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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껴안자 마음속 불빛이 환히 켜졌다
프란 크렌즈의 <매스(mass)>
김 문 홍
화해와 용서의 과정이 환히 드러나다
화해와 용서는 가능한가?
아들을 죽이고, 또 어느 아들이 죽임을 당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부모가 서로 한 자리에 앉았을 때 화해와 용서는 가능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이 영화는 가능하다고 말해주고 있다. 최근에 개봉된 <모리타니안>(2021)이란 미국 영화의 주제가 그 해답을 간접적으로 제시한다. 그 영화 속의 실존 인물인 모하메두 울드 슬라히는 말한다.
“나는 용서하려고 합니다. 용서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나의 신 알라가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고문한 사람들에게 원한이 없습니다.”라고 ‘관타나모 일기’의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는 9.11 테러의 핵심 용의자로 미군의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6년간 수형 생활을 하다가 풀려난 사람이다.
그의 주장은 이렇다. 자기를 고문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으려면 우선 원한이나 복수의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용서와 자유, 자유와 용서는 아랍어에서 동의어라는 논리로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202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매스>(2021, 111분)는 그런 용서와 화해의 과정을 감동 있게 그려낸 미국 영화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누구나 용서와 화해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형식 실험의 특별한 영화이다.
배우 출신 프렌 크란즈의 데뷔작인 이 영화는 연극적인 포맷으로 형식 실험을 하고 있다. 러닝 타임 거의 대부분을 한 교회의 모임방에서 시작하고, 또 거기서 서사를 끝맺는다. 피해자외 가해자의 부모 네 명이 한정된 공간 안에서 대사와 표정, 그리고 마임만으로 서사를 진행시킨다. 그것도 큰 동선을 만들거나 등퇴장이 많은 보통의 연극 형식이 아니라, 오로지 배우들이 주고받는 대사와 그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리액션, 감정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전환시키는 표정 연기나 마임으로 일관한다. 이처럼 큰 동적인 변화가 없는 연극은 오로지 배우들의 연기 하나로 모든 승부를 걸어야 한다. 그러므로 배우들의 적확한 연기 내공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비극적인 참상이 얼어난 끔찍한 현장도 보여주지 않은 채, 오직 가해자 부모의 대화를 통해서만 관객에게 전달되고 있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마치 자신이 현장의 화면을 직접 보고 있는 것 이상의 참상을 떠올리고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이 영화를 연출한 감독의 연출 의도가 어는 정도 짐작이 된다. 직접 현장을 눈으로 볼 수 있게 장면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이처럼 대사를 통해 장면의 상황이 전달되면 관객의 상상력을 보다 더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눈으로 보면 상상력이 유보되거나 그것이 발동될 수 있는 기회가 오히려 차단된다. 대화를 귀로 들어야만 그 현장의 모습을 상상력을 통하여 제대로 재구성할 수 있는 상상력의 연상작용이 더 허용될 수 있다는 점을 감독은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감독은 이처럼 대사를 통해 사건을 진전시키는 연극적 연상 작용이 힘이 얼마나 크고, 또 그 침투력이 강한 것인가를 환히 꿰뚫고 있는 것 같다.
이 작품은 거의 모든 것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부모 네 사람의 대사를 통해서만 모든 것을 전달하고 있다. 대사에 의해 사건의 과정이 소개되고, 대화를 통해서 장면의 상황이 제시되고, 오직 대사를 통해서만 내면 감정의 기미까지 전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행동의 영화라기보다는, 그거의 모든 것을 대사의 힘에 의존하고 있는 심리적 영화이다.
