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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진이씨 (碧珍李氏) 휘 총언(忩言)始祖, 歷史的 根據(本源,本貫.世居地). 文化財 / 有名人物
1 碧珍李氏 始祖
2 始祖歷史的 根據/本源/本貫
3 시조공 벽진장군 사실기(始祖公碧珍將軍事實記)1865年
4 敬收堂/경수당기(敬收堂記)1864年
5 벽진이씨 족보의 탄생 (碧珍李氏 最初族譜 임진보(壬辰譜)1652年
6 本貫世居地
7 碧珍地域 歷史的變遷
8 歷史的 人物 綜合 (科擧 及第者)
9 碧珍李氏 有形文化財 現況
10 始祖公碧珍將軍事實記 와 敬收堂記 考察.
編 輯
碧珍儒林:
碧珍李氏 大宗會 文化委員長
碧珍李氏 宗親會. 編輯長.
서울 花樹會(碧山會長)常任副會長.
平靖公理事.가조承旨公派 宗中 會長
(경남 거창군 가조면 동례리)
碧珍 儒林 34世 李 善 東 (號 儒 珍) 덕명
碩士 / 理學博士 課程修了
경수당(敬收堂) 전경
始祖公 碧珍將軍 휘 총언(忩言) 산소 전경
1 벽진이씨 시조
휘 총언(李忩言, 858년 ~ 938년)은 고려 개국공신이고, 삼중 대광 고려개국 원훈 벽진장군 이며벽진 이씨(碧珍 李氏)의 시조다.
태조 21년에 향년 81세로 별세했다.
신라 말기에 사회 혼란기를 틈타서 각 지역에서 도적들이 창궐하여 백성들을 괴롭히던 시기인데, 벽진지역 (현 성주군)의 태수(太守)인 이총언이 사회혼란과 도적들을 평정하고 백성들을 평안하게 잘 다스려 지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이때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뒤에 벽진 태수 이총언(61세)에게 힘을 합하여 화란(禍亂)을 평정할 것을 제안하자, 아들 이영(李永)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왕건을 도와 후백제와의 전쟁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영의 당시 나이가 18세여서 태조가 대광(大匡) 사도귀(思道貴)의 딸을 그의 처로 삼아주었다.
또 이총언을 벽진고을 장군으로 임명하고 이웃 고을의 정호(丁戶)2) 229호를 더 내려주었으며, 충주(忠州)·원주(原州)·광주(廣州)·죽주(竹州)·제주(堤州)의 창고 곡식 2,200석과 소금 1,785석을 주었다. 또한 친필 서한을 보내어 변함없는 굳은 신의를 표시하며,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변치 않겠노라고 맹세하였다. 이총언은 이에 감격하여 군정(軍丁)을 단결시키고 재물과 군량을 비축하여, 신라와 후백제가 필사적으로 다투는 틈바구니의 외로운 성으로 당당히 동남쪽에서 태조를 성원하였다.
후삼국통일에 기여한 공으로 "삼중대광 고려 개국원훈 벽진장군(三重大匡高麗開國元勳碧珍將軍)"에올랐고, 벽진백(碧珍伯)에 봉해졌다. 이총언의 아들은 이달행(李達行)과 이영이다. 영(永)은 대제학과 지경산부사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방회(芳淮)는 추밀원사를 역임하여 가세를 일으켰다.
2 시조공 역사적 근거
고려사 기록
이총언(李忩言)은 기록에 그 족보가 나와 있지 않다. 신라 말에 벽진군(碧珍郡)을 수비했는데, 당시 도적 떼가 창궐하였으나 이총언이 성을 단단히 수리하고 굳게 지켰으므로 백성들은 그 덕분에 편안할 수 있었다. 태조가 사람을 보내어, 서로 힘을 합하여 화란을 평정하자고 설득하자, 이총언은 글을 받고 매우 기뻐하며 아들 이영(李永)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태조를 따라 적을 정벌하게 하였다. 이영이 당시 나이가 열여덟이므로, 태조가 대광(大匡) 사도귀(思道貴)의 딸을 그의 처로 삼아주었다. 또 이총언을 자기 고을 장군으로 임명하고 이웃 고을의 정호(丁戶)2) 229호를 더 내려주었으며, 충주(忠州)·원주(原州)·광주(廣州)·죽주(竹州)·제주(堤州)의 창고 곡식 2,200석과 소금 1,785석을 주었다. 또한 친필 서한을 보내어 변함없는 굳은 신의를 표시하며,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변치 않겠노라고 맹세하였다. 이총언은 이에 감격하여 군정(軍丁)을 단결시키고 재물과 군량을 비축하여, 신라와 후백제가 필사적으로 다투는 틈바구니의 외로운 성으로 당당히 동남쪽에서 태조를 성원하였다. 태조 21년(938)에 죽으니 나이가 여든하나였다. 아들은 이달행(李達行)과 이영이다.[1]
벽진이씨 대동보
고려 삼중대광 개국원훈 벽진장군 이공휘는 총언이니 곧 벽진 이씨의 시조이다.
삼가 고려사를 살펴보근데 왕순식부전에 이르기를 《벽진장군 이총언이 신라말에 벽진고을을 보전하는데. 이 때 도둑의 무리들이 날뛰었으나 총언이 성을 튼튼히 하여 굳게 지키니 백성들이 그 덕을 입어 평안하였다. 이에 태조가 사람을 보내어 동심협력하여 화난을 평정하자고 효유하니 총언이 글을 받들고 매우 기뻐하여 아들 영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태조를 쫓아 정토케 하였다. 영의 그때 나이 십팔세였는데 대광으로 삼아 사도란 귀녀를 처로 삼게하고 총언을 벽진장군으로 임명하여 이웃 고을의 정호 이백이십구호를 더 주고 또 충주 원주 광주 죽주 제주의 창곡 이천이백석과 소금 일천칠백팔십오석을 주었으며 다시 친서를 보내어 금석같은 신표를 보이면서 이르되 『 자손에 이르기까지 이 마음 변치 않으리라』고 하니 총언이 이에 감격하여 군정을 단결시키고 군양을 저축하여 고성으로써 신라와 후백제가 반드시 쟁취하려는 지역에 끼어 있으면서도 흘연히 동남의 성원이 되었다. 태조이십이년무술(938)칠월임자일에 졸하니 향년이 팔십일세였다》고 하였다.
그 밖에 가승과 여지승람에 뒤섞여 나온 것이 대의는 이미 같으나 또한 번갈아 나타난 것도 있으니 이에 이러기를 『고려태조가 삼한을 통합함에 이총언에게 명하여 벽진 옛 터를 진호케 하고 이웃고을 민세로서 식록케 하여 백자천손까지 종시일절의 맹서를 맺어 신하의 예로서 대우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이르기를 『고려태조가 삼한을 통합할 때에 이총언이 벽진태수로서 오직 의연히 항복하지 아니하고 동남의 명성과 위세로 서로 의지하여 안연하였다. 태조가 도멸코자 하였으나 총언과는 옛부터 친한사이이므로 차마 치지 아니하니 총언도 또한 천명과 인심이 이미 왕씨에게 돌아감을 알고 그 아들 영으로 하여금 태조에게 귀의케 하니 태조가 기뻐하여 총언을 봉해서 벽진장군으로 삼고 혼인을 맺어 대려의 맹서를 이루었다』고도 하였다.
벽진이씨 본원
이총언이 공훈으로서 벽진에 봉해졌음으로 인하여 본관으로 삼았다.
성주에 이씨가 셋 있으나 벽진장군에서 나온 이씨가 가장 오래이다.
벽진장군 이총언(신라 헌안왕 이년 무인생 ; 858)은 사기에 세계를 유실하였으나 신라말에 벽진군을 보전하고 있었는데 당시 도적의 무리가 충만하였으나 공이 성을 튼튼히 하여 굳게 지키니 백성들이 그 덕화에 힘입어 평안하였다. 고려태조가 사람을 보내어 함께 협력하여 화난을 평정할 것을 효유하니 공이 글을 받들고 매우 기뻐하여 아들 永으로 하여금 병사를 거느리고 태조를 쫓아 정토케 하니 영의 그때 나이 십팔세 였는데 대광으로 삼아 사도란 귀녀를 처로 삼게하고 공을 본읍장군으로 배수하여 이웃고을의 이백이십구정호를 더 주고 또 충주 원주 광주 죽주 제주의 창곡 이천이백석과 소금 일천칠백팔십오석을 주었으며 다시 친서를 보내어 금석같은 신표를 보이면서 이르되 “자손에 이르도록 이 마음 변치 않으리라”하니 공이 이에 감격하여 군정을 단결하고 군량을 비축하여 고성으로써 신라와 후백제가 반드시 쟁취하려는 지역에 끼어있어면서도 흘연히 동남의 성원이 있었다. 태조이십일년 무술(938) 칠월 임자일에 졸하시니 향년이 팔십일세였다.(출전은 고려사 왕순식 부전).
이총언은 태조초에 벽진장군이 되어 본성을 지켰는데 임금이 손수 쓴 조서로서 금석같은 교분을 약속하여 이르기를 “백자천손에 이르도록 이 마음 변치 아니 하리라” 하니 총언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은 절의를 지켰다. 이에 임금이 명하여 방읍의 민호를 주어서 정호를 보태고 또 염곡 사천여곡을 상 주었다.(출전은 여지승람 벽진명환).
왕태조가 삼한을 통합할 때 이총언이 벽진군 태수가 되어 오직 의연하게 항복하지 아니하니 동남쪽의 성세가 서로 의뢰하여 평안하였다. 태조가 도멸코저 하였으나 총언과는 구지가 있음오로 차마 치지 아니하니 총언 역시 천명과 인심이 이미 왕씨에게로 돌아 갔음을 알고 그 아들 영으로 하여금 태조에게 귀의케 하니 태조가 기뻐하여 총언을 봉하여 벽진장군으로 삼아 소금 이천석을 하사하고 혼인을 맺어 대려의 맹서를 이루어서 백자천손까지 이 마음 변치 말자는 맹서가 있었다.(후손 흘가기)
이총언이 벽진장군 삼중대광 개국원훈이 되었는데 왕태조가 삼한을 통일할 때 벽진고허를 진수케하여 방읍의 민세를 식록케 명하고 백자천손까지 종시 한결같이 절의를 지킨다는 맹약이 있어 신예로서 대우하지 아니 하였으니 의임의 후중함과 진남의 공업이 지대하다 할것이다.(이참봉 보첩).
구보에 벽진장군의 묘는 성주수촌 고허에 있다고 하나 병난에 실전하였으며 경종삼년계묘(1723)에 후손 봉조하 세근이 영백이 되었을 때 그 족제 세필과 같이 의논하여 설단망제하려 했으나 성취하지 못했다가 그 후 영조사십육년경인(1770)에 세필의 아들 정태가 유지에 따라 종의를 창도하여 이해 십월보름날에 수촌서록에 설단하여 년 일회 제향키로 하였다.
본관
벽진의 유래는 옛 성산가야국 에서 부터 본피현, 신안현, 벽진군, 경산부, 광평군, 경산부, 성주목, 경산부, 성주목, 성산현, 성주군으로 승격 또는 강등, 개칭되어 왔다고 문헌에 나온다. 벽진이씨도 지명의 변화에 따라 잠시 성주이씨나 성산이씨로 불렀을 때가 있었다. (1월 9일자 이수호씨가 올린글에 대동보 272 페이지에 정헌선생 비문에 '성주이공 세근지묘'라 표시된 것은 성주이씨로 불릴 당시에 세운 비문이라고 이해시면 될 것 같다.)
그 외에도 파에 따라서 혹은 사는 집성촌에 따라서 명곡이씨(중국 천자가 산화선생이 계신 곳을 명곡으로 명명하여 하사), 산화이씨, 금산이씨(평정공이 사신 곳. 금릉의 고호), 견동이씨(감사공이 사신곳), 래진이씨(승원 자손들 집성촌), 명경이씨(문정공이 명경 급제함), 금릉이씨(금릉공 자손의 집성촌), 여은이씨(집성촌) 등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이조 정조 이후에는 벽진이씨로 정립하여 일관되게 불렀다. 경산이씨와 청송이씨가 벽진이씨의 후손이라 함에 대하여는, 쳥송이씨는 경산이씨의 후손이라 되어있다.
경산이씨의 시조인 이덕부는 벽진이씨 시조의 장자인 이달행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었다. 경산 이씨의 구족보에는 위와 같이 벽진 장군의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몇대손인지도 알 수 없고 다른 기록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도 없어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최근 경산이씨 족보에는 벽진장군의 후손이라는 말은 넣지않고 있다. 참고로 성주에는 이씨성을 가진 본이 6본이 있다. 벽진이씨, 성주이씨, 성산이씨, 광평이씨, 경산이씨, 가리이씨 의 6본인데 성주 6리(李)라 부른다. 그 중에서 벽진이씨의 유래가 가장 깊다.
新增東國輿地勝覽 제28권 慶尙道 星州牧 名宦 高麗
858∼938(헌안왕 2∼태조 21) 신라 말 고려 초기의 호족. 신라 말기 벽진군(碧珍郡;지금의 성주)의 치안에 힘써 백성을 보호하였으며,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도움을 요청하자 18세의 나이인 아들 영(永) 을 보내 왕건을 따라 삼한을 정복, 이에 왕건은 그에게 후한 은사(恩賜)를 내리고 서신을 보내 자손에 이르기까지 고마운 마음을 변치 않도록 하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는 군사를 훈련시키고 양식을 비축하여 고립된 성을 지키면서 고려의 후삼국통일에 기여하였다. 이총언은 왕건을 도와 고려를 세우는데 큰공을 세워 태조는 고려 삼중대광 개국원훈 벽진장군에 봉하고 "백자천손 대대로 이마음을 길이 간직하자"는 친서를 보내 "금석의 부"를 맺었다고 신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 제28권 慶尙道 星州牧 名宦 高麗≫ 은 기록하고 있다.이때 그의 나이가 61세였다고 한다. 시조이후 벽진을 관향으로 38대손을 이어온 후손들은 崇祖尙門의 사상이 높아 매년 (음력)10월 3일 경북 성주군 벽진면 해평동 敬收堂에 모여 시조를 숭조하는 제향을 올리고 있다.
시조공 碧珍將軍 이총언에 대한 사실기록은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및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 원문과 번역한 글은 아래와 같습니다.
高麗史 卷92. 列傳 卷 第5. 王順式 李忩言 堅金 興達 善弼 秦評 『李忩言 史失世系 新羅季 保碧珍郡時 群盜充斥 忩言堅城固守民賴以安 太祖遣人 諭以共戮力定禍亂 忩言奉書甚喜 遣其子永 率兵從太祖征討 永時年十八 太祖以大匡思道貴女妻之 拜忩言本邑將軍 加賜傍邑丁戶二百二十九 又與忠原廣竹堤州倉穀 二千二百石 鹽千七百八十五石 且致手札 示以金石之信 曰至于子孫此心不改 忩言乃感激 團結軍丁儲峙資糧 以孤城介於羅濟必爭之地 屹然爲東南聲援 二十一年卒年八十一 子達行及永』
다음은 위의 원문을 번역한 글입니다.
고려사 92권. 열전 제 5권. 왕순식 이총언 견금 흥달 선필 진평 등의 전기에 『이총언은 사서에 그 세계를 망실하였으나 신라 말에 벽진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때에 도둑의 떼가 사방에서 일어 날 새, 총언이 성을 굳게 지키고 있으니 백성들이 힘입어 편안할 수 있었다. 태조가 사람을 보내어 달래기를 힘을 다하여 화란을 진정하자고 하니 총언이 글을 받들고 심히 기뻐하여 그 아들 영(永)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태조를 따라 정토케 하니 永의 그 때 나이 18세였다. 태조가 대광 사도귀(大匡 思道貴)의 딸로 永의 아내로 삼고 총언을 본 읍 장군으로 제배하고 이웃 고을 정호 229를 더 사하고 또 충주 원주 광주 안성 제천 의 창고 곡식 2200석과 소금 1785석을 주었으며 또한 수찰을 보내어 금석 같은 신의를 보여 말하기를 “자손에 이르기 까지 이 마음 변치 않으리라.”고 하니 총언이 이에 감격하여 군정을 단결하고 자양을 저축하여 고성으로 라 · 제 간의 쟁탈하는 곳에 개재하면서 홀연히 동남방의 성원이 되었다. 21년에 졸하니 나이 81이었다. 아들은 달행(達行)과 영(永) 이다.』
- 동아대학교 고전연구실 번역 : 우리나라 최초의 고려사 번역 완간 집. -
高麗史節要太祖二十一年戊戌 『秋七月碧珍郡將軍李李忩言言卒新羅之季群盜競起唯碧珍郡爲忩言所保民賴以安王遣人諭以同心戮力底定禍亂 忩言奉書甚喜卽遣其子永將兵從王征討王善之以大匡思道貴女妻之拜忩言
本邑將軍恩賚稠重 忩言感激鍊兵峙糧以孤城介於新羅百濟必爭之地屹然爲東南聲援』
다음은 위의 원문을 번역한 글입니다.
고려사절요 태조 21년 무술.『가을 7월에 벽진군 장군 이총언이 졸하였다. 신라의 말기에 뭇 도둑이 다투어 일어났는데, 오직 벽진군 만이 총언의 보호를 입어 백성이 편안하였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화란을 평정토록 개유하니 총언이 글을 받고 매우 기뻐하여 곧 그 아들 영(永)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왕을 따라 정토케 하였다. 왕이 이를 착하게 여겨 대광 사도귀(大匡 思道貴)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고 총언을 본읍의 장군으로 임명하고 은사가 후하였다. 총언이 감격하여 군사를 훈련하고 양식을 저축하여 고립된 성으로 신라와 후백제가 서로 다투는 땅에 끼여 있으면서 흘연히 동남의 성원이 되었다.』
.- 재단법인 민족문화 추진회 번역 -
東國輿地勝覽 星州 名宦 第 一 番. 高麗 李忩言 『太祖初 爲本府將軍 守本城 上以 手詔約爲金石之交 曰百子
千孫不改此心 忩言終始一節上命賜旁邑民口以添其丁戶又賜鹽穀四千餘斛以賞之』
다음은 위의 원문을 번역한 글입니다.
동국여지승람 성주의 이름난 벼슬 제일 첫째. 고려 이총언 『고려 태조 초년에 본부 장군이 되어 본성을 지켰는데, 임금이 친히 쓴 조서로써 금석 같은 친구가 되기를 약속하여 말하기를“백자천손까지 이 마음을 변하지 말지어다.”하였다. 총언이 시종 한결같은 절개를 지키었다. 임금이 명하여 옆의 고을의 민구를 주어 그 호구를 보태고 또 소금과 곡식 4천여 곡을 상으로 주었다.
재단법인 민족문화 추진회 고전국역 총서에서 전재
- 위의 역사 사실을 토대로 하여
서기 1865년 9월 11일
시조공 27세손 문경공 화서 이항노(文敬公 華西 李恒老) 선생께서“시조공벽진장군 사실기(始祖公 碧珍將軍 事實記)”를 지어셨습니다.
3 시조공 벽진장군 사실기(始祖公碧珍將軍事實記).
고려(高麗) 삼중대광(三重大匡) 개국원훈(開國元勳) 벽진장군(碧珍將軍) 이공(李公)의 휘(諱)는 총언(忩言)이니 곧 우리 이씨(李氏)의 시조(始祖)이다. 세계(世系)가 아득하고 멀어서 그 상세(詳細)한 것은 고증(考證)할 수 없으나 오히려 국사(國史)에 나타난 것은 가(可)히 징험(徵驗)되어 믿을 수 있다.
삼가 고려사(高麗史)를 살펴보건대 왕순식부전(王順式附傳)에 이르기를 “벽진장군(碧珍將軍) 이총언(李忩言)이 신라 말(新羅末)에 벽진(碧珍)고을을 보전(保全)하고 있었는데 이때 도적의 무리들이 날뛰었으나 총언(忩言)이 성(城)을 튼튼히 하여 굳게 지키니 백성(百姓)들이 그 덕(德)을 입어 평안(平安)하였다.” 이에 태조(太祖)가 사람을 보내어 동심협력(同心協力)하여 화란(禍亂)을 평정(平定)하자고 효유(曉諭)하니 총언(忩言)이 글을 받들고 매우 기뻐하여 아들 영(永)으로 하여금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태조(太祖)를 좇아 정토(征討)케 하였다. 영(永)의 그때 나이 18세(十八歲)였다. 太祖以大匡思道貴女妻之하고 총언(忩言)을 벽진장군(碧珍將軍)으로 임명(任命)하여 이웃 고을의 정호(丁戶) 229호(二百二十九戶)를 더 주고 또 충주(忠州) 원주(原州) 광주(廣州) 죽주(竹州) 제주(堤州)의 창곡(倉穀) 2,200석(二千二百石)과 소금 1,785석(一千七百八十五石)을 주었으며 다시 친서(親書)를 보내어 금석(金石)같은 신표(信標)를 보이면서 이르되 “자손(子孫)에 이르기까지 이 마음 변(變)치 않으리라”고 하니 총언(忩言)이 이에 감격(感激)하여 군정(軍丁)을 단결(團結)시키고 군량(軍糧)을 저축(貯蓄)하여 고성(孤城)으로써 신라(新羅)와 후백제(後百濟)가 반드시 쟁취(爭取)하려는 지역(地域)에 끼어 있으면서도 흘연(屹然)히 동남(東南)의 성원(聲援)이 되었다. 태조(太祖) 22년(二十二年) 무술(戊戌,938) 7월 임자일(壬子日)에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81세(八十一歲)였다고 하였다.
