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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월남이다
베트남 한국군 전적지를 가다
2013년 5월의 일기―김 원 민
#1. 월남을 간다. 우리가 머물고 전쟁을 했던 나라, 실로 반세기만에 그 땅을 다시 밟는다.
1965년 10월 13일 수요일, 미군 수송선 APA-32함에 몸을 싣고 인천항을 떠나 남태평양을 건너 열흘 만에 닿았던 월남 땅. 시간을 거슬러 2013년 5월 22일 수요일, 내가 다시 월남에 왔다. 48년 전과 마찬가지로 월남에 가기 위해 선 곳이 인천이었음은 무슨 운명 같은 것인가. 그 때는 인천항이었지만 이번에는 인천공항이다. 요일도 수요일로 똑 같다.
인천에서 베트남 수도 하노이까지는 4시간 30분. 남쪽으로 1시간 쯤 날아가자 비행기 아래로 멀리 한라산이 보였다. 이것 역시 나를 반세기 전으로 되돌려 놓았다. 문득 시간은 1965년 10월 14일 목요일로 돌아간다.
그날의 일기.―「선실에서 낮잠을 자는 데 누군가가 깨운다. 제주도가 보인다는 것이다. 갑판으로 달려갔다. 한라산이 그 웅자를 바다 위에 과시하고 있지 않은가. 그냥 헤엄이라도 쳐서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야! 영원히 다시 못 볼 지도 모르는 고향.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치는 아련한 추억들……. 보히미언 처럼 홀홀히, 고독한 외인병사의 낭만과, 이름 모를 전선에서 숨져간 어린 병사의 순정 같은 것을 느끼며 적도의 원색으로 빨려 가지만, 어찌 고향의 산천이며, 항구며, 그 선술집 인심들을 모른 체 하리……. 」
이제 반세기만에 월남 땅으로 간다. 베트남항공의 스튜어디스는 유창한 한국말로 안내를 한다. 베트남에어라인이 대한항공과 업무 협약을 맺어 자신들이 베트남항공사에 근무하고 있음을 알려 준다. 비행기는 어느덧 하노이 공항에 착륙했다. 실로 반세기 만에 밟아보는 월남 땅. 그러나 그 곳은 우리 파월 장병들에게는 적의 수도, 바로 적도(敵都)였던 곳 아닌가.
어쨌든 월남이다. 나는 베트남이란 단어보다 월남이라고 말해야 마음이 편하다. 우리가 파월될 당시 공산지역이었던 북베트남은 월맹이라 불렸고, 17도선 이남의 자유월남을 월남, 또는 베트남이라 표현했기 때문이다. 하노이 공항은 우중충했으며, 공항 직원이나 세관원들의 옷차림도 꾀죄죄하고 촌스러웠다. 공산 세계의 티가 폴폴 났다.
#2. 하노이는 현재 베트남의 명실상부한 정치 중심지이다. 하노이 시내 여기저기에서는 옛 소련의 영향과 사회주의 냄새가 느껴졌다. 남자들이 쓰고 있는 초록색의 헬멧, 공원에 있는 미그 전투기 놀이기구, 망치와 낫이 그려진 붉은 공산당 깃발 등등이 어둡고 칙칙한, 공산주의의 이미지를 그대로 내보이고 있었다.
둘째 날, 우리는 유명하다는 하롱베이로 갔다. 하롱베이는 베트남 최대의 관광 명소이다. 비록 우리가 주둔하여 전투를 벌였던 전적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가 가서 보아야 할 유네스코의 세계 자연 유산이자 제주도와 함께 세계 7대 자연경관의 하나가 아닌가. 실제 하롱베이 입구에는 성산 일출봉 사진이 내걸려 있고, 하롱베이에 있는 거대한 용암동굴은 전쟁 당시 월맹군이 무기와 포탄을 대량으로 숨겨두었던 곳이었다니(가이드의 말), 따지고 보면 여기도 전적지일 수 있는 것이다.
