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너무 너무 안 됐지요.
인서점이라는 간판 밑에서 책장사라는 의미조차 읽을 수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미루고 또 미뤘지요.
봄을 넘기고 또 여름을 넘기고 가을이 닥쳐 올 때까지
'인서점 서른 해'기념 행사, 제가 강력하게 말렸습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 특히 청년건대의 강권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래서 한 해가 기우는 늦가을 드디어 '인서점 창립 서른 해 잔치' 토크 콘서트'가 마렸됐던 것입니다.
아아! 생각해 보면 인서점이나 특히 저에겐 분에 넘치는 기념식이었습니다.
사실 그건 오로지 님들의 사랑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큰 님들의 사랑 앞에서 저와 우리 가족은 그져 '고맙다'는 말 밖에는 그 어떤 말도 그 뜨거운 사랑을 다 담아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입니다. 저는 그걸 그냥 뭉뚱그려서 그건 어떻게 해서든지 '인문학의 씨앗'은 지켜가야 한다는 저와 여러분의 꿈이라고 그 꿈을 담는 그릇이 '문화사랑방 인서점'이 아니냐고 말하고 했었지요.
돌이켜 보면, 1982년은 정말 캄캄했던 때였지요.
실로 엄혹했던 시기에 인서점은 작은 등잔불처럼 이 땅의 어둠 속에서 태어났던 것입니다. 비록 불쑥 내 걸었지만 정말 겁 없이 당당하게 고고의 소리를 내 질렀지요. 허기야 그 땐 저도 진짜 젊었으니까요. 그래요, 청년이었지요. 그래서 깃발도 젊었지요.
"인간은 지식을 가진 무서운 동물"이라고 소리를 질렀지요. 그리고 그 동물의 욕망을 눌러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그 눌러진만큼의 크기로 '인간의 의미'고 '나의 의미'가 태어나는 것이라고 정말 가당찮게 큰 소리를 치면서 깃발을 들었지요. '나' 그리고 '인간'이라는 의미를 새롭게 창조해야 한다고 그래서 인류가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큰 소리를 뻥뻥 쳤으니 지금 유행하는 말로 진짜 '구라쟁이'였는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해서 '새로운 나'와 '새로운 우리' '새로운 인간들'로 우리들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자고 정말 통크게 떠들었지요. 1982년 5월 12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큰 소리를 친 것은, 그 때 저의 곁에
저의 영원한 친구인 조영명님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정말 저의 좋은 친구이자 후배였고 스승이었지요.
조영명님이야말로 인서점아저씨에게 영혼을 만들어 준 분이니까요.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그 인간의 씨앗을 여러분은 이 땅이 갈망하던 민주 민족 민중이라는 정신으로 여러분께서 키워내실 줄이야...... 그건 정말 저의 행운이었고 뜻밖이었습니다. 그 때 그 의미를 우리는 그 때로부터 꼭 서른 해가 지난 지금 추억의 공간으로 미래의 꿈으로 소중하게 간직하면서 그 것을 '인문학의 씨앗'으로 지켜가고자 다짐하면서 기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서점은 그 때 그 사회과학의 시대를 혁명의 시기로 맞이해서 여러분들의 함성과 깃발을 따라가며 정말 용감하게 싸웠지요. 그리고 마침내 저 87년 6월의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영광의 순간을 맞아 얼싸안았고 뜨겁운 눈물을 흘렸고 환호했지요. 그러나 그 사회과학을 필요로 했던 어두운 시대가 가고 우리의 어두운 역사가 시민사회로 진입하는 듯 했으나 사회주의를 몰락시킨 자본주의는 약육강식이라는 무한경쟁을 몰고 왔던 것입니다. 착하고 가난한 것을 잡아 먹는 무한경쟁은 결국 인문학의 위기로 몰려왔지요. 1995년의 <문화과학마당 인서점>으로 그 위기를 모면하는가 했지만 2005년 인서점이 또다시 경영위기에 봉착하자 1억 3천 8백만원이라는 거금을 모아서 <문화사랑방>을 표방하면서 시민사회 시대가 요구하는 담론의 장으로 맞서 새길을 재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둠이 사라지면
그 어둠 속에서 태어나 그 어둠을 먹고 살며 어둠의 꽃을 피우고 어둠의 열매인 혁명을 맺고자 했던
어둠의 생명은 사라져야 하는 것
인서점은 밝아 오는 세상의 빛을 뒤로 한채 역사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순리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때의 추억이거나 기억어야 했을 뿐 인서점의 생존은 쉽지 않은 과제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로지 연명만을 위한 초라한 모습만으로 인문학의 종자을 지켜내야 하는 무의미한 짓일 뿐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어둠 속에서 태어난 존재의 필연적인 운명일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지금 우리는 저 멀리서 우쭐 우쭐 다가올지 모르는 새로운 우리의 어둠을 발견하고 그 어둠속에서 들어야 할 횃불을 들어야 하리라고 봅니다.
