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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에 이르는 길
1요한 5,5-13; 루카 5,12-16 / 공현대축일 후 금요일; 2025.1.10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리를 깨닫고 자신의 삶에서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일은 먹고 자고 일하는 일상의 활동만큼이나 어렵습니다. 아니, 더 어려울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져 있는 인생의 과제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진리에 이를 수 있을까요?
공현대축일부터 어제까지는 세상에 오신 메시아께서 누구이신지를 알려주는 공현의 징표를 선포했다면, 오늘은 공현의 과정이 어떠했는지를 선포합니다. 과연 메시아께서 세상에 알려지시는 과정은 어떠했을까요? 이는 오늘날에도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고 믿게 되는 과정이 어떠한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기에 이르렀습니까?
우선, 복음 선포자이신 예수님의 관점에서 오늘 복음 말씀을 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 지방에서 주로 활동하시던 예수님의 소문이 그 지방을 넘어 전국으로 퍼져 나가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치료할 엄두도 내지 못해서 천형(天刑)이라 불리던 나병을 예수님께서 당신의 뜻만으로 아주 간단하게 고쳐 주셨기 때문입니다(루카 5,13).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그 놀라운 치유 능력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몸이 깨끗해진 나병환자에게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단지 한 말씀만 하셨는데, 그것은 사제에게 가서 깨끗해진 몸을 보여주고, 그러니까 나병이 나았음을 증명해주고 이에 대한 예물을 바치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공생활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이 장면의 본질에 대해서는 오늘 독서에 나오는 사도 요한의 진술이 적중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셨으며, 성령으로 그분의 참 모습이 증언된다고 진술하였습니다. 여기서 물은 세상의 죄에 물들어 자기가 지은 죄를 씻어버리는 회개를 상징합니다. 의로움의 가치를 드러내는 세례성사의 은총입니다. 또 피는 아직도 여전히 사람들이 짓고 있는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한 희생을 상징합니다. 거룩함의 가치를 드러내는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이 의로움과 거룩함의 가치로 사회 공동선을 위해 헌신하는 사도직 활동은 불치의 나병이라도 깨끗하게 하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세상에 드러내어 주는 힘이 있습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신데, 이로써 세상은 온갖 오류와 이로 말미암은 우상숭배적이고 무신론적인 죄악들로부터 정화되어 깨끗하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 죄악들은 사탄이 조종하는 인간의 어두운 본성, 즉 탐욕과 지배욕은 물론 진리에 눈먼 무명(無明)까지 걸쳐있어서,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탐욕은 사람들이 함께 공동으로 소유해야 하거나 공동으로 사용해야 할 재화들을 독차지하려 들기 때문에 부동산 가격의 폭등, 분배정의의 지체, 빈부양극화 선호 등을 초래합니다. 지배욕은 기왕에 차지하고 있던 기득권의 카르텔을 방어하고자 허수아비를 내세워서라도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합니다. 무명은 세상에서 얻은 지식과 명성에 기대어 하느님을 가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눈먼 채로 살아가게 합니다. 이 세 가지가 물과 피와 성령, 즉 의로움과 거룩함과 사도직이 지닌 가치와 힘을 사회적으로 공현시켜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대적해야 할 과녁입니다. 즉, 공현의 과정은 물과 피와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다른 관점에서 오늘 복음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복음 선포자이신 예수님이 아니라 복음을 들은 수혜자인 나병환자의 처지에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신 이 치유 기적은 그가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치유 기적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지니신 신적 권능의 양적 비중이 99%라면 치유를 절박하게 원하던 나병 환자의 믿음은 1%밖에 안 될 정도로 그분의 능력은 절대적입니다. 하지만 질적으로 보자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만일 그 나병 환자가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께 매달리지 않았더라면 그는 결코 자신의 나병을 치유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질적 비중으로는 적어도 예수님의 능력과 나병 환자의 믿음이 50 대 50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나 사도직을 행함에 있어서나 우리가 발하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도 종속변수가 아니라 주요 독립변수입니다.
변수는 더 있습니다. 바로 사제에게 가서 검증을 받는 일입니다. 나병 환자는 그 전염의 위험성 때문에 격리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나병이 치유되어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돌아오고 싶다면 마을 사람들의 지도자격인 사제에게 치유의 검증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 검증 과정에는 종교적인 의미의 예물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혹시라도 이 절차를 생략하게 되면 그는 치유를 받지 못한 처지나 다름없이 마을 복귀가 허용될 수 없었으므로 치유와 믿음만큼은 아니어도 실제로는 이 검증도 필요했습니다. 종속변수입니다.
y= ∱(χ)+α라는 함수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여기서 함수 y는 치유된 나병입니다. 그리고 ∱(χ)의 χ는 나병 환자의 믿음과 사제를 통한 검증으로서 독립변수와 종속변수로 작용하고, α는 상수로서 예수님의 신적 능력으로 나타나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이는 모든 문제 해결과 사도직 활동의 목표 성취에 적용되는 공식입니다.
