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례지 정보
● 박해시 선교사 입국에 ‘약속 장소’로 큰 몫을 한 백령도
● 소재지 : 인천 옹진군 백령면 백령로254번길 66 (진촌리 807-1)
● 연락처 : 백령 성당 (032) 836-1221 FAX (032) 836-8008
● 홈페이지 : 백령 성당 http://cafe.daum.net/baekryungcatholic
● 미사시간 : 평일 : (화-금) 오후 7:30 (토) 오후 5:30
주일 : 오전 6:30, 11:00
● 교통편 : 백령면 사무소가 있는 진촌리에 있다.
● 인천-백령도 운행
▲ 운행 선박 데모크라시5호
출발시간 : 08:00(인천-백령 매일 출발), 13:00(백령-인천 매일 출발)
연락처 : 032-836-6789
▲ 운행선박 프린세스호
출발시간 : 13:00(인천-백령 매일 출발), 08:00(백령-인천 매일 출발)
연락처 : 032-836-6789
백령도는 이제까지 1846년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중국에 와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에게 서한을 전하기 위해 백령도에 와서, 중국 어선 선주에게 서한을 주고 순위도(巡威島)에 돌아와 관헌에게 잡히게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 하나만 알려져 왔다.
해로를 통하여 김대건 신부의 안내로 입국에 성공한 페레올 주교는 조선에 들어올 선교사들이 국경을 넘어 육로로 들어오는 입국로가, 1839년 기해박해로 앵베를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가 잡혀 순교함으로 드러나게 되자, 김대건 신부에게 서해를 통한 선교사 입국로를 개척하게 하였던 것이다.
백령도 인근 해역에 어군의 형성으로 중국에서 모여드는 어선들을 활용하여 백령도에 잠입하고, 백령도로 안내하러 온 교우들을 만나 입국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백령도는 선교사들의 밀입국에 도움을 주는 천혜의 위장지가 되었다.
현재 백령도 인근 해안 중 중국 어선이 많이 모였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은 관련 문헌이 없어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구전과 주민들의 기억으로 백령도 서쪽 중화동과 연화리 근해가 선교사들이 조선 안내 교우를 만날 수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한종오)
1795년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 신부 입국부터 1880년까지 방인 신부인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 그리고 파리 외반선교회 소속 선교사 28명 중 입국시 백령도와 인연을 갖은 선교사가 19명이고, 그중 성인이 된 선교사는 7명이나 된다.
○ 1795년∼1880년 입국로에 따른 방인·외국인 선교사 인원
⓵ 육로로 입국한 선교사 : 6명
⓶ 육로와 해로로 입국한 선교사 : 1명
⓷ 해로로 입국한 선교사 : 24명
⓸ 백령도를 통해 입국한 선교사 : 13명
⓹ 백령도로의 입국 시도에 실패한 선교사 : 6명
※ 입국 시도시 백령도와 인연을 갖인 선교사 : 19명
※ 백령도와 인연을 갖은 성인 : 김대건 신부, 베르뇌 주교, 오매트르 신부, 위엥 신부, 볼리위 신부, 도리 신부, 브르트니에르 신부
박해시 선교사 입국에 ‘약속 장소’로 큰 몫을 한 백령도는 심한 박해의 와중에서도 순교를 각오한 선교사들의 입국에 도움이 되어 한국 천주교회의 발전에 기여하였고, 한민족에게 그리스도의 복음과 동서 문화와 사상을 만나게 해준 역사적인 곳이다. 그러므로 백령도는 한국 천주교회의 문화 유적지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동서 문화와 사상적 의미로 재조명되어야 할 곳이다.
◆ 김대건 신부의 서해 입국로 탐색
김대건은 1845년 8월 17일 상해 푸동 지역에 있는 김가항(金家巷) 성당에서 신부들과 조선 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제 서품을 받은 후, 김대건 신부는 8월 24일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신부를 복사로 횡당(橫堂) 신학교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김대건 신부 일행은 조선으로의 귀환을 위해 타고 온 배를 수리한 다음 배의 이름을 여행자의 수호성인인 라파엘 대천사의 이름을 따서 '라파엘(Raphael)호' 라고 불렀다. 8월 31일 페레을 주교와 다블뤼 신부, 김대건 신부 등은 라파엘 호를 타고 출항하였다. 각종 어려움을 뚫고 10월 12일 충청도 강경의 황산포구 나바위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이로써 김대건 신부는 서해 해로를 통해 페레을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조선에 맞아들이는 데에 성공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서울에 도착한 후, 서울과 용인 일대에서 사목 활동을 하였다. 1846년의 부활 대축일 미사를 은이 공소에서 봉헌하고 서울로 올라온 김대건 신부에게 서해를 통한 선교사 입국로를 개척하라는 페레을 주교의 지시가 내려졌다. 이에 5월 13일(음력 4월 18일) 김대건 신부는 복사 이의창과 사공 및 일꾼 노언익, 엄수(嚴秀). 김성서(金性西, 요아킴). 안순명(安順命), 박성철(朴性哲, 베드로) 등과 함께 임성룡(林成龍, 베드로)의 배를 타고 마포를 출발하여 백령도로 향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연평, 순위도(巡威島) 등을 거친 후, 백령도 근처에서 닻을 내렸다. 그는 중국 어선들이 해마다 음력 3월 초에 고기잡이를 위해 이곳으로 모였다가 5월 말경에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 중국 어선들의 중개를 이용한다면 선교사들을 입국시키고 편지를 전달하는것이 매우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판단하에 김대건 신부는 밤중에 중국 배를 찾아가 배의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에게 페레올 주교의 편지와 자신이 베르뇌, 메스트르, 리브와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 및 중국 신자 두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아울러 황해 해안의 섬들과 바위와 그 밖에 주의해야 할 것들에 대한 설명과 함께 조선지도 두 장을 첨부해 보냈다.
