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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6일 목요일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이들이 하나가 되게 (요한17,20-26)
제1독서<너는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사도22,30; 23,6-11)
30 천인대장은 유다인들이 왜 바오로를 고발하는지 확실히 알아보려고, 바오로를 풀어 주고 나서 명령을 내려 수석 사제들과 온 최고 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리고 바오로를 데리고 내려가 그들 앞에 세웠다.
23,6 의원들 가운데 일부는 사두가이들이고 일부는 바리사이들이라는 것을 알고, 바오로는 최고 의회에서 이렇게 외쳤다. “형제 여러분, 나는 바리사이이며 바리사이의 아들입니다. 나는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희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7 바오로가 이런 말을 하자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면서 회중이 둘로 갈라졌다.
8 사실 사두가이들은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주장하고, 바리사이들은 그것을 다 인정하였다.
9 그래서 큰 소란이 벌어졌는데, 바리사이파에서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일어나 강력히 항의하였다.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영이나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면 어떻게 할 셈입니까?”
10 논쟁이 격렬해지자 천인대장은 바오로가 그들에게 찢겨 죽지 않을까 염려하여, 내려가 그들 가운데에서 바오로를 빼내어 진지 안으로 데려가라고 부대에 명령하였다.
11 그날 밤에 주님께서 바오로 앞에 서시어 그에게 이르셨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화답송>시편16,1-2ㄱ과 5.7-8.9-10.11(◎1) ◎ 하느님, 저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 하느님, 저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주님께 아뢰나이다. “당신은 저의 주님.” 주님은 제 몫의 유산, 저의 잔. 당신이 제 운명의 제비를 쥐고 계시나이다. ◎
○ 저를 타이르시는 주님 찬미하오니 한밤에도 제 양심이 저를 깨우나이다. 언제나 제가 주님을 모시어, 당신이 제 오른쪽에 계시니 저는 흔들리지 않으리이다. ◎
○ 제 마음 기뻐하고 제 영혼 뛰노니, 제 육신도 편안히 쉬리이다. 당신은 제 영혼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구렁을 보지 않게 하시나이다. ◎
○ 당신이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고, 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하리이다. ◎
복음<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17,20-26)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셨다. “거룩하신 아버지, 20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21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22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24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25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6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제1독서 (사도22,30; 23,6-11)
"그 무렵 천인대장은 유다인들이 왜 바오로를 고발하는지 확실히 알아보려고, 바오로를 풀어 주고 나서 명령을 내려 수석 사제들과 온 최고 의회를 소집하였다." (22,30)
사도 바오로는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었다. 로마 시민을 우대하는 조항이 많았던 로마법에 따르면, 정식으로 고소한 사람이 있어야만 비로소 로마 시민을 심문할 수 있었다. 사도 바오로의 경우 정식 고소자가 없었으므로 형사범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천인대장은 제일 먼저 사도 바오로의 결박을 풀어 주었으며, 그 후 산헤드린 최고 의회를 소집하여 사도 바오로가 종교적 범죄를 행하였는지 알고자 했다.
'풀어주고 나서'라고 번역된 '엘뤼센 아우톤'(elysen auton)은 '속박으로부터 해방하다'라는 뜻을 지닌 '뤼오'(lyo)의 부정(不定; indefinite) 과거형 '엘뤼센'(elysen)이 남성 3인칭 대명사 '아우톤'(auton)과 결합되고 있어서, 직역하면 '그를 석방했다'가 된다.
이 본문은 사도 바오로가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안 천인대장이 사도 바오로를 자유롭게 풀어 준 사실을 묘사한 것이다.
즉 본절은 단순히 사도 바오로가 문자적인 의미의 결박에서만 풀려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유인의 신분으로 되돌아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둘러싸고 벌어진 소요가 있었으므로, 치안을 책임지고 있었던 천인대장으로서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규명해야만 했고, 바로 그 문제를 종교적인 것으로 생각했으므로 '산헤드린'을 소집했던 것이다.
원문에는 '쉬네드리온'(synedrion)으로 나오는데, '산헤드린 최고 의회'를 말한다.
이 최고 의회는 71명의 의원, 즉 율법학자들(서기관들), 원로들, 수석 사제들 가문 중에 탁월한 구성원들, 그리고 이 집단의 의장인 대사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유대지역을 관할하던 로마인 통치자들은 산헤드린 최고 의회 법정에 소송 사건을 심리할 권한을 부여하고, 또한 사형 판결을 내릴 권한도 주었다.