서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는 주체, 즉 변수가 성령과 물과 피라고 설파하고 있습니다. 이를 함수 방정식으로 표시하면, 「예수 그리스도=∱(물과 피)+ 성령」이라는 표현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요한의 어법상 의미로 물은 세례성사요 피는 성체성사이기 때문에 물과 피는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교회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교회)+ 성령」이라는 방정식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게 하는 주체는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의 신적 능력으로 나타나는 자비가 현대 가톨릭교회에, 특히 교황직에 어떻게 성령의 이끄심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현대 유럽의 지성을 대표할만한 빼어난 신학자 요셉 랏칭거 추기경은 요한 바오로 2세의 후임으로 교황직에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20년 이상 재직하면서 자신의 능력과 성향을 유감없이 발휘한 바 있었기 때문에 선출 과정은 길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유럽의 수호성인인 베네딕도로 정한 그는 관리자라기보다는 학자에 가깝다고 자신이 토로한 대로, 신앙교리 이외의 사목적 현안들을 처리하는 일이 몹시 버거웠고, 그보다는 ‘나자렛 예수’라는 총3권의 방대한 저작을 집필하는 데 몰두했습니다. 교황직에 선출될 때의 나이가 이미 78세였고 그 후 8년 간 교황직을 수행하면서 86세의 고령이어서 건강 문제도 있어서 그는 7백 년만에 종신직인 교황의 자리를 스스로 사임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가 보인 보수적 행보들 모두가 가톨릭교회의 정통성을 확인하고자 했던 그의 학자적 관심의 발로였습니다. 그는 학자답게 갈등의 소지가 있는 현안들을 다룸에 있어서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었고, 매사에 맺고 끊음이 분명하고 정확했습니다. 하지만 어린이 성추행을 저지른 성직자들을 처벌하는 일에 있어서나, 마피아와 관련된 검은 돈 세탁의 혐의를 받고 있었던 바티칸 은행을 개혁하는 일에 있어서는 교황청의 전통적 관료들의 관행을 거스르기 싫어서 미적거리다가 언론의 호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가 가장 잘한 일로 평가받는 것은 자발적 사임이라는 평이 그래서 나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나올 수 있도록 자신을 낮추었기 때문입니다.
이 결단은 1984년과 1986년에 해방신학 논쟁이 불붙을 무렵,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를 교황청으로 소환하여 경고를 하면서도, 해방신학의 주제와 노선을 공식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가톨릭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시작한 파스카 과업의 길을 더욱 명백하게 확장하게 만드는 공헌을 했던 결단의 연장입니다. 유럽 바깥에서, 그것도 라틴 아메리카라는 변방 제3세계의 목소리가 바티칸을 움직였던 최초의 사례였습니다. 누가 보아도 보수요 지성으로서는 최고였던 그가 해방신학 노선과 주제를 수용했기 때문에 보수 진영의 어느 누구도 감히 반대를 표명할 수 없었으며, 게다가 그 길로 온 교회를 끌고 나갈 수장으로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등장하도록 문을 열어놓았기 때문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겸손하면서도 과감하게 개혁 행보를 걷고 있어도 현재 보수파 일각의 볼멘 소리가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대세를 뒤집지 못하는 마법과도 같은 보증효과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세례자 요한을 닮았습니다. 그래서 베네딕도 16세의 공현적 성과를 함수 방정식으로 표현하면, 「y=∱(프란치스코)+성령」입니다.
