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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재악산(載嶽山) 산명(山名)이 기록된 '단장면 리동가(丹場面 里洞歌)' 노래(1절~3절) 및 동영상 완성 발표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4134?svc=cafeapp
'daum cafe 밀양광장'은 전국에서 제일 큰 카페로서 게시판 숫자만도 무려 508개가 있으며, 경남 밀양의 문화, 관광, 역사, 지명 관련 조사, 연구, 홍보 활동 등 커뮤니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번 글은 재악산(載嶽山)을 홍보하는 1935번째 글입니다
※[천황산 세력]이 [daum cafe 밀양광장]에 있는 수많은 글을 인터넷에 노출되는 것을 방해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밀양광장의 수많은 글]을 못보게 하므로, 위와 같이 영문주소(URL)를 [도재국의 페이스북 계정]에 링크(연결)시켜 세상 사람들이 본 글 등을 쉽게 볼 수 있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도재국이 운영하는 [daum cafe 밀양광장]ㆍ[naver blog 밀양 재악산] ㆍ[페이스북 도재국 계정]의 대부분의 내용을 보시면 공익을 위한 카페ㆍ블로그ㆍ페이스북 입니다
[밀양광장]의 대부분의 중요한 글은 [밀양 재악산]과 [페이스북 도재국 계정] 등에 링크시켜 세상 사람들에게 홍보하고, 때로는 [다른 단체 등의 밴드]나 [인터넷 웹사이트], [카톡] 등에도 링크시켜 홍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밀양광장]은 공익용 정보의 생산 및 저장 기지 역할을 하고 있는 중요한 카페 입니다
※[천황산 세력]은 일제 잔재를 없애는 일을 방해하는 매우 나쁜 세력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저희들은 경남 밀양에 살고있는 81세의 손흥수와 71세의 도재국입니다. 일제가 조작한 천황산(天皇山)을 없애고 동시에 원래의 재악산(載嶽山)을 복원하기 위해, 밀양아리랑에 버금가는 민족문화가 생생하게 배어있는 '단장면 리동가(丹場面 里洞歌)'를 홍보하기 위해서 선생님에게 카톡을 보내드립니다. 지인들에게도 본 카톡을 복사하여 많이 전달해 주시고, 많은 성원을 보내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참고
휴대폰에 《daum cafe 앱》을 설치하면 카페에 게시된 글자가 선명하고 크게 잘 보입니다. 《앱》 설치를 잘 모르시는 분들은 자녀나 손주 등에게 부탁하면 몇 분 내로 설치해 줍니다
●●●37년째 재악산(載嶽山) 산명(山名) 복원을 선도하는 손흥수, 도재국 인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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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단장면 리동가(丹場面 里洞歌)' 가 3개월여 만에 완성되었습니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손흥수, 장우익, 도재국
●2022년 5월 중순에 손흥수ㆍ장우익ㆍ도재국 3인이 밀양 표충사 입구의 한 식당에서 모여 '단장면 리동가'를 작시(作詩), 작곡 및 노래 취입, 동영상까지 제작하기로 계획하였습니다.
●장우익 선생님 소개
○출신 : 밀양시 단장면 국전리(菊花田) 양지마을
○나이 : 2022년 현재 76세
○학력 :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3년 수료
○전직 : KT 국장 퇴직
○직업 : 시인(수많은 詩를 作詩하여 페이스북 등을 통해 발표하고 있음)
○참고 : 현재 서울에서 작곡가, 가수, 노래 공연가, 노래 영상 편집가 등과 활발하게 교류중임.
○유튜브에서 '장우익'을 검색하면 '장우익 詩人님'이 作詩한 수십 편의 詩가 노래로 작곡되고, 또 유명 가수에 의해 동영상으로 제작되어 방영되고 있습니다.
