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표징과 사도직의 은총
로마 1,1-7; 루카 11,29-32 /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 2024.10.14.
빛이 사라진 캄캄한 밤에 바다에서나 들판에서 사람들은 북극성을 보고 방향을 찾아 갈 길을 정합니다. 해가 떠 있는 밝은 낮에는 눈으로 사물과 사태의 표징을 보고 일을 하거나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처럼 빛은 낮이나 밤이나 우리를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어 줍니다.
이 같은 물리적인 이치를 정신적인 가치로 보면, 빛은 진리입니다.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예수님께서 알려 주셨고 또 보여 주셨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이 진리와 사랑이 최고선으로서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로 세상에서 실현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가치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비추시는 빛이요 길잡이이며 표징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고 영혼을 잊어 버린 듯하며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가는 무신론자들이 숱하게 많은 이 즈음의 세태에서도 표징을 알아보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징’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루카 11,14-16)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으로서 ‘요나의 표징’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나는 기원전 8세기 경에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로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예언자입니다. 하지만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의 세상 한복판으로 가서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소명이 너무도 부담스럽고 힘들어서 멀리 도망치려다가 고래 밥이 되어 사흘만에 니네베로 돌아가 마지 못해 소명을 수행했으나, 의의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예언자로서는 자신의 소명을 내팽겨치고 내뺄 정도로 부족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렇듯 부족하고 비겁한 요나마저도 당신의 일꾼으로 삼아 크게 쓰셨습니다.
이러한 요나의 표징은 하느님보다 자신의 힘을 더 섬기던 우상숭배자의 나라 한복판에 가서도, 하느님께서 뒷받침해 주시기만 하면 의외로 커다란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나의 표징에 대해 말씀하신 이유와 배경이 이러합니다. 비록 당신은 요나보다 더 큰 배척과 더 큰 누명을 쓰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되기는 했어도 그만큼 더 큰 영광이 부활의 은총으로 되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 당신은 요나보다 더 큰 사람이라고 자처하신 것이었습니다. 또 실제로 부활의 사기지은을 입은 초대교회 사도들과 신자들은 유다교와 로마제국이 안팎으로 가하는 모진 박해를 이겨내고 끝내 신앙을 공인받았고(313년 밀라노 칙령),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받음으로써(395년, 도미티아누스 황제) 니네베 제국을 회개시킨 요나의 성공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과 같은 시대에 활약한 바오로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기 전에, 요나처럼 좀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자였습니다. 하도 설쳐대니까 그예 예수님께서 그에게 벼락을 내려 발길을 돌리게 하셨지요.(사도 9,1-18 참조) 예루살렘 다락방에 숨어 지내던 열한 제자에게 부활하시어 발현하심으로써 그들을 사도로 변화시키신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박해자로 사납게 굴던 바오로에게까지 발현하시어 사도요 선교사로 삼으신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고래 뱃속보다 더한 기적적 표징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바오로의 회심은 당시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과 그분의 현존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해 준 놀라운 표징이 되었습니다.
