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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송(海松) 陳玉洙추천 0조회 025.12.08 17:49
여양진씨 상대사 재구 - 연구자료
(전) 연세대학교 교수 양권승 박사 논문 인용
[출처:다음] 진씨사랑방 지기 ㅣ작성자 해송(海松) 진옥수(陳玉洙)
| 여양진씨 상대사의 재구 가능성(1) 1.머리글 여양진씨 사적을 고찰해보니 선계는 중국의 2大 성군(聖君) 순(舜 )임금이 비조이시며 휘는 중화 (重華)이다. 기원전2231년 순임금의 34세손 호공만을 중흥조로 공의 53세손 민공월로 계대를 잇는다. 진나라가 초나라 혜왕(惠王)에게 망한 기원전 478년, 그 후손이 제(齊)나라로 가서 나라이름 진(陳)을 성(姓)으로 하였으니 이것이 진씨의 최초 근원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18대 의종 조, 무신의 난(정중부의 난)에 문신들에게 덕을 베푼 참지정사 진준과 그의 손자 진식,진온,진화가 있으며 모두 문과에 급제하고 문명을 떨쳤다. 여양진씨 2세조 ▼진준편 고려사 원본 권100, 20쪽 좌 1~2열 陳俊淸州(呂)驪陽縣人-중략-庚癸之亂文臣家賴俊全活者甚多時人謂 有陰德後必昌孫湜澕溫皆登第有文名 ▼ 진준과 그의 손자 식,화,온 모두 문과에 급제하고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진준편 고려사 원본 우1~9열 그러나 족보서지학분야에서 근 20년을 연구해온 필자는 한시특강에 매호 진화와 예빈경 진온의 몇 편의 시를 음미해 본 정도였고 임진왜란의 의병장인 건재 김천일을 연구하면서 함께 활약한 섬호 진경문선생이 남긴 몇 편의 글을 읽어 본 게 전부였다. 한마디로 여양진씨에 관한 깊은 연구가 없었던 필자는 지난 2005년 10월 전남 나주시에서 개최한 영산강 문화축제에서 제1회 팔도성씨올림픽을 주관하게 되었다. 나주시에서 이런 특별한 행사를 하게 된 연유는 나주를 본관으로 한 성씨가 무려 76본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본관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동족마을 보고서에서 나주를 본관으로 한 성씨 중에 나주나씨,금성나씨,나주정씨,남평문씨와 함께 나주지역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성씨로 나주진씨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록을 근거로 진씨가 살고 있는 나주시 왕곡면 장산리, 나주시 동강면을 방문해서 족보를 열람해 보니 모두 여양진씨로 합보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통계청에서 발표한 자료에는 아직도 나주진씨로 본관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나주목지에는 고려조의 나주진씨 인물로 고려 원종조에 삼별초군의 진압에 공을 세운 진자화(나주인:여양진씨)라는 인물이 대서특필되어 있었다. 그러나 진자화는 나주진씨 족보는 물론 여양진씨 어느 족보에도 입록이 되어 있지 않았다. ▼ 진자화陳子和 나주인羅州人 고려사 103권 40쪽 우1열~ 역사기록에 큰 발자취를 남긴 진자화라는 인물의 기록이 나주진씨 족보는 물론 합보된 여양진씨 족보에도 없으니 그 사유가 무척 궁금했다. 게다가 나주시 문화공보실에서 나주목사 부임행차 재현행사를 준비 하면서 역대 나주목사들의 본관을 조사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는데 고려 공양왕조에 나주목사에 부임한 진원서, 송문중 등 20여명의 나주목사는 그 본관을 도저히 알 수 없어 공란으로 남긴 체 보고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필자는 제1회 팔도성씨올림픽에 나주진씨 또는 여양진씨를 전시소개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데 어떤 인연이 있었을까? 7년 전 효녀심청연구를 통해 알게 되어 여지 껏 호남지방의 향토사자문을 해주고 있는 광주의 한 지인을 통해서 진영기,진옥수 선생님이 여양진씨 상대사정립을 위해 깊은 연구를 하고 있으며 다소의 궁금한 점이 있어 함께 논의를 했으면 한다는 뜻을 전해 들었다. 첫 만남에서 나는 지금까지 접해보지 못한 여양진씨에 관한 많은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미리 수집하고 연구한 문중자료의 복사본을 전달받았다. 연구가 부족했던 필자는 새로운 사실에 흥미를 느켜 하루의 일과를 온통 여양진씨 자료 탐독에 쏟았다. 당시 한국족보학연구소의 연구진은 한국의 명가,오신남장군실기 등을 출판하는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했으나 출판일정을 늧추면서 까지 여양진씨 탐구에 열중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작성된 이 보고서는 여양진씨 상대사에 관하여 몇 가지 주요 논점을 정리한 1차 연구물이다. 현재도 연구가 진행 중인 관계로 다소 미흡한 부분이 있으나 몇몇 주제는 최초로 문제제기를 한 내용들인데다 종중과의 공동연구가 절실히 필요한 부분이므로 여양진씨 종중은 물론 씨족사를 연구하는 여러 학자들도 함께 열람하여 상호보완연구를 했으면 하는 바램에서 이 보고서를 작성한 것이다. 2. 시조고 1)동래조 송나라 진수 (陳琇)설 여양진씨에서 기발간한 일부 족보 서문에는 진씨의 유래에 관하여 우리 동방의 진씨는 중국에서 고려에 동래하였는데 갑인보 사적편에 송나라 복주인이며 우윤벼슬에 있는 진수라는 분이 오랑케의 난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고려국 여양현에 숨어 살았으며 그 후손 총후가 비로소 고려 예종조(1106~1122)에 벼슬하여 상장군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대종회게시판에도 중국 북송때 복주사람으로 중국진씨의 비조이신 항亢 의 46세손으로 진수라는분이 우윤벼슬을 지내시다 몽고족인 요금이 침범하자 가족을 동반하여 황해바다를 건너 고려에 귀착했다고 적고 있다. 만약 이 주장을 수용한다면 동래조인 진수陳琇 는 진총후의 선대가 되어야 하는데 진수의 동래시기에 관하여 여양진씨 종중자료에서는 송宋나라 휘종년간(1082~1125)이라 하였다. 송나라 휘종은 재위시절 금나라에 의해 수도 개봉이 함락하게되자 아들 흠종에게 양위를 한다. 1125년의 일이다. 이를 정강의 변이라 하는데 이 때 송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동래하여 고려에 귀화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 여양진씨 동래조라고 추정하는 진수陳琇 가 이 때 동래한 것이라 한다면 진수는 1080년 전후에 출생하였을 것이다. 한편 여양진씨 가문의 기록에서 시조 진총후가 이자겸의 난(1126)을 토평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의 관직이 대장군이므로 진총후 또한 1080년 전후에 출생한 것으로 비정할 수 있다. 즉 진수陳琇 와 진총후는 생졸시기에 있어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모순이 있다. 왜냐하면 여양진씨 문중에서 진수陳琇 의 아들 또는 후손이라고 비정하는 여양군 진총후는 진수가 고려에 귀화한 1125년 경 보다 앞서 이미 예종조(1106~1122)에 상장군으로 벼슬을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여양진씨 최초의 동래조라고 비정하는 진수가 고려에 동래하기도 전에 이미 그 후손이라고 하는 진총후가 먼저 고려에서 벼슬을 한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양진씨 갑인보(1914년 발간)등에서 언급하고 있는 진수의 동래설과 그가 진총후의 선대라는 문헌적 근거는 무엇인가? 아마도 서산정씨 족보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서산정씨 시조는 송나라에서 원외랑을 지낸 정신보이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원래 중국 절강성 출신으로 증조부는 응충이며 아버지는 정우거로 원외랑을 지냈다. 정응충의 증손자인 정신보는 송나라에서 상서형부원외랑으로 있다가 북송이 망하자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로 망명하여 서산에 정착세거하였다. 그런데 정신보의 아들 정인경은 고려 고종 41년(1254) 문과에 급제하고 충렬왕이 세자로 있을 때 원나라 수도 연경까지 호종하였으며 이 공로로 1274년 2등공신에 오른 인물이다. 즉, 여양진씨 족보자료에서 진수와 사돈관계인 서산정씨 시조 정신보 일행의 한반도 동래시기를 송나라 멸망시라 하였는데 송나라는 북송과 남송이 있으며 북송은 960년에 창업하여 1127년에 멸망하였고 절강성일대의 남송이 원나라에 멸망한 시기는 1279년이므로 남송이 망하자 동래한 것은 아니고 아마도 북송말기(1125년)에 정신보일행이 동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인경은 1254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남송이 멸망(1279)하기 전에 이미 정신보의 아들 정인경이 고려 충렬왕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다녀오고(1269)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려사 등의 문헌기록에서 정인경의 출생시기는 1237년이며 1305년에 졸한 인물이므로 서산정씨 시조이며 정인경의 부친인 정신보는 1210년 전후에 출생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서산정씨 족보에 의하면 서산정씨 2세 정인경의 배위가 중국(송나라) 복주인으로 양주군부인 진씨이며 친정아버지가 예빈윤인 진수陳琇이다. 서산정씨 족보상 2세 정인경의 장인 이름이 바로 진수로 이는 여양진씨 갑인보(1914) 등에서 말하는 진수와 휘도 완전히 동일할 뿐 아니라 벼슬, 동래시기, 이유등이 모두 사실로 확인된다. ---------------------------------------------------------------------------------------- 二十二.여양진씨 '선계先系 진수陳琇 설'은 폐기 >참조 후손회람 1292년(고려 충렬왕18)개성부에서 정인경에게 내려준 가족 현황과 그 조상을 기록한 문서로 서산정씨가승에 수록된 것. 典議部上星化一里 辛卯戶口良中戶奉翊大夫同知密直司 事軍簿判書上將軍世子元賓 鄭仁卿乙准爲內敎 壬辰十月日部上星化一里 辛卯戶口準奉翊大夫同知密直 司事軍簿判書上將軍世子元賓 鄭仁卿年五十二本富城郡 父追封金紫光祿大夫門下侍郞平章事判禮賓事行尙書刑 部員外郞 臣保古名彪故祖追封尙書戶部員外郞行禮部承 同正 秀琚故曾祖追封銀靑光祿大夫尙書左僕射行儒林郞 檢校軍器監 儀故母高敞郡夫人 吳氏年七十二外祖衛尉 承同正 吳永老古名愈延故 妻楊州郡夫人 陳氏年三十八 本福州父衛尉尹致仕陳琇 1)古名平裕祖追封軍器監 明允故 曾祖掌治署令 仁光故母中原郡夫人 梁氏年六十本忠州父 檢校太子詹事太醫少監賜紫金魚袋梁{木+延}古名允壽故幷産 一男信忠年十七一女召史年十六二女召史年十三節付二 男巴只年九節付改名信英三男巴只年六節付改名信和五 男巴只年二節付改名信綏已下不準印 1995『한국고대중세고문서연구』, 노명호 외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고려 政案의 양식과 기초 자료: ‘鄭仁卿政案’을 중심으로」, 박재우, 『고문서연구』28, 한국고문서학회, 2006 ◆ 註 1)妻楊州郡夫人 陳氏年三十八 本福州父衛尉尹致仕陳琇 본문내용> 처는 양주군부인 진씨(陳氏)이며 38세로 '본은 복주(송나라)인' 아버지는 위위윤 진수陳琇(정인경의 장인)이다. ▣1. 