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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 바로잡기 가락종친 대책위원회(가칭)
결성 제안서
‘김수로왕·허왕후·장유화상’을 본래의 자리로 모시는 일 가락종친이 할 일이며 그것은 우리 역사를 반듯하게 세우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의 역사가 반듯하게 서야 이 나라의 미래가 더 밝아질 것이다.
차례
가야사 바로잡기 가락종친 대책위 꾸려야 하는 이유 1
가야사 바로잡기 가락종친 대책위원회 건설경로 5
가야사 바로잡기 공동 기자회견문 7
2. 가야사 왜곡의 뿌리 정한론과 식민사관 13
3. 역사교과서에 시퍼렇게 살아 있는 식민사관 14
4. 삼국사기, 삼국유사, 김해김씨 족보가 가짜라는 강단 역사학자들 18
가야사 바로잡기 가락 종친 대책위 꾸려야 하는 이유
□ 필요성
○ 가락종친회는 가야사 복원 시작지점부터 올바른 가야사가 복원이 되도록 노력해야 했으나 정치권과 김수로왕·허왕후·장유화상이 모두 가짜라는 식민사학자들에게 맡기는 실수를 범했다.
○ 복원된 가야사는 가야가 임나라는 임나일본부설로 가득 채워져 있고 유네스코 등재 등 마무리 수순을 밝고 있다.
○ 이를 방치하면 김수로왕·허왕후·장유화상은 허구인물이 되는 것이기에 가락종친은 얼굴을 들기 다니기가 부끄럽게 될 것이다.
○ 가락종친 중앙조직은 법정 싸움에 휘말려 제 기능하기 어렵다.
○ 이에 부득이하게 17개 시도 종친회가 중심이 되어 ‘가야사 바로잡기 가락종친 대책위원회’(가칭)를 결성할 필요가 있다.
□ 올바른 가야사 복원이란
○ ‘김수로왕‧허왕후‧장유화상’ 세 분이 실존 인물임을 확인하고 본래 자리에 모시는 것
○ 가야 해상문화(건국과정, 허황옥의 혼례길, 일본 진출) 복원
○ AD 1세기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고조선 통치체제 방식(6가야)으로 건국
○ 일본에 철기문화 전파와 일본열도에 많은 가야분국, 소국설치
○ AD 1세기 불교 전파
○ 삼국시대를 4국시대로 통사 정리
□ 식민사관으로 왜곡된 가야고분군 연구총서 1~7권의 내용
○ 일본에 있었던 가야 분국 임나를 가야라면서 임나일본부설 추종
○ 6가야를 수많은 소국 연맹체로 조작해서 가야의 역사발전단계 폄하
○ 가야가 AD 4세기에야 고대국가로 발전했다고 조작
○ 왜는 문화 수준을 높이고, 가야는 문화 수준을 낮추는 조작
○ ‘김수로왕‧허황옥‧장유화상’을 허구인물로 조작
□ 수난의 가야사
○ 임진왜란 때 왜군이 김수로왕릉을 파해 처 도굴하였고 그 유물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음
○ 1860년대부터 일본 극우파가 정한론을 설계하며 가야사를 조작하기 시작함
○ 일제 때 총독부는 김수로왕릉에 천막을 쳐 외부와 단절시킨 체 도굴하였고 그 유물이 어디에 있는 지 알 수 없음
○ 1920년대 조선사편수회를 설치 가야사 포함 우리 역사를 체계적으로 조작함
○ 해방 이후 이병도와 신석호에 의해 조선총독부가 조작한 역사관이 그대로 우리 역사로 이식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고, 70년 이상 이 체제가 이어지다보니 정치권과 국민은 비정상이 정상인 것처럼 굳어져 있음
○ 현재 우리나라 고대사 학자 진영은 식민사관으로 똘똘 뭉쳐 있음. 그러니 복원한 가야사는 일본 극우 시각의 가야사가 됨
○ 가락종친회가 나서지 않으면 가야사는 식민사관 학자들의 뜻대로 조작되어 시조부터 허구의 인물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임
□ 대책위 구성 방향
○ 대책위 건설 경로 및 시기
∙참봉어른들을 비롯한 가락종친 어르신들의 지지를 받으며 건설
∙영남 중심으로 가락종친회를 묶어 준비위 꾸림
∙17개 시도 가락종친회와 인천이씨, 김해허씨와 함께 대책위를 발족
∙2020.1.1. 김수로왕릉 앞에서 선언문 채택으로 대책위 건설 마무리
○ 가락 유튜브 운영
∙ 100년 이상 식민사관으로 가야사를 조작하였기에 종친회조차 실재 가야사와 조작된 가야사가 혼재되어 있어 이를 정리하여 공유할 필요가 있음.
∙ 가야사를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했기에 종친 다수가 가야사에 관한 기본 지식이 부족
∙ 가야사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가락 종친이 가야사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를 바탕으로 가락종친의 대중적 참여와 지원이 있어야 승리할 수 있음
□ 대책위가 해야할 중심사업
○ 가야사 바로잡기 사업 중심에 가락종친회가 서야
○ 식민사관으로 가득 차 있는 가야고분군 연구총서 1~7권을 폐기하고 새롭게 작성하여야 한다.
∙공신력 있는 국회가 주관하는 토론회를 요구해야 한다.
∙토론회에서 제기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 청와대 국민청원에 가락 종친회가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
∙20만을 넘겨 대통령 입장을 확인하여야 한다.
∙문화재청 등 하부 기관이 식민사관으로 왜곡된 가야사를 바로 잡을 역량도 없고, 시기도 이미 지났기에 대통령의 ‘올바른 가야사 복원’이라는 지시가 절실한 상황이다.
○ 대선 활용
∙모든 대선 후보에게 가야사 바로잡겠다는 약속을 요구하고 답변 받아야
∙모든 대선 후보에게 식민사관 청산 약속을 요구하고 답변 받아야
∙모든 대선 후보에게 일본의 역사왜곡과 중국의 동북공정을 옹호하는 한국의 역사관련 국책기관의 문제에 대한 대책 마련을 약속받아야.