그 밖에 가승(家乘)과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뒤섞여 나온 것이 대의(大義)는 이미 같으나 또한 번갈아 나타난 것도 있으니 이에 이르기를 “고려 태조(高麗太祖)가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함에 이총언(李忩言)에게 명(命)하여 벽진(碧珍) 옛 터를 진호(鎭護)케 하고 이웃 고을 민세(民稅)로써 식록(食祿)케 하여 백자천손(百子千孫)까지 종시일절(終始一節)의 맹서(盟誓)를 맺어 신하(臣下)의 예(禮)로써 대우(待遇)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이르기를 “고려 태조(高麗太祖)가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할 때에 이총언(李忩言)이 벽진태수(碧珍太守)로서 오직 의연(毅然)히 항복(降伏)하지 아니하고 동남(東南)의 명성(名聲)과 위세(威勢)로 서로 의지(依支)하여 안연(晏然)하였다. 태조(太祖)가 도멸(屠滅)코자 하였으나 총언(忩言)과는 예부터 친(親)한 사이이므로 차마 치지 아니하니 총언(忩言)도 또한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이미 왕씨(王氏)에게 돌아감을 알고 그 아들 영(永)으로 하여금 태조(太祖)에게 귀의(歸依)케 하니 태조(太祖)가 기뻐하여 총언(忩言)을 봉(封)해서 벽진장군(碧珍將軍)으로 삼고 혼인(婚姻)을 맺어 대려(帶礪)의 맹서(盟誓)를 이루었다.”고도 하였다.
아! 공(公)은 신라 말(新羅末) 도탄(塗炭)의 때를 만나 고성(孤城)을 지키고 백성(百姓)을 어루만져 덕망(德望)과 위의(威儀)가 진실로 드러났으며 한 나라가 거듭 수복(率服)될 즈음에 새 임금을 만나 대업(大業)을 도와서 풍성(豊盛)한 공훈(功勳)과 위대(偉大)한 충렬(忠烈)이 태상(太常)⑬에 기록(記錄)되고 역사(歷史)에 실렸으니 어찌 그리 훌륭하였으리오! 그러나 이미 사업(事業)이 밖으로 드러남이 이와 같다면 반드시 덕행(德行)이 안으로 온축(蘊蓄)⑭됨이 있으련만 도리어 문헌(文獻)의 징거(徵據)가 없어 능(能)히 상세(詳細)한 설명(說明)을 못하니 슬프고 애석(哀惜)하도다. 일찍이 듣건대 군자(君子)가 도통(道統)을 전(傳)하면 후인(後人)들이 가(可)히 이었다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공자(孔子)가 도학(道學)으로써 천하만세(天下萬世)에 교조(敎詔)하였으나 그 근본(根本)을 거슬러 보면 결(契)이 오륜(五倫)을 가르친 데에서 나왔고 맹자(孟子)가 백무농상(百畝農桑)으로써 제(齊)나라와 양(梁)나라의 임금에게 권(勸)하였으나 그 근본(根本)을 거슬러 보면 직(稷)이 백곡(百穀)을 뿌린 데에서 나온 것이니 크고 작음과 미미하고 드러남이 비록 같지 않으나 단서(端緖)의 출처(出處)는 가(可)히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공(公) 후손(後孫)의 명성(名聲)과 덕행(德行)의 실상(實相)을 조차 그 근본(根本)을 거슬러 찾아보면 거의 공(公)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로다.
공(公)의 후손(後孫)이 번성(蕃盛)해서 우리나라의 대성(大姓)이 되고 고려조(高麗朝)와 조선조(朝鮮朝)의 명현(名賢)과 거공(鉅公)이 우뚝하게 나타났으니 이를테면 대제학(大提學) 견간(堅幹), 문정공(文靖公) 극송(克松), 도원수(都元帥) 희경(希慶), 전서(典書) 존인(存仁), 정간공(靖簡公) 맹전(孟專) 평정공(平靖公) 약동(約東), 판서(判書) 승원(承元), 성산군(星山君) 식(軾), 대사성(大司成) 철균(鐵均), 좌찬성(左贊成) 승언(承彦), 정도공(貞度公) 장곤(長坤), 승지(承旨) 언영(彦英), 참의(叅議) 석경(碩慶), 세마(洗馬) 후경(厚慶), 세마(洗馬) 흘(屹), 충숙공(忠肅公) 상길(尙吉), 충강공(忠剛公) 상급(尙伋), 감사(監司) 상일(尙逸), 현령(縣令) 세옥(世玉), 효헌공(孝獻公) 세환(世瑍), 봉조하(奉朝賀) 세근(世瑾) 등(等)이 혹(或)은 문장(文章)이나 학행(學行)으로 드러났고 혹(或)은 청백(淸白)이나 절의(節義) 또는 사업(事業)으로 명망(名望)이 당시(當時)에 나타나서 성문(聲聞)이 후세(後世)까지 널리 전(傳)해졌으며 그 밖에도 명현(名賢)과 석학(碩學)이 또한 많이 빛났으니 어찌 그 근본(根本)이 없고서야 그러했겠는가?
또 가만히 듣건대 “산화공(山花公)의 증손(曾孫) 희길(希吉)이 원(元)나라에 들어가서 운남(雲南)에 살았는데 그 후손(後孫)으로 이성량(李成樑)이 있어 아들인 제독(提督) 여송(如松)을 보내어 우리나라를 구(救)할 때에 본국(本國)이라고 일컬으면서 심력(心力)을 다해 힘쓴 뜻은 대개 의의(意義)가 있었다.”고 이르기도 한다.
벽진(碧珍)은 지금 경상우도(慶尙右道) 성주목(星州牧)이니 시조공(始祖公)께서 일어나신 땅으로서 자손(子孫)들이 이로 인(因)해서 관향(貫鄕)을 삼았다. 치소(治所)서(西)쪽 15리(十五里)의 명암방(明巖坊) 수촌(樹村)은 곧 공(公)의 유허(遺墟)이고 그 좌강(左岡) 수백보(數百步)는 곧 공(公)의 묘소(墓所)였으나
임진병난(壬辰兵亂) 이후로는 그 장소를 정확히 알수가없어서, 일찌기 우암 송문정공의 말씀에 따라, 설단(設壇)하여 봉사(奉祀)하게 되었다.
고종 원년(高宗元年) 갑자(甲子,1864)에 후손(後孫)들이 보첩(譜牒) 간행(刊行)을 위(爲)하여 유허(遺墟)에서 모였는데 세월(歲月)이 오래되면 민멸(泯滅)될까 크게 두려워해서 비(碑)를 다듬어 비문(碑文)을 쓰고자 하면서 나에게 의론(議論)하거늘 내가 말하기를 “우리 시조공(始祖公)의 후덕(厚德)과 풍공(豊功)은 진실로 만자손(萬子孫)의 근본(根本)이 되고 토구(菟裘)의 땅과 하구(瑕丘)의 집에 이르러서는 또한 능(能)히 수백천년(數百千年)까지 보수(保守)하게 되었으니 어찌 성대(盛大)하지 않으리오? 그러나 조선(祖先)의 유덕(遺德)을 소술(紹述)하는 것은 근본(根本)이요 조선(祖先)의 구기(舊基)를 수호(守護)하는 것은 말단(末端)이니 우리 백세지친(百世之親)이 되는 이는 진실로 그 말단(末端)을 소홀히 하는 것도 옳지 아니하거니와 더욱 그 근본(根本)에 힘써야 마땅할 것이다. 이것이 그 영구불변(永久不變)의 도리(道理)가 되는 것이니 조선(祖先)의 영혼(靈魂) 또한 반드시 오르내리면서 나도 후손(後孫)이 있다 하리라.”고 하였다.
내 어리석으나 삼가 순서(順序)에 따라 이 사적을 기록(記錄)하였으니 당세(當世)의 입언군자(立言君子)를 뵈옵고 기리는 글을 청(請)하도록 하여라. 고종(高宗) 을축(乙丑,1865) 9월 11일 후손(後孫) 항로(恒老) 근서(謹書)
출처: 직장공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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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공 27세손 문경공 화서 이항노(文敬公 華西 李恒老)1792년(정조 16) ~ 1868년(고종 5)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
이칭,별칭: 자 이술(而述), 호 화서(華西), 시호 문경(文敬)
출신지 : 경기도 양평
본관 : 벽진(碧珍: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
저서(작품): 화서집(華西集), 화동사합편강목(華東史合編綱目),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 화서아언(華西雅言)
대표관직(경력): 공조참판, 경연관
조선후기 『화서집』, 『화동사합편강목』 등을 저술한 유학자.
아버지는 이회장(李晦章)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 이의집(李義集)의 딸이다.
3세 때 『천자문』을 떼고, 6세 때 『십구사략(十九史略)』을 읽고 「천황지황변(天皇地皇辨)」을 지었다.
12세 때 신기령(辛耆寧)에게서 『서전(書傳)』을 배웠다. 1808년(순조 8) 반시(泮試: 한성초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당시 권력층의 고관이 과거급제를 구실로 자기 자식과의 친근을 종용하자, 이에 격분하여 과장의 출입마저 수치스럽다 하여 끝내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과거를 포기한 뒤 당시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던 서울의 임로(任魯)와 지평의 이우신(李友信) 등을 찾아가 학우의 관계를 맺었다.
25∼26세 때 어버이와 사별한 뒤 학문에 전념하였다. 30세 때 이항로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한 청년들이 많이 모여들었으나, 세속을 피해 쌍계사·고달사 등 사찰을 옮겨 다니며 사서삼경과 『주자대전(朱子大全)』 등 성리학연구에 힘을 쏟았다.
이항로의 학덕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1840년(헌종 6) 휘경원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으며, 그 뒤에도 지방수령 등에 제수되었지만 고사하고 향리에서 강학을 위해 여숙강규(閭塾講規)를 수정하여 실시하였다. 이 무렵 한말의 위정척사론자로 유명한 최익현(崔益鉉)·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 등이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62년(철종 13) 이하전(李夏銓)의 옥사에 무고로 체포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864년(고종 1) 당시 권력자 조두순(趙斗淳)의 천거로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에 임명된 후 같은 해에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 사헌부 지평(持平)·장령(掌令) 등에 차례로 임명되었으나 노환(老患) 때문에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동부승지의 자격으로 입궐하여 흥선대원군에게 주전론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 뒤 공조참판으로 승진되고 경연관(經筵官)에 임명되었으나, 대원군의 비정(秕政)을 비판한 병인상소와 만동묘(萬東廟)재건 상소 등으로 인해 대원군으로부터 배척당했다.
이항로의 학문은 주리철학(主理哲學)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호남의 기정진(奇正鎭), 영남의 이진상(李震相)과 함께 침체되어가는 주리철학을 재건한 조선조 말기 주리철학의 3대가의 한 사람이다.
이항로의 주리철학은 이기합일설(理氣合一說)을 주장한 명(明)의 나흠순(羅欽順) 일파의 우주론을 반대하고, 이(理)와 기(氣)를 엄격히 구별하는 동시에 그것을 차등적으로 인식하였다. 즉, ‘이’가 주가 되고 ‘기’가 역(役)이 되면 만사가 잘 다스려져 천하가 편안할 것이나, 만일 반대로 기가 주가 되고 이가 버금이 되면 만사가 어지러워져 천하가 위태로울 것이라 하여 이·기를 차등적으로 보았다.
또, 주리론에 기초를 둔 심전설(心專說), 즉 심즉리(心卽理), 심즉기(心卽氣)설을 반대하고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존기비(理尊氣卑)를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중교가 비판하였듯이 이리단심(以理斷心)의 이론이라 할 수 있으니 이항로의 심설은 심전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항로의 사상은 심전주리론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항로의 심전주리론은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라는 윤리와 아울러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처럼 하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집처럼 한다는 애국사상과 자주의식을 강조함으로써 조선조 말기의 민족사상인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가 되고, 나아가서 민족운동의 실천적 지도이념으로 승화되었다.
저서로는 『화서집』·『화동사합편강목(華東史合編綱目)』 60권,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 『화서아언(華西雅言)』 12권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참고문헌
『화서집(華西集)』
『면암집(勉庵集)』
『한말의 민족사상』(홍순창, 탐구당, 1975)
『한국철학사』(유명종, 한명문화사, 1963)
『조선유학사』(현상윤, 민중서관, 1949)
『조선유교연원』(장지연, 해동서관, 1922)
「이항로의 위정척사사상」(홍순창,『독서신문』270, 1976)
「이항로」(신석호,『조선의 유학자 8인』, 신구문화사,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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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내력을 가진 우리 벽진이씨는 경종수족(敬宗收族)하여 그 역사와 문화를 지키고 이를 널리 선양하고자 시조공의 유허인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 756-1 번지에 종당인 경수당(敬收堂)을 창건하고 매년 춘추로 시향을 드리고 있는데, 연혁은 다음과 같습니다.
4 敬收堂연혁 (1770년~현재)
묘역: 경북 성주군 벽진면 외기리 959 번지
경수당(1826년):경북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 756-1 번지
우리 碧珍李氏는 경종수족(敬宗收族)하여 그 역사와 문화를 지키고 이를 널리 선양하고자,
諱 총언 시조공의 유허인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 756-1 번지에 宗堂인 경수당(敬收堂)을 창건하고.
시조공의 얼과 정신을 되세기고 은덕을 기르기위해서 매년時享을 드리고 있다.
1. 원래 시조공의 묘소가 성주 서쪽 명암방 수촌에 있었다고 하나 임진병란 후 실전함에 따라 후손들이 이 묘소를 찾으려 많은 노력을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 서기 1770년 영조 46년인 상수촌 매적산 동쪽 기슭에 단을 설치하고.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제사를 드려오다가
3. 서기1826년 순조 26년인 단소와 조금 떨어진 지금의 자리에 제실을 짓고 당호를 경수당(敬收堂)이라 하였다.
4. 서기 1864년 고종 원년인 갑자에 본당에 보소를 설치하고 다음해 갑자보 (甲子譜) 17권을 완간 배포 하였는데, 그 여력으로 시조공의 유허비와 표갈을 세우고. 시조공의 29세손 승지공 일하정 학준공께서 경수당기를 찬술하고. 경수당이 벽진이씨의 성지임을 대내외에 표방 하였다.
5. 서기 1865년에는 시조공의 29세손 직장공 화서 이항로선생께서 벽진장군 이총언 사실기를 찬술하였다.
6. 서기 1878년 고종 15년에 매적산 동쪽에 있던 제단을 영봉산 남쪽 기슭 이천 부근으로 옮겼다가, 서기 1881년 다시 경수당 경내 유허비 옆으로 옮기면서 시향 일자를 음력 10월 3일로 변경 결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7. 서기 1886년 고종 23년에 성주 목사로 부임한 시조공 31세손 참판공 용화(龍和) 님께서 경수당의 부지를 수습하여 담장과 문간채를 짓고 담장 밖 서쪽에 소나무를 심어 조경하여 경수당의 면모를 일신 하였으며, 다음해 이 토지 의 완문(完文 : 토지의 소유 권리를 명시한 관문서로 지금의 등기권리증)을 공포함에 따라 완전 경수당의 부지 로 확정하고 차차 매입 확장하여 지금은 대략 3000여평에 이르고 있다.
8. 서기 1917년 시향 때 제사(齋舍) 중창을 발의하고, 다음해 10월 이를 완공하여 당호 경수당(敬收堂)을 편액 하였다.
9. 서기 1930년 단소에서 드리던 시조의 시향을 풍설도 피하고 위의를 갖추기 위하여 재실에서 드리기로 합의하면서, 2세 휘(諱) 영(泳) 지경산부사 부군. 3세 휘(諱) 방회(芳淮) 추밀사 부군. 4세 휘(諱) 경석(慶錫) 평장사 부군. 5세 휘(諱) 증(曾)상호군 부군. 6세 장손 휘(諱) 실(實) 금자광록대부 부군 역시 6세 차손 휘(諱) 보(寶) 상장군 부군. 7세 휘(諱) 방화(芳華) 광록대부 부군. 8세 휘(諱) 은(殷)은청광록대부 부군. 9세 장손 휘(諱) 당규(唐揆) 태자담사 부군. 9세 차손 휘(諱) 당개(唐蓋) 금자광록대부 문화시중(金紫光祿大夫 門下侍中). 10세 휘(諱) 옹(癰) 은청광록대부 지추밀원사 부군을 모시기로했다.
10. 서기 1962년에 경수당 수축 및 유허비 이건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다음해 경수당수축 숙사신축 담장보축 공사를 완공하고,『고려삼국대광개국원훈 벽진장군이충언유어비(高麗三重大匡開國元勳 碧珍將軍李忩言遺墟碑) 라고 제액한 유허비를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11. 서기 1966년 위의 유허비를 근엄하게 보존하고자 비각건립위원회를 결성하여 다음해 이를 완공하고 그 전면 비도에 양쪽으로 사자석(獅子石) 장군석(將軍石) 석등(石燈)을 각 한 쌍 식 의물로 도열 설치하였다.
12. 서기 1974년 경수당 서쪽 길 건너 솔밭에 벽진장군 사적비를 건립하였는데, 비문은 화서 이항로 선생께서 찬술한 벽진장군 사실기이고, 진성인(眞城人) 이가원(李家源) 박사가 글씨를 썻다.
13. 서기 1977년 在日 일가들의 헌성으로 정문(正門)을 건립하였는데, 서기 1989년 경수당 정화 사업에 따라삼문을 수축하면서 이 문은 지금의 서문으로 이건하였다.
14.서기 1986년 사우(祀宇) 건립 추진위원회(建立推進委員會)를 발족하고 우선 비현사(丕顯祀)와 세덕사(世德祀) 그리고 내삼문(內三門)인 숙정문(肅靜門) 외삼문(外三門)인 숭상문(崇尙門)을 착수하고, 서기 1989에 이를 완공하여 비현사에서는 시조공를, 세덕사에서는 위 2세에서 10세 까지 10위와 여기에 더하여 9세 차손(次孫)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 금릉백(金陵伯) 부군(府君)을 추향하여 모두 11위를 향사함에 따라 비현사와 함께 경수당에서 모두 12위를 봉향하고 있다.
이에 공사를 이어 동재인 양정제(養正齋) 서재인 근성제(勤誠齋)를 완공하고, 함께 제수(祭需)를 변공(辦供)하는 전사청(典祀廳)을 지었는데 이는 여은공파 종중이 그 비용을 부담하였으며, 부지 1114평을 매입하여 경내를 확장하였다.
15.서기 1992년 임신 음력 3월 3일 위에서 말한 12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10월 3일은 12위 제위에게 추향을 드리고, 3월 두째일요일에는 비현사(시조공) 세덕사에서 춘향을 드린다.
16. 서기 2008년에 시조공묘가 입진명화(1592)로 410여년간 실전하여 왔는데 벽리 종인의 종론을 모아서
경수당 서편 벽진장군 사실기 사적비 옆에 백진장군말 무험이라고 전해온 전설의 무덤을 문현의 고증과 고고학계의 탐사과정에서 신라말 고려초 토기와편 19점과 벽진장군 4자의 명문전이 발견되어 벽진장군 묘임을 확증하게 되었다..
17. 서기 2013년 6월에 자손의 성금으로 성주군 벽진면 외기리 959 번지에 시조공 묘역을 복원 하고 매년 추향제 향사를 지내고있다.
경수당기(敬收堂記) 1864年
가야산伽倻山 동쪽에 있는 성주는 산천의 수려秀麗함과인물을 배출함에 있어,
경주慶州 진주晋州 상주尙州 복주福州:安東와 서로 앞을 다투며 스스로 큰 고을을 이룬다.
국사와야사를 상고하건데, 이미 선배들이 지은 글 속에 이런 사실이 갖추어져 있으니 다시 군더더기 말이 필요치 않다.
갑자甲 1864년 봄에 족보 일로 인하여 단소所에 머물면서 오랫동안 지세의 아름다움을 두루 돌아보니 참으로
하늘이 만든 훌륭한 땅으로서 지금은 명암방明巖坊 수촌樹村이라 일컫는데, 여기가 우리 시조 벽진부군碧珍府君께서 예전
에 살던 곳임을 알리고 있다.
외로운 성城에서 성원聲援하신 일은 신라新羅 말기末期에 뛰어나시고 천호의 봉읍封邑:食邑을 받은 일은 고려 초기初期에 특출하셨으니
빈:周나라 서울을 떠나서 양산梁山을 넘은 것과<周의 遠祖 大王의 故事> 같이 조상이 옮겨 사신 것은 어느 시대이
었는지는 모르겠지마는, 산화공이 명곡에서 생장하시어 나라를 빛낸 계책으로서 명망名望이 천하에 퍼졌으니,
옛일을 회고하건대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감개感槪한 눈물이 흘려내려 옷깃을 적시는 것도 깨닫지 못하겠다.
우리 시조의 수천 후손들이 누가 그렇지 않겠는가? 다만 1년에 한 차례씩 모시는 제사가 끊이지 않고 다행히 전
해지고 있으나 남아있는 재사齋舍가 오히려 소박하여 감坎 한 채와 당堂 한 채가 있는데, 서감西坎은 두 칸 장방
長房으로 비록 노나라의 큰 집인 영광전靈光殿만은 못하지마는 운곡雲谷의 곁 이천伊川가에 우뚝이 서 있는데도
한자의 편액도 없으니 아! 슬프도다.면상綿上을 지나는 사람들은 반드시 개산봉이라 일컫고 기산箕山에 오르는
사람은 허유許由)의 무덤이라고 이르는 사람도 있는데, 두예杜預의 침비는 무슨 일이었으며 악의樂毅:전
국시대 연나라 장수의 무덤길을 징험徵驗할 바 없는 것 같이 길가는 나그네들이 이 지점을 가리켜 “벽진이씨 단소壇所
와 재사齋舍이다”라고만 말하는데 지나지 않을 뿐이다.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운거족종雲擧族從이 도배를 하여 옛모습보다는 약간 나아졌으나 조금 모자라는 것은 명칭이 없
는 것이다. 동감東坎은 화수헌花樹이라 현판懸板을 달고 서감西은 경수당이라 액자를 달고 당 가까이에는
단소壇 두 자를 게시하고 북쪽에는 "벽진이씨 보청譜廳”이 라 크게 써 붙였으니 모두 친구 여응규呂應奎의 서까래 같
은 큰 글씨를 빌린 것이다. 외면으로 보면 불가佛家에 도금한 아름다움 같으나 그 속이 어떠한가는 알지 못하겠다.
