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욥기 1,6-22; 루카 9,46-50 /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2024.9.30.
오늘 독서에 나오는 욥은 자기 탓 없이 사탄의 계략으로 억울한 피해를 보았으면서도 결코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았던 의인입니다.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을 겪을 경우에도,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욥 1,21) 하는 영성으로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욥의 영성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을 섬기는 진정한 자세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서열 문제로 다투던 제자들에게 제발 서열에 대한 관심을 접고 꼴찌 같은 마음으로 서로 섬기라고 가르치셨고,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으로 간주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공동체 안에서는 겸손을, 공동체 바깥에서는 관용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사실, 공동체 내부의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겸손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사람들 안에서의 서열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십보 백보”라는 말이 여기에 어울립니다. 서열은 종종 뒤집어지기 일쑤여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흔히 인간 사회와 공동체 안에서의 구분은 서로가 공동선을 위해 기여해야 할 역할을 정해놓는 기능적인 것이지, 존재의 서열을 구분하거나 자격이나 가치를 매겨 놓은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 외부의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는 관용을 들어야 합니다. 인류는 생명체들 가운데에서 동족을 죽이고 괴롭히는 유일한 종입니다. 인류 역사상 수도 없이 일어난 전쟁과 국제 분쟁, 내전 중에서 그 어떤 경우에도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고 죽여야만 할 정도로 중대하고 위급한 상황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저 서식지로서의 영토를 확장 하려거나 식량을 확보하기 위한 욕심의 결과였던 경우가 대부분이고, 심지어는 통치자의 위신을 세우려고 일어난 전쟁도 있습니다. 우리가 힘의 우열에 따라서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질서가 지배하는 정글을 동물적이라거나 야만적이라고 폄하하지만 동물도 필요 이상으로 다른 동물을 죽이거나 잡아먹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인간이라는 종만 쓸데없이 넓은 영토를 차지하려 들거나 이미 먹고 살만한 충분한 재산이 있는데도 더 축적하고 쌓아두려고 욕심을 부리는 가장 어리석은 종입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르는 세간의 평은 실제 역사적 사실이나 현재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진실이 아닙니다. 현재에도 인류 자신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환경을 오염시키고 생태계의 균형을 파괴하는 물질문명을 보아도 그렇고,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대립이 사라진 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패권 다툼으로 날이 지새고 있는 인류 지성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사랑과 평화, 행복과 자유를 위해서 쓰여져야 할 지성과 정성이, 패권 유지와 영토 확장, 대량 학살을 위한 파괴적인 무기 개발에 쓰여지고 있는 한심한 형편이 이를 웅변합니다. 하여, 지구 바깥에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세력은 아무데도 없는데도 오직 지구 안에서 인류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하며 지성과 노력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치를 위하여 주어진 능력을 활용하는 일이고, 이를 위해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도와주며 섬기는 것입니다.
이 나라와 우리 민족이 지난 2백 년 동안의 근현대사에서 천주교 신앙을 들여오고, 박해를 받으면서도 치명하기까지 하면서 저항한 가장 큰 이유는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섬기는 최고선과 서로가 서로를 돕는 공동선의 질서를 확립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그 최고선의 가치는 진리를 추구하는 가운데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양심과 신앙의 자유는 물론 신분으로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각자의 행복을 추구할 자유를 누리는 세상을 열망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고 모두가 자신의 행복을 누리고자 노력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그에 따라오는 공동선의 가치는 정의와 공정을 지키고, 평등과 행복을 목표로 모두가 힘을 합치되 특히 더 많이 혜택을 받은 이들이 솔선수범함으로써 인간을 존중하라는 데 있었습니다. 이렇듯 최고선과 공동선의 가치를 구현하려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의 문화를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으뜸으로 쳐 왔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조선 왕조와 유림들은 이러한 역사의 징표를 보지 못하고 하느님을 흠숭하는 대신 인간을 신분으로 나누어 차별했습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우상숭배였습니다. 학문을 숭상하되 지식을 독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식을 독점한 양반들이 농지의 소유권까지도 독점했습니다. 공업과 상업, 문화와 예술에 종사하는 일들도 천시했습니다. 이 불공정한 질서에 저항했던 순교자들은 물론이고 천주학을 신봉하던 모든 이들의 값진 희생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우리 민족이 전 세계에 드높은 문화를 퍼뜨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요컨대 욥은 우리네 인생의 기준이 될 가치관을 보여 주었고, 섬김과 관용을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세워야 할 새 세상의 내부와 외부 질서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에 대한 모범을 증거했던 우리 신앙 선조들은 현대 한국판 욥들이었으며, 우리가 이룩해야 할 새 세상의 선구자들이었습니다.