○ 가락종친이 가야사 바로 잡기에 뭉치지 못하면 식민사관 추종 학자들의 뜻대로 가야사 복원될 수밖에 없는 환경임
□ 대책위가 주의 사항
○ 가락종친 내부 분규에 관해 논의 자제
○ 대책위 이름으로 특정 대선후보 지지나 지원 금지
○ 대책위 성격은 가야사 관련한 한시적인 가락종친회 비상 대책기구임
□ 일정에 따른 구체적인 일
○ 2022.1.1.일까지 대책위 건실하게 구성
∙대책위 사업을 위한 3억 정도의 자금 가락종친회 내부 대중적인 모금
○ 공동 기자회견과 조계종 방문
∙12.20일 전후 오전에 국회에서 기자회견
∙당일 오후 조계종 총무원장 면담하여 불교대책위 종단 차원에서 구성 요청(불교대책위도 잘 꾸려져야 힘을 발휘)
○ 청와대 국민청원 : 12. 22일 전후
∙ 꼭 20만을 넘겨야
○ 2021. 1.1 : 김수로왕릉 앞 사진전 및 집회
∙17개 시도에서 대표단 2~5명 조직하여 참여
○ 주요 정당 대표 방문 : 2021. 1
∙가야사 바로 잡을 수 있도록 정당 차원의 노력 요청
∙식민사관 청산 입법 요구
○ 국회의장 면담과 가락종친 국회의원에게 서한문 발송
∙국회의장 면담 : 가야사 훼손관련 국정조사 요구
∙가락종친회 국회의원에게 서한문 발송
-식민사관으로 가득 찬 ‘가야고분군 연구 총서 1~7’ 국회 토론회 요구
-가야사 식민사관으로 왜곡 국회 국정조사 추진 요구
○ 김부겸 총리 면담
∙가야사 왜곡관련 서한문 전달
∙대통령 면담 요청 : 청와대 국민청원에 따른
○ 문재인 대통령 면담 및 국민청원 답변
∙가야사는 본래 우리 역사로 복원되어야 한다.
∙가야사가 식민사관으로 왜곡되었다면 진상을 조사하고 바로 잡겠다.
○ 주요 대선후보 면담
∙가야사 바로 잡고 식민사관 청산해 달라
∙대선 후보와 MOU(협약) 체결
가야사 바로잡기 가락종친 대책위원회(가칭) 건설 경로
□ 대책위 건설 주요 일정(논의에 따라 조정)
○ 2021. 12.15 저녁 7시 화상회의(영남권) : 준비위 발족
∙카톡과 줌으로 회합 : 코로나와 시간 촉박하기에
○ 12.20 : 17개 시도 가락종친(허씨, 이씨 포함) 관계자 회의
∙정관 및 사업 계획 논의
○ 12. 27
∙ 임원 및 일꾼 조직
∙ 통장 개설 : 개인이 아닌 종친회 통장 사용
○ 출범 : 2022.1.1. 김수로왕릉 앞 마당(선언문 채택)
□ 기본 조직 체계
○ 대책위 본부는 김수로왕이 있는 김해에 설치
∙ 통장도 김해시 가락종친회(신뢰 확보) 통장 사용 고려
∙ 사무처를 비롯한 일꾼 확보 : 50대 이하 (유급도 고려해야)
○ 상임고문 : 참봉을 지낸 분, 가락종친회 중앙회장 지낸 분, 전 국회의원, 전 장관 이상 직함
○ 고문 : 덕망과 학식이 있는 분 중 광역자치단체 가락종친회에서 요청하는 분
○ 공동대표 : 17개 광역자치단체 가락종친회 회장 각 1인
(이씨, 허씨 포함하면 더 늘어 날수도)
∙회장이 유고시는 지역 종친회에서 논의를 거쳐 대표 1인 참여
∙회장이 참여가 어려운 조건이면 회장이 지명하는 대리자 지명
○ 상임공동대표 : 공동대표 중 1인
○ 중심 단위 : 운영위원회
○ 운영위 구성 : 공동대표, 사무처 임원, 선출직 운영위원
□ 정관 주요 항목
○ 목적
∙ 식민사관으로 왜곡되어 온 가야사를 바로 잡고 가야사가 우리 역사의 중심으로 편입되도록 노력한다.
∙ 가야사 연구와 ‘영화·소설·노래’ 등 각종 문화 선양 사업의 토대를 만든다.
○ 주요 사업 방향
∙ 가락 유튜브 개설과 운영
∙ 일본 극우의 정한론과 식민사관으로 오염된 가야사를 본래의 가야사로 정립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 전국과 해외에 있는 가락종친이 참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한다.
∙ 단기적으로는 유튜브를 개설하여 가락종친의 역사 인식을 높이고 묶어 세워 그 힘을 바탕으로 가야사 바로 잡는데 주력한다.
∙ 가락종친 중 민족 가야사 박사학위 배출을 위한 시스템을 구축한다.
∙ 웹튼, 소설, 영화, 노래 등 문화적 도구로 가야사를 전국화 세계화시키는 토대를 구축해 나간다.
12월 20일경 국회 소통관에서 발표할 기자회견문
1. 주관 : 김병욱 국회의원(가락종친회 청년회장)
2. 주최 : 가락종친회 대책위, 불교 대책위, 가야사 바로잡기 전국연대
3. 참가자 :백신 완료자 중 가락(3인) 불교(2인) 전국연대(2인)
4. 가락대책위에서 수정요구하면 문안 수정 가능함
가야사 바로잡기 공동기자회견문
자랑스러운 국민 여러분!
‘국권침탈·분단·전쟁·독재·가난’을 국민의 피와 땀으로 극복하고 이제는 어엿한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앞에는 ‘남북평화, 소득 불평등 해소, 지구촌 지속 가능, 선진국으로서 올바른 역할 ’등 여전히 버거운 과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민의 역량을 모아 난국을 돌파했던 것처럼 이를 극복해 내리라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 고대사는 일본 극우세력이 조작한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아직도 계승하고 있어 세계 역사학계는 우리 역사학계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핀잔을 주고 있습니다. 일반 국민과 정치권은 이를 알지도 못한 채 식민사관에 농락당하고 있습니다.