이에 갑자기 백천의 흐름이 한 근원에서 비롯되고 만엽의 가지가 하나의 뿌리에서 나누어진다는 것이 생각되어
그 감동으로 7률七律 한수와 오언시詩 한수-首를 읊었으니 어찌 5언五言 7언七言으로 장성長城:名文大家의 솜씨를
얻었다고 하겠는가? 원래 문장을 짓는 일에는 익숙하지 못한데 진실로 운거족종雲擧族從의 성의를 저버릴 수 없어서
마침내 기문을 짓는 바이다. 1864년 학준 삼가지음
경수당기(敬收堂記) 1864年
<原文> 象王之東 有星州 山川之秀麗 人物之繁興 相頡頑於慶晋尙福
而自作大雄州於頻表者 攷之國乘與野史 己備於先輩之撰述 不必更贅
子春 因譜事留壇所 久周覽乎地勢之繡錯 真箇是天作之鴻基 而今稱明巖
坊樹村 認是吾始祖碧珍府君古都也 聲援之孤城最於羅季 勳封之千戶優於
麗初 去邠踰梁未知昉於何代 而山花公生長櫛谷 以華國手段名聞天下 追
惟往事 滄桑之感 淚迸出不覺沾襟 惟吾祖數千雲孫 夫孰不然哉 維歲一祀
幸傳不替所存齋舍尙樸 坎一堂 一西坎則 通二間長房 雖不若魯靈光 巋
然突立於雲谷傍伊川濱 而無一字扁楣 噫嘻痛矣 過綿上者必稱日 介山封
登箕山者 盖有云許由塚而杜預之沉碑 何事樂毅之封墬無徵 行人之指點不
過曰 碧珍李氏壇所齋舍而己 同吾志雲擧族從 塗泥排紙稍勝於昔貌樣 而
少欠者無稱 東坎則扁以花樹軒 西坎則額而敬收堂 近則揭以壇所二字 堂
北則大書碧珍李氏譜廳 皆借得來呂友應奎如椽之筆也 以外面觀之 有若佛
像塗金之美 而不知其裏之如何 於是乎倏爾思 百川之派流始於同源 萬葉
之枝分委於一根 感以吟七律一五言一 安得以五七長城云乎哉 素不嫺於文
字上攸爲 而固不負雲舉從之誠 遂為之記 甲子 學竣 謹撰
출처: 一何亭 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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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공 29세손 일하정(一何亭) 諱 학준(學俊)(1798~1870)
평정공(平靖公) 약동(約東)의 12세손
묘 합천 숭산면 황령촌 약산.
여러번 도추에 올랐는데 천거의 요지에
경학에 침잠함은 왕이 못속에 있는것과같다 하고,임하에서 독서를하고,안빈낙도 하였다.
일하정기는 화서이항로선생이 지었고. 행장은 족승손 우형이짓고. 갈명은 산화 권용현이지었다.
일하정문집이있다.
17대조 평정공 노촌 이약동의 노촌실기에 편찬 간행에참여함.
18대조 합천 판서공(승원) 재실 영모재실을 창건하고 신창기를 남김
직장공 27대 거유 애국지사 화서 이항로선생이 일하정(一何亭)호號 와 일하정기 (一何亭記)짓고,
혈족으로서의 애정 어린 인연을 갖고 있으며, 일하정 문집과 화서 문집에 두 선조의 오고간 서신이 수록되어 전하고있다.
碧珍李氏 文獻錄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민(潁敏)하여 말을 하면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이 많았다. 자라서는 금곡(錦谷) 송선생(宋先生)의 중용강론(中庸講論)을 들었는데 금곡(錦谷)이 여러번 칭찬하여 말씀하기를 『내가 이 모(李某)에게 처음으로 중용(中庸)의 심오(深奧)한 뜻을 들었다』하고 또 홍매산(洪梅山)과 이화서(李華西) 제현을 좇아 교유(交遊)하였는데 다들 장려(獎勵)하고 칭예(稱譽)하여 허교(許交)하였다. 간혹 일찍이 과시(科試)에 나아가기도 하였으나 거연(居然)히 대수롭 지 않게 생각하고 별로 좋아하는 바가 아니었다. 다만 어진 경재(卿宰 : 공경사대부(公卿士大夫))들과 사귀는 인연이 되어 선현(先賢)과 조선(祖先)의 미적(美蹟)을 강론하고 포장(褒章)함으로 모든 공(公卿)들이 몸을 낮 추어 굽히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살고있는 고을에 용호원(龍湖院)이 있으니 동계(桐溪) 정온선생(鄭蘊先生)을 제사하는 곳으로서 공(公)이 일찍부터 힘을 다하여 관리경영(管理 經營)하고 그 원(院)에 주강(主講)이 되어 엄숙한 규약으로 여러 학생을 창도(唱導)하고 인솔하여 유풍(儒風)을 진흥케 하니 향중(鄕中)이 공을 의뢰(依賴)하였다. 항상 고상한 풍채를 가져 연연(戀戀)하여 머뭇거리고 아첨하는 태도 (態度)가 없으므로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그때 청고(淸高)를 지키고 자처 (自處)하는 몇 분의 인사(人士)도 반드시 공(公)으로 수반(首班)을 삼았다.일찍이 경학(經學)과 유행(儒行)으로 향천(鄕薦)과 도천(道薦) 그리고 수의어사(繡衣御使)의 천거(薦擧)가 여러번 있었으되 마침내 처사(處 士)로 돌아가셨으니 공의(公議)는 애석해 하지마는 공의 심사(心思)는 어찌 손상함이 있었으리오.
화산(花山 : 세칭유종(世稱儒宗)) 권용현(權龍鉉)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에서
공이 여덟살때 어른들이 조선(朝鮮)으로 제목(題目)하여 시(詩)를 지으라 명령하니, 문득 지어 말하기를 『일월(日月)의 밝은 빛이여 아침마다 거듭되도다』하니 좌중(座中)이 다 경탄하였다. 이로써 공의 재지(才智) 가 뛰어났음을 볼 수 있을 것이오. 일찍이 학덕이 높은 선생의 문하(門 下)에 경례(敬禮)를 갖추고 명현(名賢)과 공명(公卿)의 반열(班列)에 종유 (從遊)하였으니, 용전(龍田) 송내희(宋來熙) 제주(祭酒)께서 추증(推重)하여 허교(許交)하시고 말하기를 『독서(讀書)한지 四十년만에 들어보지 못한 중용(中庸)의 심오한 뜻을 처사(處士) 이모(李某)는 의문나고 어려운 것을 해부하여 풀어주니 진실로 경학(經學)의 유사(儒士)로다. 사람들이 묻지 않은 바를 물었다』하고 홍매산(洪梅山) 직필(直弼)은 『이모(李某) 는 단아(端雅)한 선비로 더욱이 선현(先賢)을 포미(褒美)하는데 부지런 하다』고 말씀하셨으며, 종중(宗中)의 어른이신 화서 항로(華西 恒老)께서 일하정기문(一何亭記文)을 지어 말씀하시기를 『유행(儒行)은 도(道)에 근접(近接)하고 곤궁(困窮)을 겪어도 안연(晏然)히 처신함이 옛날의 현 인들도 이에 지나치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본(本)고을 부사(府使)인 매곡(梅谷) 송계수공(宋啓洙公)도 말씀하기를 『이모(李某)의 말은 아름답기가 문장고 시율(詩律)같아 시(詩)로 꾸민 것이 아니로되 자연히 우러나는 음성이라 일렀더라. 관부(官府)에서 천거(薦擧)한 요지는 명문세족(名門世族)으로 유행이 있고 타고난 성(郭 性)이 효우(孝友)하다』고 하였고 도(道)에서 천거(薦擧)한 요지(要旨)는 『경학(經學)에 침잠(沈潛)하여 주옥(珠玉)이 못물에 잠겨있는 것 같다』고 하였으며 비단옷 입은 암행어사(暗行御使)도 임하(林下 • 자연(自然))에서 독서하고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유사(儒士)라는 요지로 공을 천거(薦擧)하였었다.
공의 학문과 행의가 실질적이고 깊이 감추어진 포부가 중후함이 이와 같음에도 마침내 당세에 대우받은 바가 없이 불운(不運)하여 곤궁하게 사시다가 세상에서 돌아가시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으랴。
족증손(族曾孫) 우형愚亨이 지은 행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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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정집(一何亭集) 文獻
조선 후기의 학자 이학준의 시문집. 1956년 현손 창기가 편집, 간행하였다. 4권 1책. 석인본. 연세대학교 도서관 소장.
一何亭集. 卷1-4 / 李學峻(朝鮮) 著, 石版本
4卷1冊 : 四周雙邊 半郭 19.6 x 14.7 cm, 有界, 10行24字 註雙行, 上下向2葉花紋魚尾 ; 28.3 x 19.5 cm
序: 丙申(1956)暮春...族曾孫[李]愚亨謹敍
跋: 丙申(1956)端陽節咸從魚命德謹識,
丙申(1956)流頭節慶州崔源謹述, 中元丙申(1956)秋七月旣望曾孫[李]愚甲謹識
소장기관 :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원광대학교 도서관전주대학교 중앙도서관
4권 1책. 석인본. 1956년 현손 창기(昌基)가 편집, 간행하였다.
卷頭에 권용현(權龍鉉)과 족증손 우향(愚享) 등의 서문이 있고,
卷末에 어명덕(魚命德)· 최원(崔源)과 증손 우갑(愚甲) 등의 발문이 있다.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卷1은 시(詩) 159首,
卷2은 서(書) 37편과 문목(問目),
卷3은 서(序) 7편, 기(記) 11편, 上樑文 2편, 祭文 6편,
卷4는 墓誌 7편, 墓碣銘 3편, 行狀 4편, 事蹟 2편, 附錄으로 기· 만사· 행장· 묘갈명· 차운시(次韻詩) 등이 수록되어 있다.
詩에는 홍석주(洪奭周)· 홍재철(洪在喆)· 이항로(李恒老) 등에게 보낸 증여시(贈與詩), 김경선(金景善)· 김수근(金洙根) 등에게 준 송별시(送別詩), 그리고 시대적 현실이 강하게 투영된 「억적성(憶赤城)」· 「탄적상산성황폐난지(歎赤裳山城荒廢難支)」· 「문열읍수령다위민소축(聞列邑守令多爲民所逐)」 등이 있다.
서(書) 중에는 「상용전송선생문목(上龍田宋先生問目)」은 송내희(宋來熙)에게 생부모와 양부모의 상(喪)에 상기(喪期)와 복제(服制)에 대하여 질문한 내용이다.
「상이순상(上李巡相)」은 이기연(李紀淵)에게 보낸 것으로, 그가 살던 고을의 애로사항을 폭넓게 적고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참고자료가 된다.
「의사용암진공행장(義士龍庵陳公行狀)」은 임진왜란 때의 의사 진우창(陳遇昌)에 대한 기록이다.
5 벽진이씨 족보의 탄생 (碧珍李氏 最初族譜 임진보(壬辰譜) : 1652년)
1. 족보의 역사.
족보는 옛날 중국에서 왕실의 계통를 기술한것이 근원이며 , 사가(私家)에서는 한(漢)나라의 관직등용을 위한 현량과(賢良科) 제도를 만들어 후보인물의 내력과 그 선대(先代)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 시초이다. 그 후에 위(魏)나라와 진(晋)나라 때를 거쳐서 남북조시대 (南北朝時代) 에 비로소 학문으로서 보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족보는 고려조가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것이 시작이며, 고려중엽의 의종때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등이 그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신라말기에 귀족 계급에서 성씨를 쓰기 시작해서, 고려초기까지 이어 오다가 11대 문종조 (1047-1082)에 이르러 서는 성씨없는 사람은 과거에 응시 못하게 하는제도가 만들어져서 성씨가 갑자기 많이 생겨난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 최초에 발간된 족보는 1423년(세종5)의 문화유씨 영락보이나 서문만 전할 뿐 현존하지 않는다. 그 다음으로 1476년(성종7)에 발간된 안동권씨 성화보이다. 그 후 1562년(명종)에 발행된 문화유씨 가정보는 내외 자손이 상세히 기록되어 현존하고 있다. 이밖에 강릉김씨 을축보(1565), 능성구씨 만력보(1576)등이있다.
2.벽진이씨 족보 탄생
당시에는 사대부 가계 즉 양반 계층만이 족보를 할 수 있었는데, 우리 문중도 이에 해당하며, 전체 인구 대비로 양반계층은 6%에 불과하던 시대였다.
1)임진보(壬辰譜) : 1652년
1652년(효종3)인 임진년에 간행한 우리 문중 최초의 한문본 창간족보이다. 이 대동보는 1635년(인조13)에 충숙공 상길(尙吉)선조님께서 완산 부윤으로 계실때 단자를 수집하여 족보를 편집하기 시작하였으나 직책이 바뀌고, 1637년 (인조15)에 병자호란으로 순절하심에 따라 중단되었다.
그로부터 10년후 진주목사로 부임한 그의 종제 감사공 휘 상일께서 이를 완성하기 위하여 준비하든 중에 영남지방에 계파가 다른 일가가 많은 사실을 알고, 함께 단자를 모으고 비용을 부담하면서 효종 임진년에, 성주벽진이씨세보 라는 판각 목판본의 단행본 족보를 간행하였다.
특징은 2남인 대장군공파가 먼저 수록되고, 장남인 산화공파가 다음으로 수록되어 있다. 원본은 유일본으로 전승되고 있었는데, 1983년 증간위원회를 결성하여 간행한 100질의 한정, 영인본이 효종 임진 벽진이씨 세보 라는 이름으로 전하고 있다.
서문(序文) : 이상일(李尙逸)
식 (識) : 이수억(李壽億)
발문(跋文) : 조시량(曺時亮)
1)임진보서(壬辰譜書)(1652年),
星州에 李氏가 三姓이 있으니 碧珍將軍이 곧 우리의 始祖이다, 新羅末期에 碧珍郡을 保全하니 高麗太祖가 公을 碧珍將軍으로 除授하였다, 아들 諱 永은 知京山府事를 지냈고 그 뒤에 諱 芳華 諱 殷 父子가 모두 光祿大夫로서 벼슬이 代代로 世上에 빛나 그 아름다움을 中世에까지 이어왔고 나의 五代祖인 平靖公 諱 約東에 이러러서는 淸白과 剛正으로서 朝廷에서 뚜렸하였으니 門閥과 官爵이 가히 盛大하다 할수있으나 族譜가 아직 世上에 刊行되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크게 哀惜하지 않으리오?
나의 從兄인 尙書公이 일찍이 完山府尹으로 계실 때에 支派의 單子를 蒐輯하여 譜冊을 發刊하려 하였으나 때마침 事情으로遞職되어 成就하지 못하여서 平素에 歎息해 마지 않았다. 不肖한 이사람이 祖上의 蔭德을 입어서 晉州牧使로 왔는데 일가들이 南方에 사는이가 많았다, 우리 宗人인 進士 見龍과 秀才 壽檍이 이에 傷心하여 宗中에 發議해서 옛 合族하는 禮를 본받아 後世에 傳할 바를 계획하니 이는 宗族을 誇示하고 존중하는 議論이라 어찌 거룩하지 않으리오 ? 생각큰데 내가 비록 보잘 것 없으나 감히 門中의 큰일에 힘쓰지도 않고 平生의 뜻인바 所願을 이루고저 하겠는가 ! 오직 親屬이 이미 다함에 가지가 나누어지고 갈래가 달라지며 服이 끝나고 戚分이 다하여 吉凶事에도 서로 방문하지않고 路上에서 만나도 人事하고 지나가는 이 조차 드물게 되었다.
禮記에 이르되『同姓은 宗家를 따른다』라 하고 또 이르되 『宗家를 恭敬하기 때문에 族親을 뫃이게한다』 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飮食으로 族親을 모으는 禮節이 생기게 되었으니 君子는 드디어 이 일을 所重히 여겼다, 신령스르운 椿나무가 茂盛하게 잎이 퍼저도 그 根本은 한뿌리이며 大姓이 아무리 繁昌해도 그 처음은 한몸이라 動作하고 呼吸하는 元氣가 어버이에게 通했거늘 子孫끼리 남과 같이 지낸다면 이 또한 슬픈일이 아니리오 ? 官俸의 餘分으로 이 일을 마치게되니 우리 氏族의 譜冊이 비로소 只今이나 以後에 流布될것이므로 以後에 나는 子孫들은 모두 注意깊게 보고 敦睦孝悌하는 氣風으로 서로 힘쓴다면 나의 責任은 다한것이되고 諸君들의 일을 繼承하는 道理도 또한 다함이 되리라.
譜役이 完成될 무렵에 諸君이 다시 나에게 請하여 이르되『序文이 없으면 後嗣들이 어떻게 볼것인가 願컨데 번顚末을 적어서 族譜의 끝에 添附케 하소서』 하기에 義理上 拒絶할수없었다. 또한 생각컨데 우리 宗族이 예로부터 뜻은 있었으나 이루지 못한 것을 오늘에 이러러 비로서 編纂하였으니 어찌 運數가 있음이 아니랴. 또한 諸君이 없었다면 參考,校正해서 미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또 諸君에게 付託하노니 이제 見龍,壽億君이 能이 이 役事를 맡아서 尊祖 敬宗의 義理를 다 알게되었다고는 하나 그르나 先代를 빛네고 祖上을 나타나게함이 이것만으로 다헸다고 할수 있으리요 ? 詩經에 이러기를 『너의 祖先을 生覺하지않으랴 그 德을 닦을지어다』라 하였으니 이 族譜가 있드라도 이 德이 없으면 사람들은 오히려『先祖를 辱되게한다』 고 할것이니 우리가 取할바 아니로다. 아 ! 諸君들은 어찌 서로 힘쓰지 않겠는가 ? 이에 참남(僭濫)함을 해아리지 않고 드디어 序文을 쓰노라.
後孫 通訓大夫 晋州牧使兼 春秋 編修官 尙逸謹書
2)壬辰譜識(임진보식)
오호라 이것은 碧珍李氏의 世系인데 年代가임이 멀어저서 分派와 系譜가 분명하지 못한 중에 未詳處가 있으서 간혹 疑心스러운 것이 없지 않음이 오래되었다. 우리 祖父(諱 屹)께서 오래되면 될 수록 더욱더 그 眞實을 잃게 될까바 두려워해서 舊聞을 蒐集하여 世系를 編敍하여서 뒷날의 子孫에게 이어주려하였다. 叔父께서 父母의 喪을 당하여 孝養하지 못하게 된 것을 슬프한 以來 깊이 思慕함이 날로 절실하여 求함이 있어도 얻지 못하였다. 일찍히(본인은) 가르침을 받은것에 바탕을 두고 內外譜를 追成하되, 文獻으로 밝혀지기(徵)를 기다리도록 하였다. 지금바로 宗叔 *昌一氏 (註1) 가 居昌 文氏家의 舊譜를 얻어보게 되었다, 文氏는 李氏의 外孫이라 李氏의 系譜로서는 그 중에있는 것을 참고하였는데 大將軍 諱 成幹은 곧 樞密院事 諱 雍의 次子로서 이 분이 保勝郞將 諱 晟을 낳고 晟이 中郞將 諱 桓을 낳았으니 平靖公(諱 約東)은 그의 玄孫이다.
여기서 이 族譜를 祖父께서 기록하신 바와 비교한즉(서로) 符合되고 다름이 없어 한편으로 先代의 根源과 系統이 詳細하여 기쁘고 또 한편으로 祖父님의 祖上을 追慕하는 정성에 감격하여 더욱더 흥겹게 생각지 않을수 없었다, 아 ! 여기서 系統의 詳細함이 그 族譜에 실려 있어서 우리들이 오늘날에 비로서 알게되니 의문이 남아 있을수 있겠는가. 그간 古語에 이러기를『마음속으로 그것을 정성껏 求하면 얻어진다』 는 것이니 그 말은 믿을수 있도다. 子孫되는자는 거의 걱정이 없겠도다. 어찌 하늘이 장차 李氏의 家門을 열고자 이 族譜를 굳게 간직하여 잃치 않도록 해서 우리들의 눈에 덜어오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先祖께서 여러 代 쌓은 蔭德으로 子孫이 끊임없이 이어저서 百代의 後에 크게 울리게한 것이 아니겠는가. 叔父께서 悲感한 나머지 檍에게 命하여 騰書하게 하였음으로 쓰기를 마치고 또 序文을 써서 다른날 出刊하기를 바라노라.
後孫 幼學 李壽檍 삼가 적는다. ...이수억(李壽檍 1613-1670), 德老 梧潭 碧珍 三嘉 桐溪門人林汝栢撰狀 有文集
* (註1) 昌一氏
始祖公의 23世孫 찰방공 이창일(李昌一,1611 ~ 1653). 科擧及第. 承文院博士. .
자(字) 융보(隆甫), 호(號)는 동곡(東谷), 광해군(光海君) 3년 신해(辛亥 1611) 3월 8일생이며,
인조(仁祖) 26년 무자(戊子 1648)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였으며,
인조(仁祖) 27년 기축(己丑 1649)에 문과(文科) 정시(庭試) 을과(乙科) 2인에 급제하였다.
승문원박사, 보안찰방을 역임(歷任)중 효종(孝宗) 4년 계사(癸巳 1653) 12월 13일 임지에서 졸(卒).
거창군 동쪽 안양산 할아버지 묘 우측 신좌(辛坐)에 있고 묘갈명(墓碣銘)에 현감(縣監) 서호(徐琥)가 찬(撰).
