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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노을. 강물과 평사리 무논이 붉은 하늘빛을 받아들여 환하다 못해 황홀하다.
이 세상에 야인(野人)으로 산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이 불행하고 불경스러운 나라에서 저 홀로 야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쩌면 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때로 산중 운무에 휩싸인 채 스스로를 방목해 보는 것을 어찌 마다할 수 있으랴. 일종의 도피여도 좋고, 회피여도 좋다. 이렇게 자연과 한 몸이 되는 순간마저 없다면 ‘메르스’가 판치는 이 나라의 국민으로 산다는 게 참으로 견디기 힘들 것이다.
3년 넘게 지독하게 몰두한 ‘몽유운무화’ 시리즈 속에 야생화 대신 나의 알몸을 슬쩍 밀어 넣어 보았다. 아직은 해발 1,100m 고지에서 홀로 옷을 훌훌 벗는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 조금은 어색하고 자연합일의 꿈 또한 멀겠지만 메르스인지 모르스 부호인지에 휘둘려 온몸을 웅크리는 것보다는 알몸 정면으로 높은 산중 운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지난해부터 나름대로 준비해 온, 아직은 공개할 수 없는 ‘다중- 나는 너다’ 시리즈와 ‘몽유운무화’에 이은 ‘야인’ 시리즈 작품인 셈이다. 차마 사진 전체를 보여 줄 수 없어 조금은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요즘 어쩌다 뉴스를 보다 보면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메르스가 그 얼마나 무서운 바이러스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그것보다는 멀쩡한 사람들이 세월호 아이들처럼 죽어가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률 세계 1위의 나라라는 사실이 더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냄비근성의 극치를 또 다시 보는 듯해 안타깝기도 하다. 사스가 그랬고, 조류인플루엔자와 더불어 살처분이 그러하지 않았던가.
섬진강 노을. 강물과 평사리 무논이 붉은 하늘빛을 받아들여 환하다 못해 황홀하다.
잠시 산 아래 내려와 평사리 들녘을 바라보니 막 새 옷을 갈아입고 있다. 보리와 밀이 노랗게 익어가던 자리에 어린 벼들이 실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 온 들판이 시끌벅적하던 그 옛날의 모내기철 풍경은 아니지만, 이앙기로 순식간에 여섯 줄의 모심기가 이어지니 참으로 신기했다. 일일이 손으로 모를 심으려면 최소한 보름 이상은 걸릴 텐데, 이 너른 평사리 들판이 순식간에 여름풍경으로 바뀌었다.
모내기 풍경과 평사리 부부송의 반영이 잘 표현되는 한 장의 사진을 찍으려고 날마다 가봤다. 그러다가 무논의 어린 벼들 사이로 부부송의 물그림자가 떠오르고 이앙기가 막 모들을 심는 장면을 마침내 잡았다. 이 방향의 부부송 사진을 찍으려면 일 년에 딱 한 시간 정도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미리 삼각대를 세워놓고 몇 시간 어슬렁거리다 후다닥 찍었다.
사진가 김홍희 형 같은 고수들은 2,000분의 1초, 그러니까 ‘아, 좋다 좋아’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셔터부터 누른 뒤에 감탄해야 한다고 했다. 말하자면 서부의 사나이가 순식간에 권총을 쏘듯이 말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속사의 건맨이기보다는 비정규군인 게릴라인 데다, 오래 오래 잠복해야 하는 저격수에 가깝다.
송광사 불일암 법정 스님 나무의자는 그대로
일찍이 나의 미천한 실력과 장비의 수준을 간파했기 때문에 내가 선택한 것은 온몸으로 기다리고 기다리는 일뿐이다. 비가 오거나 운무 자욱한 산중에 우비를 덮어쓰고 엎드려 때를 기다리다 마침내 드르륵 드르륵 연사를 한다. 그러니까 엄밀히 따지면 단 한 방으로 승부를 거는 스나이퍼도 못 된다. 수천 발의 총알을 쏘아 겨우 한두 장 건지는 수준이다.
아마 필름 카메라 시절이었으면 꿈도 못 꿀 일이 아닌가. 다행히 아무도 이 무식한 짓을 하지 않으니 그나마 ‘몽유운무화’라는 콘셉트를 내보일 수 있는 것이다. 풍경 사진도 그렇지만 언제나 중요한 것은 ‘그 순간 그 곳에 내가 있어야’ 하고 그 이전에 ‘미리 알고 가서 끝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시만 쓸 때는 이 사실을 간과했었다. 그리하여 때로는 사진 속에서 시가 흘러나온다.
