|
고려(高麗).
삼중대광(三重大匡).
개국원훈(開國元勳).
벽진장군(碧珍將軍).
시조공(始祖公)
이총언(李忩言)사실기事實記
벽진장군 시조공 이총언사실기
벽진이씨 시조공 이총언 산소 전경
고려(高麗) 삼중대광(三重大匡) 개국원훈(開國元勳) 벽진장군(碧珍將軍) 이공(李公)의 휘(諱)는 총언(忩言)이니 곧 우리 이씨(李氏)의 시조(始祖)이다. 세계(世系)가 아득하고 멀어서 그 상세(詳細)한 것은 고증(考證)할 수 없으나 오히려 국사(國史)에 나타난 것은 가(可)히 징험(徵驗)①되어 믿을 수 있다.
삼가 고려사(高麗史)를 살펴보건대 왕순식부전(王順式附傳)에 이르기를 “벽진장군(碧珍將軍) 이총언(李忩言)이 신라 말(新羅末)에 벽진(碧珍)고을을 보전(保全)하고 있었는데 이때 도적의 무리들이 날뛰었으나 총언(忩言)이 성(城)을 튼튼히 하여 굳게 지키니 백성(百姓)들이 그 덕(德)을 입어 평안(平安)하였다.” 이에 태조(太祖)가 사람을 보내어 동심협력(同心協力)하여 화란(禍亂)을 평정(平定)하자고 효유(曉諭)②하니 총언(忩言)이 글을 받들고 매우 기뻐하여 아들 영(永)으로 하여금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태조(太祖)를 좇아 정토(征討)케 하였다. 영(永)의 그때 나이 18세(十八歲)였다. 太祖以大匡思道貴女妻之하고 총언(忩言)을 벽진장군(碧珍將軍)으로 임명(任命)하여 이웃 고을의 정호(丁戶) 229호(二百二十九戶)를 더 주고 또 충주(忠州) 원주(原州) 광주(廣州) 죽주(竹州) 제주(堤州)의 창곡(倉穀) 2,200석(二千二百石)과 소금 1,785석(一千七百八十五石)을 주었으며 다시 친서(親書)를 보내어 금석(金石)같은 신표(信標)③를 보이면서 이르되 “자손(子孫)에 이르기까지 이 마음 변(變)치 않으리라”고 하니 총언(忩言)이 이에 감격(感激)하여 군정(軍丁)을 단결(團結)시키고 군량(軍糧)을 저축(貯蓄)하여 고성(孤城)으로써 신라(新羅)와 후백제(後百濟)가 반드시 쟁취(爭取)하려는 지역(地域)에 끼어 있으면서도 흘연(屹然)④히 동남(東南)의 성원(聲援)이 되었다. 태조(太祖) 22년(二十二年) 무술(戊戌,938) 7월 임자일(壬子日)에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81세(八十一歲)였다고 하였다.
그 밖에 가승(家乘)⑤과 여지승람(輿地勝覽)⑥에 뒤섞여 나온 것이 대의(大義)는 이미 같으나 또한 번갈아 나타난 것도 있으니 이에 이르기를 “고려 태조(高麗太祖)가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함에 이총언(李忩言)에게 명(命)하여 벽진(碧珍) 옛 터를 진호(鎭護)케 하고 이웃 고을 민세(民稅)로써 식록(食祿)케 하여 백자천손(百子千孫)까지 종시일절(終始一節)⑦의 맹서(盟誓)를 맺어 신하(臣下)의 예(禮)로써 대우(待遇)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이르기를 “고려 태조(高麗太祖)가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할 때에 이총언(李忩言)이 벽진태수(碧珍太守)로서 오직 의연(毅然)히 항복(降伏)하지 아니하고 동남(東南)의 명성(名聲)과 위세(威勢)로 서로 의지(依支)하여 안연(晏然)⑧하였다. 태조(太祖)가 도멸(屠滅)⑨코자 하였으나 총언(忩言)과는 예부터 친(親)한 사이이므로 차마 치지 아니하니 총언(忩言)도 또한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이미 왕씨(王氏)에게 돌아감을 알고 그 아들 영(永)으로 하여금 태조(太祖)에게 귀의(歸依)⑩케 하니 태조(太祖)가 기뻐하여 총언(忩言)을 봉(封)해서 벽진장군(碧珍將軍)으로 삼고 혼인(婚姻)을 맺어 대려(帶礪)의 맹서(盟誓)⑪를 이루었다.”고도 하였다.