3)壬辰譜跋(임진보 발)
벽진이씨(碧珍李氏)는 대성(大姓)이다. 그 시조가 신라말엽에 일군(一郡)을 보전했고, 고려조에 들어와서는 공신의 으뜸이 됐음은 국사를 상고해 보면 뚜렷이 알 수 있다. 그후 평정(平靖, 주: 이조참판 이약동)공(公)이 청백과 충직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공의 후손인 상일(尙逸,1600~1674, 경상감사, 현재 영정 있음)이 진주목사(1650~1654)가 되고, 나(주: 조시량) 또한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니 모두 공의 내외손(內外孫)이다.
하루는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 종족의 신수(神秀)함이 요요(遙遙: 멀고 아득함)하나 오히려 상고할 보첩이 없으니, 이 어찌 흠사가 아니겠는가. 나(주: 이상일)의 종형(從兄)인 상서(尙書)공(公)이 일찍이 이 일에 뜻을 뒀으나, 직사(職事)에 심력을 기울이다보니 능히 편수하지 못하고 평소 일가자제들에게 개탄해 마지않았다. 내가 일찍이 종형(從兄, 이상서)이 뜻을 이루지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하여 진실로 이 일을 주관함으로써 종형의 뜻을 조금이라도 위로하려 했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여 감히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국은을 입어서 다행히 이 고을(주: 진주목사)을 맡게 되자 동종(同宗) 몇 사람과 더불어 보첩을 편찬하여 그대로 인쇄하게 됐으니, 종형의 평생 뜻이 오늘에야 이뤄져서 여한이 없게 됐다. 그대(주: 조시량)가 마침 이 고을에 와서 이 일을 함께 의논하게 됐으니, 이 또한 다행이다. 이 보첩의 서문을 그대에게 부탁하니 사양하지 말라”고 했다.
나(주: 조시량)는 이에 두 손을 마주잡고 말하기를 “벽진이씨가 대대로 현달한 이가 여러 사람이 있어도 이 일에 뜻을 둔 사람이 없었는 데, 당신(주: 이상일)께 이르러서 비로소 족보가 편찬됐으니, 상서(尙書)공이 아니었다면 보첩 편찬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요, 상일(尙逸)공이 아니었다면 상서공의 뜻을 이어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보첩을 이룩한 것은 상일(尙逸)공이 아니라 곧 상서(尙書)공이라 할 것이니, 대체로 이씨 가문의 복이 다하지 아니한 것이다. 후손들이 이 보첩을 보면 효제(孝悌)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서 그 가풍을 추락시키지 아니함이 상서(尙書)공과 같고 상일(尙逸)공과 같을 것이 틀림 없을 것이다”고 했다.
외손 통훈대부행성균관전적 조시량 근발
出處: 碧珍李氏 族譜 임진보壬辰譜
6 본관 세거지
慶北(경북) 星州郡(성주군) 草田面(초전면) 月谷1里(월곡1리) 俗稱(속칭) 홈실(明曲)마을
.八作(팔작) 지붕의 골기왓집이 처마를 맞대고 43家口(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古風(고풍)스런 마을이다.
43家口中(가구중) 5家口(가구)를 除外(제외)하고는 모두 碧珍李氏(벽진이씨) 한 姓(성)으로 8百餘年前(8백여년전)高麗仁宗(고려인종)때 金紫光祿大夫(금자광록대부)이던 入鄕祖(입향조) 李芳華(이방화)가 唐(당)나라 風水地理(풍수지리)의 名堂(명당)을 찾아 이곳 穀城山(곡성산) 아래터를 잡았다.그러나 累代(누대)에 5兄弟(5형제)가 태어나 高官大爵(고관대작)의 벼슬에 오르면 마을을 떠나라는 遺言(유언)으로 不過(불과) 8代(8대)를 살다 뿔뿔이 흩어졌다 한다. 5兄弟(5형제)가 벼슬길에 오르고 叔姪間(숙질간)에 8判書(8판서)가 나와 名門大家(명문대가)로 繁昌(번창)했으나 곧 衰運(쇠운)을 맞았던것이다.2百餘年後(2백여년후) 後孫(후손)들이 家門(가문)을 일으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벽진이씨 현주요세거지
경북 성주 홈실(椧谷: 명곡),구미시 일원,칠곡군 일원,청송군 일원,영천시 임고면 효리,의성군 가음면,성주군 어산리,고령군 소재, 김천시 일원,영천시 자양면 용산동(원각), 영천시 임고면 효리, 건천읍 송선1리, 칠곡군 동명면, 문경시 영순면
경남 밀양시 일원,창녕군 일원,김해시 주촌면,합천 삼가 일원,거창 성기,가조동례리일원
강원도 화천군 하남면 삼화리
충북 음성 맹동면 쌍정리
전북 남원군 덕과면 사율리
7 벽진지역 역사적 변천
本貫所在地 : 慶尙北道 星州 碧珍(벽진)은 慶尙北道(경상북도)星州郡(성주군) 地域(지역)의 옛 行政區域(행정구역)이다. 伽倻聯盟(가야연맹)의 하나인 碧珍伽倻國(벽진가야국)을 新羅(신라)가 滅亡(멸망)시키고 碧珍郡(벽진군) 또는 本彼縣(본피현)이라 하다가 757年(新羅 景德王16)에 新安縣(신안현)으로 改稱(개칭)하여 星山郡(성산군)에 屬(속)하게 하였고,後(후)에 碧珍郡(벽진군)으로 改稱(개칭)하여 治所(치소)를 只今(지금)의 星州邑(성주읍)에 두었다. 940年(高麗 太祖23)에 京山府(경산부)로 昇格(승격)했으며, 1018年(顯宗 9)에는 高靈郡(고령군)等(등)을 屬郡(속군)으로 삼는 大邑(대읍)이 되었다. 1295年(忠烈王 21)에 興安都護府(흥안도호부), 1308年(忠烈王34)에 星州牧(성주목)으로 昇格(승격)했으며,1310年(忠宣王2)에는 다시 京山府(경산부)로 降等(강등)되었다. 1614年(光海君6)무렵 暫時(잠시)新安縣(신안현)으로 改稱(개칭),降等(강등)되기도 했으나 1895年 地方制度(지방제도)改正(개정)으로 慶尙北道(경상북도) 星州郡(성주군)으로 改編(개편)된 以後(이후) 星州郡(성주군) 碧珍面(벽진면)이 되었다.
8 역사적 인물 종합 (과거 급제자)
始祖(시조) 李忩言(이총언)의 아들 李永(이영)은 18歲(세)의 나이로 王建(왕건)을 따라 三國(삼국)을 征服(정복), 高麗開國(고려개국)에 功(공)을 세워 大提學(대제학)에 올랐고 孫子(손자)李芳淮(이방회)는 樞密院使(추밀원사),曾孫(증손)李慶錫(이경석)은 平章事(평장사)에 이르는등 初期(초기)부터 名門巨族(명문거족)으로 繁盛(번성)한 碧珍李氏(벽진이씨)는 後(후)에도 많은 人物(인물)들을 輩出(배출)해냈다.
조선시대에 장원 2명을 포함해 51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하였고, 고려·조선에 걸쳐 2명의 대제학, 3명의 청백리(고려 1명), 9명의 공신(고려 1명)이 나왔다. 고려 인종 때 금자광록대부를 지낸 이방화의 후손에서 숙질간에 8명의 판서가 나와 고려 태조에서 인종조에 걸쳐 가장 성세를 보였다.
高麗時代(고려시대)의 人物(인물)로는 李會(이회),李實(이실), 李克松(이극송)李雍(이옹)等(등)을 꼽는데 이中(중) 李克松(이극송)은 高麗(고려)高宗23年 明經文科(명경문과)에 壯元及第(장원급제)하고 淸廉强直(청념강직)한 淸白吏(청백리)로 判三司事(판삼사사)의 벼슬에 올라"맑고 깨끗하여 아무티가 없는 精神(정신)을 지녔다"하여 高宗(고종)이 親(친)히 永玉(영옥)이라는 號(호)를 내렸다.特(특)히 始祖(시조)의 10世孫(10세손) 李擁(이옹)의 아들 4兄弟中(형제중)長男(장남) 李堅幹(이견간)은 高麗(고려)忠烈(충열),忠宣(충선),忠肅王等(충숙왕등)3王代(3왕대)에 걸쳐 벼슬이 進賢館大提學(진현관대제학)에 이르렀다.
朝鮮時代(조선시대)에 不事二君(불사이군)의 節義(절의)를 지킨 李孟專(이맹전)들어 李氏家門(이씨가문)의 忠義(충의)와 節介(절개)의 脈(맥)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사람이다.世宗(세종)때 親試文科(친시문과)에 及第(급제)司諫院 正言等(사간원정언등)에 오른 그는 世祖(세조)가 端宗(단종)을 몰아내고王位簒奪(왕위찬탈)을 꾀하는데 憤慨(분걔), 벼슬을 버리고 故鄕(고향) 善山(선산)으로 내려가 거짓으로 눈멀고 귀먹었다며 草野(초야)에 묻혔다.
金宗直(김종직)의 門人(문인)으로 成宗(성종)때 大司成(대사성)에이른 李鐵均(이철균),丙子胡亂(병자호란)때 江華(강화)에서 自決(자결)한 李尙吉(이상길)은 높은 學文(학문)과 忠義(충의)의 人物(인물)로 李氏家門(이씨가문)을빛냈다
또한 己卯八賢(기묘팔현)의 한사람으로 中宗(중종)때 大司憲(대사헌),兵曺判書(병조판서)를 지낸 李長坤(이장곤),朝鮮末期(조선말기)의 巨儒(거유) 李恒老(이항로)等(등)이 있다.
1)가문을 빛낸 선조 (과거 급제자)
조선(朝鮮) 왕조(王朝) 27왕대의 539년 동안 750회의 대과(大科)인 문과과거 (文科科擧)를 시행하여 15,151명의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그 중에서 51명이 우리 벽진이씨로 현재 파악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문중도 한 때는 성주(星州)를 관향으로 했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국조방목(國朝榜目)의 성주(星州)와 성산(星山)이씨의 명단을 면밀하게 검토 확인하면 추가로 더 파악이 가능 할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파악된 명록(名錄)을 그 소속계파를 확인하여 아래와 같이 세대 (世代)별로 정리하였는데. 인구대비로 따진다면 상당히 많은 급제자를 낸 가문에 속한다.
과거 급제자 명단
세(世) 명(名) 자(字) 호(號) 구분(區分) 등위(等位) 계파(系派)
16 | 명겸(鳴謙) | 지산재(地山齋) | 世宗5. 1423式年試 | 丙科1 | 山花公· 參判· 吏判 | ||
16 | 맹전(孟專) | 백순(伯淳) | 경은(耕隱) | 世宗 9. 1427 親試 | 乙科2 | 山花公· 判書 | |
16 | 계전(季專) | 경지(敬止) | 태원(台園) | 世宗29. 1447式年試 | 丙科3 | 山花公· 判書· 恭僖 | |
17 | 약동(約東) | 춘보(春甫) | 노촌(老村) | 文宗1. 1451增廣試 | 丁科10 | 大將軍· 平靖 | |
18 | 철균(鐵鈞) | 사형(士衡) | 월오(月塢) | 燕山君2. 1496式年試 | 丙科21 | 山花公· 正獻· 月塢 | |
18 | 소원(紹元) | 인숙(仁叔) | 燕山君7. 1501式年試 | 丙科24 | 大將軍· 平靖 | ||
18 | 장곤(長坤) | 희강(希剛) | 금헌(琴軒) | 燕山君8. 1502別試 | 別試2 | 山花公· 參判· 貞度 | |
19 | 희건(希騫) | 효순(孝純) | 죽곡(竹谷) | 中宗8. 1513 別試 | 丙科7 | 山花公· 判書 | |
20 | 등림(鄧林) | 대재(大材) | 공암(孔巖) | 宣祖6. 1573 式年試 | 丙科16 | 山花公· 監務 | |
21 | 언영(彦英) | 군현(君顯) | 완정(浣亭) | 宣祖36. 1603 式年試 | 甲科1 | 山花公· 監務· 浣亭 | |
22 | 상철(尙哲) | 사보(士保) | 宣祖18. 1585 式年試 | 丙科22 | 大將軍· 平靖· 評事 | ||
22 | 상길(尙吉) | 사우(士祐) | 만사(晩沙) | 宣祖18. 1585 式年試 | 甲科2 | 大將軍· 平靖· 忠肅 | |
22 | 상급(尙伋) | 사언(思彦) | 졸부(拙夫) | 宣祖39. 1606 增廣試 | 丙科14 | 大將軍· 平靖· 忠剛 | |
22 | 상일(尙逸) | 여휴(汝休) | 용암(龍菴) | 仁祖8. 1630 式年試 | 丙科4 | 大將軍· 平靖· 監司 | |
23 | 경(坰) | 동야(東野) | 성수(聲叟) | 仁祖1. 1623 改試 | 丙科12 | 大將軍· 平靖· 忠肅 | |
23 | 여익(汝翊) | 비경(棐卿) | 수봉(秀峰) | 仁祖8. 1630 式年試 | 乙科3 | 山花公· 參判· 訓正 | |
23 | 인(土+寅) | 야수(野수) | 소옹(素翁) | 仁祖20. 1642 式年試 | 丙科2 | 大將軍· 平靖· 忠剛 | |
23 | 창일(昌一) | 융보(隆甫) | 동곡(東谷) | 仁祖27. 1649 庭試 | 乙科2 | 大將軍· 平靖· 承旨 | |
형천(亨千) | 익세(翊世) | 孝宗5. 1654 式年試 | 丙科8 | 國朝榜目에 碧珍人이라 기록 | |||
23 | 해준(海準) | 계도(季度) | 肅宗8. 1682 增廣試 | 乙科7 | 山花公· 監務· 浣亭 | ||
24 | 장(樟) | 군직(君直) | 仁祖5. 1627 式年試 | 乙科5 | 山花公· 正獻· 月塢 | ||
24 | 주세(柱世) | 이안(以安) | 오일헌(五一軒) | 肅宗25. 1699增廣試 | 丙科19 | 山花公· 監務· 浣亭 | |
24 | 주천(柱天) | 이능(爾能) | 낙저(洛渚) | 肅宗17. 1691 增廣試 | 丙科3 | 山花公· 監務· 浣亭 | |
24 | 주태(柱泰) | 동망(東望) | 英祖1. 1725 增廣試 | 丙科32 | 山花公· 監務· 浣石 | ||
24 | 명기(明夔) | 성필(聖弼) | 청옹(聽翁) | 肅宗39. 1713增廣試 | 丙科21 | 山花公· 麗隱· 注書 | |
25 | 정화(正華) | 현원(顯元) | 소리재(素履齋) | 肅宗34. 1708 式年試 | 丙科13 | 大將軍· 平靖· 承旨 | |
25 | 세근(世瑾) | 성진(聖珍) | 정간(靜幹) | 肅宗23. 1697 庭試 | 乙科2 | 大將軍· 平靖· 忠剛 | |
25 | 세진(世璡) | 명서(明瑞) | 英祖1. 1725庭試 | 乙科2 | 大將軍· 平靖· 忠剛 | ||
25 | 세춘(世瑃) | 백화(伯和) | 景宗3. 1723增廣試 | 丙科10 | 大將軍· 平靖· 忠剛 | ||
26 | 정주(挺周) | 석보(碩輔) | 옥천(玉川) | 肅宗34. 1708式年試 | 甲科1 | 大將軍· 平靖· 評事 | |
26 | 정응(挺膺) | 원례(元禮) | 景宗3. 1723增廣試 | 丙科25 | 大將軍· 平靖· 忠肅 | ||
26 | 정연(挺淵) | 춘백(春伯) | 肅宗38. 1712庭試 | 丙科13 | 大將軍· 平靖· 忠剛 | ||
26 | 정박(挺樸) | 성질(聖質) | 英祖1. 1725增廣試 | 丙科8 | 大將軍· 平靖· 忠剛 | ||
26 | 정욱(挺郁) | 성문(聖文) | 현승당현(陞堂) | 英祖1. 1725增廣試 | 丙科12 | 大將軍· 平靖· 忠剛 | |
26 | 정룡(挺龍) | 사장(士章) | 正祖10. 1786式年試 | 丙科4 | 大將軍· 平靖· 忠剛 | ||
27 | 육(錥) | 춘숙(春淑) | 이가재(二哥齋) | 純祖7. 1807別試 | 丙科3 | 山花公· 監務· 浣亭 | |
27 | 현(鋗) | 성용(聖鎔) | 경옥제(景玉齊) | 純祖7. 1807別試 | 丙科3 | 山花公· 監務· 浣亭 | |
27 | 화(鏵) | 몽여(夢汝) | 純祖22. 1822式年試 | 丙科16 | 山花公· 監務· 浣亭 | ||
27 | 익보(益普) | 겸중(謙仲) | 英祖20. 1744式年試 | 乙科5 | 大將軍· 平靖· 評事 | ||
27 | 양보(陽普) | 치장(穉長) | 英祖43. 1767庭試 | 丙科5 | 大將軍· 平靖· 忠剛 | ||
28 | 극록(克祿) | 예경(禮卿) | 英祖15. 1739謁聖試 | 丙科4 | 大將軍· 平靖· 忠剛 | ||
28 | 극생(克生) | 경춘(景春) | 허주(虛舟) | 英祖41. 1765式年試 | 丙科10 | 大將軍· 平靖· 忠剛 | |
29 | 응모(膺模) | 경휴(景休) | 哲宗3. 1852式年試 | 科8 | 山花公· 監務· 浣亭 | ||
29 | 희준(羲峻) | 덕요(德繇) | 憲宗2 1836庭試 | 丙科1 | 山花公· 麗隱· 司果 | ||
29 | 기준(麒峻) | 자범(子範) | 純祖5. 1805別試 | 丙科1 | 大將軍· 平靖· 判官 | ||
29 | 강준(綱峻) | 치삼(稚三) | 純祖29. 1829庭試 | 丙科6 | 大將軍· 平靖· 監司 | ||
29 | 상준(翔峻) | 대로(大路) | 성재(誠齋) | 憲宗15. 1849式年試 | 丙科17 | 大將軍· 平靖· 監司 | |
30 | 승덕(承德) | 명길(明吉) | 만회(晩悔) | 哲宗6. 1855庭試 | 丙科4 | 大將軍· 平靖· 消憂軒 | |
31 | 희화(喜和) | 경춘(景春) | 高宗28. 1891增廣試 | 乙科3 | 大將軍· 平靖· 忠剛 | ||
31 | 광수(光洙) | 국빈(國賓) | 亮和로 | 改名憲宗9 1843 式年試 | 丙科36 | 大將軍· 平靖· 忠肅 | |
32 | 우면(愚冕) | 성원(聖元) | 경석(經石) | 高宗18. 1881別試 | 丙科10 | 大將軍· 平靖· 忠肅 | |
32 | 우만(愚萬) | 윤필(允必) | 高宗29. 1892別試 | 丙科5 | 大將軍· 平靖· 忠肅 |
이 이외에도 17세 참판공계(參判公系) 조봉대부(朝奉大夫) 한성참군(漢城參軍) 승언(承言)선조는 성종(成宗) 3년인 1472년 춘장(春場)의 생원과(生員科) 장원(壯元)으로 급제한 사실이 국조방목(國朝榜目)에 올려 있다.
2) 벽리 유명 선조 인물
이영(李永): 이총언의 아들. 고려 태조의 부마로 대제학이 되었다.
이방회(李芳淮) : 추밀원사를 역임하였다.
이극송(李克松, 1202년 ~ 1274년) : 호(號)는 빙옥재(氷玉齋),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으로 상호군(上護軍) 보(寶)의 현손(玄孫), 백운(白雲) 이상국(李相國) 규보(奎報)의 문인(門人). 1236년(고종 23) 명경문과(明經文科)에 급제하여 판삼사동지경연(判三司同知經筵), 춘추관사도총관(春秋館事都摠官)을 역임하였다. 청백(淸白)하고 강직(剛直)하였으므로 왕(王)은 그를 가리켜, 한옥(寒玉)같은 정자(貞資)와 추수(秋水)같은 정신(精神)을 지녔다고 격찬(激讚)하여 빙옥(氷玉)이란 호(號)를 내렸으며 73세에 돌아가셨다. 의성(義城)의 봉강사(鳳岡祠), 성주(星州)의 빙옥재(氷玉齋)에 제향(祭享).
이명겸(李鳴謙, ? ~ ?) : 조선의 문신, 호(號)는 지산재(地山齋).산수재(山水齋).이조판서(吏曹判書) 신지(愼之)의 아들로 1423년(세종 5)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가 박사(博士)를 지내고 호당(湖堂)에 뽑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1449년에 제주(濟州) 안무목사(按撫牧使)에 보임(輔任)되었다.1451년에 제주(濟州) 방어대책긴요성(防禦對策緊要性)을 상소(上疏)하여 왕(王)의 재가(栽可)를 받고 전함(戰艦) 40소를 신조(新造)해서 제주(濟州)에 30소,대정현(大靜縣)에 10소를 요해지(要害地)에 포박(砲泊)시켜 침입한 왜적(倭敵)을 격퇴, 많은 공을 세워 첨지중추(僉知中樞)를 거쳐 강원. 전라. 충청. 평안. 경기 5도 감사, 한성부윤(漢城府尹), 이조판서 (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1453년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가 살해되어 함길도 도절제사(都節制使)인 매서 이징옥(李澄玉)이 파면되고 거의순국(擧義殉國)함을 보고 관직에서 물러나 초계(草溪)에서 만년을 보냈다.
