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조실록38권, 세조 12년 2월 24일 병신 5번째기사 1466년 명 성화(成化) 2년
병조에서 말을 죽게 한 겸감목의 말을 징납할 것을 건의하다
국역
진효우(陳孝友 3) 조선왕조 실록 국역▼
원문
.원본 보기
병조에서 아뢰기를,
"도초도 겸감목(都草島兼監牧) 진효우(陳孝友)는 소 1백 8마리 가운데 38마리가 죽었고, 노도 겸감목(露島兼監牧) 황선로(黃善輅)는 말 6백 68필 가운데 2백 10필이 죽었고, 용류도 겸감목(龍流島兼監牧) 민효열(閔孝悅)은 말 1백 60필 가운데 58필이 죽었고, 승황도(昇荒島)는 말 86필 가운데 62필이 죽었으며, 대산곶이 겸감목(大山串兼監牧) 박중종(朴仲宗)은 말 4백 80필 가운데 1백 20필이 죽었고, 산달도 겸감목(山達島兼監牧) 홍영하(洪永河)는 소 74마리 가운데 30마리가 죽었고, 원산도 겸감목(元山島兼監牧) 김신(金莘)은 말 1백 필 가운데 8마리가 죽었고, 사읍시도 겸감목(沙邑時島兼監牧) 김귀명(金貴命)은 말 60필 가운데 17필이 죽었고, 흥양곶이 겸감목(興陽串兼監牧) 정숙(鄭淑)은 말 4백 25필 가운데 36필이 죽었고, 대소산 겸감목(大小山兼監牧) 장윤신(張允愼)은 말 2백 36필 가운데 44필이 죽었는데, 죄가 사유(赦宥) 전에 있어서 비록 추론(追論)할 수 없으나, 청컨대 법에 의하여 징납(徵納)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목포」 조선 세종21년 1439년에는
목포」 조선 세종21년 1439년에는 목포만호(木浦萬戶 4) 가 설치 되었으며, 임진란 때에는 목포 고하도에 이순신장군이 친히 수군진을 설치하여 108일 동안 머물렀고, 1897년 10월 1일 목포항은 개항 하였다. 그후 1910년 일제가 국권을 빼앗던 해의 10월 1일「목포부」로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 1932년에는 무안군 일부지역을 더하여 8.6㎢의 도시면적에 인구 6만인 전국 6대 도시의 하나로 성장하여 一黑(김), 三白(면화, 쌀, 누에고치)의 집산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49년 8월 15일「목포부」를 비로소「목포시」로 고쳐 부르게 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외항·무안 망운국제공항 건설 등 SOC 투자촉진과 대불·삼호공단 조성으로 산업기반 시설이 확충되어 서남해안 시대의 중추기능을 담당한 비중있는 도시 이다.
=출처:목포시청 홈페이지=
www.tour.mokpo.go.kr 목포시청사이버투어
--------------------------------------------------------------------------------------------------------------------------------------------
都草도초도는 목포에서 서남쪽 54.5km 떨어진 섬으로 섬의 지형이 당나라의 수도와 비슷하면서도 초목이 무성해 도초(都草)라 불렀다고 한다. 주변의 섬 중에서 가장 큰 섬이어서 도치도라고도 하며 섬의 형태가 고슴도치처럼 생겨 그렇게 불렀다는 설도 전해오고 있다. 면단위로는 신안군에서 가장 큰 면적이다.