이제 복음 선포의 사명을 계승해야 할 제3자, 즉 우리의 입장에서 오늘 복음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바다에 살고 있으면서도 바다를 보고 싶어 찾아 헤매는 어린 물고기 이야기는 구도적인 신앙인들에게 영원한 고전적 화두입니다. 십자군 전쟁 당시의 유럽 가톨릭 신자들은 위로 교황청에서 아래로 농노에 이르기까지 어린 물고기를 빼 닮았습니다. 종교라고는 그리스도교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가톨릭 교회는 교황만이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철학자는 플라톤에, 신학자는 아우구스티누스밖에 없는 줄로 알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유럽 가톨릭 신자들은 이슬람교라는 더 강력한 상대를 만났으며, 교황도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음을 알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를 계승함으로써 스승 플라톤을 능가하였음을 알게 되었는가 하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방법론으로 활용해서 사람들을 깨우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로 나온 기념비적인 저작이 ‘신학대전’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소크라테스가 그러했듯이 아무것도 전제하지 않고 심지어는 하느님의 존재 자체도 전제하지 않고 처음부터 세상의 질문으로 시작해서 대상자의 깨우침으로 끝내지요. 그래서 질문도 많아져서 방대한 대작이 되고 말았지만 신학대전의 핵심은 단 두 가지, 소크라테스에서 비롯된 근본적 질문인 자기 자신을 알라는 묵시적 요청과, 요한 사도를 통해 계시된 근본적 해답인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존재라는 명시적 진리뿐입니다.
중세 유럽인들에게 자기 자신이 얼마나 모르는 게 많은지, 정작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며, 따라서 우리들 각자는 서로의 인격과 양심과 신앙을 존중해야 하며, 설사 개인이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잘못된 행위를 하더라도 그 개인이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질 때까지는 그 잘못된 선택과 행위마저도 존중되어야 함을 깨우쳐주고 싶었던 사람은 이슬람 현자인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Cide Hamete Benengeli)였습니다.
이슬람 세력의 점령 하에 있었던 중세 시대 말기에 스페인의 세르반테스는 아랍어로 쓰여진 베넹헬리의 글을 읽고서 스페인어로 번역해서 동시대 유럽인들에게 알리고자 했습니다. 중세에는 워낙 교회의 출판 검열이 심해서 세르반테스는 묵시문학가들의 수법을 흉내내서 라만챠의 괴짜 기사를 풍자하는 이야기 속에 자신의 메시지를 담았습니다. 주인공 돈키호테는 중세 봉건 왕조로부터 억압받고 역시 봉건 체제의 눈먼 가톨릭 교회의 다스림을 받으며 스스로는 판단 중지를 당하는 중세 유럽 가톨릭 신자의 전형이었습니다. 세르반테스는 이렇게 주인공을 설정하고 나서 중세 봉건 질서의 폐단을 신랄하게 풍자했습니다. 계급과 신분 질서가 얼마나 비인격적인지, 종교는 얼마나 무지몽매하며 그러면서도 폭력적으로 신자들을 우매하게 가두어 놓고 있는지,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이며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 등을 깨달아야 함을 말하고자 했던 공로로, 세르반테스는 근세를 열어젖힌 지식인으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신곡’이라는 작품으로 당대 중세 봉건 교회의 천국관, 지옥관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실감나게 묘사했던 단테와 같은 근세인의 반열에 세르반테스를 올려 놓은 사람들은 그 당시 사람들이 아니고 몇백 년이 지난 후의 현대의 독자들이었습니다.
소설 ‘돈키호테’에는 당시 교회를 대변하는 가톨릭 사제를 비롯하여 시대착오적인 중세 봉건 시대를 상징적으로 연출하는 여러 인물이 등장합니다. 사제는 이 작품에 대해 평하기를, 기발한 구석이 있지만 결론은 아무것도 없다고 혹평하는데, 이 혹평이 당시 가톨릭 교회의 헛똑똑함을 비웃는 풍자입니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악마에 대항한다고 설치면서 엉뚱한 여성 신자들을 마녀로 몰아서는 화형을 시키는 악행을 아무런 양심 가책 없이 저지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르반테스는 종교재판감으로 보이지 않으려고 돈키호테의 호들갑스러운 돌출행동과 모험 가득한 영웅담으로 위장한 것이지요. 그러나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로 하여금 부각시킨 작중 인물은 당시 평범한 중세 유럽 가톨릭 신자를 상징하는 농사꾼 처녀 덜시네아였습니다. 그는 돈키호테가 사모하는 인물이지만 작품 가운데에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덜시네아는 돈키호테에게는 공주와도 같은 품위를 지닌 고귀한 인물인데, 정작 본인은 자신의 품위를 모르고 지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온몸에 나병이 걸려 흉측해진 사람을 만나서 본래의 건강한 모습으로 되찾아주신 것처럼, 사도 요한은 자신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독자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는 존재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내적 정체성을 깨닫는 일, 진정한 공현의 시작입니다.
첫댓글 공현의 의미가 쉬운 듯하면서 어려워요
지금까지 공현대축일을 이런 깊은 뜻도 모르고 그냥 지나쳤다니..
여러번 읽으면서 새겨보아야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