○체칠리아음악 체널 : 장우익 작시(作詩), '또다시 당신을 만나' 外 여러 영상사진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NOIO/3796?svc=cafeapp
●'단장면 리동가(丹場面里洞歌)'는 지경(地耕) 손흥수(孫興銖) 선생님이 밀양시 단장면(丹場面民)의 각 마을에서 수백 년 전부터 농요 및 내방가사 등의 형식으로 단장면 마을의 구석구석을 따라 노래부르면서 구전되어 왔으나, 노래가사가 채록되지 않아 멸실될 우려가 있어 안타까운 상태였습니다.
●단장면 구미마을이 고향인 손흥수 선생님이 면내의 마을마다 수십 년 동안 다니면서 어르신들로부터 노래말 가사를 한 소절, 한 소절씩 채록하여 모은 것을 십여 년 전에 'daum cafe 밀양광장'과 '밀양향토사연구회 회지(會誌)인 밀양이야기' 책에 최초로 발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향이 단장면 국전리인 서울에 계시는 장우익 선생님이 지난 번에 만든 노래 '재악산(載嶽山)아'에 이어 이번에 재악산(載嶽山) 산명이 수록된 '단장면 리동가'를 작시(作詩)를 하고, 성창경 선생님의 작곡과 이리진 국악 가수님의 가야금 병창, 서미영 선생님의 동영상 제작까지 완성하여 세상에 발표하였습니다.
●밀양문화원 부설 밀양향토사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박순문 변호사는 《단장면 리동가》가 《밀양아리랑》에 버금가는 위대한 명곡이라 평하면서 행정기관과 여러 시민단체 등에서 밀양시민과 경남도민, 전 국민에게 널리 알렸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단장면 리동가' 동영상 화면 :
○'단장면 리동가'는 단장면민의 노래로 마을 구석구석의 옛 지명과 역사, 문화 등이 깃들어 있고, 특히 300여 년 전부터 단장면민에 의거 해발 1189m인 사자봉(獅子峰)이 천황산(天皇山)이 아니고, 재악산(載嶽山)으로 불러진 증거가 가사에 채록되어 있습니다.
●1923년에 일제가 조작한 천황산(天皇山)을 없애고 본래의 산명인 재악산(載嶽山, 제1봉인 산봉우리 명칭은 사자봉, 해발 1189m)으로 되찾기 위해서 37년째 노력하는 손흥수 ㆍ도재국 등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재악산(載嶽山)의 증거 80여 건을 찾아낸 것은 향토사학자 손흥수ㆍ도재국ㆍ박순문(변호사)이 37년째 노력한 결과입니다.
●2017년에는 손흥수와 도재국, 정대재 3인이 '호국성지(護國聖地) 표충사(表忠寺) 배산(配山) 재악산(載嶽山) 산명 복원 범국민운동 추진위원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산명복원운동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번 '단장면 리동가'의 노래 완성으로 재악산(載嶽山) 정상에서 흘러내린 칠리수(七里水)가 밀양시의 단장면, 산내면, 산외면, 활성동, 용평동, 내일동, 삼문동, 부북면의 마암산까지 여러 마을과 산야(山野)를 기름지고 풍요롭게 적시면서 밀양인의 옛 기상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단장면 리동가(丹場面 里洞歌)에 나타난 지명 위치도
●●●'단장면 리동가' 따라 각 골짜기 위성지도 :
●배내천, 단장천, 구천, 동천을 통털어서 조선시대에는 載岳山에서 발원한다 해서 載岳川이라 대동여지도에 기록한 것만 보더라도 天皇山이 아니고 載岳山이 확실한데, 울산 측은 天皇山이라 어거지로 우기고, 울산 측의 힘에 눌려 바른 말도 못하고 있는 꼴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아래 위성지도를 화면이 큰 컴퓨터 모니터로 확대해서 보면 다음과 같이 골짜기를 따라 노래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서물한 산 국화전:국전리, 무릉동, 진주동, 태동:부엉덤 등》