여양진씨 대종회> 씨족사정립의 모순점. ▶1) 여양진씨 임신보 1권 51페이지 셋째줄~넷째줄▶ 진씨 유래편에서 우리 동방진씨는 중국으로부터 고려시대에 동래한것 같으며, 갑인보 사적편에 동방진씨 선계는 송나라 복주(福州)사람이며 우윤벼슬에 있는 진수(陳琇)라는 분이 오랑케의 난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고려국 여양현 덕양산아래 뜻을 높이고 숨어살았다. 그 후손이 휘 총후라 하였으나 그 사실은 확증 이 없으므로 후인들의 넓은 고찰을 기다린다. 여기에서 말하는 여양진씨 시조 진총후 선계 송나라인 陳琇설의 陳琇와, '1292년개성부(開城府)에서 정인경(鄭仁卿) 에게 내려준 호적등본에 해당하는 문서의, '瑞山 鄭仁卿의 장인:진수(陳琇)가 복주인(송나라:福州人), 벼슬(윤:尹), 성명(이름:진수陳琇) 에서 일치한다. ▶2) 임신대동보 1권 55페이지 여양진씨 시조 단비명- 임신보 1권 59 페이지' 넷째줄~8째줄을 인용하면 나와 친히 지내는 진태하교수가 문중어른들의 명(命)으로 그 시조 단향비명을 와서 청하며 소매속에서 그 세보2책(世譜二冊) 및 관계글을 꺼내면서 조용히 말하기를 세상에 전하는바 우리 진씨는 본래 중국 복주인(福州人)이다 하며 북송시(北宋時) 우윤 진수(右尹陳琇)가 있었는데 북노의 난을 피하여 가족을 솔령(率領)하여 바다를 건너 고려의 여양현(驪陽縣)에 이르러 덕양산아래 복거(卜居)하니, 그 자손이 여양인(驪陽人)이 되었다고 한다. ▶1) 진씨 유래편에서는 확증이 없으므로 후인들의 넓은 고찰을 기다린다 하였는데, ▶2) 단비명에서는 우윤진수(陳琇)가 있었는데 그 자손이 여양인이 되었다고 한다 "라고 확정지어 말하고 있다. 서기 1986년(丙寅) 성균관대학교 교수 여주 이우성 근찬. 발행처: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동 여양진씨 대종회. 서기 1994년 3월 25일 편수부장:진광열(陳光烈) - 인쇄인:(주) 뿌리 출판사 2. 송나라 복주인(福州人) 진수(陳琇)는, 여양진씨 선계가 될 수 없는 이유! 1) 위의 기록을 고찰한바, 1292년당시 정인경이 52세이다. 그렇다면 1241년생이되며, 아내 진(陳)씨는 14세 연하이므로 1255년생이된다. 50세에 딸을 낳았다해도 아버지인 진수(琇) 출생년은 1206년 전후생으로 추정할 수 있다. 2) 여양진씨 시조 진총후 여양군은 1126년 이자겸의 난을 토평하여 여양군이란 군호를 득봉하였다는 '보' 사적을 신뢰한다면, 여양진씨 시조공(진총후)은 최소한 1090년 전후생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결론> 福州人 진수(陳琇)는 여양진씨 시조 여양군 진총후陳寵厚의 최소 110 여년 후대인물이므로 선계가 될 수 없다. 자료검토/ 25世 ☞ 해송(海松) 진옥수(陳玉洙) [출처:다음] 진씨사랑방 지기 ㅣ 공동연구자 해송(海松) 진옥수(陳玉洙) ▼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八 ▶人物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8 권 ▶인물 -[人物] 인물 臣聞東南之夷。高麗人材最盛。仕於國者。唯貴臣以族望相高。餘則或由進士選。 或納貲爲之。與夫世祿吏職。莫不有等。故有職,有階,有勳,有賜,有檢校, 有功臣,有諸衛。仰稽本朝官制。而以開元禮參之。然而名實不稱。淸濁混餚편001 。 徒爲虛文耳。今使者入境。皆擇臣屬通敏者。付以將迎之禮。 以州牧則有若刑部侍郞知全州吳俊和,禮部侍郞知青州洪若伊, 戶部侍郞知廣州▶陳淑。以迎勞餞。送則有若銀青光祿大夫吏部侍郞朴昇中, 아래에서 계속-- ▼ |
| 이 자료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정인경의 장인인 진수는 1210년 전후에 출생한 인물이다. 즉, 진수는 여양진씨 시조인 진총후(1080년 전후 출생) 보다도 적어도 130에서 110 여년 후에 출생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산정씨 족보에 등장하는 송나라출신 진수를 여양진씨 기세조인 진총후 (1080년 전후 출생)의 선대로 이해하여 무비판적으로 여양진씨 족보의 서문 등에 기록한 점은 명백한 오류이다. 여양진씨 족보기록의 우리나라 모든 진씨들이 그 뿌리를 중국에 두고 있다는 사실에만 집착하여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이해할 수는 있으나 이들의 위차관계는 반드시 바로 잡아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양진씨 갑인보(1914)등에 서술되어 있는 송나라에서 우윤벼슬을 지낸 진수의 동래사실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인가? 공교롭게도 송나라 휘종 말년인 1125년 송나라 수도인 개봉이 함락되고 송나라 관료들이 상당수 고려에 귀화할 무렵 고려 인종은 5월에 금나라에 사신을 파견한다. 그동안 송나라를 섬겼으나 새로 발호하는 금나라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어 등거리 외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때 사신의 대표는 사재소경인 진숙(陳淑) 과 상의봉어인 최학란 이었다. 금나라에서는 국서가 표문이 아니고 고려가 금나라에 대해 신하국이라고 적지 않았다 하여 받아들이지 않아 되돌아왔다. 진숙(陳淑) 우 2열 하단-3열 상▼ 사서에는 인종3년(1135)에 진숙陳淑 이 김부식과 함께 서경에서 일어난 묘청의 난을 토벌하고 이듬해 예부상서 동지추밀부사 겸 태자빈객에 이어 병부상서 지추밀원사 1138년 우복야를 거쳐 다시 추밀원사가 되고 참지정사로 치사했으며 1151년에 졸한 인물이라고 적고 있다. 매우 현달한 진씨 성을 가진 인물이다. 이처럼 여양진씨 서문에서 말하는 송나라 휘종 연간에 금나라의 침입으로 송의 수도 개봉이 함락되는 소용돌이에서 금나라와의 등거리 외교를 위해 사신으로 나갔다가 되돌아온(동래)한 인물이 진수와 비슷한 이름의 진숙이 있는데 매우 흥미롭다. 졸년을 역산하면 진숙은 1080년 전후에 출생하였다. 즉, 진총후와 같은 항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또 한 1123년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의 수도 개경에 와서 1개월간 머무르며 고려의 여러 가지 풍물을 기록한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당시 송나라 사신을 접반한 고려왕실의 접대 책임자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전라도 경내에서는 형부시랑 오준화가 충정도에서는 예부시랑 홍약이가 경기도에서는 호부시랑겸 지광주사 진숙陳淑 이 맡아 의전을 수행했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八 ▶人物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8 권 ▶인물 [본문내용]을 보면, 경기도 광주(廣州)에 온 서긍일행을 1] 진숙(陳淑) 호부시랑 광주지사가 접대 할 때 송별연에 참석한 고려 중신들을 열거한 내용 이다 . -[人物] 인물 臣聞東南之夷。高麗人材最盛。仕於國者。唯貴臣以族望相高。餘則或由進士選。 或納貲爲之。與夫世祿吏職。莫不有等。故有職,有階,有勳,有賜,有檢校, 有功臣,有諸衛。仰稽本朝官制。而以開元禮參之。然而名實不稱。淸濁混餚편001 。 徒爲虛文耳。今使者入境。皆擇臣屬通敏者。付以將迎之禮。 以州牧則有若刑部侍郞知全州吳俊和,禮部侍郞知青州洪若伊, 戶部侍郞知廣州▶陳淑。以迎勞餞。送則有若銀青光祿大夫吏部侍郞朴昇中, KBS HD역사스페셜 – 송나라 사신이 그린 천 년 전 국제도시, 개경 / KBS 20051202 방송 선화봉사고려도경 동영상 해설:고두심 ☞ 클릭 https://youtu.be/bw2XtwLfAAE 당시 권력의 실세는 예종왕비의 아버지인 이자겸으로 이자겸의 난(1126)이 일어나기 3년 전의 일이다. 문제는 3년후 권력의 실세인 경원이씨 이자겸의 세력을 제거하고 새롭게 부상한 가문이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으로 대표되는 경주김씨 가문이다. 진숙은 경주김씨 김부식과 노선을 함께 하며 고려 인종조의 가장 큰 난인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을 평정하여 큰 공을 새웠다. 한편 파평윤씨 윤언이가 조정에 올린 광주사상표에는 진숙이 고려 인종조의 묘청의 난을 평정하는데 선봉에 섰으며 당시 관직이 군사軍使 라고 적고 있다. 군사는 대장군 병마사의 약칭이다. 이로 보면 진숙은 사재소경으로 외교관을 지냈고 목민관인 지광주사, 지금의 교육부,문화부장관격인 호부시랑 등 문관직과 대장군병마사와 같은 무관직을 겸직한 인물이다. 이는 김부식,윤관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고려 초중기에는 문관이 무관직을 주로 겸직하였다. 진숙이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1135)을 진총후가 이자겸의 난(1126)을 그리고 참지정사 진준이 문무겸관으로 정중부의 난에 공을 세운 인물이라는 가문사적 정체성 측면에서 진숙의 여양진씨 입록여지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특히 사료에서 참지정사 진준의 아버지인 여양군 진총후에 관한 기록이 전무하다는 점과 진숙이 이자겸과 묘청의 난 진압으로 사료에 명백히 공적을 세운 사실이 있는 점, 당시의 직책이 대장군 병마사로 여양진씨 족보에서 진총후의 관직인 신호위대장군과 동일하다는 점,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에 진압책임자로 공을 세운 인물에는 진총후는 없고 오히려 유일하게 진숙이 크게 활약하여 공을 세운 점에서 진숙과 진총후의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된다. 특히 시조 진총후의 이름에서 총후寵厚 는 왕의 두터운 총애를 받았다는 의미이다. AI 브리핑실험 단계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陳淑(진숙)은 고려 전기(12세기)에 활동한 문신으로, 우복야·추밀원사·참지정사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한 인물입니다. 주요 이력과 활동
실재 진숙은 송나라에서 고려에 파견 온 서긍 일행을 접반하는 총책임자였으며 동시에 송나라와 적대관계에 있는 금나라에 특사로 파견되어 외교를 전담하고 인종조의 가장 큰 난리인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 총책임자로 발탁될 정도로 왕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렇다면 진총후의 총후는 고려 인종이 총애하는 신하인 진숙에게 하사한 이름이거나 자字 일 가능성이 있다. 본 연구자(양권승교수)는 진숙과 진총후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판단한다. 자료검토자/ 25世 ☞ 해송(海松) 진옥수(陳玉洙 [출처:다음] 진씨사랑방 지기 ㅣ 공동연구자 해송(海松) 진옥수(陳玉洙) |
다음의 자료를 보자.
