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이라는 빛을 보라
예레 31,7-9; 히브 5,1-6; 마르 10,46ㄴ-52 / 연중 제30주일; 2024.10.27.
- 영적 소경 처지에서 벗어나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거지를 볼 수 있게 치유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이례적으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인생 역전이 일어날 수 있었던 데에는 바르티매오의 용기와 예수님의 자비,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격려라는 세 가지 조건이 채워졌기에 가능했습니다. 바르티매오가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자 처음에는 그를 구박하던 주위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그의 청원을 들으시고 불러오라고 말씀하시자 이에 호응하여 격려해 주었습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마르 10,48ㄴㄷ) 우리네 인생도 역전하기 위해서는 이 세 조건이 다 필요합니다. 우리는 눈이 멀지 않았지만 기쁨이라는 빛을 보기 위해서는 그러합니다. 기쁨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고 특히 하느님께서 비추시는 빛을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들이 태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의 제목이, “기쁨이라는 빛을 보라.”입니다. 여러분의 영적 사정은 어떠합니까?
2. 내면의 빛, 기쁨
첫째 독서인 예레미아 예언서에서 들으신 대로, 이스라엘에는 이미 장차 오실 메시아께서 눈먼 이와 다리저는 이를 도와 주시리라는 희망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다른 대사제들이 백성과 자기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예물과 제물을 바쳐야 했던 것과는 달리, 백성의 죄를 없애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대사제이셨습니다. 그 고난은 사랑의 고난이요, 사랑의 봉사이며, 사랑의 희생이었던 겁니다. 사랑하기 위해 바치는 고난과 봉사와 희생의 가치는 그토록 위대합니다. 다른 이들의 안타까운 장애를 치유하고 절박한 처지에서 해방시킬 힘을 지닐 정도로 그 힘은 커다란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고난과 봉사와 희생으로 나타내는 사랑의 가치와 힘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께서만 지니신 것입니다. 그분께 자비를 청하는 용기가 없으면, 그 가치와 힘은 우리에게 다가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이 용기만 있으면,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내면에 지니셨던 기쁨을 우리도 빛으로서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미사의 제2독서인 히브리서에서는 진정한 사제직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죄, 즉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죄를 없애기 위하여 희생과 헌신의 제물을 바치는 것이 사제직입니다. 직무 사제직을 수행하도록 선발된 사제들뿐만 아니라 보편 사제직에로 부르심을 받은 평신도와 수도자들 모두 이 사제직을 수행함으로써 예수님을 본받을 수 있고 하느님을 닮을 수 있습니다.
3.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르티매오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티매오의 아들입니다. 그가 어찌해서 눈이 멀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는 눈이 멀었기 때문에 평생 동안 자기 힘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남의 동정에 의지하여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딱한 거지였습니다. 그런 거지에게 메시아로 알려지신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문은 그야말로 복음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 여기서 ‘다윗의 자손’이란 호칭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알려진 다윗 왕의 후손 가운데에서 메시아가 오시리라고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전승에 따른 이름입니다. 그러니 그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믿는 마음이 이미 확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절박한 심정으로 그는 앞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목소리가 예수님의 귀에 들이리라는 기대로 외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미사 중에 바르티매오의 기도를 되풀이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세 번이나 되풀이합니다. 사제가 외치는 기도까지 합하면 모두 여섯 번 외칩니다. 자, 우리가 눈이 멀지도 않았고 빌어먹어야 하는 거지도 아닌데 왜 우리가 그 같은 외침을 세 번씩이나 되풀이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영적인 소경임을 자각하라는 뜻이 아니겠는지요? 바르티매오처럼 절박하게 청원하지 않으면 우리가 바치는 모든 기도는 응답받기 힘듭니다.
4. 내면의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가?
