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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8일 토요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참 증언 (요한21,20-25)
제1독서<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사도28,16-20.30-31)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갔을 때, 바오로는 자기를 지키는 군사 한 사람과 따로 지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17 사흘 뒤에 바오로는 그곳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이 모이자 바오로가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백성이나 조상 전래의 관습을 거스르는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도, 예루살렘에서 죄수가 되어 로마인들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18 로마인들은 나를 신문하고 나서 사형에 처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으므로 나를 풀어 주려고 하였습니다.
19 그러나 유다인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나는 내 민족을 고발할 뜻이 없는데도 하는 수 없이 황제에게 상소하였습니다.
20 그래서 여러분을 뵙고 이야기하려고 오시라고 청하였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희망 때문에 이렇게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30 바오로는 자기의 셋집에서 만 이 년 동안 지내며,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31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
화답송시편 11(10),4.5와 7(◎ 7ㄴ) ◎주님, 올곧은 이는 당신 얼굴 뵈오리다.
○ 주님은 당신의 거룩한 성전에서, 하늘에 있는 주님의 옥좌에서, 당신 눈으로 살피시고, 당신 눈동자로 사람들을 가려내신다. ◎
○ 주님은 의인도 악인도 가려내시고, 그분의 얼은 폭행을 즐기는 자를 미워하신다. 의로우신 주님은 의로운 일을 사랑하시니, 올곧은 이는 그분 얼굴 뵈오리라. ◎
복음<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요한21,20-25)
20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21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3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24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제1독서 (사도28,16-20.30-31)
그래서 여러분을 뵙고 이야기하려고 오시라고 청하였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희망 때문에 이렇게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20)
사도 바오로가 유대인들의 오해를 받아 쇠사슬에 매인 죄수가 된 것은 바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망하고 있던 것을 전파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사도 바오로가 로마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 유력자들을 자신이 기거하는 곳으로 청한 것도 일차적으로는 그들과 함께 '그 이스라엘의 희망'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함이었다.
이 '희망'이라고 번역된 '엘피도스'(elpidos)라는 용어의 개념은 사도 바오로가 유대아에서 재판을 받는 과정 중에 여러 번 사용한 적이 있는데 (사도23,6; 24,15; 26,6.7), 그것은 곧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희망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주신 '구약 성경 약속들의 성취'를 의미한다(사도26,6.7).
사도 바오로는 바로 이 희망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결정적으로 완성되었다고 주장하였으나, 나자렛 예수에게 그 희망이 성취될 수 없다고 믿는 유대인들은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 희망'에 대한 이해의 차이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고소당해 죄수의 몸이 된 사도 바오로가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만나고자 한 것은 바로 이런 점들을 해명하고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제1독서는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면을 전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사슬에 묶여 있으면서도 끝까지 전하고자 하였던 “이스라엘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도행전은 당시 땅끝으로 여겨졌던 로마에서 바오로가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담대히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친 것으로 끝이 납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남기신 사명에도 들어맞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하느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 바오로 사도가 전한 이스라엘의 희망이며, 온 인류의 희망입니다.
이 기쁜 소식의 선포는 교회 역사 안에서 사도들과 부활의 증인들,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을 통해서 계속 이어집니다.
복음서 가운데 마지막인 요한복음 21장 20-25절은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와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 증언되고 복음서가 기록되었으며
공동체 안에서 그 증언이 참되다는 것이 확인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서가 기록된 목적을 다시한번 떠올립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아버지 하느님의 권한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기록된 말씀으로도 다 담아낼 수 없는 예수님. 그분께서 바로 우리 구원자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이름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우리를 먼저 초대하셨고, 이제 모든 이에게 이 은총의 선물이 전해지도록 우리를 구원의 도구로 부르십니다.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성령께서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셨네
(요한21,20-25)
20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21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3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와 비교하는 삶을 산다. 그래서 온갖 질투, 미움, 분노 등이 일어난다. *저주의 시몬에서 주님의 사랑, 은총으로 반석이라는 이름을 받은 베드로가 동료 제자와 자신을 비교하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버리지 못하는 베드로의 모습이다.
앞18절에서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라는 말씀을 듣고서도 여전히 자신으로 차 있는 모습이다. 우리의 모습이다, 베드로 자신이 예수님의 어린양, 곧 하느님의 사랑,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존재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하느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베드로가 끝까지 어둠(시몬()의 모습으로 폭로되고, 그 어둠의 존재를 열심히 쫓아 다니면서 먹이시고 섬겨주시는 빛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결론으로 부각되면서 끝을 맺고 있다. 한쪽(인간)은 계속 실패했는데, 한쪽(주님)은 집요하게 아침까지 싸들고 쫓아다니신다. 이것이 구원이라는 것이다.
24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앞15절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 이들- 곧 배와 그물과 기타 고기 잡는 도구들, 그리고 고기 잡는 행위, 이것들보다 너는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모두에 “예”라고 대답한 것이다. 그러나 슬퍼하며(고통스러워하며) “그 사랑, 주님이 아시쟌아요” 하며 자신 없는 대답이었음을 묵상했다.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라고 자신을 했었다. 사랑할 줄 알았는데, 그 사랑의 확신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우리 도한 삶을 살다보니 점점 ‘나는 안 되겠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주님이 저를 사랑하지 않으시면 제가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몬의 자리로 내려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신앙여정 속에 있는 우리의 실존이다.