아! 공(公)은 신라 말(新羅末) 도탄(塗炭)⑫의 때를 만나 고성(孤城)을 지키고 백성(百姓)을 어루만져 덕망(德望)과 위의(威儀)가 진실로 드러났으며 한 나라가 거듭 수복(率服)될 즈음에 새 임금을 만나 대업(大業)을 도와서 풍성(豊盛)한 공훈(功勳)과 위대(偉大)한 충렬(忠烈)이 태상(太常)⑬에 기록(記錄)되고 역사(歷史)에 실렸으니 어찌 그리 훌륭하였으리오! 그러나 이미 사업(事業)이 밖으로 드러남이 이와 같다면 반드시 덕행(德行)이 안으로 온축(蘊蓄)⑭됨이 있으련만 도리어 문헌(文獻)의 징거(徵據)가 없어 능(能)히 상세(詳細)한 설명(說明)을 못하니 슬프고 애석(哀惜)하도다. 일찍이 듣건대 군자(君子)가 도통(道統)을 전(傳)하면 후인(後人)들이 가(可)히 이었다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공자(孔子)가 도학(道學)으로써 천하만세(天下萬世)에 교조(敎詔)⑮하였으나 그 근본(根本)을 거슬러 보면 결(契)이 오륜(五倫)을 가르친 데에서 나왔고 맹자(孟子)가 백무농상(百畝農桑)⑯으로써 제(齊)나라와 양(梁)나라의 임금에게 권(勸)하였으나 그 근본(根本)을 거슬러 보면 직(稷)이 백곡(百穀)을 뿌린 데에서 나온 것이니 크고 작음과 미미하고 드러남이 비록 같지 않으나 단서(端緖)의 출처(出處)는 가(可)히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공(公) 후손(後孫)의 명성(名聲)과 덕행(德行)의 실상(實相)을 좇아 그 근본(根本)을 거슬러 찾아보면 거의 공(公)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로다.
공(公)의 후손(後孫)이 번성(蕃盛)해서 우리나라의 대성(大姓)이 되고 고려조(高麗朝)와 조선조(朝鮮朝)의 명현(名賢)과 거공(鉅公)이 우뚝하게 나타났으니 이를테면 대제학(大提學) 견간(堅幹), 문정공(文靖公) 극송(克松), 도원수(都元帥) 희경(希慶), 전서(典書) 존인(存仁), 정간공(靖簡公) 맹전(孟專) 평정공(平靖公) 약동(約東), 판서(判書) 승원(承元), 성산군(星山君) 식(軾), 대사성(大司成) 철균(鐵均), 좌찬성(左贊成) 승언(承彦), 정도공(貞度公) 장곤(長坤), 승지(承旨) 언영(彦英), 참의(叅議) 석경(碩慶), 세마(洗馬) 후경(厚慶), 세마(洗馬) 흘(屹), 충숙공(忠肅公) 상길(尙吉), 충강공(忠剛公) 상급(尙伋), 감사(監司) 상일(尙逸), 현령(縣令) 세옥(世玉), 효헌공(孝獻公) 세환(世瑍), 봉조하(奉朝賀) 세근(世瑾) 등(等)이 혹(或)은 문장(文章)이나 학행(學行)으로 드러났고 혹(或)은 청백(淸白)이나 절의(節義) 또는 사업(事業)으로 명망(名望)이 당시(當時)에 나타나서 성문(聲聞)이 후세(後世)까지 널리 전(傳)해졌으며 그 밖에도 명현(名賢)과 석학(碩學)이 또한 많이 빛났으니 어찌 그 근본(根本)이 없고서야 그러했겠는가?
또 가만히 듣건대 “산화공(山花公)의 증손(曾孫) 희길(希吉)이 원(元)나라에 들어가서 운남(雲南)에 살았는데 그 후손(後孫)으로 이성량(李成樑)이 있어 아들인 제독(提督) 여송(如松)을 보내어 우리나라를 구(救)할 때에 본국(本國)이라고 일컬으면서 심력(心力)을 다해 힘쓴 뜻은 대개 의의(意義)가 있었다.”고 이르기도 한다.
벽진(碧珍)은 지금 경상우도(慶尙右道) 성주목(星州牧)이니 시조공(始祖公)께서 일어나신 땅으로서 자손(子孫)들이 이로 인(因)해서 관향(貫鄕)을 삼았다. 치소(治所)⑰ 서(西)쪽 15리(十五里)의 명암방(明巖坊) 수촌(樹村)은 곧 공(公)의 유허(遺墟)이고 그 좌강(左岡) 수백보(數百步)는 곧 공(公)의 묘소(墓所)였으나
임진병난(壬辰兵亂) 이후로는 그 장소를 정확히 알수가없어서, 일찌기 우암 송문정공의 말씀에 따라, 설단(設壇)하여 봉사(奉祀)하게 되었다.
