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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1일 토요일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요한16,23ㄴ-28)
제1독서<아폴로는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논증하였다.>(사도18,23-28)
바오로는 안티오키아에서 23 얼마 동안 지낸 뒤 다시 길을 떠나, 갈라티아 지방과 프리기아를 차례로 거쳐 가면서 모든 제자들의 힘을 북돋아 주었다.
24 한편 아폴로라는 어떤 유다인이 에페소에 도착하였는데,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달변가이며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25 이미 주님의 길을 배워 알고 있던 그는 예수님에 관한 일들을 열정을 가지고 이야기하며 정확히 가르쳤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설교하기 시작하였는데, 프리스킬라와 아퀼라가 그의 말을 듣고 데리고 가서 그에게 하느님의 길을 더 정확히 설명해 주었다.
27 그 뒤에 아폴로가 아카이아로 건너가고 싶어 하자,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그곳의 제자들에게 그를 영접해 달라는 편지를 써 보냈다. 아폴로는 그곳에 이르러,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미 신자가 된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28 그가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논증하면서, 공공연히 그리고 확고히 유다인들을 논박하였기 때문이다.
<화답송>시편47,2-3.8-9.10(◎8ㄱ) ◎ 하느님이 온 누리의 임금이시다.
○ 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주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 경외로우신 분, 온 세상의 위대하신 임금이시다. ◎
○ 하느님이 온 누리의 임금이시니, 찬미의 노래 불러 드려라. 하느님이 민족들을 다스리신다. 하느님이 거룩한 어좌에 앉으신다. ◎
○ 뭇 민족의 귀족들이 모여 와, 아브라함의 하느님 그 백성이 된다. 세상 방패들이 하느님의 것이니, 그분은 지극히 존귀하시어라. ◎
복음<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요한16,23ㄴ-28)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2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25 나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가 온다.
26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27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28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사도18,23-28)
"한편 아폴로라는 어떤 유다인이 에페소에 도착하였는데,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달변가이며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이미 주님의 길을 배워 알고 있던 그는 예수님에 관한 일들을 열정을 가지고 이야기하며 정확히 가르쳤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설교하기 시작하였는데, 프리스킬라와 아퀼라가 그의 말을 듣고 데리고 가서 그에게 하느님의 길을 더 정확히 설명해 주었다." (24-26)
사도행전 18장 24절부터 28절까지는 바오로에 대한 기록이 중단되고, 아폴로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이것은 제3차 선교 여행에서 앞으로 바오로가 3년간이나 머물며 사목할 장소인 에페소에서, 제2차 선교 여행 이후 바오로가 떠나 있었던 동안에, 어떠한 일이 발생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즉 바오로가 에페소를 떠난 사이, 아폴로라는 사람이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와서 예수께 관한 것을 가르쳤다는 에페소 선교의 예비적 상황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아폴로'(apollos)라는 이름은 '파괴하다'는 의미가 있는 '아폴뤼미'(apollymi)에서 유래된 것으로, '파괴자'란 뜻을 지니고 있다.
'달변가'로 번역된 '로기오스'(logios)는 '말'이란 뜻을 지닌 '로고스'(logos)에서 유래한 단어이므로, 일차적인 의미는 '구변이 좋은'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로고스가 '학문', '도'(道)라는 뜻도 있으므로, '학식있는 (사람)' 을 뜻하는 'a learned(man)' 으로 번역될 수 있다.
또한, 아폴로는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성경'에 해당하는 '그라파이스'(graphais)가 복수형으로 쓰인 것은, 구약 성경에 두루 능숙하였음을 암시한다.
특히 '정통한'으로 번역된 '뒤나토스'(dynatos)가 '힘', '능력'을 의미한다는 점으로 볼 때, 그는 성경이 지니고 있는 의미와 감동을 청중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성경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이해력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그리스 학문의 도시이며, 아프리카 지역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들이 밀집하여 사는(사도6,9;19,24)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서, 어려서 부터 충분히 학문적 훈련과 성경적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열정을 가지고'에 해당하는 '제온 토 푸뉴마티' (zeon to pneumati)에서 '제온'(zeon)의 원형 '제오'(zeo)는 '끓어오르다', '분출하다' 라는 의미이며, 본문에서 '영'(spirit)을 뜻하는 '프뉴마'(pneuma)의 여격 '프뉴마티'와 함께 쓰여서, 성령으로 인한 끓어 오르는 열정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였다.