사랑은 하나다.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다.(에페3,16)
(1요한3,16) 16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 하늘의 그 사랑이 나를, 이웃을 살리신다. 그래서 베드로처럼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쟌아요.” 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 그 사랑을 진리로 전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분 사랑 안에서만이 다른 이와의 비교의 삶을 살지 않을 수 있다.
너도나도 그분 앞에서는 죄인, 없음의 존재로 그분의 사랑으로 존재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우리의 피난처이다.
☨ 은총의 천주 성령님! 하느님 사랑에 저희 모두가 “아멘”하게 하소서~~아멘!!!
부활 제7주간 토요일 복음(요한21,20~25)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25)
요한복음 21장 25절은 과장법에 의한 수사학적 표현인데, 여러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로, 요한복음 사가가 자신이 알고 있는 예수님께 대한 지식조차도 모두 기록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복음서 저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그대로를 다 기록했다면, 그 내용이 엄청나게 방대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4복음서 저자들에게 그 책을 기록하기 위한 특별한 목적을 주셨고, 각 저자들은 자신들의 직접적인 경험과 간접적인 지식과 능력을 사용해서 많은 내용들 중에 꼭 필요한 내용만을 취사 선택하여 하느님의 의도대로 기록한 것이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영적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온전히 담기에는 부족했다고 알아들을 수 있다.
세째로, 자신의 한계이자 인간의 언어로 하느님의 일을 기록하는 작업의 한계를 인정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로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 자체가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 아니며, 또한 자신이 기록한 요한복음의 내용이 부분적이므로, 요한 복음사가가 함께 했던 교회 공동체가 요한복음에만 한정해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이해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해 왜 한 제자에 의해 단 한권의 책으로 기록하게 하지 않으시고, 세 권의 공관복음서를 쓰게 하시고 난 뒤에 다시 요한 복음사가를 통해 요한 복음서를 기록하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게 한다.
사실 사도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늘 예수님과 동행했고,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70년 정도를 더 살면서, 성령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많은 사목을 하였다. 그러한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21장 25절을 통해 요한 복음서를 다 기록한 뒤에 보여 주는 모습은 하느님 역사의 광대무변함과 그분의 크신 사랑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는 것이다.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다시 예전 삶으로 돌아가 고기를 잡는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는지 세 번 물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 부르신 것은 부르심 때와 이번 뿐입니다(1,42; 21,15-17 참조).
베드로가 당신을 뜨거운 마음으로 따라 나서던 그 첫 순간을 기억하기 바라셨나 봅니다.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26,33) 하며 믿음을 과시하던 일이 떠올라서였을까요? 담담한 그의 대답은 지난날의 교만에 대한 후회가 엿보입니다.
세 번째로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그분을 세 번이나 배신한 자신에게 깊은 원망과 슬픔을 느꼈을 테지요.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을 주님의 손에 맡겨 드립니다.
세 번이나 사랑을 서약하고 새롭게 태어나 이제 제힘만으로 당신을 따를 수 없음을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목자의 사명을 맡기시고 당신 뒤를 따르는 ‘수난과 영광의 길’을 예고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의 살해 위협과(사도 25,3 참조) 모함 속에도 마지막 증언과 순교를 위하여 로마로 향하는 바오로의 모습은(제1독서 참조), 베드로에게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불편한 일상에 끌려다니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베드로처럼 우리의 사랑을 주님께 아룁시다. 마음의 상처와 불편함을 딛고 증언과 순교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강수원 베드로 신부)
[부활 제7주간 토요일]
너나 잘하세요.
복음(요한21,20-25)
20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21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3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 우리 또한 베드로처럼 다른 이와 비교하는 삶을 산다. 누구는 나보다 착하지도, 신앙생활도 못하는 것 같은데 축복은 많이 받네? 혹은 아무개는 착한데 시련이 끊이질 않지?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너무하신 것 아닌가?
그리고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는데 복음은 들어보지도 못한 우리 선조들은? 오지(奧地)의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겠느냐? 며 하느님이 공평하신 분이 맞냐? 고 하느님의 뜻은 알 수가 없다며 따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걱정하시고 해결 하셔야 할, 아버지의 일이지 우리가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걱정한 만큼 기도(祈禱)하는가?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려 성경(聖經)을 파고드는가? 나 자신의 구원의 확신도 없으면서 오지랍을 부리는 것이다. *예전에 내 모습을 적어봤다.
24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는가? 그런데 성경을 공부하며 놀라운 것은 창세기 1장 1절의 첫 단어 ‘한 처음에’ 가 그 1절 전체의 뜻을 품고 있고, 그 한절이 1장 전체의 뜻을 말하며, 그 한 장이 창세기 전체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창세기 안에 성경 전체가 다 들어 있다는 것이다.