이철균(李鐵均, 1450년 ~ ?) : 자(字)는 사형(士衡), 호(號)는 월오(月塢), 판서(判書) 건지(建之)의 증손(曾孫). 김굉필(金宏弼).김종직(金宗直)의 문에 동유수학(同遊修學)하여 사우(士友)의 추중(推重)을 받았고, 1465년(세조 10) 진사시(進士試)에 장원, 1496년(연산군 2),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하였다.연산군때 무오사화(戊午士禍)를 피하여 성산(星山)에 은거하다가 중종조(中宗朝)에 관곽(棺槨)을 특사(特賜)받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이견간(李堅幹, ? ~ ?) : 선생은 행의(行誼)가 고결(高潔)하고 학문이 굉박(宏博)하여 중국의 주(周)나라 예악(禮樂)에 밝고 당(唐)나라 풍조의 문장에 능하여 그 당시 따를 사람이 없었으며 사명(詞命 : 왕의 말과 명령)을 맡아보기 20년에 사대부(士大夫)들이 그의 문장이나 풍채를 모두 우러러 보았다.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원나라의 태학사(太學士) 주 방(周肪)과 같이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론할 제, 주 방이 자리에서 내려가 두 번 절하며 말하기를 "선생은 천하의 큰 선비로 삼한(三韓)의 문화가 여기에 이르렀습니다."하고 , 선생을 극구 칭찬하며 종이 상전을 대하듯 하였다. 고려의 충렬(忠烈), 충선(忠宣), 충숙(忠肅) 3조에 벼슬하여 통헌대부(通憲大夫), 민부전서(民部典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홍문관사(弘文館事)에 이르렀다. 원나라 황제가 선생의 문장과 풍채에 탄복하여 선생이 살고 있는 곳을 물음에 호음실(好音谷)이라 하며 그 그림을 그려 바치니 이것을 황제가 보고 명(椧)자를 새로 만들어 내리니 이로 인하여 호음실이 지금의 성주 초전면 홈실(椧谷)이 되었다.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 : 고려말 두문동 의사로 학자)이 "고려 중엽에 많은 선비중 유학자(儒學者)의 도를 실천한 이는 유독 제주 우탁(祭酒 禹倬), 문안 이견간(文安 李堅幹), 문충 이제현(文忠 李齊賢) 등 몇 사람 뿐이다. 우 탁의 주역(周易)과 이견간의 춘추(春秋)는 비록 옛날 중국의 한(漢)나라, 진(晋)나라의 전문가라도 따르지 못할 것이며, 이견간, 이제현은 그 인품이 매우 고결하고 나라에 대한 충성과, 나라를 다스리는 방책이 가히 육선공(陸宣公 : 8세기 후반 당나라의 한림학사 육 지(陸贄)와 짝이 될것이다"고 하였다. 시호(諡號)는 문안(文安), 성주의 문곡서원(汶谷書院)과 밀양의 용안서원(龍安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무덤은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청계산(靑溪山)에 있었으나 임진왜란에 실전(失傳)되고 후손이 성주 초전 홈실에 단(壇)을 모으고 문곡서당(汶谷書堂)을 세워 매년 한식(寒食)날 제사를 받든다. 또 홈실에는 선생이 살던 옛 집터가 있어 유허비(遺墟碑)가 있고, 신도비(神道碑)도 세워졌다.
이경(李坰, 1580년 ~ 1670년) :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동야(東野), 호는 오수. 공조판서 상길(尙吉)의 아들이다. 1621년(광해군 13) 유학으로 있을 때 이이첨(李爾瞻)이 구경록(仇景祿)의 옥사에 자기 아들이 관련되어 역옥을 늦추자 이를 논박하는 소를 올렸다. 1623년(인조 1) 진사로서 개시문과(改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1624년 예문관검열이 되었고, 그해 8월 장령으로 있으면서 집의 김세렴(金世濂), 장령 박안제(朴安悌) 등과 함께 이조판서 이귀(李貴)가 추숭(追崇)을 주장하고 자천한 것을 논박하다가 중신을 모함하였다는 죄목으로 당진현감에 좌천되었다. 그 뒤 1626년에 정언· 지평을 거쳤다. 1628년 3월 사서로 있으면서 국역(鞫逆)의 날에 병을 칭탁하여 불사(不仕)하였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같은해 6월에 정언에 임명된 뒤 강진현감·장령 등을 두루 거쳤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천도가 이루어질 때 아버지 상길이 적군이 상륙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소모사(召募使)가 되어 직분을 다할 것을 부탁하고 강도(江都)에 입성하여 자결하였는데 그는 포구를 지키던 그의 임무를 저버리고 아버지의 시신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그가 비록 의병에 종사하였다고 하나 자처(自處)의 도가 어긋났다고 하여 파직당하였다.
이사지(李思之, ? ~ ?) : 호(號)는 여은정(麗隱亭), 견간(堅幹)의 현손(玄孫). 공양왕 때에 중랑장(中郞將)을 지내고 왜구의 침입을 소탕하는데 공(功)을 세웠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지니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72현(賢)과 함께 송도(松都) 동남현(東南峴)에 올라가서 조천관(朝天冠)을 걸고 폐양립(蔽陽笠)을 쓰고 모두가 절의를 지키며 수차에 걸친 조선조(朝鮮朝)의 벼슬을 거절하였다. 말년을 관악산중(冠岳山中)에서 포영자적(哺영自適)하면서 보냈으며, 밀양(密陽)의 용안서원(龍?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이계전(李季專, 1404년 ~ 1459년) : 생육신(生六臣) 이맹전(李孟專)의 네째 동생으로 타고난 성품이 영민(英敏)하고 문장(文章)이 영발(英發)하여 1447년 문과(文科)에 급제, 성종조(成宗朝)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겸 경기관찰사(京畿觀擦使).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중서(中書)에 일입(一入)하여 대강(臺綱)을 재진(再振)하여 후설은대(喉舌銀臺)에 이르며 권형전부(權衡銓部)하고 화요약력(華要略歷)하여 휴유영망(休有令望)이라 졸후부문(卒後訃聞)에 철조하였으며 증부(贈賻)하고 공희(恭僖)란 시호를 내렸다.
이충민(李忠民, 1588년 ~ 1673년) : 자(字)는 여직(汝直), 호(號)는 모암(慕巖), 참의(參議) 탁미의 아들, 정한강(鄭寒岡).장여헌(張旅軒)의 양문(兩門)에서 수학하여 문장덕행(文章德行)이 제현(諸賢)의 귀감이 되었기에 하담(荷潭) 김시양공(金時讓公)이 영남(嶺南)을 안찰(按察)할때 현량 천거(賢良薦擧)에 수위(首位)로 올랐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추증.
이상급(李尙伋, 1572년 ~ 1637년) : 조선의 문신. 자(字)는 사언(思彦), 호(號)는 졸부(拙夫). 습재(習齋), 시호(諡號)는 충강(忠剛). 희선(喜善)의 아들로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문인(門人)이며 1603년(선조 36)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606년(선조 3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정자(正字). 저작박사(著作博士) 등을 지내고 형조좌랑(刑曹佐郞)으로 연경(燕京)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오던 중에 평안도사(平安都事)가 되었다.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있을 때 정조(鄭造)가 안찰사(按察使)로 부임하자, 그 속관(屬官)이 되기 싫어 사임하고 충주(忠州)에 들어가 경조(耕釣)와 후진들의 교육에 힘썼으며,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장령(掌令).집의(執義).단천(端川)과 연안군수(延安郡守)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때 남한산성으로 인조(仁祖)를 호종(扈從)했다가 중씨(仲氏) 상길(尙吉)이 순절했다는 비보를 듣고 통곡하며 강화(江華)로 가던 도중에 적병(敵兵)에게 살해되었다. 1777년 병자제사(丙子諸史) 존주록(尊周錄)에 명재(命載)되었고, 유소(儒疏)로 인하여 대신헌의(大臣?議)에서 일문쌍절(一門雙節)이라고 하였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이상길(李尙吉, 1556년 ~ 1637년) :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사우(士祐), 호는 동천(東川). 1585년(선조 18)진사로 식년문과에 급제, 정언을 거쳐 99년 광주목사로서의 선정을 베풀어 통정대부에 올랐다. 1602년 정언으로 있을 때 정인홍(鄭仁弘), 최영경(崔永慶) 등을 정여립(鄭汝立) 일당으로 몰아 탄핵한 죄로 풍천(豊川)에 유배되었다가 1608년 풀려났다. 그뒤 회양부사,안주목사,호조참의 등을 지냈으나 정인홍 등이 정권을 잡자 사직하고 이항복(李恒福)과 교우하였다. 17년(광해군 9) 동지사(冬至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온 뒤 폐모론이 일어나자 남원(南原)에 돌아가 은거하였다. 인조반정 뒤 승지, 병조참의 공조판서를 지낸 다음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듬해 병자호란 때 묘사(廟社)를 따라 강화(江華)에 들어갔다가 청군(淸軍)이 육박해 오자 자결하였다. 좌의정에 추증되고 강화의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동천집]이 있다. 시호는 충숙(忠肅)
이인(李寅, 1608년 ~ ?) : 조선의 문신. 자(字)는 야수(野搜), 호(號)는 소옹(素翁), 충강공(忠剛公) 상급(尙伋)의 아들. 계곡(溪谷) 장문충공(張文忠公) 유(維)의 문인. 1635년(인조 13)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1642년(인조 20) 문과(文科)에 올라 한림(翰林)을 거쳐 제주목사. 우부승지(右副承旨).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이건지(李建之, 1357년 ~ ?) : 자(字)는 천달(天達), 시호(諡號)는 정헌(正獻)으로 견간(堅幹)의 현손(玄孫). 13세에 경사(經史)에 능통하고 기사(騎射)에 뛰어났으며 1395년(태조4)에 중국에 유학(遊學)하고, 1406년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장 보(張輔)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안남(?南)을 정토(征討)하는데 종군하여 큰 공(功)을 세워 남경별기영도위(南京別騎營都慰)에 배명(拜命)되었다. 1409년(태종 9)에 환국(還國)하여 병조(兵燥)에 재전(再典)되고 서북이도(西北二道) 경략사(經略使)로서 맡은 임무(任務)를 잘 수행하여 5개월만에 평안을 이루어 벼슬이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올랐다.
이상일(李尙逸, 1600년 ~ 1674년) :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여림(汝林), 호는 용암(龍巖).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사마시를 거쳐 1630년(인조 8) 식년문과에 급제, 성균관박사·승정원주서가 되었다. 36년 병자호란 때 황해도도사로 산성을 지키고 주민을 보호하였다. 49년(효종 즉위년) 효종이 즉위하자 김자점(金自點)을 논핵하였으며, 이듬해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54년 폐서인(廢庶人)된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의 신원을 주장하다 사형된 김홍욱(金弘郁)의 옥사에 연루되어 면직되었으나 이듬해 안동부사로 복직되었다. 64년(현종 5)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66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이 지방의 민폐에 관한 옛 사실이 현종의 노여움을 사서 관직을 사직하고 충청도에 은거하였다. 저서에 《삼인사적(三仁事蹟)》이 있다.
이기보(李基普, 1738년 ~ 1811년) : 조선의 학자. 자는 경수(景修). 호는 팔물재(八勿齋) 정철(鄭徹)의 아들. 송명흠의 문인이 되어 성리학을 배우고 뒤에 김원행에게 사사(師事)하여 학행(學行)이 세상에 알려짐으로써 천염에 올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다.
이장곤(李長坤, 1474년 ~ ?) : 조선 중기 문신. 자는 희강(希剛), 호는 금헌(琴軒)· 학고(鶴皐), 우만(寓灣). 참군(參軍)의 승언(承彦)의 아들. 김굉필의 문인. 1495년(연산군1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02년(연산군 8) 알성문과에 급제한 뒤 교리로 있다가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거제도에 유배되었는데, 연산군이 그가 반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여 처형하려 하자 함흥(咸興)으로 도망하여 숨어 살았다. 1508년(중종 3) 박원종(朴元宗)의 추천으로 홍문관 부교리,교리, 사헌부장령을 거쳐 동부승지를 역임하였으며, 학문과 무예를 겸비한 인물로 중종의 신임을 받았다. 12년 여진족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이어서 평안도병마절도사,이조참판,예조참판 등을 거쳤다. 15년 대사헌이 되고 이듬해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함경도관찰사로 교체되었다. 18년 이조판서가 되고 19년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남곤,심정등이 주도한 기묘사화에 참여하였으나 조광조등 사화에 연루된 사림들의 처형에는 반대하다가 심정(沈貞) 등의 미움을 사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22년 복관되었으나, 여강.창녕등지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창녕의 연암서원(燕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금헌집>> 있다.
시호는 정도(貞度).
이항로(李恒老, 1792년 ~ 1868년) : 조선 후기 문신,학자.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 초명은 광로(光老). 경기도 양평(楊平) 출생. 양근(楊根) 출생. 3세때 천자문을 떼고 6세에 십팔사략을 배웠다. 1808년(순조 8) 한성초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에 부정이 있음을 알고 이를 단념하였다. 그후 학문과 후학양성에만 몰두하였다. 40년(헌종6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휘경원참봉(揮慶園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62년(철종 13) 이하전(李夏銓)의 옥사(獄死) 때 무고로 투옥되었다가 무죄임이 밝혀져 풀려나왔으며, 64년(고종 1) 조두순(趙斗淳)이 천거하여 장원서별제,전라도사,장령 등에 제수되었으나 건강을 이유로 사절하였다. 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동부승지가 되어 주전론을 적극 주장하였고, 이어 공조참판에 올라 경연관으로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경복궁 중건 및 과중한 조세정책에 반대하여 배척을 받았다. 그는 당대 이진상(李震相), 기정진(奇正鎭)과 함께 침체되어가는 주리철학(主理哲學)을 재건한 3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그의 사상(思想)을 보면 이기론(理氣論)에서는 철저하게 주리론(主理論)으로서 우주론(宇宙論)에 있어서는 이기합일설(理氣合一說)에 반대하고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입장에 섰다. 즉 이와 기를 구별하고 차등적으로 인식하여 이가 주(主)가 되고 기가 역(役)이 되어야 편안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가장 저명한 성리학자요 한국 역사상 보기 드문 민족교육자 (民族敎育者)로서 평소 애군여부(愛君如父).우국여가(憂國如家)를 문도(門徒)들에게 역설, 춘추대의 (春秋大義)를 주장하고 척사위정(斥邪衛正)을 내세워 민족주체의식을 고취시켜 한말창의(韓末倡義) 호국운동(護國運動)의 주역들을 대거 배출시켰다. 최익현(崔?鉉). 김평묵(金平默). 양헌수(梁憲洙). 유중교(柳重敎). 박문일(朴文日). 유중악(柳重岳). 박문오(朴文五). 이근원(李根元). 유홍석(柳弘錫) 등이 그의 가르침을 받은 인물들로서 이 외에도 훌륭한 이들이 숱하다. 저서로 <<송원화동사합편강목(宋元華東史合編綱目)>> 60권, <<벽계아언(蘗溪雅言)>>12권 <<화서집>> 편저에 《화서선생아언》 《문인어록》8권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70권,<<주자집차(朱子輯箚)>> 20권, 화동역사합편강목(華東歷史合編綱目)》 등 270여권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
이성간(李成幹, ? ~ ?) :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옹(雍)의 아들로 어릴때부터 병법(兵琺)을 좋아하여 기사(騎射)에 뛰어났으며, 충선왕(忠宣王) 및 충숙왕(忠肅王) 때에 중문지후(中門祗侯),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는데 충성(忠誠)으로써 이름이 높았다. 백형(伯兄) 견간(堅幹)은 문장 학행(文章學行)으로, 성간(成幹)은 무예 병법(武藝兵法) 으로 전세(傳世)하니, 세상사람들이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집이라 불렀다.
고려 충렬.충선왕조에 중문지후를거쳐 대장군에 올랐다. 기골이장대하고 총명하여 맏형을따라
뜻을세워 학문하던중 당시시대상이 외환내우하여 위기에 처함을 직시하고 외구를 물리쳐 흥국안민을 위하여 무예병법을 정확히 연구하고 투필집궁하여 북쪽의적과 섬의 오랑캐를 정토하는데 종군하며 병사를아껴 자식처럼대하며 상명을 하늘처럼하며 많은공을세워 충선왕초에 대장군에올라 왕정을 보좌하여 폐정을 바르게하고 백성의고충을해소하기를 도모하려했으나관료들의 반대로 관직을버리고 남으로 낙향해서 지예 삼도봉 대금산 구남천등에서 은거자정하였다. 북천송악을 바라보고 홀로 슬픔의 눈물을 흘리니 세상사람들은 절의군자라 칭했다.
순조 병술년(1826년)에 대금산 중간쯤에 단을만들어 매년10월8일에 제향하였다.
경술년(1970년) 설단사적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전주이은상이 지었다.
경신 1920년에 단산에 묘원당물 세워서 단소를 옮겨 제향을 받들었다. 계유 1993년에 한송정
서북편 와야곡 남쪽기슭에 옮겨 중건하여 매년 10월초4일에 봉향한다.
병자1996년에 당앞에 유허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성군관장 경주 최근덕이 짓고. 글씨는 철학박사 진성 이완제가 서했다. 같은해에 사적비를 세우고 비문은 외후손 문학박사 청송
심제완이 짓고 글씨는 외후손 창원시장 평산 신상철이썻다. 매년 10월4일 제사한다.
벽진이씨 대동보에서..
금릉(金陵)의 대금산(大禁山) 모원당(慕遠堂)에 제향(祭享).
이장길(李長吉, ? ~ ?) :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자하(子賀). 승언(承彦)의 아들이다. 창녕에 거주하며 아버지·형제들과 함께 김굉필(金宏弼)로부터 학문을 배워 독실한 행실로 이름이 높았다. 후에 스승의 가르침을 배반하고 권신들을 추종하였다. 1504년(연산군 10)의성현령으로 있으면서 세금을 과도하게 징수하는 등 악정이 심하여 신극성(愼克性)·남경(南憬)과 함께 삼맹호(三猛虎)로 불렸으며, 의성현민들은 그를 몹시 미워하여 시를 지어 조롱하였다. 1507년(중종 2) 박원종(朴元宗) 등 중종반정 공신들을 해치려 한다는 무고로 인하여 평안북도 벽동군의 관노(官奴)가 되었다. 그뒤 심정(沈貞)의 심복이 되어 1521년에는 평안도병마우후(平安道兵馬虞候)가 되었고, 1631년 심정의 몰락과 함께 몰려나 고향으로 쫓겨났다. 이황(李滉)은 이와 같이 전후가 서로 다르게 처신한 그를 스승인 정자(程子)를 배반한 형서(邢恕)에 비유하였다.
이세근(李世瑾, 1664년 ~ 1735년) : 자는 성진(聖珍)이고, 호는 정헌이다. 지걸(志傑)의 아들이고 윤증의 문인이다. 맹동면 쌍정리 배미 사람이다. 1699년(숙종23) 문과 갑과(甲科)로 급제 사헌부 지평(地平)이 되고, 1699년(숙종25)에 음성현감(陰性縣監)을 지내고, 1709년(숙종35) 병조정랑(兵曹正郞), 이듬해 수찬(修撰)이 되고, 숙종41년 동래부사(東來府使)를 지냈다. 1721년(경종1) 충청도·경상도 관찰사를 지내고, 1725년(영조1) 남양부사 도승지에 오르고 영조5년에 대사헌을 지냈다. 1733년(영조9)에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나라에서는 봉조하(奉朝賀)의 예우(禮遇)를 내리었다. 고향에 돌아와서 갱장록(羹墻錄)을 써서 진상했다. 묘는 경기도 양주에 있고, 저서로 정헌집(靜軒集)이 있다. 맹동면 쌍정리에 후손이 살고 있다.
이후경(1558년 ~ 1630년) : 조선의 학자. 자(字)는 여무(汝懋), 호(號)는 외재(畏齋), 호조참판(戶曺參判) 엄(儼)의 아들.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영남에서 이름난 유학자라 추앙을 받았으며 1601년(선조 34) 학행(學行) 으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1623년(인조 1) 유일(遺逸)로서 찰방(察訪).내첨시직장(內瞻時直長)을 거쳐 1627(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때 강화로 왕을 호종하고 하록원종훈일등(賀綠原從勳一等)에 책록되고 음성현감(陰城縣監)을 지냈다. 병조참의(兵曺參議)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영산(靈山)의 덕봉서원(德峰書院)에 제향.
이세진(李世璡, 1669년 ~ 1749년) :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명서(明瑞). 지걸(志傑)의 아들이다. 1725년(영조 1)군수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지평이 되어, 삼사의 원활한 운영과 붕당의 폐해를 논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삼수부(三水府)에 유배되었다. 1년 뒤에 석방되어 필선·장령·헌납·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729년 산림출신으로 등용된 집의 박필주(朴弼周), 장령 양득중(梁得中)의 비례(非禮)를 논하다가 산림과 유자(儒者)를 경멸하였다 하여 파직, 성문 밖으로 쫓겨났다. 다시 사간을 거쳐 참의에 올랐으나 직사(職事)를 잘못 처리하여 파면되고, 1742년 다시 승지에 발탁되었다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특별히 동지중추부사에 승진하였고, 형조참판·한성좌윤 등을 거쳐748년 지중추부사로 기사(耆社)에 들어갔다. 그뒤 동지의금부사·한성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이흘(李屹, 1557년 ~ 1627년) : 조선의 학자. 자(字)는 산립(山立), 호(號)는 려파, 백부(伯父)인 진사(進士) 희생(喜生)의 문하에서 공부한 후 조식(曺植)의 문하에 들어갔고 1588년(선조 21)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경학(經學)과 도학(道學)이 뛰어나 영남학자(嶺南學者)는 모두 경복(敬服)하였다.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천거로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후진(後進)교양에만 힘써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희정당(喜靜堂)에 채례(菜禮)하고 합천(陜川) 고암서원(古岩書院)에 제향(祭享)
이도일(李道一, 1566년 ~ 1667년) : 자(字)는 관지(貫之), 호(號)는 초우헌, 참판(參判) 엄(儼)의 손자.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 문장덕행(文章德行)이 뛰어나 제현(諸賢)으로부터 추앙을 받았으며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일필성문(日必省問)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유음(遺蔭)으로 부사과(副司果)에 천거(薦擧)되었으나 사양하고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청태종(淸太宗) 용골대(龍骨大)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게 되자, 창의(倡義)하여 그의 창고정곡(倉庫正穀) 400석(石)을 군량미 (軍糧米)로 수송(輸送)하여 보내고 의병(義兵)을 모아 싸움터로 보냈기에 조정(朝廷)에서 칠월현감(漆原縣監)을 제수했지만 역시 사양하였다. 주화파(主和派)와 척화파(斥和派)의 주장이 맞섰으나, 결국 성문(城門)을 열고 항복한다는 비보(悲報)를 듣고 통곡하면서 북벌책(北伐策)을 상소하여 설욕하고자 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어필(御筆)로 동지중추(同知中樞)를 특제(特除)하고 장수(長壽)로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받았다. 만년에 임해진(臨海津) 강상(江上)에 축정(築亭)하여 초우라 편명(扁名)하고 용슬헌(容膝軒)이라고도 한다. 창녕(昌寧) 덕림서당(德林書堂)에 제향(祭享).