진총후 시조공 문성공 시호
해송(海松) 陳玉洙추천 0조회 025.11.29 17:49댓글 0
위에서 진규방은 여양군이며 시호가 문성공인 진총후의 22세손이다. 진규방은 조선후기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송사 기우만의 문생으로 성리학의 대가였고 성리휘안 등 많은 저술을 남긴 인물이다.
이 기록에 진총후의 시호가 문성공으로 나와 있다. 문관에게 내리는 최고의 시호이다. 여양진씨의 족보에서는 오직 대장군으로만 적혀 있어 문관과는 거리가 먼 인물인 듯 하지만 그 이후 참지정사 진준 과 어사공 諱휘 식, 예빈경공 휘 온, 매호공 휘 화 등 여양진씨 상대인물중에는 무관보다는 오히려 문관으로 명성을 남긴 인물이 많다. 이러한 특징에서 비추어 진총후가 받은 문성공이라는 시호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며 이는 진총후가 진숙과 동일인물이라는 가설에 더욱 무게를 두는 기록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여양진씨 족보에는 1080년경에 출생한 진숙을 입록하고 있는가?
족보의 상대사를 검토해 보니 같은 諱휘를 가진 인물이 족보에서 몇 군데 발견되지만 대부분 조선조의 인물이다.
그런데 을해보(1865년) 등에 독특한 기록이 있다.
진광현 陳光賢 1子 -숙淑 1子 -重仁 2子 중의
2子 -양瀁
여양진씨 3세 광현의 아들로 진숙淑 과 진양이 입록되어 있는 것이다. 전후기축보는 물론 여타의 여양진씨 족보에는 진광현의 아들이 없으며 진숙淑 과 진양이 입록된 족보는 전혀 없다.
을해보 편찬자들이 어떤 문헌적 근거로 이와 같은 족보를 제작했는지는 속단하기 어려우나 병자보(1936)에서 다시 한번 동일한 계보의 족보가 제작된 사례로 보아 무시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이를 인정한다면 이미 여양진씨 가문에서는 진숙이 시대편년의 오류는 있으나 호부상서로 관직마저 동일한 진숙을 선조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근거가 된다.
2) 송나라인 동래설
위에서 진수陳琇 가 진총후의 선대라는 주장은 문헌상 부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양진씨 구보 서문에서는 가승으로 전해오는 중국 동래설에 대해 무게를 두고 있다. 여양진씨는 중국에서 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국 송나라의 진씨 중 고려에 귀화 또는 내왕한 인물에 대해 살펴보자
고려 현종조(1010) 송의 천추추신으로 토산물을 바친 진문궤, 송나라 도강(공무역선단의 대표)인 진수陳守 가 흰꿩을 고려에 바친 사례가 있으나 이들은 귀화하지 않았다.
다만 선종8년(1091)에 진양陳養 이 송나라에서 고려에 귀화하였는데 무예가 출중했으며 고려 왕실에서 벼슬을 받기도 했다. 특히 진양은 1060년 전후에 출생한 중국 송나라 출신 고려 귀화인이며 그가 진총후보다 20년전에 출생한 인물이므로 아버지 항렬에 가능성이 있다.
다음으로 문종 15년(1061)에 송나라에서 진사인 진위陳渭가 고려에 왔는데 고려왕실에서 글재주가 뛰어나 비서교서랑을 삼았으며 고려에 귀화하였다. 기록으로 보아 그의 후손이 고려에서 벼슬도 하고 번창한 것으로 보이는데 진위는 생몰시기로 보아 여양진씨 기세조인 진총후의 조부祖父항렬로 볼 수도 있다.
즉 여양진씨가문에서 그 가문의 선대가 중국 송나라에서 동래한 것이라고 단정한다면 진총후와 진준의 공훈사실과 관직사실에서 확인되듯이 진총후의 선대는 일반 평민가문은 아니며 적어도 송나라에서 명족의 후예여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위의 가설은 설득력이 있다. 이후 중국 문헌과의 비교대조 작업을 통해 이동루트가 조명될 것이다.
3)화산이씨(花山李氏)와 함께 동래설
화산이씨 족보에 의하면 시조 이용상은 송나라가 망할 것을 예견하고 고려 고종조에 바다를 건너 동래하여 황해도 옹진 화산에 정착,세거하였다고 한다.
화산군 이용상의 본전에 의하면 당시 함께 동래한 이건문이 홍주 신평에 정착세거하여 그가 신평이씨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이용상가문의 맏사위가 진일조인데 그도 함께 동래하였다고 적고 있다. 즉 이용상,이건문,진일조 가문이 각각 웅진,홍주 등 서해안에 정착한 것이다. 이로 보면 충청도 서해안에 위치한 여양진씨도 진일조陳日照의 후손이라는 가설이 성립하는데 이 시기가 1213년 후이므로 이미 여양현에 세거하고 있던 진준보다도 후대이다. 따라서 여양진씨가 화산이씨 사위인 진일조의 후예라는 가설은 타당성이 적다.
4) 당나라에서 동래설 앞서 언급했듯이 충청도 진천,청주세력과 함께 대호족으로 성장하고 있던 진원陳原 이 고려건국 6일에 단행된 첫 관료인사에서 서열 5위의 창부령(지금 재무부 장관격)에 임명되었다.
태조 원년(918) 무인년
원년 여름 6월
병진일. 태조가 포정전(布政殿)1)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2)라 하고 연호를 고쳐 천수(天授)라고 했다.
정사일.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전 임금은 사군(四郡)3)이 흙 무너지듯 붕괴할 때에 도적의 무리들을 제거하고 점차로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나 천하를 아우르기도 전에 갑자기 잔혹한 폭정으로 백성들을 다스렸으며 간사함을 가장 옳은 것으로 여기고 위협과 모욕을 가하는 것을 주된 통치수단으로 삼았다. 요역과 부세가 번거롭고 과중하여 인구는 줄어들고 농토는 텅 비게 되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궁실만은 크고 으리으리하며 옛 제도를 준수하지 않고 힘든 부역은 그칠 날이 없으니 결국 원망과 비난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함부로 연호를 정하고 황제를 칭했으며 처자를 살육한 죄는 천지간에 용납되지 못할 일이며 귀신과 사람이 함께 노할 일로서 왕업의 기반을 송두리째 추락시켰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으랴? 짐은 공들이 추대하는 마음에 힘입어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 낡은 풍속을 고쳐 모든 것을 다함께 새롭게 만들려 한다. 마땅히 법도와 규범을 혁신하는 길4)을 쫓을 것이며 가까운 데서 얻는 원칙[伐柯之則5)]을 감계로 삼으리라. 임금과 신하는 물과 물고기처럼 서로 어울려 즐거움[魚水之歡6)]을 같이 할 것이며 온 천하는 태평시대의 경사[晏淸之慶7)]를 함께 누릴지니 나라의 모든 백성들은 다 짐의 뜻을 잘 알도록 하라.”
이에 신하들이 절을 올리고 사례했다.
“전 임금의 통치 기간에는 선량한 사람들이 악독한 피해를 입고 죄 없는 사람들이 잔혹한 학대를 받는 통에 남녀노소가 모두 불만에 싸여 원한을 품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이제 다행히 목숨을 보전하여 성스럽고 현명한 임금을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힘을 다하여 성은에 보답하지 않겠습니까?”
무오일. 왕이 한찬(韓粲) 총일(聰逸)에게 지시했다.