●《정각산, 정승동, 도래재 등》
●《원구천, 載嶽山, 표충사 등》
●《밀양댐:사희동, 농암대 등, 고야천, 고례리, 벼락덤, 범도리:범도연 등》
●《당모랭이, 곰소, 동화전, 사연 등》
●《용회동, 창마, 단장리, 경주산 등》
●《연화동:감물리, 사지, 상봉, 버구삼동, 귀미:구미, 사촌 등》
●《등잔소, 월연대:월연정, 금시당 등》
●《용두소:용두연, 영남루, 아복산,무봉산,마암산,나리티 고개 등》
●●●버구삼동 : 안법리(안포+버구+노상)+법흥리(법산)
●(2) 법귀(法貴, 法區, 버구, 큰골, 大谷)
안포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안법초동학교를 중심으로 동과 남으로 길게 퍼져 있다. 안포(安圃), 법귀(法貴), 법산(法山)을 가리켜 옛날부터 버구삼동이라 하였는데 법귀 또는 법구는 버구에 대한 한자음의 표기로 여겨진다. 또 이 마을 동쪽 산기슭에 큰 골짜기가 있다 하여 큰골(大谷)이라고도 한다
○출처 : 밀양지명고(密陽地名攷) 단장면編 안법리條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NcdZ/4?svc=cafeapp
●법흥리 : (1) 법산(버구)
법흥리의 북쪽에 위치하며, 안법리의 노상 부락과 개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법산은 안포(安圃), 법귀(法貴)와 함께 흔히 버구 삼동이라고 하는데, 버구라는 지명은 버꾸(농악기)에서 온 것이라 하며 법귀(法貴) 또는 법구(法龜)로 한자음 표기를 했다. 실지로 옛날부터 버꾸놀음 건립(乞粒)이 유명하여 버구 농악의 평판이 높았다. 혹은 법산령에서 따온 지명이라고도 한다.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NcdZ/5?svc=cafeapp
●안법리 노상마을과 법흥리 법산마을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아래 지도에 《재약산》이라 적은 곳이 《수미봉》입니다. 확대 또는 축소하면 사자봉인 소위 천황산도 나타나거나 또는 숨겨지는 것은 카카오와 국토지리정보원의 기술적인 협약으로 보입니다
●칠리수(七里水) : 위의 위성지도를 보면 확인이 가능합니다
○단장면 4 골에서 발원하는
⓵ 영정수(靈井水)-재악산(載嶽山) 발원
⓶ 배내수(梨川水)- 재악산(載嶽山) 배내쪽에서 발원
⓷ 국화수(菊花水)- 금오산(金烏山) 북쪽 국화전에서 발원
⓸ 연화수(蓮花水)- 금오산(金烏山) 남쪽 감물리에서 발원,
○산내면 3골에서 발원하는
⓹ 구연수(臼淵水)- 호박소 시례에서 발원
⓺ 구만수(九萬水)- 구만산(九萬山) 구만동에서 발원
⓻ 발례수(發禮水)- 정각산(鼎角山 또는 正覺山) 발례에서 발원
●'단장면 리동가'가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으로 영원히 이 땅에 울려퍼지기를 바랍니다.
●노랫말을 채록한 손흥수 선생님, 작시(作詩)를 한 장우익 선생님, 작곡가 성창경 선생님, 가야금 병창을 하신 이리진 국악 가수님, 동영상을 제작한 서미영 선생님 등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2022. 8. 28(일요일) 새벽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허죽(虛竹) 도재국(都在國) 올립니다.