주변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구박하는 데도 더욱 적극적인 태도로 예수님께 자비를 청했던 바르티매오의 용기는 예수님의 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를 불러 오너라.”(마르 10,49) 우리가 바르티매오보다 더 많이 주님의 자비를 외치고 있는 이유는 사랑의 고난과 봉사와 희생의 구원적 가치에 눈을 떠야 하기 때문이요, 이 가치가 우리에게 내면의 기쁨을 선사해 주고 우리가 비로소 영혼의 눈을 뜰 수 있게 하는 빛입니다. 따라서 스스로의 힘으로 사랑의 고난과 봉사와 희생을 행해야 하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전례의 정신입니다.
5. 벳사이다와 예리코의 소경
마르코는 자신의 복음서에 또 다른 눈먼 거지의 치유 이야기를 수록해 놓았는데, 바로 벳사이다의 소경 이야기(마르 8,22-26 참조)입니다. 이 소경은 이름이 나오지도 않고,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이웃 사람들이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바르티매오가 단번에 눈을 뜬 것과는 달리, 두 번에 걸쳐 눈을 뜹니다. 그리고 바르티매오를 당신의 제자로 받아주신 것과는 달리 그저 자기 집으로 돌려보내셨을 뿐입니다. 말하자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청원으로 단 번에 눈을 뜬 바르티매오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청원으로 두 번에 걸쳐 눈을 뜬 벳사이다의 소경이 대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소경 이야기 사이에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마르코의 의도는 명백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고 고백하는 깨달음과 용기가 없는 처지와 있는 처지는 확연하게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벳사이다의 소경은 눈을 뜨고 나서도 자기 집으로 돌려보내질 수 밖에 없었고, 예리코의 소경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의 제자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와 이치는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뜨고 내면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반드시 깨달아야 할 진리입니다. 저는 이 강론을 읽는 여러분이 벳사이다의 소경이기보다는 예리코의 소경으로서 영혼의 눈을 뜨기를 그리고 그 눈으로 내면의 기쁨의 빛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6. 사랑의 진실과 현실
우리는 눈이 멀지도 않았고 더구나 누군가에게 구걸해야 먹고 살 수 있는 거지도 아니지만 바르티매오보다 더 많이 여섯 번이나 주님의 자비를 미사에서 외치고 있는 이유는, 마르코가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에 바르티매오가 눈을 뜬 이야기를 배치하고 있는 데에서 나타나듯이, 우리가 부활신앙으로 살면서 사랑의 고난과 봉사와 희생이 지니는 구원적 가치에 눈을 떠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문의 지면이 좁고, 티브이의 화면이 모자랄 정도로 범죄 사건 사고가 넘쳐나는 이즈음, 세상 사람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자기 양심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세태야 그들이 하느님을 알지 못해서라고 둘러댈 수도 있지만, 신앙을 간직하고 있는 종교인들도 자기 자신이 거룩하게 변화될 생각을 하기보다는 하느님께 축복을 얻어내려고 하는 기복적 태도를 버리지 않는 한, 세상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변화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활신앙으로 눈을 떠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내면의 기쁨으로 우리 영혼이 빛을 볼 수도 눈을 뜰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선행을 한다 해도 마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태도보다는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또 자발적으로 기회를 찾아서 하는 태도가 우리의 구원과 부활에 필수적입니다.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을 보면, 우리가 고난을 받고 봉사를 하고 희생해야 할 소명을 느껴야 진정한 신앙인입니다. 양심이 무디거나 병든 사람들을 보면, 우리네 신앙이 어둠을 밝히는 빛의 크기가 약해서임을 알아차려야 신앙인입니다. 그저 자기 본성대로 먹고 살기에 바쁘게 넘실거리는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방향도 없이 이 한 생을 살아갈 뿐인 세상 사람들을 보면서, 사랑을 필요로 하는 시대의 징표에 따라 올곧게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더 많이 나타나야 함을 알게 됩니다. 사랑을 행하는 경우에도 사랑을 받는 사람이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만 둘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함께 사랑을 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견이 생기거나 갈등이 생긴다고 해서 쉬이 그만 둘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질투를 하거나 시기를 한다고 해도 그만 둘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한 마디로, 사랑할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고, 사랑하되 묵묵히 한 길을 가는 우직한 바르티매오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7. 우리 삶의 기준과 목표