“전 임금이 참소를 믿고 함부로 사람을 죽였는데, 경의 고향 청주(靑州)는 땅이 기름지고 호걸이 많았기 때문에 변란을 일으킬까 우려한 나머지 그 곳 사람들의 씨를 말리려 했다. 그리고는 군인 윤전(尹全)과 애견(愛堅) 등 80여 명을 소환했는데 이들은 아무 죄가 없는데도 형구를 찬 채 끌려오고 있으니 경은 빨리 가서 그들8)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도록 하라.”
경신일. 마군장군(馬軍將軍) 환선길(桓宣吉)이 역모를 꾀하다가 처형당했다.
신유일.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관직을 설치하고 직책을 분담하는 일에는 유능한 사람을 임명하는 것이 중요하며, 세상을 이롭게 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일에는 어진 이를 가려 뽑는 것이 우선이다. 관리들이 직무에 소홀하지만 않는다면 정치가 문란해질 까닭이 없는 것이다. 짐이 외람되게도 천명[景命9)]을 받아 큰 계획을 통어하려니,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되면 편안하기 어렵고 재능이 부족함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오직 사람의 재능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관리를 선발함에 실수가 많아 어진 사람을 누락시켰다는 탄식을 야기시키고 선비를 얻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을까 걱정이다. 자나 깨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이것뿐이다. 조정 안팎의 여러 신료들이 모두 그 임무를 잘 감당할 수 있으면 현재 훌륭한 치적을 이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후대의 칭송까지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마땅히 관리[列壁10)]를 등용하고 사람들을 시험함에 있어 반드시 힘써 잘 가려 뽑아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할 것이다. 온 나라 사람들은 모두 짐의 뜻을 헤아릴지어다.”
이에 따라 한찬(韓粲) 김행도(金行濤)11)를 광평시중(廣評侍中)으로, 한찬 금강(黔剛)을 내봉령(內奉令)으로, 한찬 임명필(林明弼)12)을 순군부령(徇軍部令)으로, 파진찬(波珍粲) 임희(林曦)13)를 병부령(兵部令)으로, ▶소판(蘇判) 진원(陳原)을 창부령(倉部令)으로, 한찬 염장(閻萇)을 의형대령(義形臺令)으로, 한찬 귀평(歸評)을 도항사령(都航司令)으로, 한찬 손형(孫逈)을 물장성령(物藏省令)으로, 소판 진경(秦勁)을 내천부령(內泉部令)으로, 파진찬 진정(秦靖)을 진각성령(珍閣省令)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이들은 모두가 품성이 단정하고 일을 공정하고 성실하게 처리했으며, 개국 초창기부터 왕을 잘 보좌하여 공훈을 세운 사람들이었다.
진원은 태조왕건의 재정을 총괄했던 측근중의 측근인 것이다. 그동안 학술연구에서 태조 왕건이 한강,금강,영산강을 중심으로 중국과 무역을 하던 해상세력의 후원을 받아 고려를 건국했다는 사실은 이미 입증되었다.
그런데 개국공신인 복지겸이 면천복씨인데 그는 중국 당나라 말기에 오계의 난을 피해 동래하여 충청도 당진에 정착한 복학사의 손자로 태조 왕건을 보좌하여 개국일등공신에 올랐으며 면천복씨 시조이다.
면천복씨 외에도 서기 870년을 전후하여 중국 절강성, 산동성일대의 유민들이 무수히 고려에 동래하여 고려건국에 일조를 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들의 출신에 관하여 순수 중국인이 아니라 환국교민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이는 원래 충청도일원에 세거하고 있던 백제의 귀족들이 백제멸망(660)과 함께 유민이 되어 수만명이 중국으로 탈출망명하였는데 200년 정도 중국에서 살다가 다시 당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할아버지의 나라로 환국한 교포라는 것이다. 매우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한반도에 살고 있는 토성과 환국한 이들이 의사소통을 하는데있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함께 중앙고위관직을 역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또한 서해안에 정착하자마자 해적을 소탕하고 충청도유민을 보호하고 있다.
즉 언어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위와 같은 사실을 통해 유추해보면 백제망족들이 일단 중국으로 탈출망명 하였으나 완전히 중국에 동화되지 않은 체 생활하다가 통일신라시기에 장보고세력을 등에 업고 국제무역에 종사하였으며 고려건국에 일조하였다. 여양진씨의 경우도 백제의 귀족가문중 중국의 대성이며 복건,절강성 일원에서 해상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진씨가문과 혼인관계를 맺은 후 이들이 당나라 말기에 한반도로 건너왔으며 그 중 진원이 태조왕건의 재무담당 총 책임자로 창부령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고려전기에 중국 송나라에서 고려에 온 공무역선단의 대표가 거의 대부분 진씨라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고려초인 900년 경부터 최고위직에 있었던 진원과 같은 무수한 진씨姓을 가진 인물이 실록에 분명히 존재하는 한 한반도에 존재하는 모든 진씨의 동래시기를 1100년-1200년경으로 이해하고 이를 마치 진실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가문사의 크나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원조- 진원陳原 918년 6월- 고려개국 서열6위 소판(蘇判) 창부령(倉部令)
-진적陳頔 1009년 내사시랑평사 內史侍郎平章事 (陳原- 손자,증손항렬)
-진숙陳淑 1123년 호부시랑戶部侍郞 지광주사知廣州事(陳頔- 증손,고손항렬)
오히려 진준, 진광순, 진광수, 진광경, 진식, 진온, 진화와 같은 인물 들이 활약한 시기가 1100년 부터 1200년 전후임을 고려한다면 귀화성씨이던 토성이든 이보다 훨씬 전부터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고려사 열전 진준편에 진준을 청주 여양현인이라고 명기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양진씨 2세조 진준편- 고려사 원본 권100, 20쪽 좌 1~2열
▼陳俊淸州(呂)驪陽縣人
2세조 진준편 고려사 원본 권100, 20쪽 좌2~ 21 우1~9열▼
이런 이유로 필자는 여양진씨의 최초 동래시기를 송나라 멸망전후가 아닌 당나라 말기인 860년 전후에 중국에서 집단으로 한반도 서해안에 환국한 해상세력으로 추정하는 견해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처럼 여양진씨 전기축보(1709년 발간)나 후 기축보(1769년) 등에 언급이 없던 진총후 이전의 선대사적에 관하여 갑인보(1914년 발간) 등에서 진수의 동래 사실을 기술하고 그가 진총후의 선대라고 별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양진씨 집안에 전승 또는 가승으로 동래조 진수에 대한 전승이 있었다는 반증이 된다.
다만 고증할 수 있는 문헌이 없어 고려사열전에 등재된 진준의 부친인 진총후 조차도 기록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씨족원류등에 진총후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이다.
연구자는 이상의 전고로 볼 때 진원을 여양진씨 원조로 계대되는 계보표를 여양진씨 상대 계보도로 제시하고자 한다.
한편 진숙의 관직이 장관격인 호부상서인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는 무신들이 득세하기 이전으로 주로 과거제도에 의해 관료가 임명되었고 문벌가문에서 천거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즉 외교책임자인 진숙의 가문은 고려전기의 문벌가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고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진숙의 선대는 누구인가?
동국여지승람 충청도 홍주목조에 고려조 인물로 진준이 있다. 고려사 열전에는 진준이 홍주여양현이 아닌 청주목산하 여양현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홍주가 강등되어 전의,연기, 여양등이 모두 청주목 관할 이었다. 포괄적으로 정리하더라도 여양진씨 진준의 선대는 적어도 충청도 지역에 기반을 둔 성씨로 단정할 수 있다.
그런데 고려 태조 왕건은 고려 태조로 즉위한지 6일만에 관리들에 대한 인사를 단행하였다. 황해도 평산을 중심으로 한 예성강세력과 충청도 충주,청주일대의 호족가문들이 각부서의 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여기에 서열 5위의 시중격인 창부령에 진원이 임명되었다.
서열8위인 물장성령에는 손형이 임명되었는데 손형은 고려 개국공신인 손긍훈의 아들로 밀양손씨 2세조이다. 공교롭게도 태조부터 목종조까지 7대실록이 거란족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졌기 때문에 정확한 기록이 사료에 전하지 않으나 당시 창부령에 임명된 진원은 여양군 등에 봉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여양진씨 비조鼻祖일 개연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그러한 공신가문이었기에 이후 진숙과 같은 인물이 관직에 등용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진씨는 동래한 성씨가 아니고 토성이란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동래한 성씨라고 판단된다.
다만 동래시기가 송나라 휘종년간이 아니라 당나라 말기 오계의 난을 전후한 시기이며 이 때 중국에서 동래하여 충청도 면천에 정착한 면천복씨가문이 고려 태조왕건을 보좌하여 개국공신의 반열에 오른 사실에서 입증되듯이 건국초기 왕건의 측근에는 중국에서 동래한 해상무력세력이 많았다. 특히 여양현이 면천에서 근거리에 있으며 중국과의 교역로상 최근거리에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의 교류시 최단 전진기지 였다. 신라 최치원이 중국에 유학을 간 항구도 혜성(홍주)였던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여양진씨의 선계는 중국 절강성,복건성의 세족인 진씨였는데 당나라 말기 오계의 난으로 인해 동래하였으며 이들은 태조 왕건을 보좌하여 고려를 건국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들 중 진원은 왕건의 최측근으로 지금의 재무부장관인 창부령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고려조에 후손들이 번창하여 대를 이어 오고 있다.
여양군 진총후에 관한 문헌자료를 통해 본 상대사 재구
성씨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는 관찬서인 증보문헌비고 제계고에는 진씨에 관하여 주나라 무왕이 순임금의 후손인 호공 만을 진의 땅에 제후로 봉하였는데 그 후손이 이로 인하여 진을 성씨로 삼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한편 이 책에는 삼척, 여양, 임피, 흥덕, 덕창, 복주, 양주, 남해, 나주 외 등 110여 본관의 진씨가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조선씨족통보에는 진씨는 모두 131本이 있는데 여양진씨의 시조는 준이며 고려 명종시 참지정사를 지냈는데 판병부사로 용력이 있으며 행오에서 시작하여 공덕을 쌓아 장군에 이르렇고 경인계사년간의 무신란에 수많은 문신들이 공의 도움으로 살아난 사람이 많았다고 적고 있다. 계속해서 준의 손자 식, 온, 화가 문과에 급제하였다고 서술하며 어떤 책에는 대장군 진총후를 시조로 한 책도 있다고 적고 있다.