고종 원년(高宗元年) 갑자(甲子,1864)에 후손(後孫)들이 보첩(譜牒) 간행(刊行)을 위(爲)하여 유허(遺墟)에서 모였는데 세월(歲月)이 오래되면 민멸(泯滅)⑱될까 크게 두려워해서 비(碑)를 다듬어 비문(碑文)을 쓰고자 하면서 나에게 의론(議論)하거늘 내가 말하기를 “우리 시조공(始祖公)의 후덕(厚德)과 풍공(豊功)은 진실로 만자손(萬子孫)의 근본(根本)이 되고 토구(菟裘)⑲의 땅과 하구(瑕丘)⑳의 집에 이르러서는 또한 능(能)히 수백천년(數百千年)까지 보수(保守)하게 되었으니 어찌 성대(盛大)하지 않으리오? 그러나 조선(祖先)의 유덕(遺德)을 소술(紹述)하는 것은 근본(根本)이요 조선(祖先)의 구기(舊基)를 수호(守護)하는 것은 말단(末端)이니 우리 백세지친(百世之親)이 되는 이는 진실로 그 말단(末端)을 소홀히 하는 것도 옳지 아니하거니와 더욱 그 근본(根本)에 힘써야 마땅할 것이다. 이것이 그 영구불변(永久不變)의 도리(道理)가 되는 것이니 조선(祖先)의 영혼(靈魂) 또한 반드시 오르내리면서 나도 후손(後孫)이 있다 하리라.”고 하였다.
내 어리석으나 삼가 순서(順序)에 따라 이 사적을 기록(記錄)하였으니 당세(當世)의 입언군자(立言君子)㉑를 뵈옵고 기리는 글을 청(請)하도록 하여라.
고종(高宗) 을축(乙丑,1865) 9월 11일 후손(後孫) 항로(恒老) 근서(謹書)
===========
경수당기(敬收堂記)
경수당(敬收堂)
경수당기(敬收堂記)
가야산 동쪽에 있는 성주는, 산천의 수려함 과 인물을 배출함에 있어, 경주, 진주, 상주,안동과 서로 앞을 다투며, 스스로 큰 고을을 이룬다. 국사와 야사를 상고하건데, 이미 선배 들이 지은 글 속에 이런 사실이 갖추어져 있으니, 다시 군더더기 말이 필요치 않다. 갑자 1864년 봄에 족보일로 인하여 단소에 머물면서, 오랫동안 지세의 아름다움을 두루 돌아보니, 참으로 하늘이 만든 훌륭한 땅으로서, 지금은 명암방 수촌이라 일컫는데, 여기가 우리 시조 벽진부군께서 예전에 살던 곳임을 알리고 있다. 외로운 성에서 성원하신 일은, 신라 말기에 뛰어나 시고, 천호의 봉읍을 받은 일은, 고려 초기에 특출하셨으니, 주나라 서울을 떠나서 양산을 넘은것과 같이 조상이 옮겨 사신 것은, 어느 시대이었 는지는 모르겠지마는, 산화공이 명곡에서 생장하시어 나라를 빛낸 계책으로서, 명망이 천하에 퍼졌으니, 옛 일을 회고하건대, 상전벽해의 감개한 눈물이 흘려내려, 옷깃을 적시는 것도 깨닫지 못하겠다. 우리 시조의 수천 후손들이,누가 그렇지 않겠는가. 다만 1년에 한 차례씩 모시는 제사가, 끊이지 않고 다행히 전해지고 있으나, 남아있는 재사가 오히려 소박하여, 감 한채와 당 한채가 있는데, 서감은 두 칸 장방으로 비록 노나라의 큰 집인 영광전 만은 못하지마는, 운곡의 곁 이천가에 우뚝이 서 있는데도,한자의 편액도 없으니, 아! 슬프도다. 면상을 지나는 사람들은, 반드시 개산봉이라 일컫고, 기산에 오르는 사람은, 허유의 무덤이라고 이르는 사람도 있는데, 두예의 침비는 무슨일이 었으며, 악의 즉 전국시대 연나라 장수의 무덤길을 징험 할 바 없는것 같이, 길가는 나그네 들이 이 지점을 가리켜, “벽진이씨 단소와 재사이다”,라고만 말하는데, 지나지 않을 뿐이다.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운거족종이 도배를 하여, 옛모습 보다는 약간 나아졌으나, 조금 모자라는 것은 명칭이 없는 것이다.
동감은 화수헌이라, 현판을 달고 서감은, 경수당이라 액자를 달고, 당 가까이에는 단소 두자를 게시하고, 북쪽에는 "벽진이씨 보청”이라, 크게 써 붙였으니, 모두 친구 여응규의 서까래 같은, 큰 글씨를 빌린 것이다. 외면으로 보면 불가에 도금한 아름다움 같으나, 그 속이 어떠한 가는 알지 못하겠다. 이에 갑자기 백천의 흐름이, 한 근원에서 비롯되고, 만엽의 가지가 하나의 뿌리에서, 나누어진다는 것이 생각되어, 그 감동으로 7률 한수 와 오언시 한수를 읊었으니, 어찌 5언 7언으로 장성 명문 대가의 솜씨를 얻었다고 하겠는가? 원래 문장을 짓는 일에는 익숙하지 못한데, 진실로 운거족종의, 성의를 저버릴 수 없어서 ,마침내 기문을 짓는바이다.
1864년 후손(後孫) 승지공(承旨公)
일하정(一何停)
학준(學俊) 근서(謹書)
=================
상계파조(上系派祖) 11대선조기준.
