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는 이들이 죽은 이들과 통공하는 길
욥 19,1.23-27; 로마 5,5-11; 마태 5,1-12 / 위령의 날; 2024.11.2.
⒈ 전례의 취지
오늘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어제 모든 성인 대축일을 지낸 데 이어서 오늘 위령의 날을 지내는 이유는 비록 지상에서의 생애가 곧바로 천상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하지는 못했을지라도 하느님께서 어여삐 보실 만큼은 진정성 있게 선하고 의로웠던 모든 이들을 우리가 기억함으로써 천상에 오를 수 있도록,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기를 청원하고자 함입니다.
우리가 순교자 성월을 지내면서 미처 다 기억하지도 못한 무명 순교자들이 무척 많습니다. 또한 이 땅에서 천주교 신앙이 싹을 틔우고 그에 따라서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부패한 조선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느님의 뜻을 사상으로나 행동으로 펼쳐 보인 선조들도 우리가 기억해야만 그분들과의 통공 속에서 우리 세대에 우리 사회와 교회를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변화시켜 나갈 수 있을 겁니다.
박해시대로 점철된 초기 역사 이후 신앙과 선교의 자유가 주어진 이후에도 그 신앙과 선교의 자유를 한껏 선용하여 이 땅에서 사랑과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헌신한 수많은 의인들을 그저 몇몇 대표적인 사례만 기억하고 있을 뿐 우리는 다 알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다 알고 계시겠지요. 그래서 하느님께서 그분들을 받아 주시고, 혹시 있을 수도 있는 허물을 용서해 주십사고 우리가 대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선대 의인들의 헌신으로 인한 혜택을 우리가 거저 얻어 누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들을 위해 대신 기도해 드리는 일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⒉ 기억에 의한 통공의 영향력
하느님에게서 비롯되는 의로움과 거룩함을 위하여 치열하게 살아가신 그 어느 선조도 자신의 삶을 후대의 누군가가 기록하고 기억해 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비록 비석이나 바위에다 철필로 새기지는 못해도 우리의 의식 속에 그분들의 삶은 각인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부모님들, 부모의 부모님들과 같은 조상들을 비롯해서, 이 세상에서 우리와 삶을 함께 나누면서 우리에게 사랑과 지혜와 배려를 나누어 주신 모든 분들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기억이 남아있는 한, 먼저 가신 분들과 이루는 통공은 변함 없이 지속될 것이며, 그 통공의 영향력이 우리를 영적으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그 이끄심은 우리가 그분들의 삶을 이어받는 계승, 그분들이 못 다한 바를 채우는 보속, 그리고 우리 시대에 가능하게 된 방식과 기회를 활용한 발전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⒊ 계승
우리가 기억하는 선조들은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을 살아가신 분들이시고, 우리에게 지금의 삶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신 분들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전해주신 부모들을 비롯해서, 신앙과 지식과 지혜를 전해주신 스승들도 계시고, 우리가 살아가는 나라와 사회를 살기 좋게 만들고자 애써 주신 의인들도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사랑과 헌신 덕분에 그 혜택을 마치 물이나 공기처럼 무상으로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자신의 행복과 후손들의 행복을 위하여 선조들의 삶과 사랑과 헌신을 본받아 계승해야 합니다. 그래야 선조들에게서 우리가 받은 빚을 갚는 것이고 우리의 후손들도 우리를 기억할 것입니다.
⒋ 보속
사람은 예외 없이 때와 장소의 한계 안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시대적 한계는 물론이고 사회적인 제약을 받으며 자기 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불완전하고 자기 중심적일 수 밖에 없는 실존적 한계 또한 어김없이 작용합니다. 그래서 잘 하고자 했어도 실수를 저지르고, 본의 아니게 나약한 인간성을 노출시키기도 하는가 하면, 때로는 본성의 유혹에 빠져서 죄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우리가 기억하고자 하는 선조들, 먼저 가신 분들도 예외 없이 이런 한계 속에서 살아가신 분들입니다. 우리가 그 한계를 알게 되는 한, 그 점은 우리의 선행으로 채워서 보속해야 할 기회요 대상입니다. 냉정하게 깎아 내릴 일만이 아닌 겁니다. 우리 자신도 한 생을 살아 가다 보면 여지없이 이 한계에 봉착하게 될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⒌ 발전
하여, 우리 시대에 더 좋아진 기회와, 더 깊어진 지혜, 또 더 알게 된 좋은 방식으로 우리는 봉사와 헌신을 더 질 높은 사랑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사신 분들을 이끄신 하느님의 사랑은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도 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시대, 모든 나라에 태어난 사람들이 한결같이 바랐던 것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바라 마지 않는 그 행복이 하느님의 참된 행복으로 승화될 수 있도록 가르치셨고 손수 그 행복한 삶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탐욕을 비워서 마음이 가난하고, 옳지 않은 일에 슬퍼하며, 하느님께 온유한 마음으로 옳은 일에 주저없이 나서다가 비록 그 결과가 나를 칭송하지 않을지라도 하느님 안에서 흡족해 하며, 자비가 필요한 이들을 만나면 작은 자비라도 기꺼이 베풀고, 깨어진 한반도 평화가 하루빨리 회복될 수 있도록 뜻과 힘을 모으며, 혹시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이들이 보이면 그들이 꿋꿋하게 버틸 수 있도록 응원하는 삶이 그런 삶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위령의 날에 먼저 가신 선조들을 기억하며, 그분들의 삶을 계승하고 보속하며 계승함으로써 발전시켜서 모두의 역사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창조함으로써 하느님 나라로 향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바가 우리 모두의 몫이 되게 합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