또한 오늘은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4세기에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난 예로니모는 일찍부터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그리고 라틴어를 공부하여 사제가 된 후 다마소 교황의 지시에 따라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과 그리스어로 된 신약성경을 로마시대의 공식 언어인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오랜 기간 동안 수행했습니다. 성경을 번역한 후에는 성경을 풀이한 주해서를 비롯하여 성경을 신앙의 이치로 체계화시킨 신학 저술까지 남김으로써 암브로시오, 그레고리오, 아우구스티노와 더불어 서방 교회의 4대 교부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이 대중화된 언어로 번역되고 더구나 성경의 이야기를 신앙의 이치로 체계화시키면 신자들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됩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성찬 및 사도직과 더불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믿는 이들 안에 현존하시는 양식입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분이 천지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소개하면서(요한 1,1-2), 이 말씀이신 분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리라고 선포하였습니다.(묵시 21,1) 왜냐하면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게 창조하신 세상은 죄악에 물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신자들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셨고, 이를 부활의 삶이라 부르셨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헌신과 희생이 필요했는데, 이를 십자가라 부르셨습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의 삶이야말로 새 세상을 창조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단지 거룩한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이를 두고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렇게 서두를 시작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히브 1,1-2)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어진 예수님의 삶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선포된 이상, 그분을 믿는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이는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부활하는 삶을 살아갈 때 가능합니다. 성찬의 성사는 단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 말씀이 되어 살아가려는 우리에게 기운을 줍니다. 그래서 성찬의 성사는 말씀을 위한 양식입니다. 이렇게 말씀과 성찬으로 채워진 하느님의 기운으로 우리는 사도직을 행하도록 이끌어주며, 여기서 가난한 이들을 섬김으로 이루는 공동체야말로 모든 사도직의 공통 요소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을 보내는 마지막 날인 오늘, 한국교회를 이끄신 하느님의 손길을 뒤돌아보자면 말씀의 힘이 압도적이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우선 한민족의 초창기부터 초월적인 신, 즉 하느님을 알고 믿어온 정신적 바탕 위에서, 오묘한 섭리로 들어온 교리서를 읽고 그 안에서 신앙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던 말씀의 기적이 한국교회를 자생적으로 설립하게 만들었습니다. 무려 백 년 동안 이어진 박해를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도 제대로 된 성경책이나 변변한 교리서도 없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하느님 말씀의 힘 덕분이었습니다. 말씀의 기적으로 이룩된 한국교회 첫 백 년인 19세기를 말씀의 교회 시기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교우촌에서 사회적 신분의 차별은 철폐했어도 교리 지식이 해박한 교우는 존경을 받았습니다. 양반 출신이 아니면서도 학식이 뛰어나서 권일신에게서 교리를 배워 충청도에 복음을 전한 이존창 루도비꼬가 대표적입니다. 그에 대한 최양업 신부의 편지가 이러합니다: “이존창 집안의 딸들에게서 두 명의 사제(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탄생되었습니다. 그의 딸 이 멜라니아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조모이고, 저의 모친 이 마리아는 이존창의 사촌누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입니다.”
박해가 종식되고 나서 일제식민강점기와 해방 이후 분단과 전쟁 그리고 독재에 시달리던 또 다른 백 년 동안에 방인 사제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신자들도 늘어났으며, 성당도 많이 지었습니다. 그래서 성사생활을 자유로이 할 수 있게 된 이 20세기는 성사의 교회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해시대에 그렇게 하기 어려웠던 성사 생활을 지금은 마음 놓고 편리하게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 백년을 맞이하고 있는 지금 21세기는 사도직의 시기입니다. 이제는 말씀과 성사가 겨냥하는 사도직으로 나아가야 할 때인 것입니다. 말씀과 성찬의 은총을 세상에 전하는 일은 모두 다 엄연한 사도직이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모두 사도직 실존을 사는 것입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께서는 이제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서 그리스도인들과도 더불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섭리를 알아차리고, 이 섭리에 따라서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