견간(堅幹). 성간(成幹) 당개(唐蓋). 극송(克松)
견간(堅幹)
자(字)는 직경(直卿)이요, 호(號)는 국헌(菊軒) 또는 산화선생(山花先生)이라 하고 시(諡)는 문안공(文安公)이시다. 고려(高麗) 충렬(忠烈), 충선(忠宣), 충숙왕(忠肅王) 삼조(三朝)에 걸쳐 벼슬을 하여 통헌대부(通憲大夫) 민부전서(民部典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 지밀직사사상호군(知密直司事上護軍)에 이르렀다. 충렬왕(忠烈王) 28년(二十八年)(곧 송공제(宋恭帝) 대덕(大德) 임인년(壬寅年)이다.)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로서 관동안렴사(關東按廉使)로 부임하여 읊은 시(詩)에 “한 깃발 휘날리며 관동(關東)에 도임(到任)하니, 2월(二月) 봄바람에 한식절(寒食節)이 다하련다. 이번 가는 말머리에 좋은 구절 얻으리니, 자고새 멀리 울고 해당화 붉게 피네.”라 하였다. 또 ‘감로사사운시(甘露寺四韻詩)’가 있으니 “선경(仙境)을 드나들 제 가슴이 트이더니, 즐겁다 이 연방(蓮坊)은 성시(城市)를 멀리했네. 3면(三面)에 푸른 산은 반공(半空)에 솟아있고, 한 자락 트인 곳엔 강물소리 시원하다. 앞마을 아득하게 어등(漁燈)이 가물거리고, 별원(別院)은 쓸쓸한데 안탑(雁塔)이 분명하네. 임금님 받들어서 만수무강(萬壽無疆) 비옵나니, 자니(紫泥)를 내리시어 백의생(白衣生)을 부르소서.”라 하였다. 이는 모두 ‘동시선(東詩選)’에 실려 있다.
충숙왕(忠肅王) 4년(四年) 정사(丁巳, 1317) 원(元)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가다가 상주(常州)의 객관(客館)에 유숙(留宿)하면서 두견새의 소리를 듣고 시(詩) 한 수를 읊으니 “여관에서 잠 아니 와 등잔심지 돋우려니, 중화(中華)에 사신가는 풍미(風味) 스님보다 담담(淡淡)하네, 창 너머 두견새 소리 밤새도록 들리나니, 산꽃의 몇째 가지에서 울고 있는지.”라 하였다. 이 시(詩)가 중국(中國)에 널리 알려지니 중국인(中國人)이 그 구법(句法)의 절묘(絶妙)함에 탄복하여 시(詩) 한 연(聯)을 이어 지었으니 “산화(山花)의 시구(詩句)는 천지(天地)와 함께 있어, 강남(江南) 곳곳 난간마다 적혀지누나. 알겠도다 청연거사(靑蓮居士)가 간 뒤로도 일가(一家) 이룬 풍월(風月)이 그 자손(子孫)에 전해져온 것을.”이라 하였다. 이로해서 당세(當世)에 명망(名望)이 높아 사람들이 산화선생(山花先生)이라 부르게 되었다.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동시선(東詩選)’에 뽑아 넣고 칭찬하여 말하기를, “동방(東方)에서 두견을 읊은 네 절창(絶唱) 가운데 이공(李公)의 시가 더욱 고묘(高妙)하다.”고 하였다. 원제(元帝)가 매우 총애하여 거주하는 지명을 물으니 우리 음(音)으로 ‘호음곡(好音谷:홈실)’이라고 써서 대답하였다. 원제(元帝)가 명자(椧字)를 지어 하사하니 명곡(椧谷)이라 칭하게 된 것은 이로부터이며, 중국인들이 명곡이씨(椧谷李氏)라고 이르는 것도 이로해서이다.
이정헌(李定軒) 설(渫)이 지은 ‘서정록(西征錄)’ 후서(後序)에 이르기를,
선생(先生)은 덕행(德行)이 높고 학문(學問)이 넓어 당시 사람들이 ‘선진(先秦)의 예악(禮樂), 성당(盛唐)의 문장(文章)’으로 칭송(稱頌)했으며,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의 시대에 벼슬에 올라 20년(二十年) 동안이나 사명(詞命)의 자리를 맡아 있었으니 중국(中國)의 사대부(士大夫)들까지도 그 풍채(風采)를 상망(想望)하여 잊지 않았습니다. 원(元)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태학사(太學士) 주방(周昉)이 함께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론(講論)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재배(再拜)하면서 “선생(先生)은 천하(天下)의 선비이십니다. 삼한(三韓)의 문화(文化)가 이런 경지에 다다른 줄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예전에 내가 운곡(耘谷) 원선생(元先生)에게서 듣기를, “고려중엽(高麗中葉)에 선비가 많았다고 하나 진실로 유자(儒者)의 도(道)를 따른 사람은 좨주(祭酒) 우탁(禹倬)과 문안(文安) 이견간(李堅幹)과 문충(文忠) 이제현(李齊賢) 등 몇 사람뿐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좨주(祭酒)의 역학(易學)과 문안(文安)의 춘추(春秋)는 비록 한(漢)나라, 진(晋)나라의 전문가(專門家)라 하더라도 앞선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문안(文安)과 문충(文忠)은 인품(人品)이 대단히 높아 나라에 바치는 충성심(忠誠心)과 나라를 다스리는 경륜(經綸)은 가(可)히 육선공(陸宣公)과 동열(同列)에 설 수 있을 것이다.”라 하였다.