이식(李軾, ? ~ ?) : 조선의 무장. 자(字)는 자첨(子瞻), 호(號)는 동파(東坡), 성산군(星山君) 사지(思之)의 증손(曾孫), 천자(天資)가 청분(淸芬)하고 일찍이 무과(武科)에 장원하여 훈련부장(訓鍊副正)에 이르고 1504년 (연산군 10) 갑자(甲子).을축(乙丑) 양연간에 연산군의 학정(虐政)이 극에 달함을 보고 박원종(朴元宗)과 함께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뜻을 받들어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대왕(中宗大王)을 세웠다. 신부인(愼夫人)을 왕비(王妃)로 책봉하고(중종 1) 9월 2일 정국훈(靖國勳) 107인중 자첨(子瞻)은 26차(次)로 성산군(星山君)에 훈봉(勳封)되었다. 1520년 신진사류(新進士類)가 남곤(南袞)등에 의해 화(禍)를 당하자 통정가선대부(通政嘉善大夫)의 품계를 내놓고 물러나 밀양(密陽)에서 우거하다가 낙동강변에 고강정(高江亭)을 세우고 편안함을 즐겼다. 밀양(密陽)의 용안서원(龍安書院)에 제향(祭享).
이주세(李柱世, 1671년 ~ 1721년) : 조선의 학자. 자(字)는 미안, 호는 오일헌(五一軒), 언영(彦英)의 손자. 1699년(숙종 25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승정원 주서로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경학(經學) 및 시전(詩傳)을 진강하였으며 진학사(眞學士) 지교(지교0의 포(褒)로 시전(詩傳) 1질급(帙及) 음중팔선도(飮中八仙圖)를 어사(御賜)받고 병조좌랑(兵曺佐郞)을 거쳐 1720년 상원군수(祥原郡守)를 지냈다.
이약동(李約東, 1416년 ~ 1493년) : 조선의 문신. 자(字)는 춘보(春甫), 호(號)는 노촌(老村), 시호(諡號)는 평정(平靖)으로 현령(縣令) 덕손(德孫)의 아들. 1441년(세종 2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451년(문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사첨시직장(司瞻시直長)을 거쳐 1454년 사헌부감찰(司憲府監찰). 황간현감(黃磵縣監)을 지내고 1458년(세조 4) 지평(持平).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1459년 청도군수(淸道郡守), 1462년 사직하였다가 1464년 선전관(宣傳官), 1465년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1466년 종부시정(宗簿시正).구성부사(龜城府使:평북 서부), 1468년에 병으로 사직(辭職)했다. 1470년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도임(到任)하여 관하이속(官下吏屬)들의 부정(不正)을 단속하고 민폐를 근절, 공물(공물)의 수량을 감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474년(성종 5)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 1477년 대사간(大司諫).첨지중추부사 (僉知中樞府事).천추사(千秋使)로 4월에 명(明)나라에 갔다가 8월에 돌아왔으며, 1478년 경주부윤(慶州府尹), 1482년 호조참판(戶曹參判), 1487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1486년 전라도 관찰사, 1487년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이조참판(吏曹參判), 1489년 개성유수(開城留守), 1490년 특승자헌대부(特陞資憲大夫)가 되고 성종조(成宗朝)에 기로소에 들어갔다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1514년 청백리(淸白吏)에 선발되었다. 금산(金山)의 경염서원과 제주(濟州)의 영혜사(永惠祠)에 제향(祭享).
이맹전(李孟專, 1392년 ~ 1480년) : 조선 초기 문신,학자. 자는 백순(伯純), 호는 경은(耕隱). 병조판서 이심지(李審之)의 아들로1427년(세종9)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거쳐 36년에는 정언(正言)이 되고, 그 뒤 외직을자처하여 소격서령,거창현감 등을 지냈다. 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란(癸酉靖難)을 이르켜 단종을 몰아내고 정권을 탈취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거짓으로 눈이 어둡고 귀가 멀었다는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선산(善山)으로 내려갔다. 평생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던 김숙자(金淑滋)등과 학문을 교유하며 그 뒤 30여 년 동안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1781년(정조 5) 서명선(徐命善)의 건의에 의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선산의 월암서원에 김주(金澍),하위지(河緯地)와 함께 제향되고 함안(咸安)의 서산서원에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조려(趙旅), 성담수(成聃壽)와 함께 생육신(生六臣)으로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간(貞簡).
이언(李彦, ? ~ ?) : 호(號)는 소심헌(小心軒), 시호(諡號)는 충독(忠篤). 봉상대부(奉尙大夫).군기소윤(軍器少尹).검교내시부사(檢校內侍府事)를 역임하고, 이태조(李太祖)를 많은 공(功)을 세워 개국원록 원종공신(開國原錄 原從功臣)에 봉해졌으며 강원.전라감사(江原全羅監司)를 지냈다. 후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이세환(李世煥, 1664년 ~ 1752년) : 조선의 학자. 자(字)는 계장(季章), 호는 과재(果齋).율헌(栗軒), 시호는 효헌(孝獻), 서윤(書尹) 지웅(志雄)의 아들. 박세채(朴世采).윤증(尹拯)의 문인으로 1721년(경종 1) 학행으로 천거받아 연잉군의 사부(師傅)가 되고, 영조(英祖)가 왕위에 오른 후 감반지구교(甘盤之舊交)로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1752년(영조 28)에 효헌(孝獻)으로 증시(贈諡)되었다.
이언영(李彦英, 1568년 ~ 1639년) : 조선조 인조때의 명신으로 자(字)는 군현(君顯),호 (號)는 완석정(浣石亭)으로 의리가 아니면 한올의 털이라도 취하지 않았던 절의지사(節義志士)로서 1568년 2월 18일 축시(丑時)에 경북 칠곡군 왜관읍 석전동에서 태어났다. 공(公)은 벽진장군(碧珍將軍) 이총언의 21세손(世孫)으로 고조(高祖) 유강(惟 康: 通仕郞), 증조(曾祖) 인손(麟孫: 成均進士), 조부(祖父) 운(運: 顯陵參奉), 그리고 좌랑(佐郞) 등림 (鄧林)의 아들로 출생 하였다. 공(公)의 가계는 고려시대부터 중앙정계에 진출한 명문가이다. 공(公)의 10대조 산화(山花) 이견간(李堅幹)선생은 고려초의 충열 충선 충숙 3대를 거친 명신으로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시와 문장으로 원(元)의 황제를 감복시킨 기록등이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또 공(公)의 아버지 공암(孔巖) 이등림(李鄧林)선생도 대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 인동부사등을 역 임한 청백리로 이름이 높을 뿐 아니라 효성이 지극하여 만인의 사표(師表)가 된 분이다. 청렴결백한 몸가짐으로 선정을 배푼 공암공(孔巖公)의 덕을 글로 새긴 괘혜암(掛鞋巖)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괘혜암은 지방문화제 제184호로 지정되어 1980년에 구미시 인의동 374-5 삼거리로 이전하여 현재 시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청백공무원의 표상이 되고 있다. 이언영(李彦英)公이 나이 20세가 되어 보다 참된학문을 배우기 위하여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을 찾아 갔는데 한강(寒岡)은「요사이 젊은 사람중에서 마음갖임이 확연하고 자질이 굳건한 사람이 흔치 않은데 이제 그대를 보니 이와 같으니 후일 크게 성공 하리라」했다. 한편 이언영(李彦英)公을 맞이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선생은「이 사람은 가정교육을 참으로 잘 받았기 때문에 뒷날 집안을 빛낼 재목이다」라고 평했다. 이러한 예들은 공(公)의 가통(家統)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대에 걸쳐 학문을 숭상하고 사대부가 제일중요시 여기는 충효(忠孝)와 청렴(淸廉) 결백(潔白)의 사상을 강조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좋은 토양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공(公)은 당대의 으뜸가는 석학(碩學)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 양(兩)선생을 동시에 사사했고 여기에 공(公)의 총명마져 가미되어 그 역시 훌륭한 학자가 되어 후진의 사표가 되었다. 1575년(선조 8년) 공(公)의 나이 8살 때 교수(敎授)직으로 있는 아버지 공암공(孔巖公)를 따라 전라도 남원(南原)향교를 방문한즉이 있었다. 이때 공암공이 석전제를 드리기 위하여 여러 헌관과 같이 있는 자리에서 선비들에게 인사를시키려고 공(公)을 명륜당으로 불렀다. 그 때 한 헌관이 공(公)에게 장난삼아 골려줄 생각에서 모(母) 자(字)운을 붙여 글을 지어 보라고 했는데 그는 서슴지 않고 붓을 들어「望母我身 我望母:어머니가 고향에서 나를 애타게 생각하는 것처럼 나 또한 어머니를 간절히 생각한다」라는 글을지으니 주위 사람들이 모두놀랐다. 유년기에 집자성구(集字成句)가 가능했던 공(公)은 소년시절에는 서사원(徐思遠)의 훈도를 받았고 20세가 갓넘자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 정식 입문했다. 그는 정구(鄭逑)로부터 심성론과 절의학을, 장현광(張顯光)으로부터 심오한 우주철학을 배웠다. 1591년(선조24년) 23세때 생원(生員)이 되어 성균관(成均館)에서 공부하던 공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바로 귀향해서 와병중인 모부인(성씨)를 지성으로 시병간호하다가 1593년 봄에 농토를 팔아 전마(戰馬)40필(匹)을 마련하여 처 6촌이기도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공이 의령에서 창의(倡儀)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가서 의병활동을 활달하게 전개 하였다. 그곳에서 공은 영남우도에서 맹열한 의병활동을 전개한 오운(吳雲), 조종도(趙宗道), 박성(朴惺), 성안의(成安義)등 제공과 함께 토적(討賊)을 의논하고 많은 전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1601년(선조34)에 효렴(孝廉)의 천(薦)으로 순능참봉(順陵參奉)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하고 1603년(선조36) 10월 1일 36세의 나이로 임란(壬亂) 때문에 10년만에 처음 실시되는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가문과 고장을 크게 빛나게 하였다. 이때 판서직의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자네 급제가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하자 그는「장원하느라 늦었습니다」로 응수하여 좌중을 한바탕 웃겼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승언(李承彦, ? ~ ?) : 자(字)는 사아(士雅), 호는 동원(東園), 참판(參判) 신지(愼之)의 손(孫). 김굉필, 김종직의 문(門)에 수학하여, 1472년(성종 3)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유일로서 헌릉참봉.한성참군등을 역임한 후 창산(昌山)에 퇴귀(退歸)하여 낙동강사에서 시주(詩酒)와 금기로써 자오(自娛)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관의금부사에 추증, 창녕의 연암서원에 제향(祭享)
이여익(李汝翊, 1591년 ~ 1650년) : 자(字)는 비경(斐卿), 호(號)는 수봉(秀奉), 참봉(參奉) 응원(應元)의 아들로 성부용당(成芙蓉堂).장여헌(張旅軒)의 양문(兩門)에서 수학하여 1626년(인조 4) 생원.진사(生員進士) 양시(兩試)에 뽑히고, 유릉참봉(裕陵參奉)을 거쳐 1631년(인조 9) 문과에 급제하였다.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 양산군수. 나주목사. 정언(正言). 장령(掌令). 보덕(輔德)을 역임하고 출전오읍(出典五邑)하여 청백(淸白)으로 이름이 났다. 양산(梁山)에는 청덕애민비(淸德愛民碑).나주읍(羅州邑)에는 동비(銅碑)를 건립하고 생사당(生祠堂)에 향사(享祀)한다.
이지웅(李志雄, 1628년 ~ 1701년) : 자(字)는 만부(萬夫), 충강공(忠剛公) 상급(尙伋)의 손자, 연의 아들 1654년(효종 5)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여 1658년(효종 9) 관천 서사(筮仕)로 형조정랑(刑曹正郞)을 거쳐 8군읍의 수령을 지내고,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에 이르러 사직, 학문으로 만년을 보냈다. 아들 효헌공(孝?公) 세환의 귀(貴)로써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
이지걸(李志傑, 1632년 ~ 1702년) : 자(字)는 수부(秀夫), 호는 금호(琴湖), 충강공 상급(尙伋)의 손자, 연의 아들. 1654년(효종 5)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음보(蔭輔)로 1684년(숙종 14)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천수되었으며, 후에 영덕현감(盈德縣監)으로 나갔다가 남형(濫刑)의 죄로 곤양(昆陽)에 유배, 1689년 풀려나와 1701년 아들 세근(世瑾)의 공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또 아들 세근의 분무원종공(奮武原從功)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한시(漢詩)에 능해서 1,500여수를 남겼다.
이시원(李時遠, 1678년 ~ 1761년) : 자(字)는 이성(而聖), 호는 백원당(百源堂). 효행(孝行)이 뛰어나 부상(父喪)을 당하자 시묘(侍墓)에 정성을 다하여 영남에 선행을 수문차(搜問次) 내려온 어사 박문수(朴文秀)에게 알려지고 조정(朝廷)에 수계(首啓)하니 백원당(百源堂) 이란 호(號)를 하사받았으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추증되었다.
이지완(李志完, 1668년 ~ 1755년) : 자(字)는 중전(仲全), 호는 청간당(聽澗堂),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채(埰)의 아들. 학업에 힘써 경사(經史)를 연구하였으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후진교육에 힘썼다. 1772년(경종 2)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목호룡(睦虎龍)의 대옥으로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화를 입어 성천(성천)에서 사사(사사)되자, 달려가 시체를 거두었다가 이로 인해 유적(儒籍)에서 삭제되었다. 1725년(영조 1) 민진원(閔鎭遠)으 추천으로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이 되고, 이어 의금부 도사.감찰(監察)을 역임,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화순현감(和順縣監)으로 수령이 도망간 영.호남(嶺湖南) 지방의 4읍을 관장하여 독전을 했고, 난이 평정되자 사임하고 유학(儒學)의 진흥에 힘썼으며 수승(壽陞)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이우면(李愚冕, 1850년 ~ 1937년) : 자(字)는 성원(聖源). 호는 유석(維石). 참판 용지(龍知)의 아들. 1881년(고종 1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호조.병조.예조의 참판(參判) .한성좌우윤(漢城左右尹)을 역임. 1869년(건양 1)에 특진관(特進官).비서원승(秘書院承)을 지내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오적신(五賊臣)으 처형을 상소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후 봉상사제조(奉尙司提調)를 거쳐 회계원경(會計院卿).홍릉제조(洪陵提調)를 지내고 1902년(광무 6)에 장례원경(掌令院卿) 및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를 역임하였다.
이학로(李學魯, 1867년 ~ 1933년) : 한말의 의병장. 자는 성숙(性叔), 호는 후은(後隱). 경상북도 영천 출신. 정봉(禎鳳)의 아들이다. 1907년 한국군 강제해산 이후 의병봉기가 확대되어갈 때 경상남도 산청에서 의병을 일으켜 박동의(朴東儀)를 의병장으로 하고, 부장(副將)이 되었다. 1908년 8월 독립하여 의병대장이 되어 의병장 허위(許蔿)의 명령을 받고 서울에서 온 서병희(徐炳熙)와 의병 18명을 거느리고 산청군 두량골〔斗量谷〕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그뒤 곳곳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치렀으며, 1909년 1월에는 산청군 덕산에서 서병희와 부하 11명을 거느리고 함안군 산외면 방목동에 있는 일본인 집을 습격하여 이를 소각하였다. 함안지역에서 활동을 계속하였고, 6월에는 30여명을 이끌고 칠원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고, 또 창원·의령·고성·진주 등지에서 일본인 상점을 습격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해 겨울에는 함안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고 지리산으로 들어갔으나 붙잡혀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이용구[2](李容九, 1868년 ~ 1912년) : 대한제국 말기에 일진회 회장을 지내며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찬성 여론을 이끌었다.
이인기(李寅基, 1907년 ~ 1987년) : 호는 碧溪이다, 堅幹의 후손이고 성주군 초전면 월곡리 홈실 출생. 조부 勉卨 德厚에게 한학을 배우고 대구고보를 거처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제국대학교 교육과를 졸업하였다. 55년간 교육계에 헌신하였고 경북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초대학장, 연세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 대학원장 등을 거쳐 숙명여자대학 총장과 영남대학 총장을 역임하였다. 1972년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하였다.
▣ 科擧及第者(朝鮮時代)
李彦英(이언영) (1568 戊辰生) : 文科宣祖36年(1603) 式年試 甲科 壯元及第
李挺周(이정주) (1673 癸丑生) : 文科 肅宗34年(1708) 式年試 甲科 壯元及第
李鳴謙(이명겸) (1673 癸丑生) : 文科 世宗5年(1423) 式年試 丙科
李約東(이약동) (1416 丙申生) : 文科 文宗1年(1451) 增廣 丁科
李世瑃(이세춘) (1681 辛酉生) : 文科 景宗3年(1723) 增廣 丙科
李克生(이극생) (1735 乙卯生) : 文科 英祖41年(1765) 式年試 丙科
李愚冕(이우면) (1850 庚戌生) : 文科 高宗18年(1881) 별시 丙科
李坰(이경) (1580 庚辰生) : 文科 仁祖1年(1623) 開試 丙科
李挺郁(이정욱) (1682 壬戌生) : 文科 英祖1年(1725) 增廣試 丙科
李正華(이정화) (1666 丙午生) : 文科 肅宗34年(1708) 式年試 丙科
等 모두 60名의 科擧及第者가 있다.
(文科 42名, 司馬試 18名)
9 碧珍李氏 有形文化財 現況
歷史와 傳統을 가진 우리 碧珍李氏는 先祖님의 훌륭하신 유적과 얼과 정신을 기르기위한 수많은 文化遺産을 가지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국가기관이 그 보존가치를 인정하여 지정해 놓은 文化財는 다음과 같다.
1. 이항로 선생생가 (李恒老先生生家)
2. 완정고택 [ 浣亭古宅 ]
3. 외재집부익암집책판 [畏薺集附益庵集冊板]
4. 충숙이공영정 [忠肅李公影幀]
5. 이상길초상 (李尙吉肖像)
6. 충숙이공신도비 [忠肅李公神道碑]
7. 경은이맹전유허비 및 묘비[耕隱李孟專遺墟碑-墓碑]
8. 괘혜암 (掛鞋巖)
9. 용계서원 [ 龍溪書院 ]
10. 쌍충사적비 [雙忠事蹟碑]
11. 충강공이상급신도비[忠剛公李尙伋神道碑]
12. 창녕 부곡면 이씨고가 [ 昌寧釜谷面李氏古家 ]
13. 소학당 [ 小學堂 ]
14. 금호재[琴湖齋]
15. 창녕대동리금헌묘석상[昌寧大同里琴軒墓石像]
16. 생육신이경은선생제단[生六臣李耕隱先生祭壇]
17. 생육신이경은선생부조묘[生六臣李耕隱先生不조廟]
18. 이성간 벽진이공설단사적비 (碧珍李公設壇事蹟碑)
19. 평정공이약동신도비 (平靖公李約東神道碑)
20. 이지걸(志傑) 금호공(琴湖公) 신도비(神道碑)
21. 이장곤교지(李長坤敎旨)
22. 충렬사(忠烈祠)
23. 김천 양천동 청백리 노촌 이약동선생 신도비
24. 김천 양천동 하로서원
역사와 전통을 가진 우리 벽진이씨는 선조님의 훌륭하신 유적과 얼과 정신을 기르기위한 많은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 국가기관이 그 보존 가치를 인정하여 문화재로 지정된 현황을 정리한다.
상기내용은 본인이 소장한 정보입니다.
추가하실분은 연락주시면 소개토록 하겠습니다.
10 시조공 벽진장군 이총언 사실기와 그 종당인 경수당기의 찬술에 대한 고찰.
儒碧 이선숙 승지공 34세
전 부산 북부교육청 교육장.교장
儒珍 이선동
서울 화수회 부회장/벽산회장.
승지공종회장. 박사과정수료
목차
1.시조공 이총언 사실기와 경수당기
2.벽진장군 사실기와 경수당기 찬술 배경
3.화서 이항로선생과 일하정 이학준공의 관계
본 논고에서는 벽리종인 후손 으로서 시조공의 얼과 정신이 깃들어 있는 벽진장군 이총언 사실기와 그 종당인 경수당기가 기술된 배경에 대해서 고찰하고, 두분의 가문관계에 대해서 검토하고자 한다.
이총언 사실기와 경수당기의 찬술 년도를 살펴보면,
1864년에 경수당기가 먼저 찬술되고, 1년뒤인 1865년도에 이총언 사실기가 찬술되어 1년의 기간내에 벽진이씨 시조공에 대한 사실기와 그 종당인 경수당기가 찬술되어 후손에게 전해져 오고있다.
벽진이씨 시조공 고려 개국공신 벽진장군 이총언께서는 신라말기 858년에 태어나서, 고려 초기인 938년 별세를 해서 향년 81세수를 누리셨다.금년이 시조기로 1167년이 되는 해로서 오랜 세월를 거쳐오는 동안에 그 후손들이 시조공및 선조님의 벽리 얼과 정신을 잘 받들어 오고 있다.벽진장군 이총언에 대한 사실기록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및 동국여지승람 등에 상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어, 더이상 언급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이 된다.