위는 여양진씨 시조는 진준 또는 진총후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양진씨 대동보에는 진총후를 시조로 하고 그의 아들이 참지정사를 지낸 진준이다. 즉 양자간은 부자지간으로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양진씨 족보외에 진총후와 진준이 부자간이라는 문헌이 있는가?
여양진씨 대동보에서 시조 진총후는 고려 예종조(1106-1122)에 신호위대장군으로 적신 이자겸의 난(1126)을 토평한 공으로 여양군에 봉군되었다고 적고 있다. 족보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진총후는 1080년 전후에 출생한 인물이다. 그러나 고려사,고려사절요 등 사서에는 진총후에 관한 기록이 없으며 당시 난에 관하여 상세히 서술하고 있는 이자겸 열전에도 아무런 기록이 없다.
한편 참지정사 진준은 고려 명종조에 활약한 분으로 1179년 6월4일에 졸하였으며 당시 관직이 참지정사겸 판병부사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1120년 전후에 출생한 인물이다.
즉, 진총후의 나이 40세 전후에 진준이 출생한 것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진총후가 여양군의 봉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씨족원류, 만성보에 진총후에 관한 서술이 없는 것은 이례적이다.
3. 여양진씨 3세의 위차관계- 조선과환보
여양진씨 대동보는 3세의 위차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광순- 광수- 광경- 광의- 광현
그러나 후대의 기록이긴 하지만 조선과환보는
광의- 광수- 광순- 광경- 광현
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형제간의 위차관계는 물론 식, 화, 온의 부父가 광수와 광현으로 각각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광수와 광현은 동일인물인가? 이에 대하여 광수의 관직은 병부상서이며 광현은 대장군이다. 동일인물로 보기에는 무리인 것 같다. 한편 매호공소전에는 매호 진화에 관하여 성은 진이며 이름은 화, 호는 매호이다. 증조의 이름은 총후인데 고려 인종조에 대장군을 지냈으며 적신 이자겸의 난을 토평하여 여양군에 봉해졌다. 조의 이름은 준인데 참지정사이며 중략--아버지는 광현인데 추밀부사이며 공은 광현의 둘째 아들이다. 아들이 넷이 있는데 장남은 석이며 문하시중이고 다음이 경, 다음은 호부상서 번이고 넷째는 소감인 보이다. 라고 적고 있다. 즉 진화의 부친은 진광수가 아닌 진광현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양진씨 대동보 등에서 진화를 진광수의 셋째 아들로 정리한 것은 근거가 무엇인가?
일단 3세인 진광경이 고려 명종23년(1193) 11월에 장군으로 최인,고용지 등과 함께 민란을 평정한 기록이 있다.
여양진씨 3世 장군將軍 진광경陳光卿 ▼
한편 진광순은 명종 8년(1178) 6월에 문과에 장원급제한 인물이다. 광순과 광경이 실존인물임에는 확인이 되지만 실록을 통해 이들의 위차관계는 단정 할 수 없다.
다만 매호공 소전에서 분명히 진화의 부가 추밀부사 진광현으로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족보에는 진광현의 후사가 없이 절손되고 식,온,화 등이 같은 항렬(형제) 진광수의 아들로 표기하는 기현상이 발견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진광순의 이름이 족보에는 진광순(光純) 으로 적고, 진광순(光恂) 으로도 쓴다 라고 한 반면 고려사등과 문과방목에는 진광순(光恂) 으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단 동일인물로 상정하고 그의 장원급제시기가 1178년이 명확하므로 출생시기는 1150년 전후라고 추정할 수 있다. 부친 참지정사 진준의 1120년 전후에 출생한 인물로 추정하면 진준의 나이 30세 전후에 진광순이 출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진광순을 장자로 계대하게 된 근거가 무엇인지는 여양진씨 족보 서문등에 명기하지 않아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등 실록에 장원급제기록이 명백하고 이후 아들 담과 손자 창덕 등 3대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기록이 명백히 전해지는 것과 관련이 있거나 조선초에 여양진씨 전기축보 이전의 가승에서 세거지가 다른 광순계열이 시중공계열 가승만을 보청에 제시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서로 상이한 기록 등을 종합하여 진광현의 초휘를 진광수로 상정하거나 을해보의 기록을 참고하여 경상도 합천에 세거하는 진광현의 후손인 상서공파의 존재를 인정하는 결단이 필요한 것 같다.
왜냐하면 족보에서는 진광현의 아들이 없는 것처럼 표기하면서도 매호공 소전등에서 분명히 매호 진화를 진광현의 둘째 아들이라고 단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광현과 진광수를 동일인물로 설정할 경우 ▶ 문헌상의 모순점은 쉽게 정리될 수 있다.
내시소경 內侍少卿 진현광陳玄光 ▼
2, 3세조 동시대인물 진현광陳玄光이 고려사에 실려 전한다. 정중부의 난에서 무신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인물이다. 이후 100여 년간 이어지는 무인시대에서 살아 남기위해 후손들이 선조의 휘자를 진광현陳光賢으로 개명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매호소전 기록에 오류는 없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것 같다. 그러나 고려사 진준편에서 손자 식, 화, 온이 모두급제하여 문명을 떨쳤다고 적고 있다. 모두 진준 의 손자임은 분명하며 이 순서를 형제의 서차로 보는것은 무리다. 여말선초 고려사 집필진이 형제의 서차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병부상서 진광수의 행적- 서하집
그렇다면 진온의 부친은 누구인가? 전후기축보나 매호공 소전에 진온이 진화의 동생이며 아버지가 진광현으로 기록되어 있었음에도 훗날 진온의 부친은 진광수로 변경한데는 분명히 근거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양진씨 집안에서 간행한 모든 족보자료와 문헌에 진광수가 단지 병부상서를 지낸 것으로 만 적혀 있을 뿐 더 이상의 기록이 전혀 없다. 실제로 실존성마저 의심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 서지분과에서 매우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을 발굴하였다. 바로 서하 임춘의 유고집에서 상안서대판진낭중광수계 라는 계문을 발견한 것이다.
上 安西大判 陳(郎中) 光脩 啓 ▼
동문선
상 안서대판 진(낭중) 광수 계(上 安西大判 陳(郎中) 光脩 啓)
황곡(黃鵠)이 허공에 나르매, 구소(九宵)에 올라갈 만한 날개가 있지만, 흰 망아지 골짜기에 있는데 "한 다발 생추(生蒭)없는 것이 한입니다. 감히 긴 부리로 슬피 우니 혹 마음이 감동 되시어 살펴 주실런지요? 모(西河先生)는 운명이 고생을 많게 타고 났으며, 성품은 지극히 어리석게 태어났습니다. 안회(顔回 ) 현인(賢人)의 낙을 흠모하여 물 마시고 팔베게를 베고 눕는것을 달게 여기는 사람이요, 진등(陳登 )과 같이 국사(國士)가 될 마음은 없고, 한갓 밭과 집이나 구하고자 물으려 하였습니다. 옛날 우리 선조가 태조(왕건)께서 고려를 창업하던 때를 만나 숫대를 장막안에서 놀렸으니 정말 장량(長良)과 같은 인걸(人傑)이 셨으며 형상(形像)이 능연각(凌煙閣)에 그려졌사오니 당나라 공신에 참예되었습니다. 이에 철권(鐵券)을 내리고 영원히 토전(土田)을 주셨는데 후세 자손에게 내려오다가 남에게 빼앗기게 되어, 그만 충의(忠義)의 혼으로 하여금 오래도록 해마다 모셔오던 제향(祭享)을 끊기게 되었습니다. 이러므로 탄식하며 매번 원통함을 송사(訟事)하려 하나, 외롭고 졸연한 마음에 진실로 위태하기 쉽다하여 스스로 움츠렸고,떠돌아 다니는 종적이 바야흐로 멀리 물러나 깊이 숨으려합니다. 입을 숭상하면 마음이 궁해지는 법이요, 또한 말 많은것이 두려운 것이오니, 그 때문에 울울히 맺힌 마음을 펴지 못하고 앉아서 기한(飢寒)에 떠는 것입니다.이제 지극한 정성을 피력하여 고명하게 살펴주심을 바라오며, 비록 몸소 나아가 청하지는 못하오나 실은 가련한 것을알아주십사 하는 데 뜻이 있는 것입니다. 용납해 주어야 공정한 것이니, 바라는 바를 어기게 말아 주소서! 한형주(韓荊州)와의 일면식(一面識)이 만호(萬戶)의 봉후(封侯)보다 더 귀한것을 바라고자 하며, 유홍(劉弘)의 한 장 편지를 얻는것이, 십부종사(十部從事)보다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금장(金張) 후원이 모자라 오히려 우(虞) 예(芮)의 판결을 늦추었습니다. 법을 잘 따르는 관원의 착한 정치는 오직 어진 이천석(2000石)이요, 노는 백성으로 하여금 농사를 짓지 않고 먹게 한다면 어찌 벼 삼백석(300石)의 노적가리가 있겠습니까? 어진 사람이 계시지 않는다면 누가 언 백성을 입김으로 불어주겠습니까? 공손히 생각하건데 모(陳光脩:大都護府使公)관께서는 천인(天人)의 이치를 정통한 지식인이시고,세상을 지도할 만한 현명한 재주와 덕을 갖추셨습니다. 이태백(李太白)이 홀로 가사(歌詞)를 잘 하니 국수(國手)라 일컬었고, 진자앙(陳子昻)이 다시 시풍(詩風)을 일으키니 세상 사람들은 그를 문종(文宗)이라 하였습니다. 천자(황제,임금)가 한 세상에 만난 것을 기뻐하고, 조정 신하가 공(진광수 선조)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아름다운 계책을 가지고 임금에게 고(告)하니 이윤(伊尹)의 충성에 힘썼으며, 대각(大閣:대궐)에 바람이 일어나니 일찍 진함(陳咸)의 기절을 떨쳤습니다. 엄조(嚴助)의 승명전(承明殿) 숙직을 마다하고 장창(張廠)처럼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海州) 맡기를 청하였습니다. 과연 임금의 마음에 들어,서해(황해도 해주)의 대판(大判)으로 나오셨습니다. 멀리 왕의 교화를 퍼뜨려 크게 민심을 위로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방의 토호(土豪)들을 덕으로 꺽어 스스로 복종하게 하고, 우아(優雅)한 선비들을 예우(禮遇)하여 사방에서 맞아 들였습니다. 선비들은 품평(品評)받기를 원하였고 사람들은 즐겨 공을 흠모 하였는데 하물며 망용(妄庸)한 이 사람은 더욱 우러러 존경합니다.뜻이 산수(山水)에 있다하던 종자기(鐘子期)의 지음(知音)을 만난 것과도 같고 가죽 속에 춘추(春秋)가 있다는 저부의 고상한 인품에 접하지 못하였습니다.바라건데 사람을 구하는 데는 한 사람도 버리지 마시고, 일을 결단하는 데는 귀신같이 하여 옛 장수(將帥)의 후손으로 하여금 대대로 내려온 조그마한 땅을 짓도록 하시면 온 집안이 배부르고 등이 따스하겠습니다. 만약 유말(濡沫)의 은택을 입는다면 만(萬)번 죽어 가루가 되더라도,몸에 옻칠하여 은혜에 보답하기를 감히 맹세하겠습니다.