성간(成幹)
고려(高麗) 충렬(忠烈)ㆍ충선(忠宣) 양조(兩朝)를 섬기어 벼슬이 중문지후(中門祗候)를 역임(歷任)하고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다. 타고난 자질(姿質)이 뛰어나게 총명(聰明)하고 재능(才能)과 도량(度量)이 크고 넓어서 일찍이 백형(伯兄) 산화선생(山花先生)을 쫓아 학문(學問)을 좋아하고 학업(學業)에 독실(篤實)히 힘써서 문학(文學)과 기예(技藝)가 일찍이 성취(成就)하였으므로 조정(朝廷)에 발탁(拔擢)되어 중문지후(中門祗候)에 보임(補任)되었다. 충성(忠誠)된 마음으로 임금을 보좌(補佐)함에 겉으로는 약(弱)하나 안으로는 매우 강(强)하여 충성(忠誠)ㆍ절의(節義)ㆍ지혜(智慧)ㆍ용기(勇氣)가 뭇 사람보다 뛰어났으므로 임금의 총애(寵愛)와 대우(待遇)가 매우 두터워서 승질(陞秩)의 은전(恩典)을 입어 위계(位階)가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다. 잘못된 정치(政治)를 바로잡아 고침에 오직 정의(正義)로써 수행(遂行)하니 사람들이 그 청덕(淸德)을 칭송(稱頌)하였는데 오히려 권신(權臣)들의 간계(奸計)로 인(因)해 웅지(雄志)를 펴지 못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故鄕)으로 돌아와서 잠시(暫時) 머물면서 세태추이(世態推移)를 정관(靜觀)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삼도봉(三道峰) 아래 한송정(寒松亭)에 자취를 감추었다. 세상(世上)에 이름이 드날리기를 바라지 않고 자정(自靖)하여 만년(晩年)을 보내면서도 매양 나라 정치(政治)를 염려(念慮)하여 항상(恒常) 송경(松京)을 사모(思慕)하였다. 옛 선조(先祖)께서 그 유허(遺墟)에 모원당(慕遠堂)을 세워서 해마다 한번 제향(祭享)을 봉행(奉行)하고 있다.
당개(唐蓋)
벼슬이 고려조(高麗朝)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금릉백(金陵伯)에 봉(封)하여졌다.
극송(克松)
호(號)는 빙옥재(氷玉齋)이며 시호(諡號)는 문정공(文靖公)이다. 백운(白雲) 이규보선생(李奎報先生) 문하(門下)에서 수업(受業)하여 고려(高麗) 고종(高宗) 23년(二十三年) 병신(丙申, 1236)에 명경과(明經科) 장원(壯元)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판삼사(判三司) 겸 지사관(兼知史館)에 이르렀다. 일찍이 임금이 상찬(賞贊)하기를 “한옥(寒玉)같은 정자(貞姿)요 추수(秋水)같은 정신(精神)이라”고 하면서 인(因)해 빙옥재(氷玉齋)라 사호(賜號)하였다. 원우(院宇)가 옛날에는 성주(星州) 가리현(加利縣)에 있었으나 임진란(壬辰亂)에 소실(燒失)되고 그 뒤 숙종(肅宗) 10년(十年) 갑자(甲子, 1684)에 의성(義城) 봉강사(鳳岡祠)에 복향(復享)하였다. 고종(高宗) 7년(七年) 경오(庚午, 1870)에 방령(邦令)으로 훼철(毁撤)되었다가 임신년(壬申年, 1932)에 이르러 옥수당(玉水堂)을 성주(星州) 어동(漁洞)에 창건(創建)하여 매세(每歲) 한번 제향(祭享)을 봉행(奉行)하고 있다.
================
중계파조(中系派祖) / 15대선조기준
산화공 대파
ㅡㅡㅡㅡㅡ
건지(建之)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으며 시호(諡號)는 정헌공(正獻公)이시다. 공(公)은 임금님이 내리신 이름은 천달(天達)이라 하시고 자(字)는 자춘(子春)이며 문안공(文安公) 산화선생(山花先生)의 현손(玄孫)이시다. 나이 13세(十三歲)에 경사(經史)를 통달(通達)하셨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셨는지라 태조(太組) 4년(四年) 을해(乙亥, 1395)에 제자원(弟子員)에 선발(選拔)되어 상국(上國)에 유학(遊學)하시어 태종(太宗) 6년(六年) 병술(丙戌, 1406)에 갑과(甲科)에 합격(合格)하였으며 곧 장보(張輔)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안남(安南)을 정벌(征伐)하는 전쟁(戰爭)에 참전(參戰)하여 안남(安南)을 평정(平定)하니 황제(皇帝)가 남경별기영도위(南京別騎營都尉)란 벼슬을 제수(除授)하였다.