다만 산헤드린 최고 의회가 내린 사형 판결은 그것이 로마의 행정 장관(총독)에 의해 승인되지 않을 경우에는 유효하지 않다는 제한이 있었다(요한18,31).
천인대장이 이와같은 권한을 가진 산헤드린 최고 의회까지 소집한 것은 그가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이 사건을 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시 산헤드린 최고 의회가 사도 바오로를 죽이려고 담합한 집단(사도23,12~16)이라는 사실과 그들이 내리는 심리 결과가 사도 바오로를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어쨌든, 사도 바오로에 대한 천인대장의 이러한 신중한 태도, 즉 진실 규명을 위해 산헤드린 최고 의회를 소집한 것은 사건을 또 다른 국면으로 전개시키는 원인이 된다.
'의원들 가운데 일부는 사두가이들이고 일부는 바리사이들이라는 것을 알고, 바오로는 최고 의회에서 이렇게 외쳤다.' (23,6ㄱ)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거슬러 가르친다는 혐의로(사도21,28) 이 자리까지 나오게 되었지만, 대사제에 대한 자신의 공격성 발언으로 인해 산헤드린 최고 의회로부터 공정한 판결을 받을 수 없음을 직감하고, 의원들 간에 존재하고 있는 신학적 이견을 충돌시킴으로써, 자신이 처한 위기 상황을 돌파하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사도 바오로의 기민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사두가이나 바리사이가 가진 신학전 이견들은 무엇인가?
우선 사두가이들은 당시 수석 사제들과 산헤드린 최고 의회 회원 등 종교, 정치적 귀족들과 그 추종자들로 구성된 기득권층이었다.
'사두가이'(saddukaion; 사두가이온)란 이름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대사제였던 '차독'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었다(2사무15,24; 1열왕1,34).
그들이 역사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것은 B.C.160년경 하스모니안 왕조때부터이다. 에제키엘 40장 46절 중에 차독 가문에게 성전 관리를 위임한 것에 착안하여 일부 수석 사제들이 차독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기득권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 권위가 있는 것으로 받아 들이고, 다른 성경 및 전승 문서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하느님께서는 일단 율법을 주신 후 인간사에는 관여하지 않으므로, 오직 인간의 자유 의지만 있을 뿐, 하느님의 섭리는 없다고 보았다. 뿐만 아니라 천사나 사탄등의 영계는 물론 죽은 자의 부활과 영생등 내세도 부정하였다.
이처럼 이들은 하느님의 위격과 내세는 인정하지 않았고, 오로지 현실 생활만을 인생의 전부로 보았기 때문에 극도의 현실 추구로 도덕성을 상실하였다.
즉 그들은 신성한 성전 제도까지 상품 거래 행위로 전락시켰으며, 백성을 기만하고 수탈하면서 자신들의 이권만 추구하였으므로 백성의 혐오를 받았다.
한편 '바리사이'라는 이름은 '분리하다', '구별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파라쉬'(parashi)에서 유래하여 '분리된 자' 또는 '구별된 자'란 뜻을 지닌다.
그들은 하시딤(Hassidim; 경건한 자들)이라고 불려지던 B.C.4세기 경의 종교 개혁 주장자들의 후예들이었다.
특히 하시딤이 주동한 마카베오 혁명 이후, 하시딤파 중에 더욱 더 조직화된 분파가 B.C.170년경에 바리사이파로 성장했다.
그들은 모세를 유대교 창시자로, 에즈라를 유대교의 중흥자로 존중했으며, 모세 율법은 물론 모세 율법을 해석한 자신들의 전승(Tradition)도 동일한 권위가 있다고 믿었다. 또한 수석 사제들이 유대교를 장악하는데 반대하여 일부 의식과 율법을 자유롭게 해석했다.
이와 더불어 그들은 인간의 부활과 내세 그리고 천사와 마귀같은 영적세계를 인정함으로써, 사두가이파와 큰 차이를 보였다.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이 지닌 양자간의 이런 명백한 교리 차이는 늘 논란거리가 되었으며, 사도 바오로는 위기 타개책으로 이것을 이용하려 한 것이다.