일본 극우세력의 정한론은 우리 역사 교과서에 시퍼렇게 살아있습니다.
일본군 참모본부가 1860년대 정한론을 설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가야=임나라 하고, 한사군을 평양 주변이라 조작하고, 단군과 김수로왕을 신화로 만들었습니다. 한민족은 역사 시작단계부터 북쪽은 중국식민지, 남쪽은 일본 식민지로 만들어 정한론의 정당성을 확보한 것입니다. 이를 우리는 식민사관 혹은 반도사관이라고 합니다.
유감스럽지만 우리의 ‘초‧중‧고 역사 교과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고대사 영역은 일본 군부가 조작한 식민사관을 그대로 전승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전국 각종 박물관의 고대사 영역은 식민사관 전시장 역할을 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정입니다.
가야를 임나로 훼손한 것은 반민족행위이고 치욕입니다.
2005년 영‧호남 자치단체장은 ‘가야사 포럼’을 만들고 가야사 복원을 요구해왔습니다. 이것은 지역민의 바람이기도 했습니다. 500년 넘게 우리 역사의 주축으로 있었던 가야사가 일본 극우세력이 식민사관 출발지점으로 활용하며 많은 훼손을 해왔기에 이를 바로 잡으라는 요구가 그 밑바탕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가야사 복원을 국정과제로 채택하여 추진했고, ‘가야고분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업에 참여한 우리나라 역사학자는 식민사관의 관점으로 또다시 훼손하였습니다.
정부나 국민은 가야의 본래 역사를 복원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학자는 우리의 시각으로 역사를 보고 그런 관점에서 복원하리라는 상식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 신청한 가야사와 그 기초가 되는 ‘가야고분군 연구총서 1~7권’을 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가야사가 아니라 일본 극우세력이 만든 조선총독부 가야사로 쓰여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확인한 민족 역사학계와 영‧호남 시민들이 분기탱천하여 강력하게 문제 제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과 정치권은 올바른 가야사 복원과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진행되리라 예견했습니다.
첫째, ‘김수로왕‧허황옥‧장유화상’이 신화가 아닌 실존 인물로 복원하는 것
둘째, 가야 해상문화(건국과정, 허황옥의 혼례길, 일본 진출) 복원
셋째, AD 1세기 철기문화로 고조선 통치체제 방식(6가야)으로 건국
넷째, 일본에 철기문화 전파와 7소국 설치
다섯째, AD 1세기 불교 전파
하지만 복원한 가야고분군 연구총서 1~7권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첫째, 일본에 있어야 할 임나를 가야로 조작
둘째, 본래 6가야를 많은 소국 연맹체로 조작
셋째, 가야가 AD 4세기에야 고대국가로 발전했다고 조작
넷째, 왜는 문화 수준을 높이고, 가야는 문화 수준을 낮추는 조작
다섯째, ‘김수로왕‧허황옥‧장유화상’을 신화로 조작
위 다섯 가지는 일본 극우가 정한론을 위해 가야사를 조작한 대표적 각론입니다. 우리나라 고대 역사학계는 총론에서는 임나일본부가 극복되었다고 말하지만, 각론에서는 식민사관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반민족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식민사관을 청산하지 않은 정치권의 직무유기가 있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고대사 영역은 철저히 조선총독부 황국 식민사관을 보존하는 반민족행위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가야사를 복원하였기에 우리의 시각이 아닌 일제 조선총독부 시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조선총독부 건물을 파괴할 때 식민사관도 마땅히 청산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천재일우의 기회를 살리지 못했고 민주 정부는 ‘역사는 학자의 몫’이라며 절차적 민주주의만 강조하며 식민사관을 내버려 두었습니다. 이로 인해 발생한 비극은 부끄러운 우리 시대의 자화상입니다.
이대로 가야사를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하면 ‘일본 극우는 한국은 여전히 일본의 속국’이라며 기고만장할 것이고, 우리의 후손들은 식민사관을 극복하지 못한 선조들과 우리 정부를 비난하며 부끄럽게 여길 것입니다.
가야사 복원은 식민사학자의 파렴치한 잔치
‘가야고분군 연구총서 1~7권’은 가야사 복원에 핵심입니다. 이 보고서는 가야사를 역사 교과서에 어떻게 실을 것인가를 규정하고, 향후 가야사를 전공하는 학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참고 서적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보고서 방향을 결정하는 문헌 연구를 살펴보면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한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일본 군부의 요구대로 조선사편수회에서 중심인물로 활약하며 우리 역사를 난도질한 ‘이마니시 류(今西龍)’, 식민사관을 완성했다고 자화자찬하는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그리고 이들을 추종하는 한국 식민사학자의 선행연구를 토대로 작성되었기에 가야사는 복원이 아니라 조선총독부 역사관으로 심각하게 오염되었습니다.
국민 여러분! 식민사관 청산에 힘을 보태야 합니다.
유감스럽지만 우리 고대사 영역은 일제강점기 때보다 현재의 식민사학이 더 견고해지고 강화되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동북아역사재단, 한국학중앙연구원, 각 대학교 역사학과’의 고대사 전공 분야는 식민사관 추종자가 아닌 학자를 찾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아예 석·박사 과정에서부터 자신들과 신념체계가 다른 사람은 원천적으로 배제해왔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일제 고등계 순사 출신 노덕술은 반민족-친일경찰이라고 비판하는데,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출신 친일반민족행위자인 이병도와 신석호는 국사학계의 태두라고 떠받드는 이율배반이 식민사관을 뿌리 뽑지 못하게 만든 원인으로 작용해왔습니다.
세계 역사학계는 아직도 식민사관에서 허우적거리는 한국 역사학계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핀잔을 주고 있습니다. 북한 역사학계는 한국이 과연 독립국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반면 국내에서는 ‘뉴라이트, 일베, 토착 왜구’가 식민사관을 자양분으로 독버섯처럼 자라나 여기저기서 똬리를 틀며 갈등을 일으키는 것을 곳곳에서 목격하곤 합니다.