하롱베이의 ‘하(ha)’는 ‘내려오다’, ‘롱(long)’은 ‘용’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즉, 하늘에서 내려온 용이라는 의미로, 침략자를 막기 위해 하늘에서 용이 이곳으로 내려와 입에서 보석과 구슬을 내뿜자, 그 보석과 구슬들이 바다로 떨어지면서 1600여 개의 갖가지 크고 작은 섬과 동굴을 이루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하롱베이는 전설 그대로 보석보다 아름답고 구슬보다 빛나는 절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롱베이에 이어 베트남 제3의 도시 다낭으로 간 우리는 다음날, 다낭 시내를 거쳐 호이안 지역으로 이동하여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 전적지를 돌아보았다. 청룡 여단 본부 흔적과 짜빈동 승전비를 탐방한 후, 필자가 소속돼 있던 맹호부대(보병 수도사단) 작전 지역인 푸캇으로 이동하였다. 맹호 제1연대(비호부대) 본부 터에 있던 ‘맹호탑’이 쓰러진 채 방치돼 있는 것이 안쓰러웠다.
#3. 이제 퀴논이다. 퀴논은 가장 많은 추억이 서린 곳이다. 그 날, 1965년 10월 23일 토요일, 우리 맹호들은 잔뜩 흐린 날씨를 보인 퀴논 앞바다에 도착했다. 인천항을 떠난 지 열흘 만에 목적지에 다다른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왜 대대적인 환송행사가 열린 부산항 제3부두가 아닌 인천항에서 배를 탔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당시 맹호부대 사단사령부 직할 부대(필자는 사령부 정훈대 소속)와 맹호부대 군수지원사령부(나중에 100군수사령부, 별칭 십자성부대로 독립함) 소속 병사들은 인천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가 연대 병력과 합류했고, 전투부대인 맹호사단 예하 제1연대와 기갑연대(번개부대) 병력은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서 배를 탔던 것이다. 맹호사단의 또 다른 예하 부대인 제26연대(혜산진부대)는 다음 해 1966년 4월 십자성부대가 독립돼 맹호에서 떨어져 나간 뒤 월남에 도착했다.
그 날, 1965년 10월 23일의 일기. ―「새벽 4시 기상. 비가 내리고 있다. 날이 밝자 비는 그치고, 드디어 퀴논 도착. 갑판에서 본 퀴논의 첫 인상이 무척 마음에 든다. 깨끗한 시가, 보랏빛 투명한 산들, 바닷물은 황토색이고, 모래벌이 좌우로 길게 펼쳐져 있다. 미군 전투기들은 엄호 비행이라도 하는 지 쉴 새 없이 항만 주변을 돈다. 빨간 색, 하얀 색으로 점철된 낮은 집들, 뾰족하게 높이 솟아있는 성당의 깔끔한 모습, 깨끗이 다듬어져 있는 가로수, 모래사장에 줄지어 선 야자나무, 그리고 항구에 수없이 떠 있는 요트들……. 이런 평화스런 곳에 전쟁이라니!」
이번 전적지 순례 여행에서 본 퀴논의 인상은 세월이 흘렀어도 당시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듯이 보였다.
#4. 다시 그 날로 가보자. 1965년 10월 8일 금요일, 우리는 강원도 춘천역에 있었다. 홍천에서 한 달여의 훈련을 마친 맹호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 군장에, 철모에, 소총까지 들고 부대 이동을 했던 것이다. 1개 사단 1만5000여 병력이 말이다. 목적지는 환송식이 있을 서울 여의도 비행장.
춘천역, 안개서린 아침이다. 우리는 홍천을 떠나 군용 트럭에 몸을 싣고 춘천을 향하면서 악을 쓰며 ‘맹호는 간다’를 불러 댔다.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높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전쟁터라는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불안감을 떨쳐 버리기 위해 그렇게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는지 모른다.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한결같은 겨레 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한결같은 겨레 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목 놓아 부르는 ‘맹호는 간다’ 였다. 노래는 사단가로 이어진다.
“조국의 운명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백전백승의 강철 같은 신념으로/안강에서, 함흥에서, 길주, 청진, 혜산진까지/피 흘려 싸워온 빛나는 맹호사단/비호같은 호 부대, 번개의 기갑부대, 삼팔선을 돌파한 이름 높은 혜산진부대/청사에 찬란한 전공을 세우며/통일 독립 위하여 싸우는 맹호사단”
춘천 시내로 들어서자 많은 시민이 길가에 나와 태극기를 들고 흔들고 있었다. 초등학생인 어린 환송객들, 멀리서 뛰어오다 말고 손을 흔드는 늙은 여인, 하마 아들이라도 월남 가는가 싶다. 뽀얀 안개, 기적 소리,……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리고 우리는 여의도 모래 벌에서 홍천에서의 한 달 동안의 훈련보다 더 고된 사열, 분열 등 환송식 연습을 해야 했다.