-----------------------------------------------------------------------------------------
조선과환보(朝鮮科宦譜) 6권 -여양진씨 음사편(蔭仕編 5)
복심復深 -사경(司經 1) 우 5열 하단 ▼
조선과환보(朝鮮科宦譜) 6권 -여양진씨 음사편(蔭仕編 5)
진흠 호참(호조참판) 후손 ▶태흥 감역,- 자 규식 참봉,- 태흥 자
정미대동보 (상) 508페이지 등보- 아래 우 1열 하단▼
예빈경파 -(하계) 정자공파 9세 진흠 참판공 세수 수정안 ▼후손대표 연명 날인장
서기 2007년 2월 일
여양진씨 (상계) 예빈경 -(하계)정자공파 참판공 종중원 일동
어전통사 진흠 (御前通事 陳欽 )
중국에서 사신이 조선에 왔을 때 사신과 조선 왕 사이에 통역을 담당하거나, 또는 중국에 파견된 사신이나 중국에서 온 사신이 가져온 황제의 칙서(勅書)나 조서(詔書)를 어전(御前)에서 통해(通解)하는 임무를 가진 역관. 개설 개국 초기의 어전통사(御前通事)는 주로 사역원의 당상역관(堂上譯官)이나 통사(通事)에서 한어(漢語)에 능통한 이로 선임하였다. 하지만 외교문서로 명과의 외교적 마찰이 생기고,또한 중국에 파견된 사신이나 명사가 가져온 황제의 칙서(勅書)나 조서(詔書)를 어전 (御前)에서 통해(通解)하는 임무는 단순히 회화에만 능통한 사역원(司譯院) 출신으로는 불충분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려말에 중국에서 귀화한 이들이 점차 희소해지자 당시 외교문서의 통해와 작성에 필요한 이문(吏文)과 경서(經書)에 능한 문관 출신을 점차 어전통사로 선임하였다. 담당 직무 어전통사는 중국 사신들이 출래할 때 왕의 측근에서 그들과 조선 왕 사이에서 통역을 하거나, 사신들이 가져온 황제의 칙서나 조서를 어전에서 통해하는 임무를 지녔다. 변천 조선에서는 명과의 표·전문 등의 외교문서 작성이나, 명의 조서나 칙서 등을 정확히 통해하기 위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계속해서 명 측에 조선의 자제들을 중국의 국자감이나 요동의 향학에로의 입학을 청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 측의 요구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조선에서는 그 대안으로 ‘강이질정관(講肄質正官)’을 파견하게 된다. 이들은 한어를 가르치고 중국어 학습을 하는 데 교정을 받거나, 또는 유학의 의례(儀禮)를 물어보기 위해서도 파견되었다. 이러한 질정관의 파견만으로는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조선초기의 어전통사는 대체로 사역원 출신의 당상역관들이 차임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단순하게 회화만으로 통역하는 일반 통역관인 통사가 하는 일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을 다루는 것이 어전통사였다. 따라서 후대로 오면서 어전통사는 사역원 출신뿐만 아니라 경서나 한어에 능통한 문관으로 차임되는 빈도가 높아졌다. 태조-정종-태종대는 통사 출신이 어전통사를 담당하였으며, 세종대에는 통사 출신으로 원민생(元閔生), 김시우(金時遇), 김을현(金乙玄) 등이 있었다. 그리고 문과 출신으로도 이변(李邊), 김하(金何) 등이 있어 이들이 어전통사의 임무를 담당 하였다.세조대까지도 한어와 이문에 정통한 문신으로 진흠(陳欽) ,김자정(金自貞), 지달하(池達河) 등이 있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통사 출신이 어전통사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성종대에도 통사 출신의 장유성(張有誠)과 황중(黃中), 문과 출신의 이창신(李昌臣), 최해(崔瀣) 등이 어전통사로 활동하여 비슷한 비율로 활동하였다. 문과 출신 문신으로 어전통사가 된 경우는 세조대에 진흠(陳欽), 연산군대에는 최해, 안팽수(安彭壽) 등이, 중종대에는 최세진(崔世珍), 지달원(沈達源), 이억손(李億孫), 조익(趙翊) 등이, 명종대에는 윤개(尹漑), 주양우(朱良佑), 윤계(尹溪),채세영(蔡世英), 고경진(高景軫), 이거(李遽), 김계(金啓), 윤근수(尹根壽) 등이 있었다. 이후 선조대에는 이준(李準), 윤담무(尹覃茂), 심우승(沈友勝), 신식(申湜), 박동량(朴東亮),강홍립(姜弘立), 김수(金睟), 황신(黃愼), 이민성(李民宬), 이시발(李時發), 박정길(朴鼎吉),권진(權縉), 이덕형(李德馨), 이정구(李廷龜), 광해군대에는 이경직(李景稷), 박종주(朴宗冑) 등이 문과 출신의 문신으로 한어에 능하여 어전통사로 중용되었다. 어전통사의 차임이 문과 출신의 문신으 로 변화된 근본적인 원인으로 첫째, 조선초기에 통사로 활발한 활동을 하던 이들 중 중국어에 능통했던 귀화인이 점차 소멸된 점이다. |
| 출처:다음 진씨사랑방 지기 ㅣ 작성자 해송(海松) 진옥수(陳玉洙) |
------------------------------------------------------------------------------------------------------------------
9(世) 호조참판 진흠(陳欽) - 6代孫 15세(世) 진만재陳晩宰>승정원일기
해송(海松) 陳玉洙추천 1조회 525.11.07 15:03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검색어 陳晩宰 : 총 15건 정렬 시대순 정확도순 확인목록개수 10개 50개 100개 확인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