예수님의 마음과 삶은 우리가 기준으로 삼아야 할 등대이며 바라보아야 할 북극성입니다. 그분이 십자가를 짊어지셔야 했던 이유는 그분이 죄를 지었거나 잘못을 행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이 가시는 곳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은 모여들곤 했으므로, 오히려 그분은 사랑의 봉사를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행하셨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당시 유다교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질투하고 시기했습니다. 자신들보다 더 인기를 모으고 존경을 받는 예수님이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박해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현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모든 제자들이 당신의 이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고 따라오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안에 담긴 구원의 역설 이치를 깨닫고 눈을 뜨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을지언정 그 옳은 일을 그만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옳은 일, 좋은 일에 왜 박해가 따르는가 하면, 그것은 우리가 그 일을 잘못 실천해서라기보다는 세상 현실의 속성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세상 현실 뒤에는 마귀가 암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마귀의 뒤에는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마귀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내심을 발휘해서 선한 일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를 내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그 어떤 좋은 일도, 옳은 일도 한 두 번 시도해서 성공하는 그런 사례는 거의 없습니다. 이런 저런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인내로이 선을 행할 때 비로소 나와 우리의 구원이 조금씩 이루어져가는 것이 구원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고난과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성숙하고 정화되며 단련될 수 있는 구원의 이치에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옳고 좋은 일을 하고자 할 때 주위 사람들이 그 뜻을 모르거나 오해하고 질투하거나 시기하며 방해할 때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도구로서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8.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마르 10,49ㄴ)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예수님을 본받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선을 행하다가 박해를 받아도 중단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런 박해의 현실을 예수님께서도 살아가셨고, 그 현실 속에서 사랑하는 용기를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바르티매오의 용기는 그래서 우리에게 돋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기를 내면 그 전까지는 우리를 구박하고 무시하며 방해하던 주위 사람들까지도 달라집니다. 사랑의 용기, 이것이야말로 바르티매오를 본받아 우리가 미사에서 세 번이나 주님께 자비를 청하는 이유입니다.
바르티매오는 겉옷을 벗어버리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습니다. 가진 것 없는 눈먼 거지에게 전 재산이나 다를 바 없었던 그 겉옷마저 벗어버리고 그는 예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래서 눈을 뜰 수 있었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자존심의 겉옷, 이기적인 욕심의 겉옷, 선입견과 편견의 겉옷을 벗어버리고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바르티매오에게 던지신 물음처럼 그분이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하고 물으시면, 우리도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해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대상을 볼 수 있도록, 사랑할 기회를 찾을 수 있도록, 봉사하고 고난을 찾아 나설 용기를 볼 수 있도록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우리도 그분을 직접 따라 나설 수 있는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내면에 부활의 기쁨을 지니고 세상을 하느님의 눈으로 보는 기적도 일어날 것입니다.
부록.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치유와 구마 기적 또한 그러합니다. 바르티매오가 눈을 뜨게 된 기적 역시 믿는 이들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보는 눈을 뜨게 하고자 하신 행동적 비유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그분과 우리 자신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직의 영성은, 첫째 영혼의 눈을 떠서 내면의 기쁨이라는 빛을 보고, 둘째 이 빛이 예수님 안에 충만해 있음을 깨닫고 나서, 셋째 그 빛을 아직도 어둠 속에서 사는 이들에게 비추어 주되, 넷째 그들의 반응에 얽매이지 말고 오로지 우리가 그러한 ‘빛의 사도직’ 활동을 통해서 하느님의 빛을 비추는 투명한 도구가 될 수 있음에 만족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교우 여러분!
기쁨이라는 빛을 보시고 사도직의 영성에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