이 영화처럼 대화를 통해서만 보이지 않는 화면을 연상시키기는 여간 어렵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서사의 흐름을 촬영하는 것도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닐 것이다. 일반 보통의 영화처럼 씬 별로 끊어서 쵤영을 못하고, 인물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호흡과 감정으로 서사를 진행시켜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연기에 오류나 실패가 있을 경우에는, 일관된 감정을 이어가기 위해서 처음부터 다시 연기를 해야만 하는 수고를 각오해야 한다. 이 작품에 출연하는네명의 배우들은 감정 표현이나 리액션, 그리고 마임에 이르기까지 극사실적인 연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거의 연기 달인에 이를 만큼, 적확하고 섬세하게 장면의 리듬을 본능적으로 연기한다. 이를 조율하고 지켜봐야 하는 감독의 인내심은 거의 상상을 불허할 지경이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서스펜스적인 기법으로 관객을 사로잡다
이 작품은 시종일관 극적 긴장감을 유지한 채 서사가 진행되고 있다.
미국 어느 지역의 한적한 교회가 무대이다. 먼저 피해자의 부모가 도착한다. 가해자의 부모를 만나야 하는 그들의 심정은 헝클어진 실꾸리처럼 복잡다단하다. 총격 사건으로 황담하게 죽은 아들을 생각하면 가슴 속에서 분노의 격렬한 감정, 무작위의 희생자가 된 사건에 대한 황당함, 죽은 아들에 대한 연민과 상심이 한데 뒤엉켜 감정을 더 이상 추스를 수가 없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모임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교회 뒷편에 차를 세우고 끓어오르는 격렬한 감정을 다독이고 있다. 아버지는 이따금 백미러에 비치는 노란 리본을 힐끗 힐끗 바라본다. 철조망에 묶여져 바람에 흩날리는 애도의 노란 리본이 죽은 아들에 대한 상심과 허탈의 감정을 상징적으로 은유하고 있다. 이 작품 속에서의 노란 리본은 가끔 인서트 화면으로 보여지는 아주 특별한 오브제로 작용하고 있다.
다음으로 가해자의 부모가 모임방에 도착한다. 그들은 가해자의 부모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인다. 아들이 저지른 어이없는 총격 사건의 후유증으로 갑자기 늙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연민을 느끼게 한다. 가해자의 어머니가 피해자의 어머니에게 애도의 꽃다발을 선물한다. 겉으로는 고맙다고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형식적이고 의레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들은 총격 사건이 있은 그 이후부터 서로 편지를 주고받아온 것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피해자의 어머니가 가져온 죽은 아들의 어릴적 사진을 보는 것으로 어색한 대화의 물꼬를 튼다. 당사자인 그들도 긴장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관객들 역시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다.
가해자 부모가 번갈아 토로하는 이야기 속에 사건의 진상이 하나씩 그 꺼풀을 벗기 시작한다. 이를 통해 가해자의 아들은 어릴 때부터 심리적인 공황 상태를 겪어온 것으로 밝혀진다. 아들은 그 참상의 당일에 학교로 느닷없이 난입해 사제 폭탄을 터뜨리고 총기를 난사해 열 명의 학우을 살해한 뒤, 자신은 조용한 도서실로 가 자결하는 것으로 비극적 사건은 마무리된다. 피해자의 아버지는 당시 마지막으로 살해된 아들의 모습을 상상한다. 총을 맞고도 살아나기 위해 기어나간듯 보이는 핏자국의 흔적을 상기시키며 그날의 참상에 분통을 터뜨린다. 이들은 한동안 갈등과 반복의 패닉 상태로 빠져든다.
이 영화는 가해자 역시 피해자였음을 상기시킨다.
가해자의 부모는 아들의 심성을 이해하고 바로잡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지만 아들의 비극적인 행위를 결국 막을 수 없었다. 분노와 좌절, 갈등과 대립, 상심과 연민의 지난한 과정을 이 영화는 극적 긴장감으로서의 심리적 스릴러 기법으로 보여준다. 장면과 장면을 긴장과 이완이라는 서스펜스적 리듬으로 극한까지 몰아붙인다. 그러다 결국 피해자의 아버지가 가해자의 어머니에게 눈물을 닦을 휴지를 건넴으로써 이 작품은 소강 상태로 들어간다. 가해자의 어머니가 건네준 꽃다발을 어떻게 가져가느냐 하는 문제로 한동안 망설이는 제스쳐로서의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피해자의 어머니는 꽃다발을 꼭 가져가겠다는 말을 통해 비로소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는 묵시적인 메시지를 보낸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철조망 위의 노란 리본과 꽃다발은 애도와 화해, 그리고 용서를 은유적으로 상징하는 오브제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가해자 역시 피해자라고 말한다
이 영화의 반전은 가히 충격적이라 할 만하다.
