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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 현장 체험, 비정규노동자 쉼터 방문
지하1층, 지상 4층, 옥탑방이 있는 꿀잠 건물 전경. ⓒ김수나 기자
천주교 주교단이 27일 비정규노동자 쉼터 꿀잠을 찾아갔다.
이번 방문은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가 주관하는 '주교 현장 체험'으로 이용훈 주교(주교회의 의장), 김선태 주교(정의평화위원장), 김주영 주교(민족화해위원장), 상지종 신부(정의평화위원회 총무)가 참여했다.
꿀잠은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 사회활동가, 장기 농성 중인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쉼터다. 공공 지원 없이 노동계, 시민사회, 문화예술, 종교계 등 3000여 명의 후원과 1000여 명의 자발적 참여로 만들어진 최초의 쉼터로 2017년 문을 열었다.
거리에서 힘겹게 싸우는 노동자들이 몸이 아프면 쉬고, 밥도 먹고, 빨래도 하는 곳이자, 전시, 공연, 교육, 진료 등 다양한 활동이 이뤄지는 연대의 공간이다. 개소 뒤 4년 동안 1만 5000여 명의 노동자 및 다양한 활동가들이 이곳에 머물렀다.
폭염과 추위에도 굴뚝 위에 올라야 했던 파인텍 노동자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홀로 일하다 부서진 아들의 몸을 두고 한겨울 상경 투쟁을 해야 했던 김용균 씨 가족들, 한국마사회의 특수고용 노동문제를 알린 문중원 기수의 가족들도 그들 가운데 하나다.
이러한 꿀잠이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놓이자, 2021년 2월 주교회의 정평위는 전국 13개 교구 정평위와 함께 존치 요구안에 연명했고, 올해 1월에는 김선태 주교가 영등포구청에 공람의견서를 보내 존치를 요구했다. 이어 주교단은 이날 꿀잠의 역사, 존재 의미, 활동 등을 듣고, 연대와 지지의 뜻을 거듭 밝혔다.
꿀잠 지하 1층 벽면에 전시된 1998-2020년 동안의 비정규직 투쟁사. ⓒ김수나 기자
꿀잠 지하 1층 벽면 전시물. ⓒ김수나 기자
억울함으로 싸우는 노동자들, “당신들은 우리 사회의 빛”
이날 김소연 씨(꿀잠 운영위원장)는 주교단에 IMF 이후 더욱 공고해진 비정규직 차별 문제의 심각성과 노동권 사각지대에서 최근 급증하는 플랫폼 노동 문제 등과 함께 꿀잠의 창립 가치를 설명했다.
김 씨는 꿀잠이 노동자들의 사랑방 같은 공간이라면서 “(농성할 때) 지나가는 이들의 손가락질, 사측의 탄압, 난무하는 고소, 고발 속에서 어느새 노동자들은 잘못한 사람들이 되곤 하는데, 여기서만이라도 편히 자면 좋겠다 해서 이름을 꿀잠이라 지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목소리를 내야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있고, 당신들의 싸움이 당신만이 아닌 우리 사회의 빛이자 소중하고 존경받을 일이라고 응원하고 환대하며, 힘을 내서 살아가고 싸우라는 마음으로 만든 공간”이라면서, “노동자뿐 아니라 사회의 빈곤과 차별로 편하게 잘 수 없는 모든 이들이 꿀잠 잘 수 있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 사회를 만들어 가자는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
꿀잠의 역사와 현재 진행 중인 재개발 문제를 설명하는 김소연 씨(꿀잠 운영위원장). ⓒ김수나 기자
이날 주교단은 꿀잠 곳곳을 둘러봤다.
꿀잠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4층, 옥탑방으로 구성돼 있다. 지하 1층에는 음향과 영상 장비, 요가나 무용 등을 할 수 있는 마루와 전신 거울, 치과 진료실 등이 있다. 특히 이곳에서는 어려운 노동자들을 위해 2주일에 1번 치과 진료, 1달에 1번 한방 진료가 진행된다.
1층에는 취사가 가능한 자율식당과 연대 단체들을 위한 사무공간, 장애인 노동자를 위한 1인실 공간이 있다. 2층은 인권운동사랑방 등 연대 단체들이 전세로 입주해 있고, 3층에는 5인실 방 1개와 샤워장, 4층에는 4인실 방 3개, 옥탑에는 4인실 공간 1개가 있다. 한 번에 최대 25명이 숙식할 수 있다.
