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춘천시 서면은 ‘박사마을’로 유명하다. 전북 임실군 삼계면 박사골, 경북 영양군 주실마을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박사마을로 통한다. 1,600여 세대에 4,000명가량 사는 마을이지만 지금까지 184명의 박사가 나왔다. 여기에 초·중등 교장급 이상 교육자가 120명, 5급 이상 공직자는 100명 넘게 배출됐다. 적어도 두세 집 건너 한집 자식은 박사나 교장 선생님 혹은 고위공직자인 셈이다.
이 마을에선 ‘박사 교장 자랑하면 팔불출’이다. ‘서면 출신 박사와 교장 선생님들로 종합대학을 세워도 명문대학을 만들 수 있다’는 얘기가 결코 우스갯소리만은 아니다. 박사들이 많이 졸업한 금산초등학교 뒤편 큰길가에 1999년 마을 사람들이 뜻을 모아 세운 ‘박사 선양탑’이 있다. 이곳 출신 박사들의 이름, 학위취득 대학, 연도, 전공, 출신지를 박사 취득 순서대로 새겨 놓았다. 현재 184명이 등재(지난 3월 말 기준)되었고, 유엔총회 의장을 지낸 한승수 전 국무총리가 3호 박사로 적혀 있다. 한 명 한 명 활약상을 살펴보면 대통령 빼곤 국내외에서 없는 직책이 없을 정도로 화려하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많은 인물이 배출됐을까. 박사 모자를 쓴 선양탑에 그 이유가 잘 나타나 있다. “자식들만은 보다 살기 좋은 곳, 더 큰 꿈을 펼칠 수 있는 넓은 세상으로 내보내기 위해 힘겨워도 더 많이 가르치고 또 배워야 했기에 어느 곳보다도 교육열이 높았던 마을”이라고. 박사마을 소개 안내문에도 “풍수지리학적인 명당이어서 인물이 많이 배출되고 있다는 설이 있지만, 실제는 피나는 노력과 그를 뒷바라지한 부모들의 희생적 교육열에서 얻어진 값진 열매”라고 강조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강했던 ‘교육열’에 방점이 찍힌다. 소양강(의암호)이 가로막고 있어 육지 속의 섬이나 마찬가지였던 서면 주민들은 채소나 산나물을 광주리에 담아 춘천 시내에 내다 팔며 자녀들을 공부시켰다. 옛날엔 시내로 가는 교통수단이 나룻배뿐이었다. 이른 아침 밭작물 팔러 나가는 어머니들과 등교하는 학생들이 한배에 탔다.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부모들의 고된 모습을 보고 느끼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서면은 풍수지리적 관점에서도 금세 명당임을 알 수 있는 곳이다. 크게 보면 서쪽으로는 화악산에서 내려오는 줄기인 가덕산·북배산·계관산·삼악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동쪽으로는 소양강이 도도히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지형이다. 특히 박사가 집중적으로 배출된 금산리·신매리·방동리·서상리·현암리·월송리 지역은 강과 호수가 활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북배산에서 흐르는 지맥(地脈) 중 하나가 길고 나지막하게 왼쪽으로 돌아(좌선·左旋), 구불구불하게 내려(위이·逶迤)오다가 소양강을 만나 멈춘 곳이 있는데, 이곳을 명당 중의 명당이라는 ‘진혈처’로 볼 수 있다. 기운찬 산세의 흐름을 의미하는 용(龍)이 강하지 않더라도 길게 이어지면, 용감하지는 않으나 은근하게 지속하는 속성을 뜻한다. 여기서 왼쪽으로 도는 좌선은 명예를 의미한다. 바로 이 진혈처에 대부분의 서면 박사들이 공부했던 금산초등학교가 있다.
금산초 교정에서 보면 바로 앞에 흐르는 소양강 건너 춘천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왼쪽에 춘천의 진산(鎭山)인 봉의산이 마치 앉아서 책 읽기에 좋은 책상(案山)처럼 친근하게 자리 잡고 있다. 봉의산에는 강원도청이 있고, 그 아래쪽 소양강 건너 서면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이 지역 명문 춘천고등학교가 있다. 권력과 교육이 바로 눈앞에 있는 셈이다. 실제 서면에서 춘천으로 가는 배를 타려면 금산초 바로 앞에 있는 나루터를 이용해야 했다.
결국 금산초는 어린 용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강을 건너는 ‘자룡도강형(子龍渡江形)’의 터라 할 수 있다. 미래의 큰 꿈을 실현할 박사들이 배출되기 좋은 곳이다. 금산초는 일제 강점기 때 세워진 서면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인데, 이 마을에는 당시 학교를 지으려 땅을 팔 때 사람들에게 복을 주는 것으로 알려진 큰 구렁이가 나왔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이어지고 있다.
금산초 교정에서 춘천 시내 방향으로 보면 왼쪽 봉의산, 오른쪽 삼악산과 그 사이 춘천 시내 뒤편에 좌우로 길게 뻗은 대룡산 등 여러 산봉우리가 이어져 있다. 이 산들은 보이는 모습에 따라 문필봉(文筆峯), 귀인봉(貴人峯), 일자문성(一字文星) 등으로 해석되는데, 풍수에서는 주로 문장가와 학자를 상징하는 형상들이다. 박사들이 많이 배출된 것과 무관치 않다는 얘기다.
박사마을의 작은 동네들은 주로 북배산에서 시작해 소양강으로 이어지는 지맥 사이사이에 포진해 있는데 그 지맥 중 하나에 고려시대 충신이었던 장절공 신숭겸 장군의 묘역이 자리 잡고 있다. 이 터는 원래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왔던, 풍수에 밝은 승려 도선이 왕건의 묘소로 찾아 놓았으나 왕건이 자신을 대신해 죽은 신숭겸 장군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내주었다고 전해진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8대 명당 중 하나로 불렸고, 삼척의 준경묘와 함께 강원도 최고의 길지로 알려진 곳이다.
신숭겸 묘역엔 봉분이 세 개 있다. 신숭겸은 927년 9월 대구 팔공산에서 벌어진 후백제 견훤과의 전투에서 주군인 왕건으로 변장하여 싸우다가 전사한 뒤 머리가 잘렸다. 이를 마음 아파한 왕건이 장군의 머리 모양을 금으로 만들어 붙이고, 함부로 파지 못하도록 세 개의 봉분을 세워 그중 한 곳에 안치했다고 한다. 당시 왕건이 비통한 눈물을 비 오듯 흘렸다고 해서 그 지역 이름이 비방동(悲方洞)이 되었고, 지금은 방동리라고 불린다.
신숭겸 묘역 안내문에는 ‘북한강(소양강)을 굽어보는 곳으로 좌청룡은 장군봉이, 우백호는 마산’이 있는 명당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 봉분 뒤 용맥이 다소 가파르지만 봉분 옆의 바위가 기를 뭉치게 하고, 묘역 앞쪽 좌우에 있는 멋진 소나무들이 바람을 막아주는 비보목(裨補木)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좋은 명당 터에 대한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풍수학자들 사이에 신숭겸 묘역의 명당론과 관련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 것도 그런 차원에서 살펴봐야 할 것이다.
풍수가 좋다고 소문난 서면 박사마을은 ‘교육성지’로 불리며 지금도 젊은 신혼부부나 학령기 자녀를 가진 학부모, 그리고 풍수 연구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곳 좋은 기운을 받아 제2, 제3의 한승수가 길러진다면 나라에 큰 보탬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