그렀습니다. 또 다른 어둠 더 무섭고 더 두려운 어둠 이제까지 우리 인간이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어둠이 인간의 역사를 뒤덮어 오고 있음을 읽어 내고 대응하는 것이야말로 이제 우리가 나서야 할 운동의 본질이라고 봅니다. 20세기 말 사회주의를 붕괴시키고 등장한 자본주의 언듯 인간의 모든 욕망을 다 채워주고 이루어 주는 듯한 자본주의야말로 인간을 묶고 있는 모든 사슬과 경계를 다 허물고 인간을 해방시킨 듯 한 자본주의가 실은 인간의 재앙임을 읽어내고 대안을 내 놓는 것이야말로 인문학이 발견해야 할 새로운 어둠이라고 생각됩니다.
자본주의가 언 듯 인간의 욕망을 완성시켜 줄 신의 선물로 생각되지만 자본주의가 창작한 문명이라는 자궁에서 지금 악마의 태아가 자라나고 그 악마의 모습이 인문학의 청진기에 의해 진찰되고 관찰되고 기록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 악마의 탄생이 눈 앞에 이르렀음을 경고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몫이라고 봅니다. 그래요, 서른 해 전에 인서점의 간판에 내어 걸었던
<인간은 지식을 가진 무서운 동물이다>
라는 걸 증명이나 하듯이 지금 지식을 가진 무서운 동물이 악마로 태어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새로운 어둠 앞에 <문화사랑방 인서점>은
<인간은 지구촌의 신(神)이자 악마다>
라고
더 두렵고 무서운 구호를 내 걸 수 밖에 없는 인서점아저씨의 터무니 없는 그러나
가상한 용기를 더 늙은 용기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네요.
님들은 인서점의 간판에서나마
찬란하게 빛나는 인문학의 깃발이 외치는 이 함성을 읽어 주었습니다.
종자로 지켜가고자 하는 인문학의 씨앗을 읽어 주었습니다.
이제 다시
그 씨앗이 새로운 어둠을 읽고 새로운 씨앗
<인간(사람)은 지구촌의 악마다>라고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악마를 치료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겠지요.
그것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우리는 지구촌의 악마입니다. 악마를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는 치료
철학과 인문학과 지성의 몫입니다.
이 과제야말로 '인간실존의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화이자 변신이고 변태입니다.
땅을 버리고 하늘에 오르고자 하던 지식을 가진 무서운 동물
가던 길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때, 더 이상 가야 할 길은 없습니다.
이제, 생존의 긴 여정에서 우리 인간은 반환점을 돌고 있습니다.
이제 그 화려했던 문명을 내려 놓고 자연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 인간에 대한 저의 생각을 정리하면 인간과 사람의 의미는 비슷하지만 다르다고 봅니다. 인간의 다수 즉 사회가 창작한 '관념의 주체'가 '인간'인 반면 '사람'은 지구의 표면에서 살아가는 자연의 한 개체로서 1758년 린네가 규정한바를 인용하면 '호모사피엔스'로 동물계 척색동물문 포유강 영장목 사람과 사람속의 사람종입니다. 사람은 자연의 일부지만 '인간'은 사람이 자신들의 지적능력인 이성과 지식을 통해 가족, 씨족, 부족, 민족, 국가, 세계라는 욕망실현의 수단으로 축조한 사회적 관념의 주체이기 때문에 악마일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따라서 지구의 암적 존재인 인간이 사람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나무가 죽어야 버섯이 돋아 나듯 인간의 욕망을 제압하거나 죽였을 때 그 제어된 만큼으로 다시 사람으로 태어 날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필경 능동성의 주체인 생명의 그리고 인간의 숙명이 아닐까요.
님들께 한 없는 고마움과 사랑을 보냅니다.
문화사랑방 인서점 그 서른해에 인서점아저씨 올림
첫댓글 사람은 지식을 가진 악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 들일때 인간은 겸허해 집니다...바닥으로 낮은 바닥으로 내려가 자연을 찾아야 합니다. 지식을 가진 악마처럼 높은 곳에서는 너와 나를 가르지만 낮은 곳에서는 어디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저 다 같이 사는 길뿐이지요. 함께 어우러지고 함께 나누고 함께 행복하고 함께 아파하며 살아가는 우리인 세상...자연이 주는 선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