●●●아래의 영문 주소 또는 사진(빨간 부분)을 검색하면 '단장면 리동가'의 동영상이 나타납니다
●●●동영상 노래
https://youtu.be/WRPhMppSOfo
●PC화면에서 동영상과 지도 동시 시청
●노래를 들어면서 PC화면에서 아래의 지도를 보십시오
●동국여지승람과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여지도 등 우리나라의 모든 고문헌과 고지도에는
●단장천 [밀양댐 ~ 고례(평리) ~ 범도(아불) ~ 곰소(당모랭이) ~ 사연(동화전,사연교) ~ 태룡(연경) ~ 단장(창마,용회교) ~ 경주산 ~ 금곡교 ~ 구미 ~ 칠탄정 ~ 구서원 ~ 살래(虎噴灘:월연정 바로 위):밀양강에 합류] 과
●동천 [얼음골 ~ 남명 ~ 삼양 ~ 원서(석골) ~ 가인 ~ 봉의교 ~ 송백(잦들:백평) ~ 임고(소고,섬들) ~ 용전교 ~ 용전(한골) ~ 臺巖 ~ 희곡(박산,괴곡,보라) ~ 경주산(단장천에 합류)] 구간을
●재악산(載嶽山 = 載岳山)에서 발원한 하천이라 하여 재악천(載嶽川 = 載岳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울산 측과 국토지리정보원과 일부 국가지명위원들은 이제 천황산(天皇山) 주장을 중단하십시오. 엉터리 일제 잔재물인 천황산(天皇山)을 계속 옹호하면 국민과 민족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단장면 리동가'는 각 리별(里別, 마을별), 골짜기별 등으로 노래 가사가 채록되어 있어, 리별 지명 순서를 지도에서 보면서 시청(감상)하면 좋습니다
●'단장면 리동가'는 우리나라에서 산천경개(山川景槪)가 가장 수려한 밀양시의 단장면 국화전(국전리)에서 노래가 시작되어 다음과 같이 골짜기를 따라, 내(하천)를 건너고, 산을 넘어면서 각 마을을 지나갑니다
●순서별로 법정리(法定里)에 속한 각 자연마을과 지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국전리(국화전, 진주동) ⇒ 무릉리(가실) ⇒ 태룡리(용포, 소태동, 부엉덤) ⇒ 단장리(단정, 항산, 노적봉, 용회동) ⇒ 사연리(승학동, 사연 모래벌, 동화전, 승학동, 당모랭이) ⇒ 범도리(정각산) ⇒ 구천리(정승동, 도래재) ⇒ 구천리(●載嶽山, 표충사, 파리답, 삼거리, 귀내:원구천) ⇒ 범도리(범도연) ⇒ 고례리(벼락덤, 평리, 풍류동, 바드리, 백마산성, 사희동, 고야천, 덕달리, 사희동, 변자당 나팔고개, 농암대, 오목골) ⇒ 감물리(연화동, 용소) ⇒ 법흥리(사지, 상봉, 상상보, 상원암) ⇒ 안법리(버구삼동) ⇒ 미촌리(귀미,사촌, 칠리수 합수지점, 귀호) ⇒ 활성동(등잔소) ⇒ 용평동(월연정, 응천 구간) ⇒ 활성리(금시당, 응천 구간) ⇒ 가곡동(용두연, 응천 구간) ⇒ 내일동(영남루:응천 구간, 아복산, 무봉산) ⇒ 삼문동(응천 구간) ⇒ 부북면 전사포리 마암산(응천 구간) ⇒ 나리티(만풍에 해가 기울면서 우리내 인생도 저물어 간다)에서 노래가 끝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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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단장면 리동가' 채록 손흥수/작시(作詩) 장우익/작곡 성창경/가야금 병창 이리진
※본 동영상을 화면이 큰 컴퓨터 모니터나 노트북, 티브이 화면에 연결하여 보면 가사가 또렷하게 보이고 동영상도 크게 잘 보여 '단장면 리동가'를 더욱 생동감 있게 시청할 수 있습니다
●'이리진 국악 가수'가 가야금 연주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는 청명한 가을날 아침이슬이 풀잎에 구르는 듯하고, 가야금 뜯는 소리 또한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재악산(載嶽山) 산명이 수록된 '단장면 리동가' 동영상 네번째 화면 :
○왼쪽 사진은 도재국ㆍ장우익ㆍ손흥수 3인이 2022년 5월에 표충사 입구 식당에서 '단장면 리동가'를 작시, 작곡, 국악가수 음반 취입, 동영상을 제작하기로 했습니다.