1965년 10월 12일 화요일 오후 2시. 흐린 날씨 속에 맹호부대 파월 환송식이 여의도 모래 벌에서 펼쳐졌다. 1만여 맹호 병사들이 모였고, 식장을 메운 20여 만 명의 서울시민이 태극기를 흔들며 환호 하였다. 그날 밤 나는 위문품을 담았던 작은 광목부대에 여의도 모래를 가득 담고 바늘로 꿰맨 다음 그 위에 ‘조국의 흙’이라고 썼다. 그리고 그것을 배낭에 넣었다. 음악가 쇼팽을 흉내 낸 것이지만, 흉내보다 더 한 절박함과 조국애가 담겨 있었다고 생각한다.
환송식 다음날인 1965년 10월 13일 수요일의 일기. ―「비가 내린다. 피아프의 샹송처럼 음울한 날씨다. 빗속의 영등포역. 비는 이별을 싣고, 기차는 운명을 만재한 채 군가(軍歌) 같은 인생들이 떠난다. (중략) 인천항. APA-32함에 올랐다. 승선 번호 112에 내 젊음과 꿈과 낭만을 모두 맡기고 이제 전쟁을 배워야 한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주둔했던 퀴논의 맹호사단 사령부가 있던 곳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베트남군이 자신들의 사령부로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으로 생각하면, 맹호사령부 자리에 베트남군 사령부가 들어서 있다는 것은 맹호사단 사령부가 군사 요충지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맹호사령부 후문이 있던 곳으로 가 보았다. 후문에는 기둥 두 개와 위병소였던 작은 시멘트 건물 하나만이 폐허가 된 채로 방치돼 있었다.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근 반세기만의 추억 여행 아닌가. 맹호사령부 오른쪽에 있는 중탄산은 옛날 그대로 의연한 자태 보여 주고 있었고, 채명신 사단장 숙소 뒤에 있던 제주의 오름 같은 삼각 모양의 작은 산도 여전했다.
중탄산에는 견고한 베트콩의 요새가 있어서 우리가 월남에 진주한 처음 몇 달 동안은 포병부대에서 매일 밤 요란 사격을 해 대었다. 요란 사격이란 적의 위치를 정확하게 타격하는 것이 아니라, 적이 ‘있을 만한’ 지점을 향해 무작정 포격을 가해 적의 기습을 예방하는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요란 사격을 할 때는 밤새 대낮같이 밝은 조명탄이 터지기도 했었다.
#5. 파월 당시 필자의 소속은 맹호사단 정훈대. ‘맹호의 소리 방송’(KFVN)과 ‘맹호 진중(陣中) 신문’의 P.I.O.(Public information officer : 보도병)로 있으면서 일선 취재를 하고 기사를 만들어 방송 뉴스를 내보내고, 신문을 편집하는 일을 했다. 맹호 진중신문은 1965년 10월 초 맹호부대 주둔지였던 강원도 홍천에서 창간호를 냈는데, 그 첫 호의 머릿 기사가 ‘강재구 대위 장렬히 산화’ 였다. (강재구 대위는 65년 10월 4일 순직했고, 후에 소령으로 추서됨)
‘맹호의 소리 방송’은 라디오뿐이었지만, 역사상 월남 하늘아래서 우리말 방송을 처음 내보낸 방송으로 기록될 것이다. 맹호의 소리 방송은 우리가 월남에 도착한 1965년 10월부터 월남 국립 퀴논방송국의 전파를 빌어 매일 오후 5시부터 한 시간씩 방송하다가 이듬해 1966년 4월 사단사령부 안에 방송국 콘세트 건물이 완공되자 독자적 방송을 내보내었다. 이번 전적지 순례에서는 그 곳(맹호사령부의 ‘맹호의 소리 방송’ 터)을 직접 가지는 못 했으나 멀리서나마 내 청춘 한나절을 불태웠던 현장을 확인할 수 있어서 매우 행복했다.
