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날보다 살아가야 할 날이
올해 우리 나이로 일흔여섯 되시는법정스님이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시중드는 상좌(上佐) 하나 두지 않은 채
손수 밥 짓고 빨래하며 엄동설한을 보내고 있다.
스님 가라사대.
출가자에게 한 해가 오고 감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사람들은 고통스러워하지만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자연의 이치로
누구도 이를 거스를 수도 없고,
거슬러서도 안 된다
법정 스님의 생애는 몇 차례의버리고 떠나기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출가(出家)다.
외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책 읽고 사색하는 것을 좋아했던 청년은
1954년 싸락눈이 내리던 날 홀연히 집을 나서 머리를 깎았다.
평소 흠모했던 등대지기의 꿈을 접고 진리의 빛을 찾아 나선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과 세속적 욕망을 버리는 대신 그는 진리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었다.
두 번째는 1975년 10월 1일 서울 봉은사 다래헌(茶來軒)에서
전남 순천 조계산 자락불일암(佛日庵)으로 들어간 일이다.
글 잘 쓰고 의식 있는 40대 초반의 촉망받는 중진 스님이었던 그는
시국 비판이나 하며 글재주만 부리다가는 중노릇 제대로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자
모든 것을 내던지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한 칸 암자에서 혼자 밥 짓고 밭을 매며 17년을 지내면서
무소유 산방한담(山房閑談) 텅 빈 충만등 10여 권의 산문집을 펴냈다.
승속(僧俗)의 명예를 과감히 떨쳐 버린 덕분에 사색의 자유와 자연과의 교감을 얻게 된 것이다.
세 번째는 1992년 4월 19일 강원도 산골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오두막으로 다시 거처를 옮긴 일이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산중 암자에 방문객이 늘어나고 글 빚도 지게 되면서 수행에 지장을 받게 되자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지인들은 물론 몇 안 되는 상좌조차아직 스님의 거처를 모른다.
스님이 누군가 내 거처를 알게 되면 나는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큰스님으로 불리며 절 집의 높은 자리에 앉는 대신 자신만의 수행 공간과 절대 고독의 희열을 얻게 된 것이다.
네 번째는 2003년 12월 21일 한 여신도가 오랜 간청 끝에
스님에게 시주한 서울 성북동 길상사의 창건 6주년 기념 법회에서
회주(會主·절의 원로 스님) 자리를 미련 없이 내놓은 일이다.
주지 한 번 맡지 않았던 스님이떠밀리다시피 맡았던 자리였다.
하지만 차츰 틀이 잡혀 가자수행에는 정년이 없으나 직위에는 반드시 정년이 있어야 한다는
평소의 소신을 주저 없이 실천한 것이다.
많은 이가 아쉬워했지만 스님은 때가 되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육신을 벗어버리고 싶다고 지나치듯 말했다.
법정 스님이라면 능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님은 이후 봄가을 두 차례만길상사에서 공식 법회를 열고 있다.
수행의 고비마다 버림으로써 더 큰 자유를 얻은 스님이
올해로 출가 53을 맞는다.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버리고 떠남으로써
더 큰 것을 성취할 수 있는복된 인생이 되기를 기원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