○오른쪽은 표충사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재악산 영정사 삼층석탑 개수비' 사진으로 국가보물 1944호로 지정된 사자봉이 재악산(載嶽山, 載岳山, 嶽의 약자가 岳임)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새겨져 있으며, 손흥수와 도재국이 최초로 비문을 판독하여 원래 있던 위치에 글자를 도재국이 인터넷으로 적어 넣었습니다
●'재악산(載嶽山)아' 노래의 동영상 첫 화면 설명 :
○2018년 봄에 재경밀양향우회 총회장소인 서울 강남 소재 '더 리버사이드 호텔' 로비에서 '재악산(載嶽山) 산명 복원 홍보 활동'을 하는 좌측으로부터 우측으로 정대재, 손흥수, 도재국
○이 때 손흥수ㆍ도재국ㆍ정대재 3인은 《호국성지 표충사 배산(配山) 재악산 산명 복원 범국민운동 추진위원회 공동대표》로서 재경밀양향우회 총회장 입구인 '더 리버사이드 호텔' 로비에서 향우 500여 명에게 載嶽山 홍보물을 배부하고, 3인이 총회 단상에 올라가서 향우님들께 載嶽山 산명 복원운동에 동참해 줄 것을 부탁하였고, 향우님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로 화답했습니다
※배산(配山)이란?
우리나라 전통사찰의 산문 현판 등에 '절 이름 앞에 붙이는 산 이름"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토함산 불국사/금강산 유점사/호거산 운문사/숭덕산 수덕사/금정산 범어사/재악산 영정사/재악산 표충사/조계산 송광사/묘향산 보현사/가야산 해인사/지리산 쌍계사/가지산 석남사/영축산 통도사 등입니다.
●손흥수와 도재국, 정대재가 홍보물을 배부하고 있습니다
●500여 재경향우님들로 가득찬 '더 리버사이드 호텔' 총회場의 테이블마다 재악산(載嶽山) 홍보물이 하얗게 쌓여 있습니다
●도재국ㆍ정대재ㆍ손흥수 3인이 총회 단상에서 500여 재경향우님들께 載嶽山 홍보를 하고 있습니다
●●●동영상 사진 편집 순서
1. 합성 사진
가. 《호국성지(護國聖地) 표충사 배산(配山) 재악산(載嶽山) 산명복원 범국민운동 추진위원회》의 공동대표 손흥수ㆍ도재국ㆍ정대재 3인이 2018년 봄에 서울에 있는 《더 리버사이드 호텔》에서 재경향우회 총회 時 載嶽山 홍보물 배부 사진
나. 장우익 작시/성창경 작곡 '재악산(載嶽山)아' 노래의 동영상 첫 화면 사진
2. 단장면 리동가(채록 손흥수/작시 장우익/작곡 성창경/가야금 병창 이리진/동영상 제작 서미영) 노래를 만든 사람들 사진
3. 무형문화재 단장면 법흥리 '법흥상원놀이' 공연 사진
※단장면 법흥리에서 유래되어 경상남도 대표 문화재로 자리잡고, 영남루와 삼문동 밀양강 둔치의 야외 대공연장에서 수시로 공연합니다. 밀양아리랑대축제 때도 공연을 합니다.