보리밭 위로 하늘이 유난히 푸르다.
올해의 마지막 봄비에 며칠 동안 온몸이 젖어 으슬으슬 한기가 들더니, 바쁜 일정 속에 몸살기운까지 감돌았다. 모처럼 죽은 듯이 열두어 시간 푹 자고 일어나니 우중의 뻐꾸기가 울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의 아내 ‘고알피엠여사’ 신희지의 생일인데, 눈앞이 캄캄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뭐 특별하게 해줄 것도 없어 고민을 하다가 ‘몽유운무화’ 엉컹퀴 꽃 사진에 졸시 ‘뼈에 새긴 그 이름’을 붓펜으로 써넣은 뒤 선물로 주었다. 이것으로 또 하나의 기념일을 겨우 넘긴 셈이 됐다.
마지막 봄비 속에 뻐꾸기가 우니 송광사 불일암이 떠올랐다. 법정 스님이 기거하던 불일암에도 뻐꾸기가 울 것이다. 사월 초파일이 다가오기 보름 전인가, 진도 가는 길에 잠깐 들른 적이 있다. 법정 스님의 나무의자는 그 자리 그대로 있고, 두 비구 스님은 다행히(?) 아주 조용히 수행 중이었다. 나의 카메라를 보자마자 대숲 길로 휑하니 사라지는 아직 젊은 스님의 뒷모습을 순식간에 다중노출 촬영으로 불러 세웠다.
그러고 보니 세월 참 빠르다. 십대 후반에 서럽게 머물던 해발 800고지의 만덕사, 그리고 지리산 입산 초기의 쌍계사와 실상사 시절이 아득하다. 두 눈썹이 하얀, 보기에는 마치 선승 같은 그 파계승과 초파일 전야에 투망을 치고 물고기를 잡아 허허 웃으며 소주를 퍼마시기도 했다. 그 무렵에 쓴 시가 ‘물고기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였다.
세월은 참 빠르게 흘러 어느새 지리산 입산 18년차가 되었지만 산중 술추렴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여전히 한량이요, 백수요, 풍류객일 뿐이다.
지난 5월 31일에도 지리산 화개골의 의신동천에서 잔치 한마당을 벌여 걸판지게 놀았다. 부산의 경성대 앞 갤러리 카페<52>에서 한 달에 두 번 여는 ‘시인교실’ 제자들이 지리산을 찾아왔다. 그 동네의 원주민인 ‘화개 깊은 골’의 주인장 정현대·박숙희씨 부부의 환대를 받으며 의신동천의 최도사를 비롯한 주민들도 대거 합세했다.
남도여행 중이던 김주대 시인도 문득 조우하고, 최도사 집에 잠시 머무르고 있는 가수 한목 문해송씨와 마산공연을 마치자마자 달려온 시노래 가수 박경하씨, 그리고 시낭송과 7080노래를 선보인 울산의 이분엽씨 부부, 고알피엠 여사와 화미녀(화개미녀들의모임) 회장 등이 어울려 5월의 마지막 밤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위에 언급한 ‘화미녀’에 대해선 조만간 조명할 날이 있을 것이다.
모내기가 막끝난 논에 평사리 무딤이 부부송이 어섰다.
지리산의 술판답게 이른 새벽 먼 길 떠날 사람들은 소리 소문도 없이 가고, 지리산 최도사와 어울려 커피도 마시고 의신계곡 산책도 했다. 15년 동안 돈 한 푼 벌지 않으면서도 아직 굶어 죽지 않았으니 최도사 형은 정말 최고의 도사인 게 분명하다. 부산의 마술사 유현웅 선생과 최도사는 초면인데도 너무나 잘 어울렸다. 마술사의 아내이자 시인교실의 총무인 장혜정씨도 환하고, 더불어 시인교실의 왕언니 김영미 선생도 바위 위의 선녀 반열에 올랐다.
‘몽유운무화’ 남도순회 사진전 세 번째인 울산의 바닷가 인문학서재 ‘몽돌’에 작품을 걸고 돌아와서 계곡 산책을 하던 사진들을 정리하다 보니 별유천지비인간이 따로 없었다. 우스갯소리로 공중부양 정도는 벌써 옛날에 졸업했다는 최도사는 “근데 말이여, 날아오르는 것은 되는데 아직 내려올 줄을 몰러. 천장에 딱 붙어버리거든. 그런데 그런 짓을 왜 해? 내가 미쳤어? 술 먹고 잠자기도 바쁜데 말이야, 허허허” 웃었다. 그렇다. 그래서 날마다 ‘홀딱 벗고, 홀딱 벗고’ 검은등뻐꾸기가 우는 것이다.