아무튼 몹시 커다란 충격을 받은 바오로는 그 날 이후 십여 년 이상(갈라 2,1) 잠심하고 묵상하며 사색과 성경 독서를 계속하기도 하고, 그를 찾아와 세례를 베푼 하나니아스(사도 9,17)를 비롯한 초대교회 신자들을 만나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에 대해 들으며 회심하여 새로운 인생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던 끝에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나 후대 교회 역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될 두 가지 큰 결론을 바오로는 내렸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라는 것, 다른 하나는 그 예수님께서 박해자였던 자신을 사도로 부르시느라고 나타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박해자 바오로를 사도로 삼으시려던 예수님의 부르심이 매우 극적이었으나, 이 의미를 알아듣는 과정은 길고 오래 걸렸으며 많은 적대자와 비협조자들로부터 박해와 고난을 겪어야 하는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도 바오로는 좋았던 것 같습니다. 기꺼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그 모든 십자가를 자신의 허물을 감싸주기 위한 보속거리로 여기고, 묵묵히 사도직을 수행했으니까요. 그리고 로마 제국 내에 사는 그리스인, 로마인, 디아스포라 유다인 등 그가 선교하다가 만난 모든 이들이 자기처럼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치지 말고 단순 명쾌하게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 뵙고 믿기를 소망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칠삭동이’(1코린 15,8) 같은 자기자신도 그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으니, 자신보다 흠도 없고 더 훌륭한 신자들 모두도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확신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은 바오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로마 1,1),
이 한 마디 인사말을 할 수 있기까지 십여 년의 암흑 같은 고민의 세월이 있었고,
“여러분도 바로 그분을 통하여 사도직의 은총을 받았습니다”(로마 1,5),
하는 이 말 한 마디를 하기 위해 그는 20년 동안 선교사로 일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일컬어 ‘요나보다 더 큰 사람’(루카 11,32)으로 자처하셨습니다만, 우리도 선교사로서는 2% 부족했던 요나보다 더 큰 사람입니다. 요나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도 어처구니없게도 당시 땅끝으로 알려진 스페인 타르시스로 멀찌감치 도망치려다가 고래뱃속에 사흘 밤낮동안 갇혀 지내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겨우 응답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주님을 피하여 타르시스로 달아나려고 길을 나서 야포로 내려갔다. 마침 타르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뱃삯을 치르고 배에 올랐다. 주님을 피하여 사람들과 함께 타르시스로 갈 셈이었다(요나 1,3).
이처럼 비겁하게 주님을 피하려던 요나의 설교를 뒷받침해 주어 커다란 선교적 성공을 거두게 하신 하느님의 손길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니네베에 대기근을 일으키시어 정복전쟁에서 끌려 온 포로들로 하여금 두 번의 반란을 일으키게 하셨는가 하면(기원전 765, 759년), 갑자기 대낮에 하늘에 떠 있던 태양이 어두워지는 개기일식을 일으키시어 아시리아의 정복자들로 하여금 더 큰 재앙을 피해야겠다는 두려운 마음이 들게 하셨습니다.(기원전 763년) 그 덕분에 마지못해 수행했던 요나의 선교가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교훈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요나의 표징을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전조로 설명하신 바 있습니다. 당신의 선교가 성공을 거둘 수 밖에 없으리라는 자신감의 발로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도 박해자였던 바오로보다 더 흠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간혹 신앙의 열성에 있어 소홀하기는 했을지언정 동료 신앙인들을 박해하려 들 정도로 망가지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에서 드러날 요나의 표징과 여기서 드러날 하느님의 든든한 뒷받침을 믿고 우리의 삶을 사도직으로 만들어갑시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하는 사도직이야말로 세상이라는 호수에 믿음의 파문을 일으켜 하느님 나라를 퍼지게 하는 표징이요 또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부디 우리를 말 못하게 하는 벙어리 마귀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기를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부록. 요나보다 조금 더 크고 바오로보다는 조금 작은 우리가 주목해야 할 현 시대의 표징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사도적 권고인 ‘아시아 교회’ 문헌입니다. 워낙 거창하고 원대한 목표가 아시아 복음화라는 파스카 과업이지만, 교구가 부여해 온 공직에서 은퇴하여 제2의 사제 인생을 시작한 저도 이 포기할 수 없는 시대의 표징을 향하여, 조금씩 느리게 하지만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그렇게 작으나마 사람들이 함께 걸어갈 만한 길이 생기면, 제가 걸음을 멈추는 곳에서 제 다음 사람이 그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리라는 꿈을 안고 삽니다. 무모해 보인 요나의 니네베 선교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듯이, 혹시 아시아 복음화를 향해 나아가는 길에도 그 같은 섭리의 서광이 비추이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품고 삽니다.
첫댓글 아시아 복음화를 향해 제2의 사제 인생을 시작하신 이기우신부님을 위해 기도하고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 호시우행이라는 격언처럼 호랑이의 눈으로 시대를 보고, 소 걸음으로 우직하게 복음화의 길을 걸어 가고자 합니다. 응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