이러다 보니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아이들일수록 역사관이 뒤틀려 우리 사회에 많은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아이들에게 식민사관으로 우리 고대사를 가르치는 행위는 부끄러운 일이며 반민족행위입니다. 이제는 이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정부와 정치권에 요구합니다.
식민사관 청산은 ‘진보‧보수, 여‧야’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정통성을 바로 세우는 헌법적 명령입니다. 이것은 학자에게 맡길 문제가 아니라 정치권이 결단하여야 할 사항입니다. 일본의 극우 역사관 청산을 학자에게 맡긴다는 것은 정치권이 직무유기입니다.
‘한·중·일’ 삼국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역사전쟁은 앞으로도 지속할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분단상황에서 우리가 바로 서지 않으면 동북아는 언제든지 혼돈으로 치달을 수 있습니다. 특히 ‘미·중 문명사적 패권 전쟁’은 더욱 혼돈을 조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선다는 것은 본래 우리 역사 즉 상고사부터 근현대사까지 우리 시각으로 복원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라고 봅니다. 그리하여 인류와 우리 민족에 긍정적인 것은 발전시키고 문제점은 극복해 나가는 열린 자세로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본래 우리 역사를 찾고자 하는 우리는 아래와 같은 요구를 합니다.
-. 일본 극우의 시각에서 훼손한 가야사 고분군 세계문화 유산 등재는 즉각 중단되어야 하고 우리 가야사로 다시 정리한 이후에 등재해야 합니다.
-. 가야고분군 연구총서 1~7권은 본래 우리 역사 관점으로 다시 작성되어야 합니다.
-. 정부는 가야사 복원이 일본 극우의 시각으로 오염된 이 사항을 국기문란으로 규정하고 그 책임자는 누구든지 엄하게 벌해야 합니다.
-. 국회는 즉각 국정조사를 통해 일본 극우의 시각에서 역사를 왜곡한 국기문란 행위의 진상을 밝혀 바로 잡아야 합니다.
-. 국회는 식민사관 청산과 우리 역사 바로 세우기 법률을 제정하여 다시 이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특별 조치를 신속하게 취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부와 정치권의 반성을 촉구하며 아래와 같은 일을 국민 여러분과 함께 추진할 것입니다.
-. 국정과제로 추진한 일이기에 그 책임자는 대한민국 정체성을 수립하는 문재인 대통령입니다. 대통령은 가야사가 일본 극우세력의 시각으로 오염된 것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대통령의 견해를 듣고자 청와대 국민 청원을 추진할 것입니다.
-. 가야사 바로잡기와 식민사관 청산 국민과 함께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해 나갈 것입니다.
-. 20대 대통령은 식민사관을 청산하고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모든 대통령 후보의 역사 인식과 정책을 설문 조사하여 국민 여러분께 보고 드릴 것입니다.
2021. 12.
가야사 바로잡기 가락종친 대책위원회(가칭)
가야사 바로잡기 불교대책위원회(가칭)
식민사관으로 왜곡된 가야사 바로잡기 전국연대(140개 단체)
가야사 왜곡의 뿌리 정한론과 식민사관
정한론
대표적인 역사 조작 책
일본 서기 활용
요시다쇼인
(1830~1859)
정한론 창시자
야마가타 아리토모(1838~1922)
3대 내각총리대신
이토히로부미(1841~1909)
제1,5,7,10대 내각총리대신
-광개토대왕비문 조작
-식민사관 얼개 조작
-고려장 조작
1870년대
정한론 실천가
위원 3인방
조선사편수회(1916~1945)
고문(이완용 등), 위원, 간사, 수사관3명, 수사관보4명, 서기 2명
이병도(1925~1929) 수사관보
신석호(1930:수사관보, 1937~1945 수사관)
이 두 사람을 한국 역사학계는 태두로 받들고 있음
구로이타 가쓰미
이나바 이와키치
이마니시 류
이병도와 신석호 역사학계 장악
실증사학으로 개칭
★역사 교과서
★한민족대백과사전
식민사관이 차고도 넘침
국사편찬위원회, 동북아역사재단, 한국학중앙연구원,
서울대 국사학과 등 각 대학교 역사학계 장악
가야사 집필진을 포함 한국 고대사 전공학자 대부분
주1. 식민사관 해방 이후 단 한 번도 청산 대상으로 만들지 못함.
주2. 가야사 지필진 : ‘가야사 고분군 연구총서 1~7권’의 참고문헌을 추적하면 일본 극우 역사관에 귀착
식민사관 청산은 학문의 영역이 아니라 정치 영역이기에 국민이 나서야 하고 촛불 정권은 반성해야 합니다.
3. 역사 교과서에 시퍼렇게 살아 있는 식민사관
1) 한사군과 임나 조작
<그림> 식민사관 한사군
<그림 > 식민사관 임나
① 한사군 평양 주변이라는 것과 가야=임나는 일본 극우가 조작한 거짓 역사
② 한사군 평양 주변이라고 조선총독부가 조작한 것 역사 교과서 속에 살아 있음
⓷ 평양주변에 BC1세기~AD3세기 까지 있었던 최리 낙랑국을 한사군의 낙랑현이라 조작
(북한은 1960년대 이미 정리)
⓸ 임나는 가야가 아니라 일본에 있었던 가야 분국 중 하나로 보는 것이 타당
⓹ 현재 일본에서는 가야=임나라고 중고교 역사 교과서에서 가르치고 있음
⓺ 우리나라 가야사 집필진은 임나 소국인 기문국(남원), 다라국(합천)이라고 조작에 동참함
⓻ 가야사 복원에 일본서기를 중심에 두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참고만 하는 이상한 나라
2) 만리장성과 한사군 역사를 조작하는 중국과 일본
<그림-> 주. 1. 중국 각종 고대 문헌에 한사군은 만리장성 동쪽에 있다고 기록함
주, 2 한국이 한사군을 평양 주변에 있다고 70년 이상 주장하니 중국은 이를 활용하여 위 그림 발표
주. 3.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역사를 조작한다고 탓하기 전에 식민사관부터 척결해야
<그림 > 출처: 한가람역사연구소
중국 각종 자료와 발굴된 유물에 의하면 한사군 위치는 요서와 요동임은 그 증거가 차고도 넘침
한사군을 평양 주변이라고 조작한 것은 일본 극우가 식민사관을 만들기 위해 조작한 것. 우리나라 고대사 진영은 총독부가 조작한 한사군을 지키려고 부단한 노력을 함. 그들은 일본 극우를 추종하는 토착왜구임
3) 통일 신라·고려 국경 조작한 일본 극우와 식민사학자
<그림-> 고려사‧조선왕조실록‧명나라 정사에서 바라본 통일신라, 고려, 강역
조선실록, 고려사, 중국 당, 송과, 요에 기록된 역사, 명나라 기록에 그림처럼 통일신라 초기, 고려의 국경 관련 증거는 차고도 넘침. 북한은 1960년대 이미 정리
아래 그림은 역사 속에 살아 있는 통일신라 초기와 고려 국경이다.