"그날 밤에 주님께서 바오로 앞에 서시어 그에게 이르셨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23,11)
산헤드린 최고 의회 회원들에게 큰 고초를 치른 날이 다 가고, 이제 밤이 찾아 왔음을 문학적으로 잘 표현한다. '밤'이라고 번역된 '뉙티'(nykti; night)는 문자적으로는 시간을 나타내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나(요한6,17; 20,1), 또한 암울하고 어두운 상황을 나타내는 비유적인 용법으로도 사용된다(마태4,16; 루카1,79).
사실 사도 바오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 그곳에서 발생될 여러가지 일들로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사도20,22~23; 21,13; 로마15,31). 아니나 다를까 그는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배척받았고, 살해의 위협까지도 느꼈다(사도22,22.30).
더군다나 예전에 자신과 특별한 관계가 있었던 산헤드린 최고 의회에서도 심한 고초를 당했다. 만일 일이 악화되기라도 한다면, 그는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사도 바오로가 이렇게 그의 인생에서 다시는 없을, 지독하게 어두운 밤을 맞이하게 된 것을 루카는 객관적 묘사인 동시에 상징적 의미도 지니는 '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바오로를 홀로 버려 두시지 않으셨다. 놀랍게도 바로 그 밤에 주님께서 나타나신 것이다.
'주님께서 바오로 앞에 서시어'
사도 바오로의 인생에 어두운 그늘이 엄습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위로자로 나타나셨다.
여기서 '주님'으로 번역된 '퀴리오스'(kyrios)는 '주인'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사도 바오로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역사의 주인이시기도 한 예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잘 보여주는 단어이다.
바로 그 예수님께서 인생의 어두운 그림자에 휩싸여 있는 사도 바오로에게 친히 나타나신 것이다.
사도 바오로에 대한 주님의 지극한 관심은 '앞에 서시어'로 번역된 '에피스타스'(epistas)가 잘 보여준다. '에피스타스'(epistas)는 어떤 것과 매우 가까움을 나타내는 전치사 '에피'(epi)와 '멈추어 서다'라는 의미를 지닌 '히스테미'(histemi)의 합성어로서 '바로 곁에 서 있다'라는 뜻을 지닌 '에피스테미'(ephistemi)에서 비롯된 단어이다.
과거에도 그에게 나타나신 바 있는 사도 바오로의 주인이신 예수님 (사도16,9; 18,9; 22,17)께서 그가 가장 위급한 지경에 놓여 있을 때에 다시 나타나셔서 바로 그의 곁에 서 계신 것이다.
사도 바오로에게 이것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사도 바오로가 죽을 것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왔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사태를 바라보며 적지않게 당황했을 것이다.
그 당혹스런 순간에 주께서는 사도 바오로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위로하시고 로마 선교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용기를 내어라'로 번역된 '타르세이'(tharsei)는 '용기가 있다', '내적으로 기운차다', '담대하다'란 뜻을 지닌 '타르세오'(tharseo)의 현재 명령법이다.
요한 복음 16장 33절에서 제자들에게 이별담화에서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선포하신 주님께서 사도 바오로에게 담대하라고 명령하고 계신다.
이것은 그 어떤 위협이나 난관도, 이제 곧 주님께서 바오로에게 부여하실 사명, 즉 로마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 준다.
특히 주님께서는 현재 명령법을 사용하여 어떤 일이 닥쳐올지라도 계속 담대해야 할 것을 사도 바오로에게 권고하고 계신다.
한편, 주께서는 이때 사도 바오로에게 나타나시어 담대하라고 명하시며, 새로운 로마 선교의 비전을 제시하셨다.
이러한 사실은 '해야 한다'로 번역된 '데이'(dei)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희랍어에서 '데이'는 일반적으로 논리적이거나 과학적인 필연성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된다.
본문에서도 이제 사도 바오로가 로마로 가는 것은 역사의 주인이시며 사도 바오로의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그에게 부여해 주신 필연적인 사명임을 사도 바오로에게 새롭게 각인시켜 주시 위해서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세 차례에 걸친 험난한 전교 여정에 이어서 예루살렘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당당히 전한 바오로에게 주님께서는 이제 땅끝인 로마에 가서 당신을 증언하게 하십니다.