어쨌든 살다 보니 여수-하동-울산-대구 등 남도 순회 초대사진전이 이어진다. 6월 1일부터 31일까지 울산 개인사진전과 더불어 7월 7일부터 2주 동안 대구참여연대 후원기금마련 개인사진전에 이어 7월 15일부터 열흘 동안 서울 인사동의 인덱스 갤러리에서 시인 6인의 기획전도 준비되고 있다.
지리산 촌놈 시인이 신작 시집은 안 내고, 이른 봄부터 여름까지 사진판을 기웃거리니 꼴불견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러 군데 더 요청이 있지만 이것도 참 싸가지 없는 짓이니 7월까지만 저잣거리를 들락거리다 1막을 내리고, 야생화가 다 지는 겨울에야 다시 서울로 가리라 다짐한다. 얼른 신작시집 원고부터 넘겨야 하는데 날마다 술판이 벌어지니 내심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울산의 인문학 서재 ‘몽돌’과는 이래저래 인연이 참 깊다. 이미 개관 직후부터 강연과 시노래 콘서트 등으로 여러 번 갔었다. 이 아름다운 해변에 시인으로서가 아니라 초짜 사진가로 가려니 좀 어색하기도 했다. 고민을 거듭하다 울산전시에는 사진을 대폭 물갈이 했다. 지난 여수 전시 때는 울산의 사진가 박태진 형의 도움으로 야생화 사진전 최초로 파노라마 형식을 취해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하동 야생차문화축제 전시에서는 사진가 김홍희 형의 큰 사진 인화 등의 도움을 받았다. 이번 ‘몽유운무화’ 전시는 내가 직접 인화도 하고, 접사와 광각 등의 야생화와 풍경까지 더해 16:9의 사진으로 통일했다.
이 땅에 있을 수 없는 풍경 ‘안개 속의 감나무’
새 사진을 고르고 직접 인화까지 하다 보니 유난히 ‘안개 속의 감나무’ 사진에 눈길이 갔다. 지난해 늦가을 찍은 이 사진은 도저히 이 땅에 있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물속의 감나무가 붉은 감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기 때문이다. 경북 청송의 주산지처럼 물속에서도 살 수 있는 나무는 왕버드나무 정도밖에 없다.
그런데 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으로 수위가 높아지자 감나무 세 그루가 물속에 잠겨 버렸고, 그중의 두 그루는 이미 죽고 말았다. 그런데 가운데 감나무 한 그루만 용케도 붉은 감을 매달고 있었다. 지난해 가을에 열흘 정도 아침마다 물안개를 기다리며 가고 또 가다가 마침내 ‘몽유운무’ 사진을 한 장 건졌다.
백로가 래질하는 무논에서 미꾸라지를 낚아채고 있다. / (아래)천수 천안이 따로 있으랴. 산정 운무 속에서 옷을 훌훌 벗고 홀로 서면 모두가 신선이다. 셀프 다중 노출로 촬영했다.
그리고 홍시가 익어 다 떨어지는 겨울을 지나 봄이 와 연초록 새싹이 나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똑같은 구도로 안개 속의 연초록빛 감나무를 찍고 싶었다. 하지만 이른 봄부터 5월 하순까지 기도하듯이 기다려도 중간의 그 감나무는 새 잎 하나 내밀지 않았다. 두 그루 벗들과 함께 마지막 감을 매달고 서서히 죽어갔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진이 그 감나무의 마지막 모습이며 지구상에 더는 존재할 수 없는 물속의 감나무였던 것이다. 안타깝고도 서러운 일이지만 이 세상은 여전히 죽어가는 것들이 더 아름답다. 이 나라는 여전히 먼 길 떠난 사람들이 더 그립다. 참으로 쓸쓸하고 안타까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지난 6월 2일부터 울산에서 전시를 시작하고 오프닝 행사는 6월 5일 저녁에 했다. 비 내리는 울산 정자해수욕장의 밤은 너무나 행복했다. 인문학서재 ‘몽돌’의 사진전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분들이 몰려와 격려의 박수를 치며 환하게 웃어 주었다. 동해 일출까지 술자리는 이어졌으며, 밤샘 술자리에 메르스는 얼씬 거리지도 않았다.