그러나 이마니시 류(이병도)가 조작한 통일신라 초기와 고려 국경이 교과서에 실려 있다. 우리나라 역사학자가 식민사관을 추종하기에 벌어진 일이다.
670~676년 나당전쟁(통일신라와 당나라)이 일어난 이유가 고구려가 멸망하면 위 영토를 통일신라의 영토로 편입하기로 합의했는데 당나라가 지키지 않아 전쟁이 일어났고, 주 전투가 있었던 곳은 위 지도의 조양시와 심양시 사이이다. 나당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초기 통일 신라 영토는 고려 영토와 다르지 않았다. 발해가 건국되고 성장하면서 신라는 평양 이남으로 축소되었던 것이다.
지난 70년 동안 거짓 역사 그것도 식민사관으로 만든 조선총독부 역사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국민을 속여 온 이 사태를 누가에게 어떻게 물어야 할까? 우리가 정상적인 나라라면 마땅히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4) 조선 영토까지 조작
이 지도의 탄생 배경은 아래와 같다.
① 1689년 청나라가 러시아와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었는데 정확한 지도를 가져야 러시아와의 분쟁에
그림 청 강희제 황여전람도 중 조선도(1718)
대비할 수 있었기에 청 황희제가 제작을 추진
②지도제작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예수회 선교사 겸 지리학자였던 레지 신부 등을 통해 프랑스 정부에 지도제작 전문가 파견 요청
⓷1712년 조선 정부와 청나라 정부 사이에 국경선을 재확인
⓸그런 과정을 거쳐 1718년 완성되었다
⑤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이 중국과 1909년 간도협약을 맺으며 철도 부설권을 얻고 때어 준 영토가 노란색 간도
따라서 이 지도는 청나라, 조선, 프랑스, 바티칸, 제정러시아 등에 300년 전부터 공개되어 온 지도이다. 우리나라 역사학자라면 모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지난 70년 동안 역사 교과서는 조선총독부를 계승하여 거짓 역사를 가르쳐왔다.
주로 여기서는 영토 관련만 기술하였으나 우리 역사 교과서에는 생각보다 많은 내용의 조선총독부 역사가 시퍼렇게 살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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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삼국사기》《삼국유사》와 김해김씨 족보가 가짜라는 강단 역사학자들
가락종친 김명옥 박사 글
1) 가야의 건국연대는 가짜인가?
가야의 건국연대는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서기 42년으로 전한다. 따라서 국민들에게 “가야의 건국연대가 몇 년이냐”고 묻는다면 백 명이면 백 명 모두 서기 42년이라고 답할 것이다. 상식 중의 상식이라서 물어보는 사람을 오히려 이상하게 볼 것이다. 그러나 가야 건국 연대가 42년이라고 기록된 《삼국유사》〈가락국기〉와 《삼국사기》〈김유신 열전〉을 믿지 못하는 부류가 있다. 광복 7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의 논리를 추종하는 역사학자 부류들이다. 한국의 거의 모든 대학의 역사학과를 장악한 그들을 점잖은 말로 강단사학자라고 부른다. 보다 정확하게는 일본 극우파들을 추종하는 식민사학자들이다. 그들은 가야가 3세기 이후에 건국되었다고 말한다. 일반 국민들이 가야는 1세기에 건국했다고 인식하는 것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강단사학자들은 《삼국사기》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홍익대 김태식 교수는 “신라본기를 중심으로 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편년에 문제가 없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라고 하겠으며, 그와 밀접한 연관 아래 작성된 《가락국기》의 가야 왕력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고 하겠다” 김태식, ‘가야의 성립’ 《한국사 7-삼국의 정치와 사회Ⅲ-신라·가야》, 국사편찬위원회, 320쪽.
라고 말했다.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가짜라는 것이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 가짜이니 《삼국유사》〈가락국기〉도 가짜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삼국사기》《삼국유사》를 가짜라고 주장하는 것은 김해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과 허황후를 부인한 것이다. 이용현은 7세기 후반에야 김유신과 그 후예들이 김 씨를 표방했다고 하고, 이문기는 “6세기 말에 처음으로 김 씨를 칭하면서” 이문기, 〈금관가야계의 시조 출자전승과 칭성의 변화〉, 《신라문화제학술발표논문집》 25집,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2004,1쪽.
김수로를 시조로 내세웠다고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김해김씨 족보는 적어도 500여 년의 몇 십 세계(世系)가 가짜라는 것이다. 이것은 김수로와 허황후를 시조로 모시는 가락종친회를 부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의 주장처럼 과연 김 씨 칭성이 6세기에 시작되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서 설명하고, 그들이 왜 《삼국사기》《삼국유사》가짜라고 하는지를 먼저 살펴보자.
2) 《삼국사기》《삼국유사》를 가짜라고 주장하는 진짜 이유
그들이 《삼국사기》를 가짜로 모는 논리는 하나다. 〈신라본기〉와 〈박제상 열전〉에 박제상의 가계에 관한 내용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박제상은 5세기 전반 눌지왕 때 인물인데, 2세기 무렵에 생존했던 파사이사금의 5세손으로 되어 있다는 것과 박제상의 조부인 아도갈문왕이 일성이사금 때 갈문왕으로 봉해졌다는 것이 《삼국사기》를 가짜로 모는 논리의 주요한 골자다.