공의 후손으로서는 세월이 더해가면서 더욱 번성해서 우리나라의 대성이 되고, 고려조와 조선조에 명현과 거공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를테면, 대제학 견간, 문정공 극송, 도원수 희경, 전서 존인, 정간공 맹전, 평정공 약동, 판서 승원, 성산군 식, 대사성 철균, 좌찬성 승언, 정도공 장곤, 승지 언영, 참의 석경, 세마 후경, 노파 흘, 충숙공 상길, 충강공 상급, 감사 상일, 현령 세옥, 효헌공 세환, 봉조하 세근등이, 혹은 문장이나 학행으로 드러났고, 혹은 청백이나 절의 또는 사업으로, 명망이 당시에 나타나서 성문이 후세까지 널리 전해지고, 그밖에도 명현과 석학이 또한 많이 배출되었다고, 1865년 화서 이항로선생이 벽진장군 이총언 사실기에 기록되어 있고. 근대에서도 사회의 저명 인사가 많이 배출되어 덕망과 명망있는 대성의 가문으로 이어오고 있다.
다음은 경수당기에 대한 내용이다. 벽진장군의 옛 봉토였던,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에, 1826년 지금의 자리에 작은 집을지어 시조공 단소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준비와 숙소용으로 사용했다.
재사가 소박하여, 감 한채와 당 한채가 있는데, 서감은 두 칸 장방으로 운곡의 곁 이천가에 우뚝이 서 있는데도, 한 자의 편액도 없으니, 동감은 화수헌 이라 현판을 달고, 서감은 경수당 이라 액자를 달고, 당 가까이에는 단소 두자를 게시하고, 북쪽에는 "벽진이씨 보청”이라, 크게 써 붙였다.
그후에 1864년 고종 원년인 갑자에 본당에 보소를 설치하고, 다음해 甲子譜 17권의 족보를 완간하고, 그 여력으로 시조공의 유허비와 표갈을 세워 경수당이 벽진이씨의 성지임을 대내외에 표방 하였다. 이에 후손 일하정 이학준공께서 족보 편찬일로 오래동안 경수당에 머물면서 시조공및 선조님의 얼과 정신을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기서 경종수족의 마음으로 경수당기를 찬술하였다.
이후로부터 200여년 동안 경수당을 가꾸고 발전을 시켜서, 현재의 번듯한 시조공 종당으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경수당은 1당, 1각, 2사, 1청, 2재, 2문의 건조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명칭은 유허비각, 비현사, 세덕사, 전사청, 양정재, 근성재, 숙정문, 숭상문 이다.
유허비각은 좌측에 유허비를, 우측에 사마구가 안치되어 있는 비각이며, 진입로 양측에는 석등, 장군석, 사자석등을 각 쌍으로 마주보게 배치했다.
비현사는 으뜸을 나타내며, 시조공 위패를 봉안하는 사당이고, 세덕사는 대대로 쌓은 아름다운 덕이란 말로, 2세에서 10세까지의 선조님 위패를 봉안한 곳이며, 전사청은 향사를 위해 준비한 제수를 봉하는 곳이고, 숙정문은 사당권역에 출입하는 문이며, 양정재는 동재로 제관이 머무는 장소이고, 근성재는 서재로 대종회 회의장이며, 숭상문은 경수당 정문이다. 이들 건조물 전체를 경수당이라 한다,
매년 음력 10월 3일 제향를 지내면서, 시조공의 얼과 정신을 기리고, 종중의 구심점으로 삼아 오고있다.
벽진장군 이총언 사실기와 경수당기를 기술한 당시의 두분 공에 대한 상황을 살펴보면,
먼저 기술된 경수당기는 1864년에 평정공계 승지공 후손 29대 일하정 이학준공이 연세 66세때에 벽진이씨 시조공 종당인 경수당기를 기술하고, 그후 7년뒤인 1870년에 경남도 거창군 가조면 동례촌에서 별세했다.
벽진장군 이총언 사실기는 1865년에 평정공계 직장공 후손 27대 화서 이항로선생이 연세 73세때에, 인생의 마지막 여정에서 경종수족의 마음으로 기술하고, 그 마음을 고이 간직 한채로 3년뒤인 1868년에 경기도 양평군 서정면 통정골에서 별세했다.
두분 공께서는 일생의 모든 삶이 마무리되어 가는 가장 원숙한 시기에 벽리의 얼과 정신이 깃들어 있고, 또한 경종 수족의 마음을 담아서 표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벽진장군 이총언 사실기를 기술한 화서 이항로선생은 당대에 명문대가의 성리 학자요, 후학으로 많은 독립 운동가를 배출하는등, 국가에 많은 공헌을 함으로서 역사적으로 훌륭한 명성을 받아오고 있다,
화서 이항로선생은 1792년 출생해서 1868년에 사망했으며, 조선 후기 문신이며, 학자로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출생이며.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 초명은 광로(光老).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3세때 천자문을 떼고, 6세에 십팔사략을 배웠다. 1808년 한성초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에 부정이 있음을 알고 이를 단념 하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만 몰두하였다. 1840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휘경원참봉(揮慶園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864년 조두순(趙斗淳)이 천거하여 장원서별제, 전라도사, 장령 등에 제수되었으나 건강을 이유로 사절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동부승지가 되어 주전론을 적극 주장 하였고, 이어 공조참판에 올라 경연관 으로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경복궁 중건 및 과중한 조세정책에 반대하여 배척을 받았다.
이진상(李震相), 기정진(奇正鎭)과 함께 주리철학(主理哲學)을 재건한 삼대가 이시다.
화서 이항로선생의 사상(思想)은 이기론(理氣論)에서는 주리론(主理論)을, 우주론(宇宙論)에 있어서는 이기합일설(理氣合一說)에 반대하고,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입장에 섰다. 즉 理와 氣를 구별하고 차등적으로 인식하여 理가 主가 되고, 氣가 役이 되어야 편안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가장 저명한 성리학자요, 한국 역사상 보기드문 민족교육자 (民族敎育者)로서 평소 애군여부(愛君如父). 우국여가(憂國如家)를 문도(門徒)들에게 역설, 춘추대의 (春秋大義)를 주장하고 척사위정(斥邪衛正)을 내세워 민족 주체의식을 고취시켜 한말창의(韓末倡義) 호국운동(護國運動)의 주역들을 대거 배출시켰다. 최익현. 김평묵(金平默). 양헌수(梁憲洙). 유중교(柳重敎). 박문일(朴文日). 유중악(柳重岳). 박문오(朴文五). 이근원(李根元). 유홍석(柳弘錫) 등이 그의 가르침을 받은 인물들로서 이외에도 훌륭한 후학을 많이 배출했다.
저서로는 송원화동사합편강목(宋元華東史合編綱目) 60권, 벽계아언(蘗溪雅言)12권, 화서집 편저에 화서선생아언 문인어록 8권,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70권, 주자집차(朱子輯箚)20권, 화동역사합편강목(華東歷史合編綱目) 등 270여권이 있다.
다음은 경수당기를 찬술한 일하정 이학준공에 대한 내용이다.
경수당기를 기술한 일하정 이학준공은 1798년에 경남도 거창군 가조면 동례촌에서 태어나 1870년 별세해서 향년72세 수를했다.
증조부이신 26대 유산 이정매 학자의 얼과 정신을 이어받아서, 평생을 초야에 묻혀서 학문을 하고 지낸 조선후기 학자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민하여 말을 하면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이 많았다. 자라서는 금곡 송선생의 중용강론을 들었는데, 금곡이 여러번 칭찬하여 말씀하기를 내가 이 모에게 처음으로 중용의 심오한 뜻을 들었다 하고, 또 홍매산과 이화서 제현을 좇아 교유하였는데, 다들 장려하고 칭예하여 허교하였다.
어진 경재 공경사대부들과 사귀는 인연이 되어, 선현과 조선의 미적을 강론하고, 포장함으로 모든 공들이 몸을 낮 추어 굽히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살고있는 고을에 용호원이 있으니, 동계 정온선생을 제사하는 곳으로서, 공이 일찍부터 힘을 다하여 관리경영하고, 그 院에 主講이 되어, 엄숙한 규약으로 여러 학생을 창도하고, 인솔하여 유풍을 진흥케 하니, 향중이 공을 의뢰하였다. 항상 고상한 풍채를 가져 연연하여 머뭇거리고, 아첨하는 태도가 없으므로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그때 청고를 지키고 자처하는 몇 분의 인사도, 반드시 공으로 수반을 삼았다. 일찍이 경학과 유행으로 향천과 도천, 그리고 수의어사의 천거가 여러번 있었으되, 마침내 처사로 돌아가셨으니, 공의는 애석해 하지마는 공의 심사는 어찌 손상함이 있었으리오. 화산 세칭유종 권용현이 지은 묘 갈명에서.
공이 여덟살 때 어른들이 조선으로 제목하여 시를 지으라 명령하니, 문득 지어 말하기를 일월의 밝은 빛이여 아침마다 거듭되도다 하니 좌중이 다 경탄하였다。이로써 공의 재지가 뛰어났음을 볼 수 있을 것이오. 일찍이 학덕이 높은 선생의 문하에 경례를 갖추고, 명현과 공명의 반열에 종유 하였으니, 용전 송내희 제주께서 추증하 여 허교하시고 말하기를 독서 한지 四十년만에 들어보지 못한 중용의 심오한 뜻을, 처사 이모는 의문나고 어려운 것을 해부하여 풀어주니 진실로 경학의 유사로다. 사람들이 묻지 않은 바를 물었다 하고 홍매산 직필은이모는 단아한 선비로 더욱이 선현을 포미하는데 부지런 하다 고 말씀하셨으며, 종중의 어른이신 화서 항로께서 일하정기문을 지어 말씀하시기를 유행은 도에 근접하고, 곤궁을 겪어도 안연히 처신함이 옛날의 현 인들도 이에 지나치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본 고을 부사인 매곡 송계수공도 말씀하기를 이모의 말은 아름답기가 문장고, 시율같아 시로 꾸민 것이 아니로되 자연히 우러나는 음성이라 일렀더라. 관부에서 천거한 요지는 명문세족으로 유행이 있고, 타고난 성이 효우하다 고 하였고, 도에서 천거한 요지는 경학에 침잠하여 주옥이 못물에 잠겨있는 것 같다 고 하였으며, 비단옷 입은 암행어사도 임하 자연에서 독서하고 안빈낙도하는 유사라는 요지로 공을 천거하였었다.
공은 평생을 초야에 묻혀서청빈낙도 하면서, 일생을 학문을하면서 지낸 조선후기 학자로서,
일하정문집이 4권 전하고있다,
권1은 詩 159수가 수록되어있고,
권2에는 書 37편과 問目이, 권3에는 序 7편, 기 11편, 상량문 2편, 제문 6편이 기록되어 있고,
권4에는 묘지 7편, 묘갈명 3편, 행장 4편, 사적2편, 부록으로 기· 만사· 행장· 묘갈명· 차운시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에는 홍석주· 홍재철· 이항로 등에게 보낸 증여시, 김경선· 김수근등에게 준 송별시, 그리고 시대적 현실이 강하게 투영된 억적성, 탄적상산성황폐난지· 문열읍수령다위민소축등이 있다.
書 중에는 상용전송선생문목은 송내희에게 생부모와 양부모의 喪에 喪期와 服制에 대하여 질문한 내용이다.
상이순상은 이기연에게 보낸 것으로, 그가 살던 고을의 애로사항을 폭넓게 적고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참고자료가 된다. 의사용암진공행장은 임진왜란 때의 의사 진우창에 대한 기록 이다.
경종수족에 관한 글로서는 시조공 종당인 경수당기, 청백리 평정공 노촌 이약동선생의 일대기 요약본인 노촌실기를 편찬하고, 합천입향조 판서공 승원선조님의 재실인 영모재실을 신축건립해서 영모재기를 찬술 현판을 만들어 걸어셨다, 또한 거창입향조 감천공 이건 선조님의 재실에 경수당기를 찬술해서 그 글이 1987년 10월 세자손의 총회를 거쳐서 편찬한 오담재 연혁집과 일하정문집에 전하고있다.
29대 일하정 학준공께서 생전에 사용하던 호패와 직인 (현물 가문에서 보관중)
29대 일하정 이학준공의 일하정문집 과 합천 숭산의 일하정 묘소
(일하정문집은 현손 33세 동강 이창기공이 26대 유산 이정매공의 유산집과함께 1956년에 편찬)
경수당이 있는 성주 벽진은 동례촌 고향에서 합천 가야산을 사이에 두고있어 자주 왕래를 하며, 대동보 족보 편찬등 벽리 종인의 종사에 많이 참여하며, 벽리 종인의 후손으로 평생을 경종수족의 정신으로 살았다.
화서 이항로선생과 일하정 이학준공의 관계에 대해서는, 화서선생은 경기도 양평으로 기호지역 이고, 일하정공은 경남도 거창으로 영남지역으로 천리가 넘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학문적으로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때로는 논쟁을 했던것으로 서신내용에 나타나있다. 한편으로는 청백리 노촌 이약동선생의 같은 후손으로 서로간에 애정어린 내용이 서신왕래를 통하여 깊은 유대관계를 해온 흔적이 이항로선생의 화서집과 이학준공의 일하정집에 여러건의 서신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대표적인 내용을 보연, 1862년에 화서 이항로 선생이 6년 연하의 종인인 일하정공에게 보낸 봉화 일하정주인 이라는 서신과 1865년 3월에 이학준공에게 일하정 이라는 휘호와 일하정기를 기술해준 내용이다.
화서선생 유적 유묵집에 실려있는 일하정 휘호 와 일하정기 및 종씨 일하정주인 서신
1862년 화서선생이 봉화 일하정주인에게 보낸 서신내용이 화서집에 전하고, 서신은 현손 동례촌 동강 이창기가 보관하고있다,
그 주요 내용을 정리해 보면
율곡선생은 “理는 만물에 통하고, 氣는 개체에 국한된다.”는 “理通氣局說”을 주장했었고, 화서선생은 心傳主理論을 주장했다.
여섯 살 연상의 일가 할아버지인 화서 선생과, 예순다섯의 족손이 태극을 논하다 가 의견이 갈리자, 화서 선생께서 일하정주인에게 효성 깊은 그대가 내 말에 동의해야 할 것이야 라고 엄포를 놓고 있는 것같은 내용이 있다.
이런 사항을 종합해 보면 이학준공도 나름대로 학문을 정립되어 있다는 것을 알수있다.
그렇듯이 화서선생도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 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서로의 종인간에 때로는 동조하여 합심하고, 때로는 첨예한 대립을 통해서 각자의 학문을 주장하기도 했다,
서신내용에 "연원에서는" 라는문구는 일하정의 증조부인 26대 이정매공 유산거사(儒山居士)가 스승인 민진원(閔鎭遠)과 더불어 태극도설을 강론 했다.(一何亭主人曾王考儒山居士。與閔丹巖論太極圖云)”는 것을 말한다. 화서집(華西集).
또한 가문의~ 이었다네 는 본문의 당구(堂構)는 가학을 계승한다는 말이다. 유옹은 일하정(一何亭) 이학준(李學峻)의 증조부인 이정매(李挺邁)를 가리키는데, 1701년 출생해서 1767년 사망한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다. 호는 유산거사(儒山居士),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 문하생으로 저서로 유산집(儒山集)2권을 남겼다.
권1은 詩 140수, 부록에 제인창수운32수,
권2는 書 10편, 부록으로 내서첩이라는 제목 아래 서 23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詩는 소박하면서도 청절하며,
때로는 철학적인 의의를 내포하고, 때로는 한가롭고 탈속한 선경을 노래하여, 고상한 취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
유원학동에서는 절경 가운데 미몽의 세계에 도취된 신선의 꿈을 그리고 있으며, 야인행에서는 농업을 천부의 낙으로 삼아 생활하는 순수한 인간성을 묘사하였다.
서 중에는 민진원에게 보낸, 상단암 민상국진원에는 학문연구에 대한 의견을 비롯하여, 정치·시사 등 단편적인 문제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정치란 仁의 道로써 시행 하여야만 민심이 복종하고, 그 결과로 태평의 덕치를 이룰 수 있음을 강조 하였다.
창의격문은 1728년(영조 4년) 이인좌의 난에 의병을 모집하기 위하여 쓴 글이다. 이밖에 향약에 관한 글인 향약보장과 향약절목이 있다.
또한 거창부 여지승람에 영조36년 1760년에 거창부사 박종익이 유생 이정매 등으로 하여금 거창지도를 만들게 했다는 내용이 있다.
1765년에는 촉성루의 삼장사관련, 송암 이로의 증시를 청원을하는 내용으로, 경상도 유생들과함께 경상도 관찰사 순상국에게 상서문을 올리기도했다.
이정매공은 말년에는 동례촌의 박유산 동쪽 끝자락에 유산재실을 지어 노년을 보냈다는 내용이, 개축된 가조입향조 통덕량 이난서공 재실인 영모재기와 거창군지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유산재 현판인 유산정숙 편액이 가문에 전해지고 있다.
1865년에는 화서 이항로선생이 종족인 이학준공에게 일하정 휘호와 일하정기를 직접 지어 주었다.
화서선생은 일하정의 의미를 알고, 그 뜻을 쫓아 학문에 매진하기를 기원하는 애정어린 내용이 담겨져 있으며. 일하정 휘호 끝말에 증조부인 26대 유산 이정매의 종인인 일하정에게 라고 기술함으로, 학자 유산 이정매의 유산집 문헌을 통해서 학문이 높다는것을 알고 있으며, 장차 가문이 학문에 더많은 발전이 있음을 생각하여, 종족인 학준에게 일하정호와 일하정기를 서한다고 기록하고 있어 두가문의 깊은 유대 관계를 짐작할 수있다.
두글의 내용에는 화서선생의 높은 철학이 깃들어있어 두사람의 학문적 깊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화서선생의 친필인 봉하일하정 주인 서신과 일하정의 휘호와 일하정기는 우리가문에 대대로 보관해 왔으나, 2001년에 화서학회에서 화서선생 유집유묵을 발간했는데 이들 내용 게재되어있고, 지금은 서종면 노문리에 화서기념관이 건립되면서 부친인 33세손 동강 이창기공께서 화서기념관에 위탁 전시함으로서 사회의 공공 자료로 활용하도록 했다.
화서기념관에 화서선생과 함께 중앙벽면에 전시되어있는 일하정 휘호와 일하정기(아래왼쪽 2번째)
끝으로 벽진이씨 시조공이신 고려 개국공신 벽진장군 이총언 사실기와 그종당인 경수당기가 찬술된 배경을 알아보고, 찬술자인 화서 이항로선생과 일하정 이학준공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두 가문간에는 학문적으로나 벽리종족 및 평정공의 후손으로서 서로간에 깊은 유대감을 였볼수있다.
특히 화서이항로 선생은 기호지방의 덕망있는 학자요, 독립운동가로서 정부나 학계에서도 많은 지원과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즉 가평군에서는 서종면 노문리에 화서선생 기념관을 건립해서 업적을 기리고, 노산사지에서는 후학들이 주자, 송시열과 함께 매년 시향을 지내고있다.
또한 학계에서는 후학들이 화서학회 재단을 설립해서 매년 화서선생의 정신을 연구하고, 발표회 행사를 함으로 사회적 인식을 함양하고 있다.
이러한 사업들이 정부나 사회 단체 후학들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는데,
훌륭한 선조님을 모시고 있는 우리 벽리 후손으로서도 많은 관심을 갖고, 화서선생의 높은공덕을 기리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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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자료
1벽진장군 이총언 사실기
2경수당기
3 화서선생서신 봉하 일하정주인
4일하정기
1시조공 벽진장군 사실기내용.
고려 삼중대광 개국원훈 벽진장군, 이공의 휘는 총언이니, 곧 우리 이씨의 시조이다. 세계가 아득하고 멀어서, 그 상세한 것은 고증할 수 없으나, 오히려 국사에 나타난 것은, 가히 증험되어 믿을수있다.
삼가 고려사를 살펴 보건데 왕순식부전에 이르기를,벽진장군 이총언이 신라말에 벽진고을을 보전하고 있었는데, 이때 도적의 무리들이 날뛰었으나, 총언이 성을 튼튼히 하여 굳게지키니, 백성들이 그 덕을 입어 평안하였다.
이에 태조가 사람을 보내어, 동심 협력하여 화란을 평정하자고 요청하니, 총언이 글을받들고 매우 기뻐하여, 아들 영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태조를 좇아 정토케 하였다.
그때 영의 나이 18세였는데, 대광 사도귀녀를 처로 삼게하고, 총언을 벽진장군으로 임명하여, 이웃 고을의 정호, 229호를 더 주고, 또 충주, 광주, 제주 현제천의 창곡곡식 2200석과 소금 1785석을 주었으며, 다시 친서를 보내어 금석같은 신표를 보이면서이르되,자손에 이르기까지 이마음 변치 않으리라 고하니, 총언이 이에 감격하여 군정을 단결시키고, 군량을 저축하여 고성으로써, 신라와 후백제가 반드시 쟁취하려는 지역에, 끼어 있어면서도 흘연히 동남의 성원이 되었다.
태조 22년 무술 938년,칠월 임자일에 별세하니, 향년 팔십일세 였다고하였다.
그밖에 가승과 여지승람에 뒤섞여 나온 것이, 대의는 이미 같으나 또한 번갈아 나타난 것도 있으니, 이에 이르기를 고려태조가 삼한을 통합함에 이총언에게 명하여, 벽진 옛 터를 진호케 하고, 이웃 고을 민세로서 식록케 하여, 백자 천손까지 종시일절의 맹서를맺어, 신하의 예로서 대우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이르기를『고려태조가 삼한을 통합 할때에 이총언이 벽진 태수로서, 오직 의연히 항복하지 아니하고, 동남의 명성과 위세로 서로 의지하여 안연하였다.