즉 아폴로의 선교는 그 안에서 폭발하는 성령의 열정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또한 '정확히'로 번역된 '아크리보스'(akribos)는 '정밀하게', '부지런히' 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니는 부사이다.
따라서 본문은 아폴로가 예수께 관한 것을 열정적으로 가르쳤을 뿐 아니라, '정확하게' 또는 '부지런히' 가르쳤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예수께서 어디에서 탄생하셨으며, 그가 이 땅에 와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또한 그가 사람들에게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에 대해서 구약 성경에 입각해서 매우 정확히, 또는 부지런히 가르쳤음을 뜻한다.
'요한의 세례'로 번역된 '밥티스마 이오안누'(baptis ioannu)는 직접적으로는 세례자 요한이 베푼 물 세례를 가리키는데(요한1,26), 이를 통해 볼 때, 아폴로가 세례자 요한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교훈을 배웠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아폴로는 세례자 요한으로 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기보다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를 통하여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폴로가 세례자 요한의 세례만 알았다는 것은 그가 예수의 공생활 초기까지만 살아 활동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을 통해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께 관한 그의 지식에 한계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비록 아폴로가 물 세례는 받았지만,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파견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받는 세례, 즉 성령 세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마태3,11; 요한3,3-5,16,7-15; 사도2,1-4,8,14-17)
유대인중 석학이었던 아폴로는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에페소 회당에서 가르치도록 허락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가르치는 그 회당에 프리스킬라와 아퀼라 부부가 참석해 듣고 있었으며, 이들은 아폴로의 가르침 중에 핵심이 빠져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챘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지만, 유대인 석학 아폴로는 알지 못하는 복음의 핵심을 아폴로에게 자세히 풀어 가르쳤다. 여기에서 '더 정확히' 로 번역된 '아크리베스테론'(akribesteron)는 앞절에서 '정확히'로 번역된 부사 '아크리보스'(akribos)의 비교급이다.
이것은 프리스킬라와 아퀼라가 그리스도를 아는 데 있어서 불완전함을 지니고 있었던 아폴로에게 그리스도께 관한 온전한 지식을 매우 정확하고도 주도 면밀하게 가르쳤음을 보여 주기 위해 쓰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제반 학문과 구약 성경을 배운 아폴로는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오심등에 관한 전체적인복음의 내용들을 습득하였을 것이다.(사도17,3)
아폴로의 설교를 회당에서 들으면서, 그의 결점을 대중 앞에서 드러내지 아니하고, 복음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들의 집으로 데려다가 가르친 프리스킬라와 아퀼라의 겸손한 태도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천막을 제조하고 파는 사업가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당대의 석학이라고 자부하는 아폴로가 겸손히 배우는 자세는 참으로 본받을 만하다.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형님 집에 놀러 갔다가 어린 조카 녀석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네 살 동생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여섯 살 오빠가 빼앗으려다가 싸움이 난 것입니다.
집안 여기저기에 수많은 장난감이 쌓여 있는데도 동생의 장난감이 탐난 모양이었습니다.
동생도 만만치 않습니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용을 쓰다가 장난감을 끌어안은 채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오빠가 흠칫하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납니다.
그러고는 곧장 엄마에게 달려가“나 저 장난감 가지고 놀고 싶어요.” 하고 간절한 눈빛으로 도움을 청합니다.
두 아이 사이에서 형수는 엄마로서 먼저 오빠에게 충고합니다.
동생을 괴롭히면 안 된다고, 다른 장난감도 많으니 그걸 가지고 놀라고. 그러고는 네 살 동생에게도 오빠랑 사이좋게 놀아야 한다고 다독입니다.
여섯 살 조카 녀석의 요구가 받아 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집안은 다시 평화로워집니다.
입시 철이 다가오면, 자식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게 해 달라는 부모들의 기도가 줄을 잇습니다.
