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과 정의로 하느님 백성을 모으시는 성령
예레 23,5-8; 마태 1,18-24; 대림 제3주간 수요일; 2024.12.18.
요즘 같이 성탄절이 임박한 대림시기에는 흔히 “기쁜 성탄절을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인사하는 것이 보통이고, 성탄절 당일이 되면 “성탄을 축하합니다.” 하는 인사말을 나누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이 인사말들이 의례적인 빈말로 그치지 않으려면,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 초점은 청빈의 삶을 살면서 더 가난한 이들에게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비록 그 규모가 아무리 보잘것없이 작고, 그 정도가 미미하다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그 희미한 빛을 장차 역사의 밝은 빛으로 키우십니다.
오늘 독서인 예레미야 예언서는 남유다 왕국이 멸망 당하기 전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라는 두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끝내 바빌로니아에게 점령당하고, 두 세대 정도의 기간 동안 바빌론에서 종살이를 했으며, 그 후에 다시 돌아와서 이스라엘을 재건해야 했던 짧지 않은 시기에 그와 그 제자들이 받은 하느님의 말씀을 후대에 남긴 기록입니다. 그래서 이미 시온 계약에도 불구하고 왕조가 멸망 당한 다윗의 명예를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고 예언하기도 하고, 당시에 이미 용도 폐기되어 버린 시나이 계약을 상기시키는 맹세, 즉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 오신, 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맹세한다.” 하지 않고, 그 대신 “이스라엘 집안의 후손들을 북쪽 땅에서, 그리고 당신께서 쫓아 보내셨던 모든 나라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맹세한다.”(예레 23-7-8)고 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미 오늘 독서인 예레미야 예언서 23장이 쓰여지던 시대의 공동선 요청은 자기 고향 땅에 돌아와서 자리잡고 사는 것, 그러니까 귀환과 정착 그리고 공동체의 재건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적 요청은 곧 이어 닥친 강대국들의 침입과 지배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와 그 사후에도 적어도 이스라엘의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범주 안에서는 실현되지 못했고,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새롭게 하느님의 백성으로 모인 교회 안에서 실현되어 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옛 이스라엘 백성을 이어 받아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소명을 계승해야 할 교회가 명심해야 할 예레미야의 예언적 메시지는 공정과 정의입니다. 공정함은 백성 가운데에서 이룩해야 할 기본 덕목이고 정의는 백성 중에서도 특히 약자들에게 베풀어야 하는 필수 덕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공정과 정의로 당신의 빛을 역사 안에서 드러내야 할 새로운 하느님 백성을 시작하시기 위해 직접 역사에 개입하셨습니다. 그 내용의 일단이 오늘 복음입니다. 성령께서는 먼저 마리아에게 내려오셨고 이를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알리셨습니다. 그 결과로 마리아는 혼전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이 사실을 도무지 알 길 없던 요셉은 형언할 수 없는 인간적 고뇌와 배신감으로 괴로워하다가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실 구세주께서 다윗의 후손이 되지 못할 것이고, 또 구약성경의 야곱과 여러 예언자를 통해 예고하신 하느님의 섭리가 어긋날 위험이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급히 두 번째로 개입하신 일이 오늘 복음에 소개되고 있는 바, 가브리엘 천사의 요셉 방문입니다.
이렇게 독서와 복음 말씀의 뜻을 헤아렸으니 대림과 자선의 지향 관점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제 강론에서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명제가 파스카의 과업을 명하는 명제로서 지니고 있는 성서적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그 선택의 결과 형성된 하느님 백성이 이룩해야 할 질서가 공정과 정의라는 덕목임을 청빈의 가치에 비추어 살펴보겠습니다. 청빈은 마음의 가난함으로서 생존을 위협하는 빈곤에서는 벗어나 있고 생활의 여유로움을 구가할 수 있는 정신적 여유도 누리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질의 풍요로움을 탐하는 탐욕은 경계하는 자세입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아직도 빈곤의 나락에 떨어져 있는 더 가난한 이들을 향한 나눔을 더 중요시하는 자세라고 해야 하지요. 나눔의 실질적인 기준이 공정함과 정의로움이 됩니다. 공동선의 혜택이 고르게 돌아가야 하는 것이 공정이고, 여러 가지 사정으로 생존에 필수적인 것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더 넉넉하게 나눔이 이루어져야 정의가 구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실질적으로 공정해질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메시아적 백성으로 모으신 교회 안에서 공유해야 하는 가치들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기반이 되어야 합니다. 믿어야 하는 이유가 하느님의 자비에 있기 때문이고, 나누어야 하는 이유 또한 하느님의 뜻에 있기 때문입니다. 공정과 정의를 하느님께서 바라시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의 문화가 꽃필 수 있습니다. 빈곤이나, 억압이나 착취, 불평등 같은 사회악에서 벗어나 공동선이 주는 풍요로운 은총을 한껏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공동체들이 살아나고, 섬김의 질서가 자리잡으며, 사람들의 양심이 신앙으로 조명되어 학문이나 문화 예술, 언론이나 정치 경제 등이 건전하고 인간적으로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함은 물론 향기롭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각 개인들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청빈과 공정과 정의 그리고 믿음이 보편화된 이런 상태에서는 자신들의 행복만을 추구하지는 않아야 합니다.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는, 그래서 빈곤의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사도들을 파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만난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정성으로 이 반열에 들 수 있었고, 회개한 자캐오도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눔을 거절한 부자 청년 또는 권력가는 스스로 이 길을 포기했습니다. 메시아적 백성으로서 오늘날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이 청빈의 공동체가 누릴 수 있는 행복에 대해서 마태오는 진복팔단으로 증언한 바 있습니다. 이 행복의 매력이 선교의 원동력입니다.
그리하여 이 청빈의 공동체를 이끄시는 성령께서는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는 가난한 이들에게 사도들을 파견하십니다. 이 파견으로 매력에 바탕한 선교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선교 현장으로 파견된 사도들을 통해서 인적 나눔에 이어 물적 나눔이 가능해집니다. 그렇게 될 때라야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을 찾아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즉 임마누엘이심을 느끼고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전해야 할 성탄의 복음이요 강생의 기쁜 소식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청빈의 삶이야말로 우리가 지금부터 살아야 할 고향, 즉 하느님 나라입니다. 성령께서 공정과 정의로 우리를 본 고향으로 불러 모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