꿀잠에서는 현장 투쟁 연대와 지원, 비정규직 지원 사업, 문화예술 활동 등도 이뤄진다.
지하 1층 한켠에 마련된 노동자들을 위한 치과 진료 시설. ⓒ김수나 기자
지하 전시 공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주교단. ⓒ김수나 기자
꿀잠 건물이 지어지는 과정을 담은 사진들이 붙은 미닫이 문을 열면 전신 거울이 있다. 방문객들이 요가나 춤 연습 등을 할 때 쓰이기도 한다. ⓒ김수나 기자
꿀잠 건립을 후원한 이들의 이름이 새겨진 장식물. 천주교에서도 여러 단체들이 후원했다. ⓒ김수나 기자
꿀잠, 교회가 나아갈 방향 보여 줘
사람 냄새 나는 참 좋은 곳
이날 간담회에서 김선태 주교는 “꿀잠은 초대 교회의 공동체 모습을 그대로 구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2, 제3의 꿀잠과 같은 보금자리가 가꿔지면 좋겠다”면서, “꿀잠이 교회에 도움을 요청했을 때 이런 일이야말로 교회가 함께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해 기꺼이 도왔지만, 교회가 도움을 드린 것보다는 오히려 도움을 받았다. 교회가 못하고 있는 것을 해 주시니 고맙고, 교회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그 방향을 보여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2010-14년 주교회의 정평위원장을 지냈던 이용훈 주교는 당시 방문했던 밀양 송전탑, 쌍용차, 세월호참사, 핵발전소 현장 등을 회고하면서, “현장에 있는 이들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다. 교회도 적극 힘을 보태겠다. 많이 보고 배우고 깨달았다. 오늘 우리 교회가 갈 방향을 설계하고 재정립하는 계기로 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여러 관심과 지속적 도움으로 알뜰하고 깔끔하고 쾌적한 공간을 이룬 것이 놀랍다”면서, “노동자들의 피와 눈물로써 기업이 발전하고 경제 성장을 이뤘는데 정작 노동자들은 소외되고 핍박받아 매우 슬프다. 경제 강국이라면서도 함께 가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정치, 사회적 분위기가 아직 그에 이르지 못하고 수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인권 탄압을 받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후원자들 이름이 촘촘히 새겨진 철로 된 대형 현판 위에 있는 빗자루를 탄 여성 조형물은 그림자 노동에 가려진 여성 청소 노동자를 상징한다. ⓒ김수나 기자
쉼터를 찾은 노동자들이 씻을 수 있는 샤워장. ⓒ김수나 기자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고단한 몸을 뉘이는 숙소. ⓒ김수나 기자
김주영 주교는 “춘천교구가 지난 3년 동안 코로나로 교구 내 인력 유지를 고민하면서도 유지하기로 결정한 것은 잘한 일이다. 필요하면 쓰고 없으면 안 쓰는 세상 논리를 따르면 교회도 똑같아진다”면서, “그러나 우리 교회는 정말 잘하고 있는가, 자성도 필요하다. 요즘 제가 많이 만나고 있는 더 열악한 이주노동자들과 꿀잠 방문으로 노동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고 말했다.
상지종 신부는 “이곳에 오니 사람 냄새 나서 참 좋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거창한 건물들, 체계적으로 꽉 잡힌 조직들은 잘 돌아가지만 사람 냄새가 안 난다. 사람 사는 곳인데도 갈수록 사람 냄새를 지우고 그것이 세상이 가야 할 길인 것처럼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세상이 화려해지고 편리해질지 몰라도 사람답게 살기는 힘든 곳으로 가는데, 어딘가에서 그것은 아니라고 외쳐야 하고, 그러한 파열음을 내는 곳 중 하나가 꿀잠이 아닐까”라면서, “이곳을 찾는 분들은 아마도 여기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역시 나는 사람이구나,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구나를 느껴서 더 고향 같고, 외갓집 같이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주교 현장 체험단이 간담회 하는 모습. ⓒ김수나 기자
1층 식당 공간. 지방에서 올라오거나 거리 투쟁, 고공 농성 등을 하며 제대로 된 끼니를 챙기지 못하는 노동자들에게 꿀잠은 직접 차린 밥상을 나눈다. ⓒ김수나 기자
밥은 연대자나 봉사자들의 손으로 직접 만든다. ⓒ김수나 기자
이날 주교단 방문에 대해 조현철 신부(예수회, 꿀잠 대표이사)는 꿀잠이 지금 많이 힘든 때지만 오히려 꿀잠의 공공성을 더 알리고 더욱 힘을 모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면서 이번 방문이 매우 힘이 된다며 고마워했다.