4. 합성 사진
가. 손흥수ㆍ장우익ㆍ도재국 사진
나. 《載岳山靈井寺(표충사)三層石塔改修碑, 약칭 改修塔記碑》 사진
※본 비(碑)는 사자봉이 재악산(載嶽山)이라는 80여 건의 증거 중에 하나로서, 표충사 삼층석탑에서 출토되어 2017.10.31에 국가보물 제1944호로 지정되었고, 손흥수와 도재국이 최초로 비문을 판독하여 세상에 알렸습니다
5. 표충사 중문(中門) 사진
※표충사 산문과 일주문을 지나서 표충사당으로 들어가는 누각의 문입니다. 이 중문의 오른쪽에 걸린 《天皇第一樓》란 현판이 日帝 天皇을 상징한다 라고 손흥수와 도재국이 주장, 철거를 건의하여, 표충사가 본 현판을 철거했습니다
●위 사진에는 중문의 양 날개(양익 兩翼)에 두 개의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손흥수, 도재국이 《天皇第一樓》 현판을 철거할 것을 주장하여, 위 중문 사진의 오른쪽 날개에 걸린 현판이 철거된 사진입니다
●'수충루'가 아니고 '숙충루'로 확인한 현판
※표충사 중문 현판, 도재국이 보기로는 표충사라는 현판 위치에 淑忠樓라는 현판을 다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이유는 지금의 表忠寺는 《유교 경역》과 《불교 경역》이 공존하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곳입니다
○이 中門을 들어서면 바로 표충사당이 있는 유교의 경역입니다
○유교의 경역을 지나서 높은 계단을 올라서면 사천왕문(四天王門)이 있는데, 이 사천왕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불교 즉, 사찰의 경역에 들어섭니다
●아래는 당초에 표충사 中門의 양익(兩翼)에 걸린 현판 사진입니다
●손흥수, 도재국, 박순문이 酬忠樓가 아니고 淑忠樓로 확인한 현판
●손흥수와 도재국은 《天皇第一樓》란 현판의 天皇은 일제 天皇을 상징한다고 주장하여 철거할 것을 요구한 결과 표충사가 철거했습니다
※아래의 中門은 일명 숙충루(淑忠樓)라고 하며, 왼쪽 날개에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기허대사등 삼대사가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쳐 나라를 구한 맑고 향기로운 구국충성에 보답하기 위해서 中門(숙충루)를 건립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밀양사람들은 이 현판의 글자를 처음에는 酬忠樓라 했으나, 밀양의 향토사학자인 손흥수와 도재국, 박순문 등 3인이 현판의 글자를 여러 번 확인한 결과 酬忠樓가 아니고 淑忠樓로 확인했습니다.
中門의 表忠寺와 淑忠樓 현판은 '菁南 오재봉' 서예가가 적었습니다
●淑 字 : 名蹟書道 七體大字典, 2006년 書藝文化院 출판
●酬 字 : 名蹟書道 七體大字典, 2006년 書藝文化院 출판
★1544. 경남 밀양 표충사의 일부 누각과 전각 등의 어려운 한문 명칭에 대해서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3463?svc=cafeapp
6. 표충사 산문(山門) 현판 및 산문 준공식 사진
※2017.8.17에 500여 내외빈이 참석한 산문 준공식 및 산문현판 제막식 사진으로 손흥수ㆍ도재국 등이 참석하여 찍은 현판 사진입니다
※산문 준공식 및 산문현판 제막식 날에 《대한불교조계종 宗正 진제법원 대종사님》이 참석하셨습니다
※손흥수와 도재국이 수십 년 동안 載嶽山 산명복원운동을 하던 중에 표충사 산문을 건축할 때 표충사 주지 법기(法機) 스님에게 여러 번 찾아가서 산문 현판에 載嶽山 산명을 걸어달라고 설명을 드린 결과 드디어 당시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이신 진제법원 대종사님의 휘호로써 《載嶽山門》이라는 현판을 걸게 되었습니다. 실로 감격스러운 산문 현판입니다.
※이 현판을 걸기 전에 표충사 주지 법기 스님은 도재국에게 표충사 산문의 상량문(上樑門)의 들보에 봉안할 상량문(上樑文) 글씨를 잘 쓰는 서예가를 알아봐 달라 하셔서, 밀양이 낳은 유명한 서예 대가인 석천 박지석 선생님을 섭외하여, 밀양 삼문동 제1밀양교 부근에 있는 석천 선생님의 서실에서 도재국은 3일 동안 무려 7.5m 길이의 화선지에 석천 선생님이 載嶽山門의 上樑文을 쓰는 것을 감격스럽게 지켜보았고, 上樑文이 완성되자 표충사 총무 성래 스님과 서실에서 上樑文을 전달하는 광경을 지켜보았고, 손흥수 선생과 함께 上樑式에 참석하였고, 이전에 표충사 법기 주지 스님의 요청으로 도재국은 上樑文 원안을 미리 검토했습니다.