태조가 도멸코자 하였으나, 총언과는 옛부터 친한사이 임으로 참아치지 아니 하니, 총언도 또한 천명과 인심이 이미 왕씨에게 돌아감을 알고 아들 영으로 하여금, 태조에게 귀의 케하니 태조가 기뻐하여, 총언을 봉해서 벽진장군으로 삼고, 혼인을 맺어 대려의 맹서를 이루었다고 하였다.
아 , 공은 신라말 도탄의 때를만나 고성을 지키고, 백성을 어루만져 덕망과 위의가 진실로 드러났으며, 한나라가 거듭 솔복될 즈음에, 새 임금을 만나 대업을 도와서 풍성한 공훈과 위대한 충열이 태상에 기록되고, 역사에 실렸으니, 어찌 그리 훌륭하였으리오 .
그러나 이미 사업이 밖으로 들어남이 이와 같다면, 반드시 덕행이 안으로 온축됨이 있으련만,도리어 문헌의 증거가 없어 능히 상세한 설명을 못하니, 슬프고 애석하도다.
일찍이 듣건대 군자가 도통을 전하면, 후인들이 가히 이었다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공자가 도학으로써, 천하 만세에 교조 하였으나, 그 근본을 거슬러 보면, 글이 오륜을 가르친데에서 나왔고, 맹자가 백묘 농상으로써 제나라와 양나라의 임금에게 권하였으나, 그 근본을 거슬러보면,직이 백곡을 뿌린 데에서 나온 것이니, 크고 작음과 미미하고 들어남이 비록 같지 않으나, 단서의 출처는 가히 속일수 없는 것이다.
이제 공 후손의 명성과, 덕행의 실상을 좇아 그 근본을 거슬러 찾아보면, 거의 공으로부터 비롯 되였음을 알수있을 것이로다.
공의 후손이 번성해서 우리나라의 대성이 되고, 고려조와 조선조에 명현과 거공이 우뚝하게 나타났다.
이를테면, 대제학 견간, 문정공 극송, 도원수 희경, 전서 존인, 정간공 맹전, 평정공 약동, 판서 승원, 성산군 식, 대사성 철균, 좌찬성 승언, 정도공 장곤, 승지 언영, 참의 석경, 세마 후경, 노파 흘, 충숙공 상길, 충강공 상급, 감사 상일, 현령 세옥, 효헌공 세환, 봉조하 세근등이, 혹은 문장이나 학행으로 드러났고, 혹은 청백이나 절의 또는 사업으로, 명망이 당시에 나타나서 성문이 후세까지 널리 전해졌으며, 그밖에도 명현과 석학이 또한 많이 빛났으니, 어찌 그 근본이 없고서야 그러했겠는가?.
또 가만히 듣건대,산화공의 증손 희길이 원나라에 들어가서 운남에 살았는데, 그후손으로 이성량이 있어, 아들인 제독 여송을 보내어, 우리나라를 구할 때에 본국이라고, 일컬으면서 심력을다해 힘쓴뜻은 대개 의의가 있었다고 이르기도 한다.
벽진은 지금 경상우도 성주목이니, 시조공께서 일어나신 땅으로서 자손들이, 이로 인해서 관향을 삼았다.
치소 서쪽 십오리의 명암방 수촌은 곧 공의 유허이고, 그 좌강 수백보는 곧 공의 묘소였으나, 임진병난 이후로는 그 장소를 정확히 알수가없어서, 일찌기 우암 송문정공의 말씀에 따라, 설단하여 봉사하게 되었다.
고종원년 갑자1864년에 후손들이, 보첩 간행을 위하여 유허에서 모였는데, 세월이 오래되면 민멸될까 크게 두려워해서, 비를 다듬어 비문을 쓰고자 하면서 나에게 의론하거늘, 내가 말하기를, 우리 시조공의 후덕과 풍공은 진실로, 만 자손의 근본이 되고, 토구의 땅과 하구의 집에 이르러서는, 또한 능히 수백천년까지, 보수하게 되었으니, 어찌 성대하지 않으리오?.
그러나 조선의 유덕을 , 소술하는 것은 근본이요, 조선의 구기를, 수호하는 것은 말단이니, 우리 백세지친이 되는 이는 진실로, 그 말단을 소흘히 하는 것도 옳치 아니하거니와, 더욱 그 근본에 힘써야 마땅할 것이다.
이것이 그 영구불변의 도리가 되는 것이니, 조선의 영혼 또한 반드시 오르 내리면서, 나도 후손이 있다 하리라 고 하였다.
내 어리석어나 삼가 순서에 따라 이 사적을 기록하였으니, 당세의 입언군자를 뵈옵고 기리는 글을 청하도록 하여라, 라고 고종 을축년 1865년 9월11일에 화서 이항로가 기술했다.
2. 경수당기의 내용은
가야산 동쪽에 있는 성주는, 산천의 수려함 과 인물을 배출함에 있어, 경주, 진주, 상주,안동과 서로 앞을 다투며, 스스로 큰 고을을 이룬다. 국사와 야사를 상고하건데, 이미 선배 들이 지은 글 속에 이런 사실이 갖추어져 있으니, 다시 군더더기 말이 필요치 않다. 갑자 1864년 봄에 족보일로 인하여 단소에 머물면서, 오랫동안 지세의 아름다움을 두루 돌아보니, 참으로 하늘이 만든 훌륭한 땅으로서, 지금은 명암방 수촌이라 일컫는데, 여기가 우리 시조 벽진부군께서 예전에 살던 곳임을 알리고 있다. 외로운 성에서 성원하신 일은, 신라 말기에 뛰어나 시고, 천호의 봉읍을 받은 일은, 고려 초기에 특출하셨으니, 주나라 서울을 떠나서 양산을 넘은것과 같이 조상이 옮겨 사신 것은, 어느 시대이었 는지는 모르겠지마는, 산화공이 명곡에서 생장하시어 나라를 빛낸 계책으로서, 명망이 천하에 퍼졌으니, 옛 일을 회고하건대, 상전벽해의 감개한 눈물이 흘려내려, 옷깃을 적시는 것도 깨닫지 못하겠다. 우리 시조의 수천 후손들이,누가 그렇지 않겠는가. 다만 1년에 한 차례씩 모시는 제사가, 끊이지 않고 다행히 전해지고 있으나, 남아있는 재사가 오히려 소박하여, 감 한채와 당 한채가 있는데, 서감은 두 칸 장방으로 비록 노나라의 큰 집인 영광전 만은 못하지마는, 운곡의 곁 이천가에 우뚝이 서 있는데도,한자의 편액도 없으니, 아! 슬프도다. 면상을 지나는 사람들은, 반드시 개산봉이라 일컫고, 기산에 오르는 사람은, 허유의 무덤이라고 이르는 사람도 있는데, 두예의 침비는 무슨일이 었으며, 악의 즉 전국시대 연나라 장수의 무덤길을 징험 할 바 없는것 같이, 길가는 나그네 들이 이 지점을 가리켜, “벽진이씨 단소와 재사이다”,라고만 말하는데, 지나지 않을 뿐이다.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운거족종이 도배를 하여, 옛모습 보다는 약간 나아졌으나, 조금 모자라는 것은 명칭이 없는 것이다.
동감은 화수헌이라, 현판을 달고 서감은, 경수당이라 액자를 달고, 당 가까이에는 단소 두자를 게시하고, 북쪽에는 "벽진이씨 보청”이라, 크게 써 붙였으니, 모두 친구 여응규의 서까래 같은, 큰 글씨를 빌린 것이다. 외면으로 보면 불가에 도금한 아름다움 같으나, 그 속이 어떠한 가는 알지 못하겠다. 이에 갑자기 백천의 흐름이, 한 근원에서 비롯되고, 만엽의 가지가 하나의 뿌리에서, 나누어진다는 것이 생각되어, 그 감동으로 7률 한수 와 오언시 한수를 읊었으니, 어찌 5언 7언으로 장성 명문 대가의 솜씨를 얻었다고 하겠는가? 원래 문장을 짓는 일에는 익숙하지 못한데, 진실로 운거족종의, 성의를 저버릴 수 없어서 ,마침내 기문을 짓는바이다 라고, 승지공 일하정 학준공이 경수당에 관해 기술했다.
3.奉和 宗氏一何亭主人
종씨 일하정 주인께 화답합니다.
今年花太晩, 逢子杜門中
貧保心廉白, 衰餘面潤紅
淵源論太極, 堂構襲儒翁
忠孝吾家法, 他時驗局通
玄黓閹茂暮春下幹 華西山人書
올해엔 꽃소식이 매우 늦었는데
두문杜門중에 그대를 만났네.
가난해도 청렴결백한 마음 지켰고
노쇠해도 붉은 얼굴 윤기가 났었지.
연원을 헤아리니 태극을 논했었고
2)가문의 사업은 유옹(儒翁)을 이었다네. 3)충효는 우리 가문의 법도이니
훗날 국통(局通)을 징험하리라.
1862년(임술4년) 삼월(음) 하순 종말宗末 화서산인華西山人5) 쓰다.
이 시는 “거창에 거주하는 일하정一何亭 주인이 남녘의 꽃소식과 함께 시 한
수를 지어 양평으로 보내오자, 화답한 것”이라고 가정하고 풀어보겠습니다.
수련首聯을 보면, 일하정 주인은 늘 이맘때면 꽃소식을 전하며 안부 편지를 올렸던 듯한데, 이 해에는 무슨 이유가 있어서인지 늦게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
니다. 실제로 꽃이 늦게 피었을 수도 있습니다만, 당시의 시대 상황을 살펴보
면 전자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아무튼, 화서선생은 기다림에 지쳤던지 급기야
문을 걸어 닫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대가 왔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대가 보낸 “시詩”가 온 것입니다.
미련尾聯의 국통局通은 철학 용어입니다.
율곡선생은 “리理는 만물에 통通하고
기氣는 개체에 국한局限된다.”는 “이통기국설理通氣局設”을 주장했었고,화서선생은 심전주리론心專主理說을 폈습니다. 여섯 살 연상의 일가 할아버지인 화서 선생과 예순다섯의 족손族孫이 태극太極을 논하다가 의견이 갈리자,
선생께서 일하정一何亭 주인에게 “효성 깊은 그대가 내 말에 동의해야 할 것이야!”라고 엄포를 놓고 있는 것 같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선생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으면 꼼짝없이 불효자가 되고 말 지경입니다. 전술한 당시의 시대 상황을 살펴볼까요?
화서선생은 일찍이 민본주의적 왕도정치를 추구하며 과감한 국정 개혁론을 주장한 바 있는데, 토지의 재분배를 통해 농민층의 몰락을 막고 농민 경제를 안정시키고자 하였습니다.
1862년은 삼정의 문란과 지배계층의 횡포로 농민의 불만이 폭발하여, 음력 2월 단성민란丹城民亂을 시작으로 연말까지 전국적으로 민란이 확대된 해였습니다.
이 시기에 詩가 오갔던 음력 3월 하순은 거창도 예외가 아니어서 난리가 났습니다.
선생께서 주장하셨던 개혁안들이 미리 실행되었더라면 어땠을까요? 안타깝습니다. 선생께서는 대문을 걸어 잠글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일하정께서 선생께 보낸 원운原韵을 볼 수 있었더라면 좀 더 풍성하면서도 재미있는 상상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일하정문집에는 그 시가 실려있겠지요. 선생은 이 시에서, 여섯 살 연하의 족손族孫에게 조차 봉화奉和라 하여 상대는 높이고, 자신은 종말宗末이라며 낮추고 있으니 조선의 범절은 정말 어렵습니다. 종씨宗氏는 애매하여 바꾸지 않고 그냥 두었습니다. 촌수를 따질 수 있는 관계일 때는 일가一家를 쓰고, 불분명할 때는 종씨를 쓴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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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하정주인(一何亭主人) : 생몰년이 1798~1870인 유학자 이학준(李學峻)을 말한다. 본관은 벽진, 자는 덕오(德吾), 호는 일하정(一何亭)이다. 경학(經學)에 밝았으며, 문집 《일하정집(一何亭集)》을 남겼다.
2) 연원~논했었고 : “일하정의 증조부인 유산거사(儒山居士)가 스승인 민진원(閔鎭遠)과 더불어 태극도설을 강론했다.
(一何亭主人曾王考儒山居士。與閔丹巖論太極圖云)”는 것을 말한다.
《화서집(華西集)》
3) 가문의~ 이었다네. : 본문의 당구(堂構)는 가학을 계승한다는 말이다. 유옹은 일하정(一何亭) 이학준(李學峻)의 증조부인 이정매(李挺邁)를 가리키는데, 생몰년은 1701~1767년인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다.
호는 유산거사(儒山居士),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 문하생으로 저서 《유산집(儒山集)》을 남겼다.
4) 1862년(임술) : 원문의 현익엄무(玄黓閹茂)는 고갑자(古甲子)로, ‘현익(玄黓)’은 ‘임(壬)’이고, ‘엄무(閹茂)’는 ‘술(戌)’이니 곧 임술(壬戌)이다.
5) 화서산인(華西山人) : 이항로(李恒老, 1792~1868)를 말한다. 본관은 벽진(碧珍), 자(字)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이다. 초명은 광로(光老),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지금의 경기도 양평인 양근군(楊根郡) 출신으로 아버지는 이회장(李晦章)이고, 어머니는 전의 이씨(全義李氏)이다. 조선 후기의 유학자로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를 형성하며 후진 양성에 매진하여 화서학파를 이루었다.
주요저서로 화서문집, 화동합편강목, 벽계아언, 문인어록등이 있다.
4.일하정기一何亭記
일하一何의 본뜻은 알지 못한다. 이제 문헌文獻에 드러난 것에 따라 그 대강의 뜻을 모아 보면, ‘일一’은 주자朱子의 주일무적主一無適1)이라는 설說이니,
만수萬殊가 일본一本으로 귀결되는 까닭이다. ‘하何’는 공자孔子께서 “‘어찌할까 어찌할까’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나도 어찌할 수가 없다.”2)라고 했던 설說이니, 일본一本이 만수萬殊로 나눠지는 까닭이다. ‘일一’이 없으면 이랬다저랬다
할 뿐3)이지 존덕성尊德性4)이 아니고, ‘하何’가 없으면 스스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할 뿐이지 도문학道問學이5) 아니므로 한 글자라도 빠뜨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오늘에 와서 우리 두 사람의 처지에 따라 말해보더라도 통通한다.
우리 둘은 ‘이理’로 말하면, 같은 평정공平靖公의 후손이니 조상의 입장에서 보면 어찌 그대와 나 사이에 피차의 간격이 있겠는가? ‘기氣’로 말을 하자면, 형제라 하더라도 세대가 내려가서 복服을 입어야 하는 관계가 끝이 나면 은택도 끊겨6)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된다. 군자의 학문은 사욕私欲을 제거하여 공리公理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되면 사해四海도 모두 형제동포이고 인仁이 천하를 덮는다.
하물며 한 할아버지의 손자인 우리 두 사람임에랴.
공자께서 이르기를, “적선지가積善之家면 필유여경必有餘慶이요, 적불선지가積不善之家면 필유여앙必有餘殃이라.”7)고 하셨다. 무릇 성인은 무고無固와 무필無必8)을 덕으로 여겼지만, 오늘날 ‘필必’자는 그 이치가 일월日月처럼 분명해서의심스러운 것이 없으리라. 그런데도 적선積善은 어렵고 적불선積不善은 쉬우니그 까닭은 무엇인가. 선善은 먼지를 치우는 것과 같아서 치우려 해도 치워지지않고, 불선不善은 먼지를 치우지 않는 것과 같아서 쌓으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쌓인다. 이 때문에 그 어렵기가 하늘을 오르는 것과 같고, 그 쉽기는 털을 태우는 것과 같으니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듣기로, 종씨 학준學峻 덕오
德吾씨는 연원淵源을 이어받아 이미 포부抱負가 아름답다는 소문이 있다. 나는
종씨의 집에 반드시 여경餘慶이 있다고 보고, 우선 이로써 분명히 해 둔다. 숭정崇禎 네번째 을축乙丑, (1865년) 재중양再重陽9)에 종말宗末 화서산인華西山人항로恒老는 기記한다.
조선 철학사에서 단연코 우뚝하신 선생께서는,일하정에는,‘오로지 한곳에 집중하여 존덕성尊德性하고, 삼가고 전전긍긍하며 날마다도문학道問學에 힘쓰는 정자’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보셨습니다.
웃갓마을에 사는 傍後孫 鎭式은 삼가 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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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무적(主一無適) : 주자(朱子)는 ‘경재잠(敬齋箴)’에서, “두 개의 일이 있다고 해서마음이 둘이 되면 안 되고, 세 개의 일이 있다고 해서 마음이 셋이 되면 안 된다.”고 하였고. 《논어》에 나오는 ‘경사이신敬事而信’을 풀이하면서 “경敬은 주일무적主一無適을 이른다.
[敬者, 主一無適之謂]”고 하였으니, 주일(主一)은 마음을 하나로 하는 것이고, 무적(無適)은 마음을 다른 곳으로 옮겨 가지 않는 것이다. 결국 다른 곳에 신경을 쓰지 않고 당면한 일에만 오로지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2)어찌할까?~ 없다 : 익숙히 생각하고 자세히 살펴서 대처하라는 말이다. 《논어,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나온다. 공자孔子의 이 말씀을 실학자 위백규魏伯珪는 존재집存齋集에서, ”‘어찌할까’를 거듭 말씀한 것은 눈 깜빡할 사이에도 마음속으로 잊은 적이 없고 감히 나태하지 않다는 뜻이다. 옛 성인이 전전긍긍戰戰兢兢하고, 날마다 부지런히 힘쓸 것을 생각하며,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한 것이 모두 ‘어찌할까, 어찌할까.’라는 의미이다.”라고 풀었다. 즉, “전전긍긍하며 잠시라도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공자인 나도 도와줄 수가 없지만, 그렇게 한 사람은 하나의 이理가 만 가지의 기氣로 분별되어 발현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3)이랬다저랬다 할 뿐 : “그 남자는 확고한 신념이 없어서, 자꾸만 이랬다저랬다 한다.[士也罔極 二三其德]”라고 한 말이 《시경》 위풍(衛風) 맹(氓)에 나온다. ‘二三’은 (사상이나 절개를) 자주 바꾼다.’는 뜻이다.
4)존덕성(尊德性) : 덕성(德性)을 높이는 것으로 본질을 함양하는 공부이다. “군자는 덕성을 높이고 문학을 말미암는 것이니, 광대함을 이루고 정미함을 다 하며, 고명함을 다하고 중용을 말미암는다. 君子尊德性而道問學 致廣大盡精微 極高明而道中庸”는 말이 《중용 27장》에 나온다.
5) 도문학(道問學) : 학문을 통해 이치를 탐구하는 것으로 격물치지의 공부법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도문학은 치지(致知)를 하여 도체(道體)의 은미한 것까지 다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6) 은택이 끊겨 : 본문의 택참(澤斬)은 《맹자(孟子)》 이루장구하(離婁章句下)에 보면, 군자지택(君子之澤)도 오세이참(五世而斬)이요, 소인지택(小人之澤)도 오세이참(五世而斬)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선대(先代)의 일이 후손에게 영향이 미치지 않고 끊기는 것을 말한다.
7)주역〈곤괘(坤卦) 문언(文言)에 나온다.
8)《논어》 자한(子罕)에 “공자는 네 가지를 사절하셨으니, 함부로 억측하지 않았고, 함부로 단언하지 않았으며, 고집을 부리지 않았고, 아집도 부리지 않았다.[子絶四 毋意 毋必 毋固 毋我]”고 하였다.
9) 재중양(再重陽) : 두 번째 9월 9일이니 1865년 윤9월 9일을 말한다.
10) 旃蒙赤奮若(전몽적분약) : 고갑자(古甲子)로 전몽(旃蒙)은 을(乙)에 해당하고 적분약(赤奮若)은 축(丑)에 해당한다. 《이아(爾雅)》 석천(釋天)에, “태세(太歲)가 갑(甲)에 있는 것을 알봉(閼逢)이라 하고, 을(乙)에 있는 것을 전몽(旃蒙)이라 하며, 병(丙)에 있는 것을 유조(柔兆)라 하고, 정(丁)에 있는 것을 강어(强圉)라 하며, 무(戊)에 있는 것을 저옹(著雍)이라 하고, 기(己)에 있는 것을 도유(屠維)라 하며, 경(庚)에 있는 것을 상장(上章)이라 하고, 신(辛)에 있는 것을 중광(重光)이라 하며, 임(壬)에 있는 것을 현익(玄黓)이라 하고, 계(癸)에 있는 것을 소양(昭陽)이라 한다.” 했으며, 《이아(爾雅)》 〈세양(歲陽)〉에 “태세가 인에 있으면 섭제격(攝提格), 묘에 있으면 단알(單閼), 진에 있으면 집서(執徐), 사에 있으면 대황락(大荒落), 오에 있으면 돈장(敦牂), 미에 있으면 협흡(協洽), 신에 있으면 군탄(涒灘), 유에 있으면 작악(作噩), 술에 있으면 엄무(閹茂), 해에 있으면 대연헌(大淵獻), 자에 있으면 곤돈(困敦), 축에 있으면 적분약(赤奮若)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11) 유산儒山 : 일하정의 증조부의 호가 유산거사이다.
가조면 동례촌 남쪽 박유산에서 유래한다..이상
編 輯
碧珍儒林:
碧珍李氏 大宗會 文化委員長
碧珍李氏 宗親會. 編輯長.
서울 花樹會(碧山會長)常任副會長.
平靖公理事.가조承旨公派 宗中 會長
(경남 거창군 가조면 동례리)
碧珍 儒林 34世 李 善 東 (號 儒 珍) 덕명
碩士 / 理學博士 課程修了
첫댓글 가문의 역사를 많이 학습 하셔서 정리해 주셨네요.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