그런데 《삼국사기》 〈일성 이사금조〉에는 “15년(148)에 박아도(朴阿道)를 갈문왕(葛文王)으로 봉했다”고 하면서 “신라에서는 추봉(追封)한 왕을 모두 갈문왕이라고 칭하였다. 그 의미는 자세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삼국사기》〈일성 이사금조〉의 박아도가 제상의 조부인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박아도를 〈박제상 열전〉의 아도갈문왕과 같은 인물로 인식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러한 가능성을 배제한 김태식은 “박제상의 가계에 문제가 없다면 신라본기 초기 왕력 편년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김태식, ‘가야의 성립’ 《한국사 7-삼국의 정치와 사회Ⅲ-신라·가야》, 국사편찬위원회, 320쪽.
라고 결론지었다.
〈신라본기〉와 〈박제상 열전〉의 내용이 다르면 두 기록이 왜 다른지, 어느 것이 더 신빙성이 있는지를 따져야 하는데, “박제상의 가계에 문제가 없다면”이라는 전제를 달아놓고 〈신라본기〉를 믿을 수 없다고 단정 지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삼국사기》〈신라본기〉를 가짜로 몰아야 《삼국유사》〈가락국기〉도 가짜로 몰 수 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가락국기〉가 가짜여야만 가야가 3세기에 건국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고, 가야를 건국했다는 김수로도, 아유타국에서 파사석탑을 싣고와 불교를 전래했다는 허황옥도 모두 가짜로 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가야가 1세기에 건국했다는 많은 기록이 있다. 몇 가지 기록만 보자.
①《삼국사기》〈김유신 열전〉
“김유신은 왕경(王京)사람이다. 그 12세 조상 김수로는 어디 사람인지 알 수 없는데, 후한(後漢) 건무(建武) 18년(서기 42) 임인에… 나라를 열고 국호를 가야라고 했는데, 뒤에 금관국으로 고쳤다.”
②《삼국사기 》〈탈해이사금조〉
21년(서기 77)조 “(신라의 ) 아찬 길문이 황산진(黃山津) 입구에서 가야 군사와 싸워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③《삼국사기 》〈파사이사금조〉
③-1 8년(87) “짐이 부덕한데도 이 나라를 갖고 있는데 서쪽은 백제(百濟)와 이웃하고 남쪽은 가야(加耶)와 접해 있다. 덕은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없고, 위엄은 이웃 나라를 두렵게 하기에 부족하다 마땅히 성벽과 보루를 잘 수리하여 침략에 대비하라”
③-2
17년(96) “9월에 가야인들이 남쪽 변경을 습격하니 가성주(加城主) 장세(長世)를 보내 막게 했는데 적에게 죽임을 당했다. 왕이 노해서 용사(勇士) 5천을 이끌고 출전하여 패배시키고 포로로 잡은 자가 아주 많았다.
③-3
19년(99) ”18년(97) 봄 정월에 군사를 일으켜 가야를 정벌하고자 하자 그 나라 왕이 사신을 보내 죄를 청하므로 그만두었다.
③-4
23년(102) 가을 8월에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이 엉토를 다투다가 (파사)왕에게 와서 결정해달라고 청하였다. 왕이 어렵게 여겨서 이르기를 “금관국의 수로왕이 연로하여 지식이 많다.”면서 불러서 물었다. 수로왕이 의견을 내어 다투는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하였다.
서기 102년 당시 김수로가 금관국의 왕으로 있었던 사실은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가 함께 증언하고 있다. 고고학 자료들도 가야가 1세기에 건국되었음을 보여준다. 김해 대성동에는 서기 1세기 이전의 가야 고분들이 존재한다. 문헌사료와 더불어 고고학 자료 또한 가야가 서기 1세기에 건국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한편, 북한학계는 서기전 1세기 말경에 봉건소국이 형성되었다가 1세기 초엽 경에 북방에서 온 김수로왕이 기존의 지배세력과 타협해서 지배권을 확립했고 1세기 중반경에 가야연맹체를 형성했다고 설명한다. 김수로왕이 가야를 건국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또한 허왕후의 출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허왕후가 서기 1세기에 김수로왕과 혼인한 사실에 대해서는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북한 학계는 또 고고학적 근거를 가지고 가야가 1세기에 건국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조희승, 〈가야사개관_진국·가야편〉, 《조선단대사》2권
이처럼 1세기에 가야가 건국되었다는 문헌 기록과 유물·유적은 차고 넘친다. 그런데 남한 강단사학계는 3세기에 가야가 건국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서기》를 근거로 고대 야마토 왜[大和倭]가 369년부터 562년까지 갸야를 점령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주장을 사실이라고 뒷받침하기 위해서다. 총론으로는 “임나일본부설을 부인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국민들을 속인 후 각론으로 들어가면 임나일본부설의 핵심인 “임나는 가야다”라고 다른 소리를 한다. 역사서의 기본 중의 기본인 연대조차도 맞지 않는 《일본서기》의 시각으로 봐야 한다면서 임나일본부에 관한 내용이 일언반구도 없는 《삼국사기》는 가짜라고 우긴다. 일본 극우파의 논리를 그대로 추종한 것이다.
남한 역사학계를 모두 장악한 이들은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인용하면 논문심사를 빌미로 탈락시키고 자신들만의 아성을 구축했다. 《삼국유사》·《삼국사기》에 나오는 가야 건국 1세기를 부인하고, 가락국의 시조가 김수로왕이고 그 부인이 허왕후라는 사실을 부인한다. 일본 극우파들이 임나는 가야라면서 이 임나가 전라도, 충청도까지 차지했다고 우기는 것을 그대로 추종해서 ‘호남 가야’ 운운한다. 일반인들은 그들이 ‘교수니까 박사니까 그들 말이 맞겠지’ ‘한국인 학자들인데 한국 입장에서 역사를 연구했겠지’라고 믿는다. 이런 믿음을 배신하고 이들은 일본 극우파의 주장을 따라서 가야를 야마토 왜의 식민지로 삼았다. 사실은 가야계가 일본 열도에 진출해서 세운 소국, 분국이 ‘임나’인데 이를 거꾸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대한민국 국민들의 피땀인 국민 세금을 가지고.