시노래 가수 박경하씨의 맑은 노래와 시낭송가 이분엽, 김민서씨의 멋진 시낭송, 그리고 이상희님의 색소폰 연주가 전시회의 격을 높여 주었다. 대략 잡아도 100명은 넘게 온 것 같다. 뒤풀이 술자리가 꽉 차는 바람에 제대로 술 한 잔 못 나누고 먼저 가신 분들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몽돌’의 관장 이기철 시인의 신명나는 사회, 온갖 굳은 일을 도맡아 해준 김진숙 간사님, 떡을 준비한 ‘언제나 봄날’의 사장님과 술과 안주를 해온 수많은 분들, 또다시 울산의 여러 분들과 먼 길 마다않고 달려온 분들께 다 갚지 못할 신세를 지고 말았다.
그런데 세 번째 남도 순회 사진전을 열고 보니 사진전이란 게 좋은 작품을 보여 주는 게 아니라 결국 신세 지는 일이란 걸 뼈아프게 되새겨야 했다. “고맙고 고맙습니다”라는 말 말고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울산에서 지리산으로 돌아오는 길 또한 너무나 아름다웠다. 허투루 지나치면 아무런 감동이 없지만, 눈길을 주면 줄수록 그 대상은 경이롭게 다가왔다. 아주 가까이 섬진강이 늘 그랬다. 지리산에 돌아와 순천대 문창과 1학기 마지막 강의를 하다가 창밖을 보니 하늘빛이 너무나 좋았다. 구름 형상을 보니 모처럼 섬진강 노을이 좋을 것 같았다.
강의를 하는 둥 마는 둥 서둘러 끝내고 모터사이클 시동을 걸자마자 내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후다닥 삼각대를 챙기고는 지리산행복학교 캠프대회 관련회의도 까맣게 잊고 산에 올랐다. 평사리 들녘의 모내기는 거의 끝나가고 이제 보리와 밀밭만 조금 남아 있었다.
삼각대 위에 카메라를 얹고 막 구도를 잡으려는데 나의 ‘야생화 사부’ 김인호 시인도 허겁지겁 올라오고 있었다. 하늘의 시간(천시)과 포인트를 아는 ‘꾼들’은 이렇게 아무런 약속이 없어도 마주치게 돼 있다. 모처럼 섬진강 노을이 될 듯 될 듯 애를 태우더니 막 철수를 하려는데 서산 너머 해가 떨어지는 막바지에야 스리슬쩍 멋진 풍경을 보여 주었다. 조금은 아쉬웠지만 섬진강 최고의 노을을 잡으려면 아직 보름 정도의 시간이 더 남아 있다. 하지 무렵이면 일몰 각도가 제대로 맞춰지니 날마다 해질녘이면 얼마나 더 몸살을 앓아야 할까.
사람도 그렇지만 섬진강 또한 날마다 다른 얼굴, 다른 표정을 보여 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같은 강, 같은 다리를 건널 수 없다는 옛말이 생각났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듯이 섬진강 또한 어제의 섬진강이 아니다. 나는 늘 변하면서 타인에게 그때 그 사람이기만을 강요하는 것 또한 일종의 폭력이 아닌가. 변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잘못된 것이니 그야말로 무상[無常(덧말:무상)]이요, 변화무쌍한 자연[自然(덧말:자연)] 그대로가 최고 최상 아니겠는가.
이른 새벽 블루 톤의 섬진강, 그 아스라함도 좋지만 어두워질수록 붉은 하늘빛을 받아들여 온몸 불타오르는 선명한 섬진강이야말로 황홀경 그 자체다. 노을이 그리 멋지지는 않았지만 섬진강과 평사리 무딤이들녘의 무논에 붉은 하늘빛이 제대로 스며들었다. 흐르다 문득 돌아보는 황금빛 섬진강의 눈빛이 서늘하게 박혀 왔다. 바로 이런 맛 때문에 아직은 섬진강을 떠날 수 없다.
동행
밤마다
이 산 저 산
울음의 그네를 타는
소쩍새 한 마리
섬진강변 외딴 집
백 살 먹은 먹감나무를
찾아왔나
저도 외롭긴 외로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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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저건 풍기문란죄 아닌가요 ㅎ
원규 시인 착하고 겸손해요, 늘 오토바이를 타고 다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