위 계문은 서하 임춘(1150년 전후 출생)이 안서대도호부사(황해도 해주)로 부임한 진광수에게 올린 것으로 자신 가문이 억울하게 빼앗긴 토지를 찾아달라는 일종의 민원요청서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임춘은 정중부의 난에 참지정사 진준에 의해 목숨을 보전한 인물로 여양진씨 가문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은혜를 입었으며 당시 세상에 전해지는 진광수라는 인물의 됨됨이에 대해 있는 그대로 상세히 열거하고 있다. 다시 말해 기록이 없었던 진광수는 안서대도호부사를 역임할 정도로 실재 고위직에 있었던 현달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기존의 문헌에서 진광수를 1190년 전후에 출생한 인물로 상정하였는데 위의 계문과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이규보문집)을 고찰한바 ☞진한림 온상인(陳翰林溫上人) 제하(題下)의 글을 통해 진온이 매호 진화보다도 먼저 출생하였으며 진광수의 출생이 1150년 전후로 소급됨을 확인할 수 있다.
4. 예빈경 진온의 행적고
고려 신종조에 문과를 거쳐 시인이며 문장가로 명성을 날렸으며 한림학사, 예빈경 등 주로 외교, 교육분야의 행정가로 활약했던 공은 말년에 공주목사,나주목사 등 목민관으로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고려사, 동국통감 등 사서에는 조부인 참지정사 진준의 하단에 간략히 소개되어 있을 뿐 생애전반에 대한 업적과 발자취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조선초 서거정에 의해 편찬된 동문선 등에 공의 유작으로 전해지는 사시사 춘하추동 4수首 가 전해지고 있으며 이 사시사는 1769년(영조 45) 경상도 함양의 종인들에 의해 후기축보(1769)의 부록으로 편집된 매호유고 뒤에 부집 (1784) 되기도 하였고 현전하는 근세의 파보와 대동보에도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사시사 4수首만을 통해 대문장가이며 시인이라는 명성을 가늠하기란 쉽지 않으며 유독 형제지간인 매호 진화의 유고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품이 적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안항서열
예빈공 진온陳溫의 안항서열에 관하여
전기축보(1709), 후기축보(1769)에는 다음과 같이 여양진씨 4세로 기록하고 있다.
진총후 -진준- 진광의
진광수
진광순
진광경
진광현- 식, 화, 온
즉, 2세 참지정사 진준은 5남을 두었는데 그 다섯째 아들이 진광현이고 진광현의 아들은 식,화,온 순이다.
이러한 계보도는 조선과환보에도 동일하게 수록되어 있다.
또한 고려사 진준전에도 진준의 손자로 문과에 급제한 식,화,온 순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상기 자료에는 서로 차이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 여양진씨 3번째 대동보인 을축보(순조5년,1805)에 이르러 족보체계상 대대적인 변화가 발생한다. 손록을 참고하면
3세 하단에 광순-대장군이다. 전후기축보에는 공이 참지정사 진준의 제3자로 기록되어 있으나 정시술의 제성보와 경상도 진주,함양에 종인이 소장하고 있는 가승에는 참지정사 진준의 하단에 기록하기를 1子- 광순, 2자- 광수, 3자 - 광경, 4자 -광의, 5자- 광현으로 되어 있어 바로 잡는다는 것이다.
즉, 공식적으로 을축보(1805)부터 여양진씨 4세의 위차는
광의- 광수- 광순- 광경- 광현에서▶ 광순- 광수- 광경- 광의- 광현으로 바뀐 것이다.
뿐만 아니라 4세 진식, 진화, 진온이 구보에는 모두 진광현의 아들이며 그 순서는 진식, 진화,진온 순이었는데 을축보에 이르러서는 진온의 부가 진광수로 바뀌고 순서 또한 진화의 동생에서 형으로 바뀌는 대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전후기축보와 을축보 이후의 족보사이에는 이상의 변화외에도 상대계보도와 손록내용에 있어서 대대적인 변화가 있었다.
후기축보가 발간된 1769년부터 을축보 발간기인 1805년 까지 불과 36년 만에 위와 같은 놀라운 변화가 있게 된 배경과 근거는 무엇인가 ?
을축보(1805)와 기유보(1849)는 문헌적 근거에 관하여 첫째, 정시술의 제성보를 참고한 것이라 적고 있다.
그렇다면 정시술의 제성보는 언제쯤 제작된 것인가? 정시술은 감역을 지낸 언규의 아들로 현종조에 과거가 아닌 천거제에 의해 교관이 되고 전한에 이르렀으며 보첩에 밝아 종친부전부로 있으면서 이씨왕가의 족보인 선원보를 교정한바도 있는 보학전문가였다.
1674년에 경상도 안동에서 발간한 예안이씨 을묘보에 의하면 당시 을묘보를 만든 고산 이유장이 쓴 서문에 직접 안동에서 한양에 사는 정시술이 지은 제성보를 참고하여 예안이씨 족보를 수정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당시 정시술의 제성보는 족보가 없거나 기록이 적은 가문에서 족보를 펴내면서 경쟁적으로 참고했던 즉, 매우 인기가 있던 만성보였다.
그러나 제성보는 훗날 수 많은 가문의 소송의 빌미가 되었으며 실재 고증해 본 결과 상당부분에 오류가 있는 족보로 확인되기도 하였다.
물론 제성보 보다 약 20년 앞서 조종운에 의해 만성보 성격의 씨족원류(1657)가 제작되었는데 씨족원류에는 이상의 상세한 기록은 없다.
조종운과 정시술은 주로 각 가문에 소장중인 가승보와 이미 발간된 여타가문의 구족보를 참고하여 제성보를 만들었는데 만약 정시술이 입수한 가승에 오류나 조작이 있더라도 이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중략-
지금까지 전개된 이러한 혼란의 배경에는 실제 예빈경 진온에 관한 기록과 부친인 3세 진광수에 관한 기록이 거의 전무한데서 기인한다.
즉 어사대부 진식이 매호 진화의 형이라는 사실은 진식과 동년배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의 기록에서 분명히 확인되므로 논란이 없었지만 진화와 진온의 위차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어 입장에 따라 여러 해석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중 내부의 기록상의 혼선과 차이는 현재 각 대학교에서 발간한 학위논문 등에 여실히 반영되어 심지어 시조 진총후마저도 문중에서 가상으로 만든 인물이라는 학설이 전개되고 있으며 이 논문을 참고한 이후의 논문도 앵무새 격으로 이를 원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위의 위차관계 정립은 현재 전개되고 있는 재논란을 종식시키는 의미에서도 재검토가 필요한 것이다.
재구가능성
진온陳溫의 생몰시기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규보의 문집 10권에는 온상인溫上人이 소장한 백로를 그린 그림을 보고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이 시의 내용을 요약하면 강가에 백로가 우두커니 서있는 그림이 있는데 이 그림을 온상인 溫上人 이라는 분이 소장하고 있으며 그 그림을 보고 여러 가지 담겨있는 의미를 유추하며 이규보가 시를 지은 것이다. 물론 이시는 온溫 상인上人 의 집에서 이 그림을 보고 직접 이규보가 지은 시이다.
문제는 이 온(溫)상인(上人) 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이를 규명하기 위해 이규보의 작품중 상인이라는 문구가 들어가는 모든 작품을 분석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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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한 서화 명품 복제본
‘독화로사도’는 남루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왔지만 명화임에 틀림없다. 고려 대문호 이규보(1168~1241)는 그림을 평가하는 데 자신만한 사람이 없다고 자부했다. 그는 자신의 안목이 높아 최상품 그림만을 좋아한다고 했다. ‘주간동아’ 879호에서 말한 것처럼 ‘독화로사도’는 바로 이규보가 ‘그림 같은 시’로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했던 옛 명화다.
고려시대에는 귀족가문의 아들 10명 가운데 한 명이 출가해 승려가 됐다. 귀족가문 서너 집에 한 집꼴로 승려 한 명씩 나온 것이다. 고려시대 귀족문화 중심에 승려가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백(李白·701~762) 시 ‘백로(白鷺)’를 그린 ‘독화로사도
온(溫)상인(上人)
결과 이규보의 작품에 등장하는 상인은 이규보 보다 나이가 많고 덕망있는 사람으로 자나 이름, 성에 붙이며 주로 승려들이 많다. 그런데 본문 내용에 스님의 경우에는 그 스님의 이름을 적고 있으며 이름이 없을 경우에는 그 인물의 관직을 적고 있다.
다행히 위의 온상인의 그림을 보고 지은시에 온상인의 관직이 한림이라고 적고 있다. 동 문집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한림翰林이며 이름에 온溫이 들어가는 인물은 예빈경 진온陳溫 밖에는 없다. 즉 진온은 이규보 보다도 나이가 많은 참지정사 진준의 손자인 것이다.