3) 565년 이전의 김해김씨 족보는 모두 가짜?
이제 앞에서 말한 김 씨 칭성과 관련해서 살펴보자. 칭성 문제를 살피면 김수로의 조상과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가락국기〉에서 김수로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했는데, 가야계 신라인들은 그들의 원시조를 소호금천씨라고 전한다. ‘하늘’과 소호금천씨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삼국사기》〈김유신 열전〉에 “신라 사람이 스스로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라고 일렀기 때문에 성을 김이라고 했는데, 비문에는 또한 헌원의 후예요. 소호의 자손이라고 했으니 남가야 시조 수로왕은 신라와 성이 같다”라고 했다. 가야계 후손들은 그들의 원시조를 소호금천씨로 인식했다.
그런데 이문기는 김 씨 칭성이 565년 이후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북제서》에 신라의 김씨가 565년에 처음 나타났다는 게 그 이유다. 그는 김유신 아버지인 서현이 신라 왕실을 모방해서 처음으로 김 씨 성이라고 했고, 그 “가문에서 전승되어오던” “‘천강금란 출생설’에서 시조 수로의 출자를 내세웠고, 중대초에 이르러서는 ‘소호금천 씨 출자설”로 바꿨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김수로는 김유신 가문에서 만들어 낸 가짜 인물인데, 신라 중대에 가서 ’김수로 시조설‘에서 ’소호금천 씨의 시조설‘로 바뀐 것이 이것을 증명해 준다는 것이다. 이문기 주장대로라면 565년 이전의 김해김씨 족보에 실린 조상은 모두 가짜가 된다.
정말로 가야를 건국한 김수로와 소호금천 씨는 아무런 연관이 없을까? 중국 산동성 임치시에 있는 동이박물관은 복희를 비롯해 소호, 치우, 전욱, 제곡, 순을 동이족의 수장이라고 했다. 중국의 《제왕세기》를 비롯한 여러 기록들은 소호를 황제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서기전 4,100년에서 서기전 2,600년까지 이어지는 신석기 문화를 대문구문화라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대문구문화의 주인공을 소호로 꼽는다. 소호는 새를 숭배하고, 편두를 해서 머리를 네모나게 만들었다.
그런데 대문구문화에서 발견된 새모양 토기들이 가야지역인 낙동강 하류에서 발굴되었고, 《삼국지》〈동이전 변진〉조에는 “장사 지낼 때 큰 새의 깃털을 쓰는데, 죽은 자가 날아오르도록 한다는 뜻이라고 했다.”라고 해서 변진사람들이 새를 숭배한 기록이 있다. 또 “아이가 태어나면 돌로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했다는 편두 기록도 있다. 특히 그릇 받침대에 동그라미. 네모, 마름모꼴 등의 구멍이 뚫린 토기들은 대문구문화의 특징인데, 이러한 토기가 가야계 유물에서 발견된다. 문화를 연구하는 외국의 학자들은 몇 천 년이 지나도 문화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즉 문화의 상징은 그 민족의 먼 조상이나 혹은 선사시대의 다른 민족과의 연관성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소호금천씨의 문화와 가야의 문화의 친연성을 말해준다.
1954년 중국 섬서성 서안에서 발견된 〈대당고김씨부인묘명〉도 소호금천씨가 김 씨의 원시조라고 말한다. 비문을 보자.
태상천자 때 나라가 편안했고, 그 적장자께서 가문을 여셨는데 호(號)가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시니 곧 우리 가문이 씨(氏)를 받은 세조(世祖)이시다. 그 후에 종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 번창함이 있고, 빛남이 있어서 천하에 만연하니 많고도 많도다. 먼 조상 이름은 일제(日磾)이신데 흉노 조정〔龍庭〕에서 서한(西漢)에 귀순하셔서 무제(武帝)에게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삼가니 시중(侍中)과 상시(常侍)에 발탁하고 투정후(秺亭侯)에 봉하셨다.
김씨부인 가문은 소호금천 씨로부터 시작해서 여러 종파로 갈라져 번성했음을 비문은 말한다. 그런데 이 비문은 김씨의 중시조로 김일제를 명시하고 있다. 일제는 본래 흉노 휴도왕의 태자였는데, 한무제 원수 2년(서기전 121)에 곽거병이 흉노를 공격해 수많은 흉노인들을 포로로 잡아왔다. 일제도 이때 포로로 잡혀왔는데, 한나라로 끌려온 일제는 한무제 말을 관리하다가, 망라하가 무제를 암살하려는 것을 막아 그 공으로 투후에 봉해졌다. 일제가 김씨 성을 갖게된 유래는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무제가 김씨 성을 하사한 것이다.
금인과 관련해서 소호금천씨를 살펴보자. “금덕으로써 천하의 왕이 되어서 금천 씨라고 불렀으며, 죽어서는 금으로 배향되어 서방의 금덕의 신이 되었다.”라고 《여씨춘추》에서 소호가 금천씨가 된 유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소호는 금덕이 있어서 금천 씨가 되었거나. 금관의 신으로서 덕을 드러냈기 때문에 금천씨가 되었다. 흉노의 휴도왕이 금인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 지냈다는 기사는 소호금천씨의 후손이 흉노의 휴도왕임을 시사한다. 아울러 김씨 성이 매우 오래전부터 칭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흉노인과 가야계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중국 학자 손진기에 따르면 선진(先秦)시대에 북방민족은 흉노를 비롯해 동호, 산융, 동이, 예맥, 숙신, 한(韓) 등의 종족들이 넓게 분포되어 있었다. 그 중에 동호와 흉노를 보면 한(漢)대에 이르러 동호는 그 일부가 흉노로 흡수되고 일부는 오환·선비로 갈라진다. 동호는 곧 고조선 종족의 일부다. 한대에 흉노로 흡수된 동호(고조선) 종족 중에 김일제의 선조가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신라 문무왕도 흉노인인 김일제를 중시조로 인식했다. 문무왕은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의 누이인 문명왕후, 김문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양친이 모두 김씨이다. 문무왕 비문를 보자.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지후(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지(枝)가 영이함을 담아낼 수 있었다.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하였다.