*‘한 처음’의 히브리어 ‘베레시트’는 ‘타우(완성), 씬(구별), 알레프(하느님), 레쉬(시작), 베잇(성전)의 순서로 이루어져 있다. - ’한 처음, 베레시트‘는 ’하느님께서 성전 짓기를 시작하시고 완성하셔서 구별하여 주셨다.‘가 ’한 처음‘인 것이고 성경 전체의 핵심인 것이다. 성전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되는 것이고,(요한2,19-21) 우리가 그분의 성전 이 되는 것이 구원의 완성이기에(1코린6,19-20) ~ <성전은 하느님 나라를 모형(模型)한다.>
성경의 모든 말씀에 다 그 십자가(十字架)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을 전할 때, 모든 말씀의 결론이 십자가로 끝나야 한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독서(사도28,17) 17 사흘 뒤에 바오로는 그곳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이 모이자 바오로가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백성이나 조상 전래의 관습을 거스르는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도, 예루살렘에서 죄수가 되어 로마인들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 바오로의 서간을 보면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십자가(十字架)만을 진리(眞理)로 썼다. 바오로는 많은 말, 많은 일을 하고, 결론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진리로’ 귀결 시켜 말했기에 유대인들의 죄수(罪囚)기 된 것이다.
즉 말씀을 전할 때 말씀의 결론을 ‘그리스도의 대속, 그 하늘의 의(義)를 믿어 거저 받는 구원’이 아닌 인간의 관습에 따른 인간의 의(義)로 결론지어 말하면 하느님의 죄수,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해력에는 한계가 있어 이 방향, 저 방향, 이 관점, 저 관점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으셨다. 그래서 시서(詩書)와 지혜서(知慧書), 예언서(豫言書)들, 그리고 사 복음(福音)과 서간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유혹들, 거짓 가르침들이 난무하기에 말씀을 진리로 깨닫고 지키기가 힘들다.
진짜보다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그 가짜가 교회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순수했던 옛 사람들의 믿음이 참일 수 있다)
(2코린11,13-14) 13 그러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로 위장한 거짓 사도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일하는 자들입니다. 14 그러나 놀랄 일이 아닙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 누가 참 빛인지, 가짜 진리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그래서 가르침을 들으면 ‘베로이아 사람들’처럼 사실인지 성경(聖經)에서 확인해야 한다.
(사도17,11) 11 그곳 유다인들은 테살로니카의 유다인들보다 점잖아서 말씀을 아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였다.
= 진리(眞理 알레떼아)라는 단어에 망각(레테) 이라는 뜻이 들어있듯, 우리 인간은 진리를 깨닫고도 쉽게 잊어버리기에 자주 성경을 보고, 또 보고, 되새기는 기도를 해야 한다. 그랬을 때 다른 이와 비교하지 않게 된다. 또한 다른 이에게 참 진리를 전하게 되고, 다른 이들을 위해 진실된, 올바른 진리의 기도를 하게 된다.
<사제의 가르침>
*사람들에게 ‘당신의 삶에 목적이 무었입니까?’ 하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행복(幸福)’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영원하지도 않은 내, 외적인 상황에 따라영향을 받는 불완전한 행복입니다. 그러면 완전한 행복은 어떻게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내 삶의 목적이 예수님’이 되면 저절로 행복은 따라 옵니다. 하늘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목적이 되면 하늘나라는 따라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면 바로 그 사람이 목적이 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행복했습니다. 나를 만나 예수님도 행복했나요? 내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아직 어리고 이기적이며 모자라는 나를 따듯한 이해로 안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완벽한 사랑을 찾았습니다. (가요, 남녀 간의 사랑 노래를 주님과의 사랑노래로 듣고 쓴 고백이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오늘도 이끌어 주시니 감사하나이다. 저희 모두의 마음에 성령이 불을 놓으시어 오늘 말씀이 믿음으로 자라나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내버려두지 마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2024년 05월 18일 토요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이제 지난 7주 동안 계속된 부활 시기가 끝나 갑니다.
독서와 복음도 각 책의 마무리 부분이 봉독 되는데, 사도행전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요한 복음서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맨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사도단의 대표들이 부활 시기의 마지막을 마무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으로 선정된 요한 복음서의 마지막은 이 책의 저자와 저술 목적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두 번이나 되풀이되며 이질감을 주는 표현이 나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는 이 물음이, 복음서의 끝을 장식하는 데에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옮긴 문장을 원문 그대로 옮기면 “그것이 너에게 무엇이냐?”입니다.
주변과의 비교나 경쟁, 불필요한 견제에 휘말림 없이 나에게 주어진 삶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지혜로운 삶의 자세임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독서에서도 바오로 사도를 통하여 보게 됩니다.
그는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 되었지만 불안과 공포에도 흔들리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칩니다.
주변의 상황이나 조건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가는 모범을 누구보다도 훌륭히 실천한 것입니다.
“남과 싸울 필요가 없는 것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 책을 읽은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싸울 필요가 없다.’는 말은 언제나 저에게 위로가 됩니다.
날마다 그날의 말씀을 붙잡고 나의 길을 가는 것, 비교에 휘둘리거나 경쟁하느라 소모되지 않는 것, 내 삶에 집중하고 이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의 길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