미사와 기도의 지향에 대 놓고 ‘합격하게 해 달라.’는 말은 못 하지만, 결국 그런 의향으로 미사도 봉헌하고 기도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의 앞날이 평탄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이런 기도를 들으셔야만 하는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난처하실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 합격하면 좋겠지만, 누군가가 합격하면 누군가는 불합격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런데도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가 합격하게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정의와 공정의 하느님이 아니라, 나만을 위한 하느님, 내 가족만을 위한 하느님이 되어 주십사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가지고 놀고 싶으니, 엄마에게 동생의 장난감을 빼앗아 달라는 여섯 살 아이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오늘 복음의 이 말씀을 묵상하며, 먼저 우리가 무엇을 청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자신만을 위하여 하느님을 곤란하게 만드는 요구를 계속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우리는 주님을 먹고, 주님으로 存在한다.
(요한16,23ㄴ-28)
2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 그 날, 보호자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 날에는- *묻다(에로타오) *청하다(아이타오)와 혼용해서 쓰는말로 성령이 오시면 아무것도 청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아무것도 묻지도 청할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뜻이다. 곧 참 신자, 성도는 결국에는 아무것도 기도할 필요가 없는자로 완성된다는 말씀이다.
23ㄴ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 청하면 무엇이든지 주신다? 그 말씀은 신자는 청할 것이 없는 사람이며 동시에 청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마태6,31-32) 31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 청하지 말아야할 것들이다. 다른 민족들이 찾는 것은 청하지 말라 하신다. 왜? 하느님께서 다 아시고 필요한대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이렇게 분명하게 기록하셨는데도 사람들은 절대 수긍하지 않는다. 인간의 욕심이 깨닫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도18,28) 28 그가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논증하면서, 공공연히 그리고 확고히 유다인들을 논박하였기 때문이다.
=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의 뜻인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뜻을 위한 사람들의 얘기로 들은 예수로 믿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세상의 것을 적게 달라고 기도하겠는가.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기도를 모두 응답하시어 각자가 청하는 것을 모두 주신다면 세상의 모든 질서는 무너지고,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것은 하느님의 필요대로 주셔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필요를 애써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청해야 할 것은?
(마태6,33-34)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 노후 준비 말고 사후 준비를 하는 것이다. 내일은 우리의 시간이 아니다. 하느님의 시간이다. 그 내일은 내일이신 하느님께 맡기라는 말씀이다. 그러기 위해서 구원의 약속, 그 말씀을 알고 , 그 말씀에 의탁하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 곧 하느님께만 의로움이 있으며 그 의로움을 우리 죄인들에게 주시기 위해(로마3,25참조) 당신 아드님을 우리의 죄로 십자가에 못 박으셨음을, 그래서 우리가 거저 의롭게 되어(로마3,24) 내일, 그 하느님의 사랑에 자녀, 백성이 될 것이니 그분의 통치에 순종하는 자로 성숙시켜 달라는 기도는 열심히 하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신자(성도)는 청할 것이 없는 사람이며 청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 지금까지 예수님의 이름, 그분의 뜻과 일치된 기도, 즉 내일을 위한, 구원을 위한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생각해 보자,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 정작 예수님께서 “:너 기도하나 안 했어” 라는 꾸중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도는 하느님 앞에서 내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깨닫고 고백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인 것이다.
솔직한 죗성의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하느님께 용서, 구원을 의탁 할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믿음에 있어서 너무나 연약함을 알기에 믿음의 문제를 두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기도는 만남, 하나 됨이다. 흙인 나를 사람으로 창조하신 하느님과의 만남, 전능하신 사랑, 용서로 품어주시는 아버지와의 만남, 창조주와 피조물의 하나 됨이다.
25 나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가 온다.
= 창조주 하느님을, 그분의 뜻을, 피조물인 우리의 지혜로는 알아들을 수 없다. 그래서 비유로 말씀하실 수밖에 없으셨다. 그러나 이제 아버지를, 그분의 뜻을 알려주실 때가 오신다고 하신다.
성령께서 가르치시어 깨닫고 믿게 하시는 때다.
(요한14,26)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1코린2,10) 10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말씀 안에 머무름이다.
(요한8,31-32)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 진리는 곧 성령이시다(1요한5,6)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알아 들으면~
26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뜻)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하느님의 뜻, 그 자체가 예수, 곧 구원이라는 것이다.
27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28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어 우리 죄의 속죄 제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그 죗값을 당신의 목숨으로 다 갚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아버지께 가신다. 그러나 우리를 고아로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기 위해 곧 다른 모습의 보호자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오시기 위해,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해 가시는 것이다.