다시 퀴논이다. 퀴논 해변은 여전히 그 때나 다를 바 없었다. 당시 끄적였던 낙서 같은 글. ―「밀집한 야자나무 숲 안에는 바(Bar)가 드문드문 있고 내가 익히 드나들던 ‘파리 바’ 역시 이곳에 있었다. ‘후옹’, 그녀의 이름이다. 중국계 월남인 2세. 그녀의 남편이 사이공에서 다른 살림을 한다는 소문만을 들을 뿐 같이 술을 마시는 일도 드물었다. 나는 다만 그녀의 고객이었을 뿐이었다. 그 여인은 웃음을 잃고 무관심한 채 술을 따른다. 나는 그녀에게서 하나의 고뇌를 발견하였다. 그녀의 가슴에는 아물지 않은 그리스도의 상처가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와 대화를 나눠보지 못했다.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의 인간과 그녀의 인간이 합류하고 분류(分流)하며 실낙원의 상처를 나눠 갖는 것이다. 스콜이라는 소나기가 가신 뒤의 낙조 풍경은 시(詩)였다. 그때면 나는 줄 곳 바의 베란다에 나와 서 있곤 하였다. 월남의 석양은 그녀와 나와 그리고 모든 인간들의 고뇌가 흘러 모인 성혈(聖血)의 강이었다. 인간은 고뇌함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요, 또한 고뇌를 통하여 종교화되어 가는지 모른다.」
우리는 다음 방문지인 꾸몽 고개로 향했다. 퀴논 남쪽 24km 1번 도로에 있는 꾸몽 고개 양쪽에는 각각 해발 500m, 600m의 검푸른 산이 버티고 있어 금방이라도 고개를 삼켜버릴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48년 전 당시 이 고개로부터 남쪽은 공산군인 베트콩의 행정지역으로 베트콩에 대한 납세와 병역의 의무가 이행되고 있었다. 고개에 올라서서 남쪽을 멀리 내려다보면 베트콩이 총을 메고 검문소에서 주민들을 일일이 검문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곳에서 맹호부대는 자유월남 지역 주민과 베트콩 지역 주민들 사이에 물물 교환이 이뤄지도록 민사(民事) 작전을 펼쳤다.
가장 최전방인데도 가장 평온하게 자유와 공산 두 세계가 공존하는 곳이 꾸몽 고개로, 나는 가끔 이곳으로 취재를 나가 그 모습을 기사로, 사진으로 담아 왔었다. 맹호 용사들은 매일같이 벌어지는 물물 교환을 보다 평화롭게 해주기 위해 노력했으며, 특히나 이곳에 주둔하는 맹호 1연대 병사들은 쌀을 모아서 장사를 끝내고 돌아가는 베트콩 지역 주민들에게 점심으로 대접하는 인정을 아끼지 않았다. 병사들은 C-레이션이라는 전투 식량을 먹기 때문에 쌀이 별로 필요 없었다. 그 결과 맹호 지역으로 귀순하는 베트콩 지역 주민과 베트콩도 생겨났는데, 당시 미국이나 유럽 언론들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맹호의 민사작전’이라고 크게 다루기도 했다.
반세기만에 찾은 꾸몽 고개는 여전히 옛날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당시 맹호 검문소의 시멘트 건물은 폐허가 된 채 방치돼 있어 가슴을 아프게 했다.
#6. 이어 우리는 꾸몽 고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맹호사단 26연대 작전 지역이었던 송카우를 탐방했다. 이곳에서 라이 따이한(한국인과 베트남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 여인의 슬픈 사연과 마주하며 숙연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어느 덧 45세의 중년으로, 중학생과 초등학생 남매를 둔 엄마이기도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바로 송카우 지역에 주둔했던 맹호 26연대 2대대 참모로 계급이 대위였다고 한다. 그는 월남에 애인과 딸을 두고 귀국했는데, 수십 년 세월이 흘러 수년 전 대위의 친구들이 베트남 여행을 왔다가 그녀의 사연을 듣고 대위에게 그 소식을 전했지만, 그는 경제적인 능력이 되지 않는다며 딸과의 만남을 피하다가 병사했다는 것. 물론 그의 애인(딸의 어머니)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대위의 딸은 그 후에도 한국인 관광객을 만나면 대위의 사진을 보여주며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했다고 한다. 이에 월남에 사는 어느 한국인이 야자나무 열매를 파는 상점을 열도록 주선하여 상점을 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한국인 관광객, 특히 월남전 참전용사들의 전적지 순례 때에는 그 대위의 딸을 찾아 물건도 팔아주고 돈도 모아주며 도와주고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전쟁 뒤에 무책임하게 버려진 라이 따이한들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트랑으로 향한다. 나트랑으로 가는 길목에서 맹호사단과 백마사단(보병 제9사단)이 중간 중간 베트콩이 장악하고 있던 1번 도로의 전면 개통을 위해 벌인 ‘오작교 작전’ 승전비를 찾았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비는 옛날 그대로인데 비에 새겨진 내용은 월맹군(현 베트남군) 승리 기념비로 둔갑해 있었다. 그래서 전쟁사는 ‘승자의 역사’라 했던가.