다시 여양진씨 족보 손록의 진온陳溫 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자.
예빈경공파의 파조로 강종계유년(1213)에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학사翰林學士 예빈경에 있다가 외직으로 지공주사로 나갔으며 이후 나주목사로 옮겼다. 또 다른 자료에서는 신종조(1197~1204년)에 문과급제 한것으로 전한다.
그렇다면 강종계유년에 문과시험이 있었는가? 강종계유년에 실시한 방목기록이 고려사 등에 전하는데 이 때에 급제한 사람은 진교陳璬 외 13인이다. 위 13인중에 진온이 포함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 없으나 당시 장원급제한 진교는 공교롭게도 진온의 사촌동생인 전농시사 진택의 아들이다. 이 계파는 뒤에 삼척진씨로 분적한 것으로 여양진씨 신보는 기록하고 있다.
시중공5世 진창덕陳昌德시부시장원 ▼/진교陳璬 시부시장원▼
고려사 74권 16쪽
즉, 진온의 과거급제기록은 5촌 조카 진교의 기록을 원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추후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자료검토자/ 25世 ☞ 해송(海松) 진옥수(陳玉洙)
[출처:다음] 진씨사랑방 지기 ㅣ 공동연구자 해송(海松) 진옥수(陳玉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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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온陳溫 사적 재구가능성
진온의 생몰시기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규보의 문집 10권에는 온상인溫上人이 소장한 백로를 그린 그림을 보고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이 시의 내용을 요약하면 강가에 백로가 우두커니 서있는 그림이 있는데 이 그림을 온상인이라는 분이 소장하고 있으며 그 그림을 보고 여러 가지 담겨있는 의미를 유추하며 이규보가 시를 지은 것이다. 물론 이시는 온상인의 집에서 이 그림을 보고 직접 이규보가 지은 시이다.
문제는 이 온상인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이를 규명하기 위해 이규보의 작품중 상인 이라는 문구가 들어가는 모든 작품을 분석해 보았다.
결과 이규보의 작품에 등장하는 상인은 이규보 보다 나이가 많고 덕망있는 사람으로 자(字) 나 이름, 성에 붙이며 주로 승려들이 많다. 그런데 본문 내용에 스님의 경우에는 그 스님의 이름을 적고 있으며 이름이 없을 경우에는 그 인물의 관직을 적고 있다.
다행히 위의 온상인의 그림을 보고 지은시에 온상인의 관직이 한림이라고 적고 있다. 동 문집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한림이며 이름에 온溫 이 들어가는 인물은 예빈경 진온陳溫 밖에는 없다. 즉 진온은 이규보 보다도 나이가 많은 참지정사 진준의 손자인 것이다.
다음으로 금성지를 원용한 기록이다.
진온의 손록 하단에는 금성지에 의하면 진온은 기사년(1209) 나주목사로 부임하고 이듬해인 경오년(1210)에 체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고려조 1) 하즙(1358년) 이전, '나주목사 기록은' 없는것으로 전해진다. 고려 제 31대 공민왕(恭愍王) 7 (1358)년 나주목사 재임기록 -아래- 1) 牧使 河 楫 至正戊戌正月日政盛上京到任日不記 2) 牧使 李邦直 戊戌六月日到任辛丑三月初三日政盛上京 3) 牧使 崔知蔵 辛丑十一月日到任壬寅政盛上京 4) 牧使 趙天寶 壬寅年月日到任癸卯政盛上京 5) 牧使 李之泰 癸卯三月初三日到任同年九月政盛 6) 牧使 李資乙 癸卯十一月初十日到任甲辰三月十三日政盛 7) 牧使 馬天厸 甲辰四月初十日到任乙巳二月二十一日政盛上京 8) 牧使 柳 襦 乙巳十月二十九日到任丙午正月初七日政盛上京 10) 牧使 呂衛賢 丙午二月十七日到任遞歸日不記 11) 牧使 河乙祉 政盛上京到任遞歸日不記 12) 牧使 李進修 洪武庚戌二月初九日到任辛亥八月二十六日司宰監宣喚 13) 牧使 朴林宗 辛亥九月二十五日到任癸丑正月初九日上京 14) 牧使 李居仁 癸丑十月十三日到任甲寅七月十二日政盛上京 15) 牧使 � 瑨 甲寅八月初九日到任同年十二月二十六日政盛本鄕出歸 16) 牧使 文世鳳 辛禑乙卯二月十一日到任同年七月日政盛上京 17) 牧使 裵厸祐 乙卯八月二十九日到任丙辰七月日政盛上京 18) 牧使 李還儉 丙辰八月十二日到任戊午正月日政盛上京 19) 牧使 梁有珍 正順戊午四月初十日到任辛酉二月十一日政盛 20) 牧使 金希善 辛酉四月初八日到任壬戌二月初八日上京 21) 牧使 黃有龍 壬戌五月二十七日到任同年十一月初十日上京 22) 牧使 金宗衍 癸亥正月日到任甲子七月日上京 23) 牧使 宋文中 甲子八月日到任丙寅七月十六日遞 24) 牧使 金 履 丙寅九月日到任丁卯七月日遞 25) 牧使 梁安龍 丁卯十月十七日到任戊辰二月初六日遞 26) 牧使 李居易 戊辰三月十一日到任同年七月初十日遞 27) 牧使 鄭元厚 戊辰九月初四日到任己巳二月初二日遞 28) 牧使 金宗衍 己巳十月十二日到任同年十一月初六日遞 29) 牧使 陳元瑞 己巳十二月初八日到任庚午四月十三日遞 목사 진원서 기사(1389)년 12월초8일도임-경오(1390)년 4월13일 체직 30) 牧使 呂 稱 庚午正月十五日到任壬申正月二十九日移任 31) 牧使 崔子雲 壬申四月初十日到任同年七月日遞 참고- 고려 제 33대 창왕(昌王)- 재위기간:1388년 6월~1389년 11월, (1년 5개월) 제 34대 공양왕(恭讓王)- 재위기간:1389년 11월~1392년 7월, (2년 8개월) |
나주시청 홈페이지와 금성읍지, 나주목지 선생안을 보면 나주목사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최초의 등재자는 공민왕 7년 5월에 이임한 하즙이다. 이후 1~2년 간격으로 교체되다가 공양왕1년(1389) 12월 8일에 나주목사로 나왔다가 이듬해인 공양왕2년(1390) 4월 13일에 체직한 인물이 진원서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여양진씨 4세 진온陳溫 의 손록에 경오년 4월13일에 나주목사에서 체직되었다고 기록하여 간지대로 라면 진온과 진원서의 나주목사기록은 완전히 일치하고있다.
다만 두 기록간에는 3주갑인 180년의 오차가 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전고로 제시한 금성읍지에는 진온이 나주목사로 부임 했다는 기록이 없고 대신 근 200년 뒤의 인물인 진원서가 나주목사로 부임한 기록이 있을 뿐이며 실제 급성읍지에 수록된 기록상 전하는 최초의 나주목사는 1358년에 부임한 하즙이다. 즉 이전의 나주목사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 등의 정사에도 나와 있지 않다.
그렇다면 목사의 부임, 체직일자까지 정확히 기록되어 있는 금성읍지의 전고는 무엇인가?
이는 당시 나주목의 호장들에 의해 기록된 금성일기이다. 이책은 유일본이 일본으로 유출되었다가 동경대도서관에서 최근 다시 국내로 재소개된 문헌으로 향토사연구의 매우 소중한 자료이다.
금성일기 기사년(1389)기록에 병마도절제사겸 목사 진원서가 12월8일 부임하였다가 경오년(1390) 4월13일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부임하고 체직한 간지와 월일이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진원서는 나주목사로 부임하기 2년전에 일본 대마도 정벌 부원수로 나주 대굴포(지금의 함평군 대동리 1)의 수군처치영에서 활동한 기록이 있다.
주 1)함평군 대동리는- 9세 진흠 참판공을 모신 월계사소재지 함평군 대각리와 면 경계임)
즉 진온의 나주목사부분은 후대인물인 진원서의 기록을 고증 없이 전용한 것이다.
특히 족보에는 진온(陳溫) 이 나주목사에 부임한 연도를 1209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4년 후인 1213년에야 과거에 급제한 것으로 원용하는 등 여러 기록이 일관성도 없고 전고자체도 오류로 일관하여 신뢰하기 어렵다. 물론 여양진씨 신보의 상기기록은 기축보나 을축보 등 구보에는 전혀 없던 기록이다.
다시 진온의 기록을 살펴보자
포은 정몽주의 문집에 기록이 있는데 진온陳溫 이 최천로의 척불소와 비슷한 주장을 했다고 적혀 있다.
최천로는 고려조에 평장사를 지낸 인물로 삭녕최씨 시조이다. 불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그 행적에 대해서도 전해지는 것이 별로 없다. 물론 포은 정몽주의 문집에는 최천로에 관한 기록자체가 없다. 불교배척을 주장한 인물로 고려전기인 성종조의 최승로가 있는데 이 또한 포은집에는 기록이 없다. 포은집에 수록된 진씨성을 가진 인물은 진원서, 진을서 등인데 이는 정변과 연루되어 귀양을 보낸 기사이다. 진온에 관한 기사는 물론 진온에 관한 언급자체가 없다. 아마 진온의 손록기록에 정몽주와 관련지어 추록된 것은 나주목사를 지낸 진원서의 행적을 진온란에 삽입하면서 야기된 해프닝으로 판단된다.
다만 포은집에는 불교의 폐단에 관하여 언급한 기록이 있는데 진온과는 관련이 없다.
정몽주의 견해처럼 불교의 폐단을 거론하며 척불상소를 올린 인물이 있는데 진사성이라는 인물이다. 1390년 당시 정몽주는 찬성사로 있었으며 상소문을 왕과 함께 논의하고 검토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즉 여양진씨 족보에서 말하는 포은집에 수록된 것으로 주장하는 진온의 척불소는 실재 200년 뒤의 후대 인물인 사관 진사성의 척불소를 전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진사성은 고려 유학의 대가인 문정공 신은의 저술인 화해사전을 모조리 불살라 유학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는데 이로 인해 포은집과 고려사 등에 기록이 전하는 인물이다.