동시에 그에게 “용기를 내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오늘날 세상에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에게 건네시는 주님의 위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용기 있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고 힘을 주시며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해야 합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이 모두 하나 되기를 바라십니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계시고 당신 또한 아버지 안에 계시듯,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이 모두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함께 머물기를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버지의 사랑을 알아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영광을 함께 노래하기를 바라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염원은 “제 안에”, “아버지 안에”, “우리 안에”, “그들 안에”, “저와 함께”와 같은 반복되는 표현들에서도 강하게 느껴집니다.
수난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이처럼 ‘하나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신 것은 하나가 되는 것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듯 주님 안에서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우리에게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죽음으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심으로써 아버지와 하나가 되셨고, 오늘도 성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온전히 다 내주심으로써 우리와 하나가 되십니다.
십자가와 죽음, 성체와 사랑의 삶은 우리를 하느님과 예수님의 완전한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합니다.
사랑과 일치의 하느님 안에 머물며 주님을 깊이 체험한 이는 이 좋으신 분을 세상에 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우리와 한 몸이 되시기를 애태우시는 예수님의 마음
(요한17,20-26)
20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셨다. “거룩하신 아버지,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21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 제자를 비롯한 시간과 공관을 초월한 믿는 모든 이, 곧 교회를 뜻한다.
21ㄴ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22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영광(독사,dovxa -하느님의 신성과 본성인 사랑) 곧 대속의 죽음, 그 이타의 사랑인 십자가로만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있다.
23ㄴ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 하느님은 외아들 예수 만을 받아 드리신다. 피조물인 사람, 죄인은 받아 드리지 않으신다. 아니 받아 드리실 수가 없다.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탈출19,21-22) 21 주님(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려가서 백성에게, 주님을 보려고 밀려들다 많은 이들이 죽는 일이 없게 경고하여라. 22 주님에게 가까이 오는 사제들도 자신을 성결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님이 그들을 내려칠 것이다.”
= 그러나 사람(죄인) 안에 예수님이 계시면 달라진다. 하느님은 그들 안에 예수를 보시고 그들을 받아 주신다. 곧 아들 예수를 끌어 올리실 때, 그분 예수께 붙어있는 가지들인 제자들이 딸려 올려지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그 예수님 안에 하느님이 계시니 완전한 일치,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런 예수님이 우리 안에 어떻게 계시나? 어제 묵상 했듯이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시다. 그러니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말씀, 곧 하느님의 뜻, 길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하나 되는 것이다.
(이사55,8) 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 모든 인간이 자신의 뜻, 길을 위한 어둠의 삶을 살고 있다. 모든 인간이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 백성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죽음, 그 어둠에 내버려 두실 수가 없으신 것이다. 그래서 그 죄인, 당신 백성을 받아 드리시기 위해 외아들 예수를 그들의 빛으로, 그들의 속죄 제물로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요한1,9.12)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 하나 됨은 하느님의 신성과 본성이신 사랑, 그 영광이 이루시는 일이다.
24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물론 하느님 나라다. 이 세상에 뚫고 들어오신 하느님 나라다.
그런데 앞15절에-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 이 세상 나라에서 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법, 통치권이 있는 곳을 말한다. 곧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사셨고, 전하신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이다.(루가11,20 17,20-21참조)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하신 모든 일에서 하느님 나라를 봐야,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것들을 채워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24ㄴ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창세 전부터 사랑하심을 말씀하신다.
(에페1,4) 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은 이들은 그리스도의 죽음, 죄의 대속으로 이미 ‘죄 없는 자’로 분류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설명해 주시기 위해 속죄의 일, 그 의(義)가 역사 속에 들어온 것이다.
25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모든 인간이 자신들의 합의한 도덕적, 윤리적 삶을 의롭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신다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만이 의로우신 분이심을, 그래서 예수님 당신을 이 세상에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보내셨다는 것이다.
(로마3,25) 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26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사랑, 의)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 영원한 보호자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영원히 함께하며 가르치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187장 전체의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 죄인들이 당신의 대속, 십자가로 살아나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 하나 됨을 위한 것이었다. 그 예수님의 기도가 이루어 졌음을 사도는 말한다.
(골로3,1-4) 1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 숨겨진다는 것은, 이 세상 힘의 원리를 부인(否認)하는 그 자기 죽음, 버림으로 되는 것이다.