●상량문(上樑文)이 봉안된 표충사 산문의 들보가 높이 올라가고 있는 감격스러운 순간입니다
●표충사 법기 주지 스님 등이 상량문(上樑文)을 들보에 봉안하는 의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7.5m 길이의 上樑文 사진을 도재국이 보관하고 있습니다
7. 밀양댐, 댐 상수원 취수탑 사진
※밀양댐은 밀양ㆍ양산ㆍ창녕 3개 시ㆍ군에 상수원수를 공급하고, 홍수 조절을 하는 다목적댐입니다. 도재국은 밀양댐을 건설하기 전에 밀양시청에 근무하며 환경관리 업무를 담당하면서 배내골 일대를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 및 상수원수 수질 보호 업무 등을 위한 《밀양댐 환경영향평가서》를 작성하는 업무 등을 맡아 3개 시ㆍ군민의 깨끗한 상수원수 공급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8. 밀양댐 전망대 휴게소 사진
※밀양댐 전망대 휴게소는 수물된 농암대 바로 맞은편에 위치하며 밀양댐과 주변 경관을 가장 아름답게 조망되는 곳입니다
※전망대 휴게소 건너편에는 수몰된 경승지(景勝地)인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주유(周游)했던 농암대(籠岩臺)가 있습니다
●청산 신남석 교수님의 글 《물속에 잠긴 그리움》이란 제목으로 쓴 글속에 있는 밀양댐 전경 사진
※오래 전에 밀양댐이 막 준공되고 부산에 계시는 청산 신남석 교수님이 《물 속에 잠긴 그리움》이란 제목으로 밀양댐 전경을 사진으로 남겼는데, 이 사진이 밀양댐을 상징하는 가장 아름다운 사진으로 남아 있어 제(도재국)가 다시 세상에 공개하여 보여드립니다
●농암정(밀양댐 전망대 휴게소)에서 바라본 밀양댐 전경(위)
●고례리 수몰전 농암대(籠岩臺) (위)
천하 명승입니다. 물속에서 다시 꺼집어 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관련 글 1 :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JFZy/65?svc=cafeapp
※관련 글 2 :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JUMh/338?svc=cafeapp
9. 국전 저수지, 저수지 아래 계곡 등 사진
※국전저수지는 단장면 국전리, 진주동(進舟洞), 태동마을의 들판에 물을 공급하여 해마다 풍년이 되게 합니다.
※국전리 양지 마을은 시인 장우익 선생님의 고향입니다
※아래 사진의 맨 아래가 국전리 마을 입구로 시내버스가 주차하는 곳입니다
10. '밀양 - 울산 고속도로' 국전리 구간 교량 공사 사진
※이 고속도로는 경남 함양에서 합천, 창녕, 밀양을 거쳐 울산에 이르는 도로로서 밀양지역에는 《신 대구 - 부산 고속도로》와 연결됩니다
11. 표충사 일주문(一柱門) 현판 사진
※표충사 일주문에는 원래 《天皇山 表忠寺》 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으나, 오래 전에 박희학ㆍ손흥수ㆍ도재국 등이 天皇山은 일제가 붙인 산명이므로 현판을 철거해야 된다고 오랫동안 줄기차게 주장하여, 표충사가 철거하고 빈 상태로 오랫동안 두었는데, 손흥수와 도재국이 《載嶽山 表忠寺》로 현판을 새로 달아야 한다고 또 줄기차게 주장을 하여, 드디어 2017.3.12 표충사가 《載岳山 表忠寺》로 현판을 새로 걸었습니다
※嶽의 약자는 岳입니다
12. 표충사 여러 전각(殿閣) 배치도 평면 사진
※맞은편의 큰 건물이 표충사 유물관이며, 그 왼쪽의 측면으로 보이는 건물이 삼대사의 신위(神位)가 봉안된 표충사(表忠祠, 표충사당) 로 1839년에 무안의 영취산 백하암 표충사(靈鷲山 白霞菴 表忠祠)를 영정사 주지 월파천유(月坡天有)가 옮겨 지었습니다
13. 단장리 '용회동 마을' 사진
※용회동 마을 남동쪽 단장천변에는 옛 태룡장터가 있었습니다. 즉, 단장천의 제방 북쪽은 법정리(法定里)인 태룡리 구역이나, 《사라호 태풍》으로 하천이 변경되면서 용회동 마을의 남동쪽으로 들판이 이어져 있습니다. 옛 태룡장터에서 일제시대에 밀양 최초의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일본 경찰이 주재한 주재소(지금의 파출소 또는 지서)도 이쪽에 있었고, 단장면사무소는 단장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태룡리 3.ㆍ13 독립 만세운동 기념비》를 지금의 단장면사무소 마당의 도로변에 조그마하게 세운 곳은 역사적인 사건 발생지의 위치를 왜곡시킬 수 있으므로 원래 만세운동이 일어난 태룡리 장터에 세워야 한다고 손흥수 선생은 기회있을 때마다 도재국에게 이야기합니다.