중국 배와 접촉하여 편지와 지도 등을 전한 김대건 신부는 6월 1잎(음력 5월 8일) 순위도 등산진(登山鎭)으로 귀환하였다. 그런데 6월 5일(음력 5월 12일) 그곳 진장(鎭將)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김대건 신부가 타던 배로 와서 중국 배들을 물리치기 위해 배를 징발하겠다고 하자, 김대건 신부가 반대하였다. 이 문제로 시비가 발생하였고, 김대건 신부를 수상히 여긴 등산첨사(登山僉使)가 김대건 신부와 임성룡·엄수를 잡아 가두었다.
김대건 신부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서 이의창과 노언익은 시비가 발생하기 전에 등산진을 떠나 상경하였고, 김성서·안순명·박성철은 김대건 신부 등이 체포되는 것을 보고 피신하였다. 관원들은 김대건 신부의 소지품에서 한글로 된 작은 천주교 서적 1권,성모와 아기 예수상이 그려진 비단 조각과 예수성심상이 그려진 비단 조각이 들어 있는 붉은 비단 주머니 1개, 남색 명주 한 조각과 반이 삭았으나 길지 않았던 흔적이 있는 두발 등을 발견하고 그가 천주교를 믿는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소지품 중에 중국 물건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중국인으로 오해하였다. 등산첨사는 이와 같이 조사한 내용을 황해감사에게 알렸고, 이에 6월 10일 김대건 신부 일행은 해주 감영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의 체포는 조정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조정은 외국인이 국경을 넘어 와서 변방의 진영에서 체포되었다는 점과 천주교를 믿는다는 점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그리고 그가 입국하여 활동하는 데에 도움을 준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이에 김대건 신부가 중국 배에 전한 편지와 지도를 색출해 올리도록 황해감사에게 지시하고, 임성룡과 엄수의 문초에서 거론된 사람들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임성룡의 부친 임치백(요셉, 1803-1846)과 김성서의 부친 김중수가 추가로 체포되었다. 이에 조정에서 엄하게 조사하도록 지시함에 따라 6월 21일(음력 5월 28일)김대건 신부 일행은 포도청으로 압송되었고, 김대건 신부는 6월 23일부터 7월 19일(음력 윤5월 26일)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40번의 문초를 받았다.
김대건 신부는 처음 문초에서는 중국 광동 출신인 우대건(于大建)이라고 하다가 여섯 번째 문초 때 외국인이 아니라 용인 태생 김대건이며, 신학 공부를 위해 동료들과 함께 마카오에 유학한 사실을 실토하였다. 하지만 김대건 신부는 혹독한 고문에도 '하느님을 위해서 죽겠다'라고 하면서 신자들과 조선교회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함께 옥에 갇혀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으며, 임치백에게 세례를 주었다. 7월 30일(음력 6월 8일)과 8월 26일에는 페레올 주교와 스승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고, 작성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선 신자들에게 보내는 회유문(廻諭文)도 남겼다. 또한 대신들의 지시어 따라 영국의 세계지도 1장을 번역하여 채색된 2장의 사본을 만들었고, 작은 지리개설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한편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다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병오박해이다. 임성룡과 엄수의 진술로 김대건 신부의 석정동 집이 알려졌고, 남경문(베드로,1796-1846), 현석문, 이재의, 김순여, 구순오 등이 고발되었다. 조정에서는 주요 신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이천, 양지, 은이 그리고 충청도와 전라도에까지 포졸들을 보냈다.
신자들 가운데 남경문, 한이형, 현석문, 김임이 ·이간난 ·정철염 등이 모두 붙잡혀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체포된 신자들 대부분은 김대건 신부와 관련된 인물들이었다.
김대건 신부와 신자들이 옥에 갇혀 있는 동안인 8월 9일(음력 6월 18일) 중국에 있던 세실 함장이 이끄는 클레오파트르(Cléopâtre) 호 ·빅토리외즈(Victorieuse) 호 ·사빈느(Sabine) 호 등 군함 3척이 충청도의 외연도에 나타나 기해박해 때 3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살해된 것에 대해 조선정부에 항의하는 서한을 전하고 떠났다. 조정에서는 이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영의정 권돈인(1783~1859)을 비롯한 대신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프랑스 군함을 불러들였다고 하면서 김대건 신부와 신자들을 역적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헌종이 이를 받아 들여 김대건 신부를 효수경중(梟首警衆 :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아 뭇사람을 경계하던 일)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김대건 신부는 9월 16일(음력 7월 26일) 새남터로 끌려가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는데 , 그의 나이 만25세였다. 그의 뒤를 이어 9월 19일 현석문이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고 9월 20일에는 임치백 ·남경문 ·한이형 ·이간난 ·우술임 ·김임이 ·정철염 등도 순교하였다. 이로써 김대건 신부의 체포로부터 시작된 병오박해가 끝을 맺었다.
[자료 : 한국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 찾아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