(1요한2,15-17) 15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16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17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 우리는 육적(肉的), 세상의 것을 너무 좋아한다. 사랑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그 육(肉)의 세상 것을 끊어 버리도록 만드신다. 하느님의 생명으로 사는 영원한 삶을 위해 우리가 그렇게 하느님께 끌려가는 것이 신앙 생활이다.
☨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부족한 저희를 의탁합니다. ~아멘!!!
부활 제7주간 목요일 복음(요한17,20~26)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21)
요한 복음 17장 11절에서 제자들간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17장 21절에서는 그 제자들로 말미암아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신다.
원문에서도 문두에 나오는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에 해당하는 '히나 판테스 엔 오신'(hina pantes hen osin; that all of them may be one)에서 '하나가 되게'로 번역된 '헨 오신'(hen osin; may be one)에서 '오신'(osin; may be)은 현재형이므로, '계속해서 하나가 되게'라는 뜻을 갖는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가 되는 것의 모델은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은 '아버지가 아들 안에,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뜻과 목적과 감정에서의 일치를 말한다.
하느님을 보지 못하더라도 그분의 뜻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예수님을 본다면, 그는 곧 하느님을 보는 것과 똑같다(요한10,30. 37.38; 10,9~11).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교안에서 파(派)가 다르고 활동 지역이 다르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뜻과 목적을 하나로 공유하고 진리와 사랑으로 묶여 있다면, 그들은 일치된 모습을 세상에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이러한 하나됨은 그들이 '아버지와 아들 안에 있게 되는 근거'가 된다.
이것을 역으로 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뜻과 목적, 진리와 사랑 안에서 일치하지 못한다면, 겉으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워도, 본질적으로는 아버지와 아들 안에 머무르지 않는 외교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또한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사실을 믿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 안에서 하나됨에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믿게 하십시오'로 번역된 '히나~피스튜에'(hina~pisteue; so that~may believe)는 목적을 나타내는 현재 가정법으로서 '계속해서 믿도록'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뜻과 목적, 진리와 사랑 안에서 하나됨을 통해 당신 자신이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임을 세상이 믿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마음이 잘 드러난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이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요한3,16~17)에서 비롯되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은 죄인들의 멸망이 아니라(에제18,23; 2베드3,9) 모든 사람의 구원이다(1티모2,4).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어 죄인들을 위해 기꺼이 당신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로마5,6~8) 죄인들을 향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해당하는 '호 코스모스'(ho kosmos; the world)를 하느님 아버지의 관심 밖에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에서 '세상', 즉 '코스모스'(kosmos)가 반하느님적이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대적인 세력을 지칭하여 쓰이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영혼들의 집합명사이며, 믿는 이들의 일터이기도 하다(마태16,26; 28,19~20).
우리는 이 세상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 이러한 귀한 일을 위임하신 예수님께서 세상을 위해 기도하신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요한 복음사가가 자신이 기록한 성경에서 강조하는 개념이기도 하다(1요한4,9~11).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 믿는 이들 또한 이 세상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잃어버린 한 영혼이 주님께로 돌아올 때에 하느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안다면, 아무리 일이 바쁘다 할지라도, 잃은 영혼들을 위한 기도와 충고를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2024년 05월 16일 목요일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오늘 복음은 어제에 이어, 예수님의 ‘남아 있는 이들을 위한 기도’ 마지막 부분입니다.
기도의 핵심은 ‘일치’에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이 하나 됨은 사상의 강요나 이념의 주입으로 이루어지는 획일성이 아니라, ‘- 안에 있음’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치입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은 우리 안에 계시기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그 어떤 억지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치’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자발적 일치는 어디에서 생길까요? 복음은 ‘사랑을 알게 됨으로써’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버지께서…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알게 되면 저절로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이를 무시하고 하나 됨을 강요할 때 나오는 결과가 ‘불일치’이며 ‘분열’입니다.
오늘 독서는 바오로를 고발하는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 사이의 ‘불일치’를 묘사합니다.
바오로를 고발하는 일에는 담합하였지만 정작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그들은 결국 “논쟁이 벌어지면서 회중이 둘로 갈라”지고 맙니다.
“논쟁이 격렬해지자 천인대장은 바오로가 그들에게 찢겨 죽지 않을까 염려”하였을 정도로 그들의 입장 차이는 격렬하였습니다.