#7. 백마부대 작전 지역으로 들어간다. 백마 격전지의 하나였던 혼바산이 나오고 혼바산 정상에 우뚝 서 있는 바위가 인상적이다. 백마가 들어오기 전 청룡부대가 작전을 펼친 인연으로 그 바위 이름이 ‘청룡 바위’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혼바산 청룡바위를 지나 나트랑으로 간다. 십자성 부대(제100 군수사령부)의 흔적을 찾아본다. 십자성 부대는 원래 맹호부대 소속의 군수지원사령부로 파월되었다가, 6개월 후인 1966년 4월에 독립부대로 편성되어 주월 한국군의 군수지원을 도맡는 비전투부대였다. 십자성 부대가 있던 자리에는 막사나 연병장, 극장 등 모든 시설들이 옛날 그대로 남아있었으나 이제는 여기도 역시 베트남군(옛 공산월맹군) 주둔지로 변해 있었다.
나트랑은 월남 사람들이 ‘나짱’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휴양도시로 서양인 휴양 인파가 넘쳐났다. 나짱이라는 말은 ‘하얀 집’이라는 뜻으로 1800년대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인들이 하얀 집을 많이 지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월남 전적지 순례 5일째. 이제 월남 최대의 도시 호치민이다. 우리 파월 당시의 이름은 사이공이었고, 자유월남의 수도이자 동양의 파리로 그 아름다움을 자랑했던 도시이다. 지금은 공산화 되었지만 그래도 인구 1천만 명의 대도시로, ‘붉은 수도’ 하노이(인구 600만 명)를 제치고 베트남 제 1의 도시로 위용을 떨치고 있다. 하노이가 베트남 정치의 중심이라면 호치민시는 베트남 경제의 중심지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호치민시 중심가에 자리하고 있는 베트남 전쟁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7개 테마로 나누어 전시된 박물관에는 1960년대부터 1975년 4월 30일 자유월남이 패망할 때까지 발생된 전쟁에 관한 역사가 사진 자료, 또는 실물로 전시돼 있었다. 주로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이 베트콩과 월맹군에 가했던 잔혹한(?) 행위를 중심으로 자료를 전시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전장에 즐비하게 늘어선 시신, 한쪽 다리가 떨어져 나간 시신, 살점은 날아가고 옷만 남은 시신 등의 사진이 내걸려 있어 전쟁의 참혹함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 미군이 전쟁에서 사용한 고엽제(枯葉劑)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죽은 신생아 사진들과, 손발이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짧은 기형아 등의 사진을 보며 전쟁 후유증도 얼마나 심각한 지를 확인하기도 했다. 우리 순례단원 자신들이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어서 그 심각성은 더 실감나게 다가 왔다.
#8. 월남 전적지 순례 6일째, 마지막 날이다. 호치민시에서 75km 가량 떨어진 구찌시를 찾았다. 게릴라용 지하 터널로 널리 인구에 회자 되는 곳이다. 먼저 실내에서 땅굴 모형과, 땅굴 안팎에서의 베트콩들의 생활과 활동 모습을 그린 다큐멘터리(1967년 제작, 흑백, 한국어 해설 녹음)를 관람한 뒤 땅굴 주변을 둘러보았다. 베트콩들이 사용했던 땅굴에 직접 들어가 통과해보는 체험도 했으며, 미군 차량 바퀴의 고무를 잘라 베트콩 신발인 슬리퍼를 만드는 작업도 볼 수 있었다. 특이하게도 슬리퍼 밑창에는 사람이 다닌 자국을 알 수 없도록 혼란케 하는 특수한 장치를 해 놓고 있었다.
구찌땅굴은 1948∼54년 프랑스와의 인도차이나 전쟁 때 처음 만들어졌고, 1960년대 미군과의 베트남 전쟁를 치르면서 200km를 더 파서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고 한다. 땅굴 안에는 회의장, 학교, 무기 공장, 병원, 군 지휘소 등 여러 가지 생활시설과 대피시설 등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어 땅굴 속에서 1만 명 이상이 장기간 생활할 수 있었다는 설명도 홍보관에 전시돼 있었다.