태종(太宗) 9년(九年) 기축(己丑, 1409)에 환국(還國)하시어 3년(三年) 동안에 두 번이나 병조(兵曹)에 임명(任命)되었다. 북경(北境)에 오랑캐가 번성하여 무도하게 횡행(橫行)하니 조정신하(朝廷臣下)들이 공(公)을 추대(推戴)하여 이도(二道:함경도(咸境道), 평안도(平安道)) 경략사(經略使)를 삼으니 은덕(恩德)으로 힘써 정사(政事)를 행(行)하니 북경(北境)이 다 평화(平和)롭게 되었다. 태종(太宗) 15년(十五年) 을미(乙未, 1415)에 천관정경(天官正卿)으로 하정사(賀正使)에 선임(選任)되어 정주(定州)땅으로 행차 중(行次中) 노병(路病)으로 돌아가셨는지라후사(後使)가 이르러 천자(天子)께 그 형상(形狀)을 알리니 천자(天子)께서 심히 슬퍼하셨다. 태상(太常)이 천자(天子)께 아뢰기를 “이모(李某)는 충성(忠誠)스러운 신하(臣下)입니다. 재주는 문무(文武)를 겸하여 용처(用處)에 합당(合當)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지야(智也)오, 정사(政事)를 덕(德)으로써 하여 먼 오랑캐가 감복(感服)을 하니 인야(仁也)오, 한결같은 마음으로 국가(國家)를 위(爲)하여 어렵고 험난함을 피(避)하지 아니하니 공야(恭也)오, 청렴하고 예(禮)가 있어 벼슬에 거(居)하기를 청백(淸白)하니 검야(儉也)라. 정헌(正獻)이란 시호(諡號)를 내리심이 마땅하옵니다.” 하니 천자(天子)께서 가당(可當)하다고 결재하여 내리시니 이 모든 것이 그 분의 입신본말(立身本末)의 사실(事實)의 기록(記錄)이다.
심지(審之)
조선(朝鮮) 태종(太宗) 8년(八年) 무자(戊子, 1408)에 함안군수(咸安郡守)로 부임(赴任)하여 선정(善政)으로써 명망(名望)이 널리 알려졌으나 경인년(庚寅年, 1410)에 모친상(母親喪)을 당(當)하여 거환(去宦)하였고 그 후(後)에 통정대부(通政大夫)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를 역임(歷任)하고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홈실(명곡(椧谷))로부터 선산(善山) 금오산하(金烏山下) 형곡리(荊谷里)에 이거(移居)하였다.
수지(粹之)
벼슬이 승훈랑(承訓郞) 운봉감무(雲峰監務)에 이르렀다. 성주(星州) 홈실(명곡(椧谷))로부터 인동(仁同) 약목현(若木縣)에 이거(移居)하였다.
신지(愼之)
벼슬이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叅判)에 이르렀으며 아들 명겸(鳴謙)의 귀(貴)로 인(因)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홈실(명곡(椧谷))로부터 창녕현(昌寧縣) 합산리(合山里)에 이거(移居)하였다.
사지(思之)
호(號)는 여은정(麗隱亭)이고 벼슬은 중랑장(中郞將)이며 두문동(杜門同) 72현(七十二賢)의 한 분이다. 기우자(騎牛子) 이행(李行),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더불어 친분(親分)이 있어 시문(詩文)을 곧잘 주고받으면서 서로 뜻을 보였다. 밀양(密陽) 용안서원(龍安書院)에 배향(配享)하고 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
희조(希祖)
자(字)는 국임(國任)이다. 부친(父親)의 비명(非命)을 통분(痛憤)하여 신분(身分)을 바꾸고 이름을 달리해서 고양(高陽)에 은거(隱居)하였다. 신원(伸寃)된 후(後)에 벼슬이 통정대부(通政大夫)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에 이르렀다.
대장군공 대파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존인(存仁)
호(號)는 두은(杜隱)이다. 널리 배우고 도탑게 뜻을 두어 문장(文章)이 훌륭하고 기상(氣像)이 뛰어나서 고과(高科)에 발탁(拔擢)되어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歷任)하였다. 공민왕조(恭愍王朝)에 공조전서(工曹典書)에 승자(陞資)하여 충성(忠誠)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報答)하면서 힘든 일에 종사(從事)하기를 성력(誠力)을 바쳤으나 세상(世上)이 망극(罔極)함을 만나서 벼슬에 안주(安住)하지 아니하고 단산(丹山)의 임천(林泉)으로물러나 은거(隱居)하면서 평소(平素)의 뜻을 지켰다.
존례(存禮)
벼슬이 중랑장(中郞將). 스스로 시운(時運)이 미치지 못함을 탄식하고 물러나 가야(伽倻)의 증산(甑山)에 우거(寓居)하면서 시주(詩酒)와 금서(琴書)로 즐기면서 만년(晩年)을 보냈다. 뒤에 지례(知禮) 니전(泥田)으로 이거(移去)하였다.