‘투후 제천지윤’은 하늘에 제사 지내는 투후의 후손이라는 의미다. 투후는 한무제가 김일제에게 내린 제후의 이름이다. 문무왕은 신라 왕족이었으나 양친이 모두 김 씨인 점과 그의 모친이 가야계라는 점에서, 그는 집안 내력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왜 한반도로 이주해왔을까?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 “한(漢)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 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런 까닭에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에 숨어 살게 되었다”라고 했다.
왕망이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신新 서기 9~25)나라를 세웠는데, 이때 김일제의 후손들이 신나라의 조정에서 활약했었다. 왕망은 김일제의 증손인 김당과 형제다. 왕망과 김당은 김일제의 증손인 것이다. 그런데 한(漢) 광무제가 신나라를 멸망시키자 신나라 조정에서 요직을 차지했던 김일제의 후손들은 멀리 요동으로 가서 은거했다. 이때 김일제 후손들은 고조선 유민들과 융합되었을 것인데, 그 중 일부는 남하해서 가야를 건국했으며, 일부는 신라 김씨 왕족이 되었다.
조선시대 양반 가문의 자녀들은 어릴 적부터 집안 조상에 대한 내력을 암기하고 익혔다. 그래서 자기의 선조에 대한 내력을 모르는 양반은 없었다. 그 몇 대조만 몰라도 상민이 돈으로 족보를 산 것으로 여겼다. 김유신, 김씨 부인, 문무왕 등의 묘비에서 보여주는 것은 자기 선조에 대한 기록한 것이다. 이문기가 주장한 것처럼 6세기에 김수로를 가짜로 시조로 만들고, 나중에 소호금천씨를 또 원시조로 만든 것이 아니다. 본래 〈가락국기〉에서 말하는 ‘하늘’은 가깝게는 고조선의 유민이지만, 그들의 원시조는 소호금천 씨, 중시조는 김일제라는 인식이 전승되어 왔기 때문에 “헌원의 후예오, 소호의 자손”이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투후의 후손”이라고 했을 것이다.
김해 김씨, 김해 허씨, 인천 이씨 등이 포괄되어 있는 가락종친회는 모두 김수로왕과 허왕후를 시조와 시조모로 여긴다. 수로왕과 허왕후는 10남 2녀를 낳았는데, 큰 아들은 가락국 2대 거등왕이 되었고, 둘째, 셋째 아들은 허씨 성이 되었다고 여긴다. 또한 신라 경덕왕 때 허기가 당나라로 갔다가 안록산의 난으로 파천한 당 현종을 따라서 촉까지 갔기 때문에 당나라의 왕성인 이씨 성을 하사받아 이씨로 개정해 인천 이씨가 생겨났다. 지금보다 혈통의식, 신분의식이 강하던 고대에 장남은 수로왕의 김씨 성을 따르고, 차남과 삼남은 허왕후의 허씨 성을 따랐다는 내용은 만들어낼 수 없는 사실의 반영이다. 지금도 김해 곳곳에 남아 있는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유적들 또한 가락국 시조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시조 부부에 대한 존숭의 결과임을 말해준다.
그런데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일본 황국사관 역사학자들과 이들을 추종하는 남한의 강단사학자들만 이를 가짜라고 우기는 것이다.
4) 유네스코 등재는 세계인을 상대로 사기 치는 일
이제 정리해 보자. 《삼국사기》《삼국유사》가 가짜이면 가야의 건국연대도 가짜가 되고, 김해김씨 가락종친회 족보도 가짜가 된다. 그러나 강단 역사학자들이 《삼국사기》《삼국유사》 초기 기록이 가짜라고 내세운 근거는 빈약하기 짝이 없다. 자기들이 가짜라고 생각한다는 것뿐이다. 이를 가짜라고 생각하는 학자들끼리 그렇게 합의했다는 것뿐이다. 이들 논리의 허황됨은 오히려 《삼국사기》《삼국유사》 기록의 사실성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가야의 건국연대가 서기 42년이란 기록은 《삼국사기》《삼국유사》에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고, 고고학적으로도 증명되었다. 또한 중국의 여러 사료와 고고학 그리고 문화연구자들의 상징연구에 의해서도 확인되었다.
강단 역사학자들이 《삼국사기》《삼국유사》를 가짜로 모는 진짜 이유는 가야를 야마토 왜의 식민지로 몰기 위해서다. 고대 야마토 왜가 경상도뿐만 아니라 전라도, 충청도까지 차지했다는 황국사관론자들의 주장을 지금도 남한 강단사학자들이 추종한다는 사실은 세계 역사학계의 미스터리다. 이들은 심지어 이런 내용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고 한다. 가야사를 복원하라고 국고를 대주었더니 임나사를 복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인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려는 것이다. 한국인을 넘어 세계인을 우롱하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이 세계에 알려진다면 한국은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들은 승객을 가득 태우고 내리막길에 들어선 고장 난 버스와 같다. 이들을 멈추게 할 유일한 수단은 국민뿐이다. 진실을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 진실을 아는 국민들이 그들을 저지할 행동에 동참할 때 멈추게 될 것이다.
농협 301-2021-1015-11 식민사관으로 왜곡된 가야사 바로잡기 전국연대
여러분의 후원금은 우리 역사를 바로 잡는데 소중한 자금으로 사용될 것입니다.
첫댓글 전정부때는 다음만 사용했는데 문재앙 정부에서 다음을 버리고 네이버로 가서 다음에 잘 안오니 중요 공지를 놓쳐버렸네요. 공지봐도 제가 어제 수업이 있어서 참여 못했지만 마지막 수업 7~10시까지 쉬는 시간에 잠깐 들러 볼 수는 있었는데 앞으로는 카페 확인 자주 하겠습니다.
북제서에 성씨가 나타났으면 그전에부터 썼다는 말이 되는데 그걸 기록이 시초라고 보는 이유는 배가 표류를 했으면 그 전에도 많은 배가 오갔다는 말인데 그것도 무시하던 이모씨와 같은 사고 방식이네 무조건 우기면 되는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