사상과 이념, 원칙과 엄격한 교의보다 더 강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알려 주고 그 사랑이 진심임을 믿게 할 때 서로는 상대의 마음 안에 하나 되게 됩니다.
이처럼 서로 사랑하고 일치하라는 것이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와 교회에 하신 당부이고 기도였습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
복음(요한17,20-26)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셨다.20 “거룩하신 아버지,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21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 외아들 예수님이 아버지 하느님의 안에 들어가기 위해 당신의 뜻을 버리시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죄인들의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우리 또한 우리 자신들의 뜻인 욕망을 버리는 ‘작 벎, 부인’의 삶인 십자가의 삶으로 당신들 안에 들게 해 달라는 기도(祈禱)시다. 우리의 힘으로 그 자기 부인(否認), 버림의 삶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신 마리아의 고백이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내 욕망의 뜻을 죽여주십시오.” 하신 기도다.
물론 성모님 자신의 힘으로 한 고백(告白)도 아니다.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의 은총, 사랑, 총애의 말씀을 잉태(孕胎)시키심으로 고백을 하게하신 것이다. (루가1,16-38 참조)
(루가1,35.37)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항상 되새기자~
(루가9,23)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가14,27) 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현실에 내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로 가서, 그 예수님의 십자가가 제 십자가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 되어야 한다.
(로마6,6) 6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제의 가르침>
*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은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이신 것처럼, 우리 신앙인들도 아버지와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완전한 하나 됨은 바로 우리 신앙인들이 아버지와 일치를 이룰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사람끼리 일치는 불완전 하지만 완전하신 분 안에서 일치(一致)는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되면, 하느님의 사랑을 받게 되고, 이 사랑을 우리들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전(傳)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게 되면, 이들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救世主)이심을 믿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
22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 영광(榮光 독사), 하느님의 신성과 본성인 계시(啓示)의 이타의 사랑이 드러난 것, 영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하는 아드님께 그 이타(利他)의 사랑인 십자가(十字架)를 주신 것이다. 곧 우리에게 허락하신 십자가가 하느님 사랑의 표징(標徵)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그 하느님의 영광을 모르고 원하지도 않는다.
(요한12,43) 43 그들이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보다 사람에게서 받는 영광을 더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 내 영광을 위해 하느님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교 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내 안에 있는 영광의 불을 끄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하느님이 꺼 주신다. 그 삶을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견디는 것이다. 그것이 이기는 것이다. 그것이 오래 참음이며 바른 신앙 생활이다.
누군가는.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가 통합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하느님 나라의 시간대를 사는 자들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믿음으로, 아담한테도 가, 내 욕망을 위해 선악과(善惡果)를 따먹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들키기도 하고,
노아의 홍수(洪水), 그 산에서 방주에 같이 타, 살아나기도 하고, 또 사람의 의(義)로 바벨탑을 열심히 쌓다가 내 의(義)가 부서지고, 말이 흩어지는 경험도하고, 그러다 나중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그 찬란한 부활의 현실을 지금 땡겨서 경험하기도 한다고~
그것이 지금부터 영원을 사는 것이라고, 그것이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이라고,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 능력, 사랑, 그분의 성품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23ㄱ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 하느님의 영광, 사랑으로 서로 받아들여 하나 되는 곳, 하느님 나라다.
23ㄴ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24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 사랑하시어 주신 영광, 하느님의 뜻, 하느님 나라의 완성의 길인 십자가다.
(에페1,9-10) 9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 10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1코린8,6) 6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
25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3,17)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세상은 알지도, 믿지도 못하는 하느님의 뜻이다.
26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 아버지의 이름, 사랑이다. 곧 거저 주시는 은총의 말씀이다.
(로마11,5-6) 5 이와 같이 지금 이 시대에도 은총으로 선택된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6 이렇게 은총으로 되는 것이라면 더 이상 사람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총이 더 이상 은총일 수가 없습니다.
(야고1,16-18) 16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17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분께는 변화도 없고 변동에 따른 그림자도 없습니다. 18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마태4,4) 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시편119,133) 133 당신 말씀으로 제 발걸음을 굳건히 하시고 어떠한 불의도 저를 다스리지 못하게 하소서.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하느님의 영광 안에 들어 갈 수 있도록 오늘 말씀이 믿음으로 자라나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내버려두지 마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