약동(約東)
자(字)는 춘보(春甫), 호(號)는 노촌(老村) 태종(太宗) 16년(十六年) 병신(丙申, 1416) 6월 초2일(방주(傍註)에 10월은 오기(誤記)이므로 바로잡음)에 나셨다. 강호 김선생 문하(江湖金先生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수업(受業)하시고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매계(梅溪) 조위선생(曺偉先生)과 일향(一鄕)에서 같이 나시어 도의(道義)를 강마(講磨)하고 교유(交遊)하셨다. 필재(畢齋)로 더불어 명공거경(名公巨卿)이 일찍이 선생(先生)을 사모(思慕)하여 시(詩)로써 찬미(讚美)하기를 공(公)께서는 시서(詩書)에 통달(通達)하여 진실(眞實)로 사문(斯文)에영수(領袖)요 한 조각 청빙(淸氷)을 옥(玉)병에 담은 것 같고 수월(水月)같은 마음에 송죽(松竹)같은 절의(節義)와 간관(諫官)에 비로소 현재(賢才)를 얻었음이라 나라에 큰 정책(政策)을 세워서 올리고 임금님을 가까이 뫼시면서 충성(忠誠)을 다하였네 천부(天賦)의 자질(資質)로 문무(文武)를 겸(兼)하여 웅장(雄壯)한 뜻 펴셨고 문무(文武)와 재능(才能)에 덕(德) 또한 갖추셨네. 시서예문군자(詩書禮文君子)시나 군율(軍律) 또한 엄숙(嚴肅)하여 어백사(於百事) 반열 중(班列中)에 삼달존(三達尊:덕고(德高), 치고(齒高), 위고(位高))을 지니셨네. 묘당(廟堂:조정(朝廷))에서 군덕(君德)을 보익(輔益)한 인물(人物)을 뽑는다면 공론(公論)이 응당(應當) 공(公)에게 집중(集中)될 것이로다.
나시어 학문(學問)에 오로지 뜻을 두고 경전(經典)과 서전(書傳)에 박학(博學)하여 덕망(德望)과 행의(行誼)가 유림(儒林)의 영수(領袖)로다.
세종(世宗) 신유(辛酉, 1441)에 진사(進士)를 하시고 문종(文宗) 신미(辛未, 1451)에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문무(文武)로 내외(内外) 청요직(淸要職)을 역임(歷任)하셨다. 오묘(五廟:다섯 임금)를 섬기시면서 도백(道伯)과 여덟 고을 수령(守令)을 지나면서 빙옥(氷玉)같은 청렴결백(淸廉潔白)으로 치적(治績)이 높아 백성(百姓)에게 은혜(恩慧)를 베푸셨다.
성종조(成宗朝)에 공신(功臣)으로 좌리원종훈(佐理原從勳)에 책록(策錄)되고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임기(任期)가 차서 돌아오실 때에 괘편(掛鞭)과 투갑(投甲) 등의 이적(異績)이 있다. 《국조여지승람(國朝輿地勝覽)에 목사(牧使)로 있다가 임기만료(任期滿了)로 돌아오실 때에 말채찍 하나를 손에 가졌을 뿐인데 이것도 섬 물건(物件)이다 하고 누각(樓閣)에 걸어놓고 오시었다. 세월(歲月)이 오래되어 채찍이 상(傷)하여 땅에 떨어지니 고을 사람들이 이 광경(光景)을 그림으로 그려서 선생(先生)을 사모(思慕)하였다.》하고 또 돌아오는 배가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자 갑자기 빙빙 돌면서 기우뚱거리는지라 위태로운 가운데 선생(先生)은 조금도 동요(動搖)됨이 없이 침착하게 말하기를 “나는 조금도 사리(私利)를 탐하여 죄(罪)지은 일이 없는데 막료(幕僚) 중에 누군가 부정(不正)을 하여서 신명(神明)으로 하여금 나를 깨우치게 한 것이 아닌가!” 하심에 과연(果然) 휘하(揮下) 사람이 장차 선생(先生)을 위(爲)하여 갑옷 한 벌을 숨겨가지고 오는 일이 있었다고 사실(事實)대로 고(告)함에 선생(先生)께서 명(命)하시어 바다에 던지게 하니 파도(波濤)가 잠잠하고 배가 순항(順航)을 하기에 이르러 모두들 선생(先生)의 청빙(淸氷)같은 염조(廉操)에 신(神)도 오욕(汚辱)되게 함을 싫어하여 이와 같은 작란(作亂)을 한 것이다 하였고,〈관광객(觀光客)을 위(爲)하여 투갑연(投甲淵) 현지(現地)에 사실기(事實記)가 있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셨으며 대사간(大司諫), 경주(慶州) 및 한성부윤(漢城府尹), 개성유수(開城留守), 전라감사(全羅監司), 이조(吏曹)ㆍ호조참판(戶曹叅判),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나시고 기로사(耆老社)에 드시었으나 연로(年老)하여 관직(官職)을 사임(辭任)하시고 고향(故鄕) 하로촌(賀老村)에서 우유소일(優遊消日) 하셨으니 선생(先生)께서는 청덕(淸德)과 아망(雅望), 염조(廉操)와 염절(恬節)로서 사림(士林)의 영수(領袖)가 되셨다.