*욕심을 가진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 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알기에 나를 아버지께 부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신에 대해서는 점점 기도할 필요가 없어지고 영적임 문제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신자(성도)는 성령으로 인해 새로운 세계를 살아가게 된 사람들이다. 새로운 세계를 위해 청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마태6,7-11)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8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 오늘(쎄메론- 그날, 그 때) 일용할 양식(*히브리어-어피우시오스, 꼭 필요한 양식 *아람어- 마헬, 내일의 양식) 현세를 위한 육신의 양식이 아니라 내일, 그 하느님 나라를 위한 곧 성경 전체에 들어있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의 뜻, 그 진리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깨닫고, 믿게 해 달라고 청해야 하는 것이다.
(루가2,12) 12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짐승들의 먹이통)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 예수님을, 그분의 모든 말씀을, 하신 기적, 표징을 죄인들의 용서,구원을 주시는 내일의 양식으로 먹어야 하는 것이다.
☨ 천주의 성령님! 부족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멘.
부활 제6주간 토요일 복음 (요한16,23ㄴ-2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23)
요한 복음 16장 23절(ㄴ)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제자들은 성부 하느님께 기도해야 함을 보여 주며, 성부 하느님께서는 기도의 응답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실 것을 말해 준다.
이것은 믿은 이들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기도의 원리를 가르쳐 주며,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관용구를 사용하셔서 이 말씀에 깊은 관심을 기울일 것을 촉구하셨다.
여기서 '주실 것이다'로 번역된 '도세이'(dosei; he will give)는 미래 시제로 '계속해서 주실 것'이라는 진행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심으로써 그 제자들의 삶에 나타난 획기적인 변화는 예수님의 이름을 통하여 하느님과 통교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중보자(중재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믿는 이들은 무엇이든지 아버지 하느님께 직접 청할 수 있게 되었으며, 믿는 이들인 우리가 청할 때에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것을 주신다.
또한 제한적으로 몇 번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신다(마태7,7~11).
지혜도 주시고(야고1,5), 능력도 주시며(필리4,13), 일용할 양식(마태6,11)을 비롯하여 우리가 믿는 이로서의 삶을 살고, 또한 소명을 수행하는 데에 필요한 일체의 것들을 주신다.
이처럼 믿는 이들의 기도는 이처럼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기도하지 않거나 기도를 소홀히 여기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아주 특별한 능력을 활용하지 않는 것과 같이 영적으로 너무나 미련한 믿음의 자세인 것이다.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이방인들은 신의 이름을 거듭 부르면, 신을 조종하여 바라는 바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주실 것이다.” 하신 말씀은, 그러한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오직 아버지의 뜻만 생각하신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내 뜻만 고집하기보다 먼저 그분의 뜻을 찾고 나의 의지가 그 뜻에 일치되기를 청하는 이에게 하느님께서는 가장 좋은 선물인 성령을 주십니다.
그 성령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충만한 기쁨, 이해와 깨달음, 아버지의 사랑을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여야 할 것은 무엇보다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으로 아버지의 사랑과 구원 의지를 결정적으로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께 직접 청하고 사랑과 기쁨을 받아 누리게 하여 주십니다.
제1독서에서 아폴로는 예수님을 증언한 탁월한 설교가였지만 요한의 세례만 아는 이, 곧 성령의 세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프리스킬라와 아퀼라로 말미암아 성령을 알게 되고, 마침내 바오로가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1코린 3,6)라고 말할 정도로 하느님의 소중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문득 ‘내가 하느님께 무엇을 간절히 청한 때가 언제였던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아버지께 필요한 은총과 성령을 청하는 자녀의 삶으로 서둘러 돌아갑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강수원 베드로 신부)
[부활 제6주간 토요일]
기도는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느님 앞에 고백하며 의탁하는 소중한 기회다.