진온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 동국통감, 동국명현록, 매호유고, 동국이상국집, 소화시평, 동문선 등에서 확인된다.
진온- 동문선(東文選) 卷二十 11쪽. 이규보 문집 제3권 (第三) 고율시(古律詩)편에 수록
시제(詩題):대인서침병사시사(代人書寢屛四時詞) 4수
전라도지방에 여양진씨가 처음 입향한 계기와 관련하여 4세 진온이 나주목사 부임을 근거로 이로부터 세거한 것으로 족보에서는 기록하고 있으며 확실한 전고는 없다.
다만 원종11년에 삼별초의 난을 진얍하기 위해 제주도에 들어가 싸우다 순절한 인물이 있는데 진자화로 고려사에 그의 본관을 나주진씨라 적고 있다.
여양진씨의 견해처럼 예빈경 진온으로부터 나주입향이 시작되었다면 진자화가 1230년 전후에 출생한 인물이므로 예빈경공 진온의 손자항렬이 된다. 그러나 현존하는 여양진씨 족보에서 진자화로 기록된 휘가 보이지 않는다.
씨족원류 중中에서
청주한씨 한광윤의 배위는 나주진씨 진의(陳懿)이다 이와 관련하여 여양진씨종친회에서는 혼동하기 쉬운 나주진씨라 하여 나주진씨 진의나 그의 아버지인 진영략은 1030년경 고려 초의 인물이므로 여양진씨와는 관련이 없다고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청주한씨 한광윤은 고려 충렬왕조의 인물로 1260년 전후에 출생하고 부친인 한희유는 1230년경 출생하였다. 따라서 한광윤의 장인인 나주진씨 진의는 1260년경, 진영략은 1240년경 출생했다고 볼수 있다.
여양진씨 대종회의 주장과는 무려 200년 차이가 난다. 즉 나주진씨 진영략이나 진의가 모두 고려초가 아닌 고려중엽의 인물로 무조건 여양진씨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모순이다.
한편 여양진씨 족보중 매호공 진화의 아들인 진영헌의 다른 이름이 진자후로 기록한 문헌이 있으며 출생시기는 1220년경이다. 나주인물지와 고려사에 수록된 진자화 또한 1250년 출생으로 모두 예빈경 진온보다는 후대의 인물이다.
고려사 열전 진준전에 진온이 진준의 손자이며 문과에 급제하였고 문장에 조예가 있다고 하였으며 동국통감과 고려명현록, 고려왕조사, 동문선, 익재집 등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다. 조선조에 발간된 매호공 문집 초간본에 사시사(춘하추동 4수)가 부록으로 첨부된 적이 있다.
원문=동국이상국전집 제3권, 동문선 제20권 칠언절구(七言絶句)
사시사(四時詞) 고율시(古律詩) 대인서침병사시사(代人書寢屛四時詞)
남을 대신하여 침병(寢屛)에 사시사(四時詞)를 쓰다
봄 春
柳유撚연金금絲사颺양曉요風풍。 一일雙쌍閑한燕연語어玲영瓏롱。
美미人인睡수起기心심煩번悶민。 皓호腕완擎격花화吸흡露로紅1)홍。
여름 夏
銀은蒜산垂수簾렴白백日일長장。 烏오紗사半반岸안洒세風풍凉량。
碧벽筩통傳전酒주猶유嫌혐熱열。 敲고破파盤반氷빙嚼작玉옥漿장。
가을 秋
騎기省성初초驚경見견二이毛모。 西서風풍一일夜야碧벽天천高고。
夢몽魂혼盡진處처山산重중疊첩。 月월苦고霜상寒한斷단鴈안號호。
겨울 冬
淅석瀝력風풍輕경雪설驟취飄표。 王왕孫손不불憚탄捻념鸞란簫소。
綺기筵연熏훈暖난猶유敎교摺접。 不불用용剛강添첨獸수炭탄燒소。
| 춘(春日) 금실 같은 버들 새벽 바람에 나부끼고 한 쌍의 제비 영롱하게 지저귄다 미인이 자고 나니 마음이 괴로와 흰 팔로 꽃 받들고 붉은 이슬 마신다 하(夏日) 은산 드리운 발에 해는 길고 오사모 젖혀 쓰고 서늘한 바람 쐰다 벽통배로 술 건네도 오히려 더워 쟁반의 얼음 깨어 옥장을 씹는다 추(秋日) 기성에서 처음 흰머리 보고 놀라고 서풍 하룻밤에 푸른 하늘 높아졌다 꿈이 다한 곳에 산은 겹겹이고 쓸쓸한 달 찬 서리에 기러기 울음 끊겼다 동(冬日) 바람 소리 가볍고 눈은 빨리 내리는데 왕손은 꺼리지 않고 난소 만지네 비단 자리 따뜻하여 겹쳐 깔게 하니 수탄을 더 피울 필요가 없다 [주-D001] 은산(銀蒜) : 은(銀)을 부어 마늘 모양을 만들어서 발[簾]에 다는 것. [주-D002] 벽통배(碧筩杯) : 연엽(蓮葉)을 맞붙여 만든 술그릇이다. 《酉陽雜俎 酒食》 ⓒ 한국고전번역원 | 이식 (역) | 1980 |
사시사 춘하추동 四 時 詞 春夏秋冬
여양진씨 4세世 -진온陳 溫 [ 신종조(1197~1204) 문과급제
고려 문인文人, 자字 = 대방大邦 호號 = 죽헌竹軒
봄 春
玉옥帳장牙아床상 別별院원中중 -구슬장막 상아 평상의 별당 안에서
閑한吟음隨수意의 繞요花화叢총-한가히 읊조리며 마음따라 꽃떨기를 돌다가
忽홀聞문杏행杪초 鶯앵兒아囀전 -갑자기 살구나무끝의 꾀꼬리 소리 듣고
手수放방金금丸환 看간落락紅1)홍 -금가락지를 던져 떨어지는 꽃을 보네
繞 = 두를 요, 叢 = 모일 총, 杪 = 나무 끝 초, 囀 = 지저귈 전
여름 夏
金금盤반紅홍縷루 聳용氷빙峰봉 -금반의 붉은 실에 얼음 봉우리가 솟았는데
畵화閣각陰음陰음 樹수影영籠롱 -그림같은 집은 우거진 나무 그늘에 쌓였네
半반岸안烏오紗사 倚의玉옥枕침-반쯤 젖힌 검은 사모쓰고 옥베개에 기대어
互호敎교纖섬手수 扇선淸청風풍-고운손 번갈아가며 밝은 바람 부채질하네
聳 = 솟을 용, 籠 = 대그릇 롱, 紗 깁 사, 紗帽 = 깁으로 만든 모자
纖手 = 섬섬옥수
가을 秋
釦구砌체微미微미 着착淡담霜상 -섬돌위에 미미한 서리가 내리자
裌겹衣의新신護호 玉옥膚부凉량 -새로 만든 겹옷으로 옥살결을 감싸네
王왕孫손不불解해 悲비秋추賦부 -왕손[귀뚜라미]는 비추부를 알지 못하고
只지喜희深심閨규 夜야漸점長장 -다만 색시방이 깊어저 감만 좋다고 하네
釦 = 금테 두를 구, 砌 = 섬돌 체, 裌 = 겹옷 겹
王孫 = 왕족으로 귀한분 [귀뚜라미 별칭으로도 씀], 悲秋賦 = 宋玉 이 지은 슬픈 노래
겨울 冬
繡수幕막深심深심 畵화毯담重중 -수 놓은 장막 깊숙히 그림담요는 겹겹이고
龍용爐로鳳봉炭탄 發발春춘紅홍 -용로속 봉황같은 숫불은 봄꽃처럼 붉구나
酒주酣감蘭난麝사 熏훈人인面면 -술이얼근하여 난사향에 얼굴이 훈훈하기에
掛괘起기金금窓창 向향雪설風풍 -일어나 금창을 열어 걸고 눈바람 쏘이노라
毯 = 담요 담, 酣 = 술즐길 감 [술 취할 감 蘭麝香 = 난초와 사향노루 향, 金窓 = 금속 창문
이와는 별도로 한수재집과 우서 등 고문헌에 진온에 관한 기록이 있으나 현재 번역작업이 미완성이어서 본고에는 추록하지 못했다.
그런데 유고시로 전하는 사시사가 동문선에 전하는데 공교롭게도 이규보의 사시사 제목에 춘하추동 8수를 연속해서 기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앞의 4수는 이규보의 작품이며 뒤의 4수는 진온의 작품이라는 것인데 이와 관련하여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에는 본 사시사에 관하여 제목을 사시사라 하지 않고 代人書寢屛四時詞(남을 대신하여 침실병풍에 사시사를 쓰다)로 적고 있다.
다시 말해 이미 사시사가 있는데 그 사시사 내용을 어떤 사람의 침실병풍에 글씨를 대신해서 쓰다는 의미이다. 고시(古詩)에서 대필이 아닌 대작(글 자체를 대신해서 쓴 경우)은 제목에 대작代作이라고 분명히 적고 있다. 특히 이 사시사 8수(首)가 모두 진온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는 1수와 5수 春의 운韻이 모두 홍(紅 1)이라는 점이다. 이 경우 진온의 사시사에 차운하여 이규보가 같은 운(홍)으로 사시사를 적었다고 볼 수도 있으나 동국이상국집에는 차운하여 시를 쓴 경우에는 모두 제목에 次韻이라는 어귀를 적고 있다. 이는 동서同書에서 매호 진화와 차운한 10편의 시에서도 극명하게 확인된다.
즉, 동문선에 소개한 사시사 8수는 모두 진온의 작품이라고 판단되며 향후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자료검토자/ 25世 ☞ 해송(海松) 진옥수(陳玉洙
[출처:다음] 진씨사랑방 지기 ㅣ 공동연구자 해송(海松) 진옥수(陳玉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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