성종(成宗) 24년(二十四年) 계축(癸丑, 1493) 6월 13일에 하세(下世)하시니 78세(七十八歲)를 향수(享壽)하셨다. 성종대왕(成宗大王)께서 심히 슬퍼하시어 예조정랑(禮曹正郞)을 보내어 사제(賜祭)하여 고유(告諭)하기를 천자(天資)가 단아(端雅)하고 매사(每事)에 근신(謹愼)하며 성품(性品)이 순결(純潔)하고 정직(正直)하여 외지(外地)에 나아가 고을을 다스림에 치적(治績)이 제일(第一)이요 목민관(牧民官)으로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풍속(風俗)을 교화(敎化)하고 인애(仁愛)로 백성(百姓)을 구휼(救恤)함이 그 마음 감이(甘梨:단 배)와 연꽃 같아라.지난날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재임 시(在任時)에 진실로 격려(激勵)와 보익(輔益)을 받았는지라 이를 가상(嘉尙)히 여겨 곧 벼슬 품계를 높이려 하였는데 하늘이 돌보지 아니하시어 망극(罔極)한 지경(地境)에 이르게 하였으니 경(卿)의 부음(訃音)을 듣고 탄식(歎息)스럽고 애석(哀惜)한 마음 금(禁)할 길 없어 평정(平靖)으로 시호(諡號)를 내리노라.
시법(諡法)에 “정사(政事)를 집행(執行)함에 절제(節制)있음을 평(平)이라 하고 유화(柔和)한 덕행(德行)으로 여러 사람을 편안(便安)케 함을 정(靖)이라 한다.” 하였다.
한라산(漢拏山) 백록담(白鹿潭)에서 천지신명(天地神明)께 제사(祭祀)지내던 풍속(風俗)으로 백성(百姓)의 고통(苦痛)이 많았던 바 이를 산하(山下) 평지(平地)에서 산신제(山神祭)를 올리기로 변경(變更)하고 전래(傳來)의 악습(惡習)은 폐지(廢止)하고 선량(善良)한 풍속(風俗)은 천양(闡揚)하여 여러 시책(施策)을 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 취용(取用)하므로 도민(島民)이 크게 기뻐하여 선정(善政)을 송덕(頌德)하고 영원히 존모(尊慕)하기 위하여 생사당(生祠堂)을 건립(建立)하였다. 이름하여 부르기를 영혜사(永惠祠)라 하고 제주(濟州)에 있다.
금산(金山) 경렴서원(景廉書院)과 제주(濟州) 귤림사(橘林祠)에서 향사(享祀)를 하여 오다가 방령(邦令)으로 훼철(毁撤)된 후 유림(儒林)의 공론(公論)으로 선생(先生)이 계시던 곳에 하로서원(賀老書院)으로 편액(編額)하여 복원(復院)하고 또한 금세(今世)에 제주도(濟州道)에서 유적(遺蹟)을 기리기 위(爲)하여 기적비(紀績碑)를 곰솔공원 경내(境内)에 수립(竪立)하였다.
선생(先生)이 자손(子孫)에게 유계(遺戒)한 시(詩)에 “가난하고 어려워도 분수(分數)대로 살지어다. 쪽박과 낡은 옹기 나의 전 재산(財産)이라. 주옥(珠玉)이 만당(滿堂)해도 씀에 따라 없어지니 청렴결백(淸廉潔白) 가훈(家訓)으로 아손(兒孫)에게 전(傳)하리라.” 하였다.
존신(存信)
벼슬은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이며 호(號)는 한계(寒溪)이다. 품성(稟性)이 온공(溫恭)하고 효우돈목(孝友敦睦)하며 덕(德)을 숨겨 자겸(自謙)하고 청고(淸高)한 뜻을 지켰다.
=========
우리가문 파보
벽진이씨 시조공 이총언 /고려개국공신 벽진장군
대장군 /
평정공파 / 승지공
17대 김천 평정공
청백리 노촌 약동
18대 합천 판서공 승원 평정공2남
19대 우우정 유온 이천부사
20대 거창 입향조 검춘추 건
21대 거창 가조 동례 입향조
통덕량 난서
22대 거창 성기 승지공 무
朝鮮後期學者 가문
(경남 거창군 가조면 동례리)
1). 23대 과거급제 승문원박사
찰방공 창일선조님.
동례 학당골 학당운영,
벽진이씨 최초 족보편찬 참여,
2). 26대 유산 이정매공.
거창군지도편찬
유산재실 건립..학문
유산집 문헌 문집,
3). 29대 일하정 이학준공.
1864년 경수당기 찬술.
일하정문헌 문집.
4). 33대 동강 이창기
(1918~2011)
(경남 거창군 가조면 동례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