관객이 이제는 모두 끝났다고 한숨을 돌리려는 순간 느닷없이 반전으로 주제를 암시한다. 서로 화해하고 방을 나간 가해자 어머니가, 다시 돌아와 피해자의 부모에게 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에 있었던 아들과 자신의 충격적인 일화를 들려준다.
"아들 방에 들어갔더니 아들이 '엄마 맞기 전에 방을 나가세요.'하고 말하더군요. 난 내 방으로 돌아와 어쩔 줄 몰랐어요. 차라리 그때 내가 아들에게 '그래 때려라. 네 마음이 풀릴 때까지 엄마를 때려라'하고 말할 걸 그랬어요. 그랬더라면 그런 비극이 안 일어났을지도 모르잖아요,"하고 말하며 가해자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린다. 피해자의 어머니가 다가가 그녀를 진심으로 껴안아 주면서, 기나긴 연민과 애도의 드라마는 막을 내리게 된다. 감독은 가해자의 아들에게 살해당한 열 명의 아이들도 피해자이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가해자의 아들도 피해자라는 것을 이 장면을 통해 일순 상기시킨다.
엔딩 시퀀스 역시 인상적이다.
이들이 모두 돌아간 이후 카메라는 철조망에 달려 있는 애도의 노란 리본을 롱테이크 화면으로 보여준다. 어둠 속에 보여지는 노란 리본. 얼마 전까지는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미동조차 없다. 노란 리본은 분노와 상심의 격렬한 감정이 가라앉고 화해와 용서로 서로를 끌어안은 가해자외 피해자의 부모들에게 바치는 묵시적인 응원으로서의 상징적 은유의 의미를 지닌다. 그때 철조망 너머의 어둑한 들녘 저편에 환한 불빛이 하나의 느낌표처럼 반짝 하고 켜진다. 서로가 서로의 슬픔과 상심을 끌어안아 어루만져 주자, 그들의 마음속에 온화한 평정으로서의 화해의 불빛이 밝아지는 것이다.
이 영화는 영화 속 당사자들만이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치유의 시간을 제공해주는 미덕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용서와 화해의 산들바람 같다. 극장 밖을 나서는 관객들의 얼굴 역시 평온해 보일 것이다. 그들 역시 영허ㅘ 속의 그들처럼 연민과 공포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낀 것이 분명하다.
이 작품은 이렇게 소리 없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결국은 가해자와 피해자 구분 없이 모두 피해자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용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원한과 복수의 감정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부모는 서로 용서하고 화해한 뒤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처럼 자기 감정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사랑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인데 미워하는 일로 시간을 허비한다는 것은, 그렇게 길지 않는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귀하고 값진 일인가. 용서하고 나면 새로운 세상이 가슴으로 들어와 자리 잡을 것이다. 그 새로운 세상에는 아름다운 꽃이 피고 영롱한 새들의 노래 소리가 가득 차,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천국의 정원이 보석 같은 빛을 내뿜을 것이다. <매스>는 용서와 화해의 영화이다. 그 복잡다단한 감정의 기미를 절묘하게 표현한 네 명의 배우에게, 모두 아카데미 연기상을 주어야 한다는 관객의 찬사는 그런 점에서 백번이고 타당하다.
(계간『문장』202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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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예전 라디오를 들으며
모든 걸 상상하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가해자 가족과 피해자 가족 4명이 나와
이야기를 통해서 영화를 끌고 간다니
실험적입니다.
충격적인 장면을 배제한 채
독자들에게 그 장면을 상상할 수 있도록
연기에 올인한 배우와 감독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좋은 글 올려 주신 김문홍 선생님,
늘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