복음(요한16,23-28)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25 나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가 온다. 26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 신자(信者)는 청하지 않은 것을 청하게 될 것이라는, 곧 육의 것은 아무것도 청할 필요가 없는 자로 완성될 것을 기도(祈禱)로 ‘어떤 존재인가’를 가르치실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27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請)하지 않았는데(24절) 그 날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게 될 것이라 하신다. 지금까지는 하느님, 예수님의 뜻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의 뜻을 위해 기도했다는 말씀이다. 올바른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올바른 기도’란~
(마태6,31-32) 31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 성도(聖徒)는 먹을 것, 입을 것, 생존에 필요한 것을 청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세상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구(求)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 하느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줄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청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말이 싫다. ‘성경(聖經)에 분명하게 쓰여 있는데’도 수긍(首肯)하려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세상의 것이고, 넘치도록 받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세상의 것을 적게 달라고 기도하겠는가.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다 들어 주신다면 세상의 질서는 무너지고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것은 하느님의 뜻, 필요대로 주셔야 한다. 우리의 계획과 욕망에 의해 주어진다면 자연의 순리가 무너져 세상은 삽시간에 망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필요를 애써 청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태6,33)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곧 ‘하느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자로 성숙시켜 달라’는 그 오른 기도를 열심히 하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육(肉)의 문제를 영(靈)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2코린4,18) 18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 육의 문제를 육신(肉身)의 시각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빨리 해결되는 것만을 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靈的)인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당면한 문제의 해결을 구하는 기도에 앞서, 그 문제를 통해서 하느님을 더 많이, 선명하게 알게 되기를 청하게 된다.
그것이 하느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신자(信者)의 참된 기도(祈禱)다. 24절을 다시~~
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뜻과 일치하는 기도를 의미한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뜻, 육(肉)의 이익을 위해 오셨다고 생각했기에 기도를 아무리 많이 했어도 아무것도 청하지 않는 것이 된다. 기도(祈禱)라는 행위는 있었지만 하느님께서 들으시는 예수님의 이름, 뜻으로 한 기도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기도는 하느님 앞에서 내 자신이 얼마나 연약(軟弱)한 존재인가를 고백하는 소중한 기회다.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느님 앞에 고백하며 의탁하는 소중한 기회다. 믿음에 있어서 너무나 연약함을 알기에 믿음의 문제를 두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육의 욕망을 가진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알기에 나를 아버지께 의탁(依託)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육신에 대해서는 점점 기도할 필요가 없어지고,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성도(聖徒)는 성령에 의해서 새로운 세계를 살아가게 된 사람이다. 새로운 세계에서 청(請)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신자는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문제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랬을 때 무제 해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문제에서 하느님의 뜻을 배우는 것이 중요함을 알게 된다.
(로마5,8) 8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 감사(感謝)!, 감사할 일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 뜻 안에서 기쁨이 충만(充滿)하게 되는 것이다.
(필리4,6-7) 6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믿음)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7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28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육신을 입으시고 오셔서, 우리의 죄 값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죄의 용서, 구원의 의로움이 ‘다 이루어졌다.“ 하시고 우리에게 하늘의 의(義), 평화(平和), 기쁨(喜)을 주시고 아버지께 돌아가심이다. 늘 기억하자~
(로마6,10-11) 10 그분께서 돌아가신 것은 죄와 관련하여 단 한 번 돌아가신 것이고, 그분께서 사시는 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11 이와 같이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1테살5,10) 10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히브9,15) 15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보호자이시며 사랑, 진리이신 천주 성령님!
우리의 삶속에서 늘 함께 하시며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올바른 기도의 길로 이끄시니 감사 합니다. 저희 모두의 마음을 불을 놓으시어 오늘 말씀들이 믿음으로 자라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2024년 05월 11일 토요일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과 끊임없이 소통할 수 있는 방법, 곧 ‘기도’에 대하여 알려 줍니다. 본문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강조 용법으로 시작되며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청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마치 주문을 외우기만 하면 바라는 것이 뚝딱 이루어진다는 현혹처럼 들리기도 하고, 무모한 약속으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전제 조건이 하나 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복음의 뒷부분에 그 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라고 전제하시며, 당신께서 대변인처럼 우리의 처지를 하느님께 청하여 주시겠다는 의미가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곧 기도는 청탁이나 거래, 주문을 외우는 자리가 아니라 사랑과 믿음으로 소통하는 자리임을 분명히 알려 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바라는지,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지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기도는 그렇게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배려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이고, 그 만남이 주는 평화와 사랑을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믿음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허락하시고 들어주십니다.
주문이나 주술로서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진심 어린 사랑의 관계에서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