구찌 땅굴 관람을 마치고 사이공 강을 오가는 크루즈 선에서 저녁 식사를 하며 호치민 시가지의 밤 풍경을 감상했다. 3층 규모의 크루즈 선엔 식사와 여흥을 즐기는 사람들로 붐볐다. 호치민시의 야경은 단순했다. 호치민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우리 나라 모 기업이 지은 68층 짜리 빌딩인데, 원래 72층으로 설계돼 있었으나 공산당 정권이 제동을 걸어 4개 층을 낮추게 됐다고 한다. 사연인즉슨 패망한 자유월남, 그들 말로 ‘괴뢰 정권’의 수도에 무슨 72층이냐는 것. ‘혁명의 수도’ 하노이에 72층 건물을 지어 랜드마크로 삼을 터이니 호치민에는 68층만 올리라고 했다는 것이 가이드의 설명.
어쨌거나, 68층 짜리 빌딩과 주변의 건물들,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이 월남을 방문할 때 묵었다는 하얀 색의 호텔을 포함하여, 한껏 네온싸인으로 반짝이는 호치민의 야경이 분위기를 돋우는 가운데, 크루즈선의 무대에서는 4인조 밴드의 반주에 맞춰 가수들의 노래가 이어졌다. 한국인 관광객이 왔다고 하여 ‘돌아와요 부산항’ ‘소양강 처녀’ ‘아파트’ 같은 한국 노래와 어우러진 월남의 유행가도 가사 내용은 모르지만 가슴을 파고드는 무엇이 있었다. 그들의 노래는 애잔하면서도 슬펐다. 자유월남이라는 나라를 잃고 자유를 속박 당하는(베트남에선 특히,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다고 한다) 사람들의 비애가 담겨 있었다면 나만의 느낌일까.
#9. 나는 월남 전적지로의 순례 길을 떠나기 전에 우리가 파월될 때 국방부에서 나눠준 ‘해외파견 장병 수첩’이란 수첩을 찾아보았다. 거기에는 월남어 회화가 나와 있기 때문에 무슨 도움이 될까 해서였다.
그 수첩에는 ‘우리의 맹세’, ‘군인의 길’, ‘군인 복무령’ 외에 여러 가지 규정과 수칙, 군가 가사, 월남어 회화까지 망라돼 있다. 그 가운데 ‘주월 한국군의 신조’에서는 ‘우리는 대한민국 국군의 대표이다. 외국군에게 모범을 보이자’ ‘우리는 사랑과 친절로서 자유 우방의 참된 벗이 되자’라는 내용이 보이고, ‘주월 장병의 몸가짐’이라는 항목에서는 ‘웃는 낯으로 먼저 인사하자’ ‘부녀자를 희롱하지 말고 악수를 청하지 말자’ ‘힘든 일을 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는 도와주자’ ‘금지구역의 출입은 스스로 삼가고 무전취식을 하지 말자’ ‘음주 후 노상에서 대성 방가 하거나 추태를 부리는 일이 없도록 하자’ ‘듣고 보는 것의 전부가 정보이니 빠짐없이 보고하자’라는 대목도 나온다. 지금 보더라도 똑바른 말이 아닐 수 없다. 솔직히 외국에 나가면 해방감에 들 떠 자칫 일탈하게 마련이다. 우리가 파월될 당시에도 병사들에게 그것을 경계하고 스스로 잘 지켜 나가자는 교훈을 담은 것이다. 이번 순례 길에서도 마찬가지. 우리는 스스로를 경계하며 월남 참전 군인으로서 조금치도 흐트러짐 없는 마음가짐과 행동으로써 파월 장병의 긍지를 드높이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존심을 살리려고 노력하였다.
반세기만의 외출, ‘작전 지역으로의 귀환’은 끝났다. 5박 7일의 ‘추억 시간 여행’의 마지막에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가 생각키움은 웬 일일까. 그래, 우리는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세월을 이야기 하자. 그리고 옛날을 추억하자. 세월은 가고 온다지 않는가.
‘한 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세월은 가고 오는 것/……/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가을 바람 소리는/내 쓰러진 술병에서 목메어 우는 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