꿀잠의 후원자 규모는 900여 명대를 유지했으나 코로나19로 현재 800여 명대로 줄었다. 꿀잠이 단순한 게스트하우스가 아니라 수많은 연대 활동이 이뤄지는 곳이라 상근 활동가가 더 필요하지만 지금의 후원 규모로 증원은 어렵다. 현재는 활동가 3명 정도가 상근 형태로 활동한다. 김소연 씨는 비정규직, 산재 노동자에 대한 관심과 응원을 요청했다.
응원의 말을 적는 수첩에 메시지를 남기고 있는 김선태 주교. ⓒ김수나 기자
옥탑방을 둘러보는 모습. ⓒ김수나 기자
꿀잠 옥상에서 바라보이는 재개발을 앞둔 신길동 일대. ⓒ김수나 기자
이전돼도 꿀잠 사업은 중단 없이 진행될 것
꿀잠이 있는 서울시 영등포구 신길동 일대는 현재 재개발이 추진되고 있다. 꿀잠은 2020년부터 꿀잠 존치를 위한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대응해 왔지만 사실상 지금 자리에 그대로 남기는 어렵게 됐다. 김소연 씨에 따르면, 꿀잠 사업이 중단 없이 진행되는 것을 최우선 조건으로 현재 서울시와 존치에 준한 이전 대책을 협의하고 있다.
올해 2월 천주교를 포함해 단체 52개, 개인 5000여 명이 존치를 요구하는 의견서를 영등포구청에 낸 바 있다.
올해 1월 김선태 주교는 영등포구청에 제출한 공람의견서에서 재개발사업이 공익 목적의 사업임에도 “현재의 재개발은 민간업체가 공적 권한을 위임받았을 뿐 공공성과 같은 공공의 목적을 수행하기보다 이윤 추구를 우선한다. 이런 이유로 원주민과 세입자들은 불이익을 당하며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본 위원회는 꿀잠의 존치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 살고있는 원주민과 세입자 그리고 상인들의 삶을 위해서도 정비계획 사업의 수정을 요구한다”면서, “이들의 삶이 나아질 수 없는 정비계획이라면 당연히 공익 목적의 사업이 아니기에 이 재개발사업은 올바로 수정돼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철회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꿀잠 개소 과정
2015년 7월 17일 : 기륭전자 10년 투쟁 평가와 더불어 ‘비정규 노동자의 집’ 공식 제안
2015년 7월 24일 : 초기 제안자 구성 및 제안자 모집
2015년 12월 12일 : 비정규 노동자의 집(가칭) 추진위원회 발족
2016년 5월 28일 : 비정규 노동자 간담회 및 추진위원회 전체 회의
2016년 6월 11일 : 사단법인 꿀잠 창립총회
2016년 7월 5-17일 : 시대의 2인전 “두 어른”
2016년 7월 26일 : 사단법인 꿀잠 법인 설립
2016년 9월 5일 : 후원을 위해 비정규직 특별잡지 <꿀잠> 발행
2017년 2월 18일 : 꿀잠 제2차 정기총회
2017년 4월 24일 : 쉼터 첫 삽 뜨기
2017년 8월 19일 : 쉼터 개소
“비정규직이라는 현대판 노예제가 없는 세상. 그 누구도 이 귀하고 존엄한 삶으로부터, 자기로부터 소외받지 않는 세상. 그 누구도, 그 누구로부터도, 그 어떤 이유로도 부당한 차별과 폭력에 시달리지 않는 세상. 군대와 전쟁이 없는 세상. 그 누구도 그 누구에게 권력이 되지 않는 세상, 모든 생명들의 자율적 발화와 연대와 공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세상.
그런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연대의 집. 새로운 역사의 집, 새로운 사랑의 집을 짓자.” -꿀잠 창립선언문 중
출처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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