오래 전에 손흥수 선생과 도재국은 《태룡리 만세운동》이 일어난 실재 위치를 답사했는데 대추밭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14. 단장숲, 경주산(競珠山) 사진
※경주산은 주변의 다섯 마리의 용(龍)이 경주산(구슬)을 탐낸다는 전설을 손흥수 선생이 최초로 발굴했습니다. 경주산 둘레에는 다섯 마리의 용을 나타내는 산 지형이 선명하게 있습니다
※단장천에 있는 용회교 전경
※대동여지도에는 지금의 단장천과 동천을 載岳川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載岳川의 발원지가 배내골(梨川), 玉流洞天, 金剛洞天, 얼음골 등이기 때문입니다
15. 사연리 마을
※단장면 사연리 '사연 마을'의 마을 회관 부근의 사진입니다
16. 범도리 '범도 마을' 사진
※고야천(지금은 단장천이라 부름) 범도연 맞은편의 마을
17. 고야천(姑射川) 범도연(泛棹淵) 사진
※고례리 일대에서 옛날부터 배를 만드는 목재를 생산하는 국유림 격인 선재봉산(船材封山)이 고지도에 표기되어 있고, 고야천의 범도淵에는 나룻배가 드나들었습니다
18. 법흥리 '사지 마을'
19. 영남루 침류각 사진
20. 영남루 사진
※조선시대에는 부벽루와 광한루, 영남루를 《조선 3대 누각》이라 불렀습니다
21. 영남루 능파각 사진
22. 영남루 야경 사진
23. 영남루 처마에 걸린 풍경 사진
24. 영남루(낮 시간) 사진
25. 載嶽山 獅子峰 정상 사진 (1)
26. 載嶽山 獅子峰 정상 사진 (2)
27. 단장면 리동가 악보 사진
※3절까지 편집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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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면 리동가' 악보
★1933. 재악산(載嶽山)이 기록된 '단장면 리동가' 악보(채록 지경 손흥수/작시 금천 장우익/작곡 성창경/가야금 병창 이리진)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4132?svc=cafeapp
●●●장우익 선생님이 카톡으로 보내오신 메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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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수 선생님이 발굴한 "단장면 리동가(丹場面 里洞歌)"
●가사 :
국화전(菊花田) 서물(庶物)한 산(山)
진주동(進舟洞) 배를 모아 지사동(智士洞) 학서학지(學書學智)
※배를 모아 = 배를 만들어
무릉동(武陵洞) 돌아들어 가실(蘆谷)에 백로(白鷺) 앉고
용포(龍浦)에 꿈을 꾸니 소태동(小台洞)이 부가(富家)로다
부엉덤 노적봉(露積峰)은 단정(丹亭) 항상 정기(精氣) 받고
용회동(龍回洞) 슬쩍 건너 사연리(沙淵里) 모랫길에
도화 일지(桃花一枝) 꺾어 들고 승학동(乘鶴洞) 학을 타고
동화전(桐花田) 건너 들고 당모랭이 돌아들어
정각산(鼎角山) 슬푼 넘어 정승동(政丞洞) 쉬어 가자
도래재(回嶺) 돌아넘어 재악산(載嶽山) 죽림가람(竹林伽藍)
표충사(表忠寺)에 들어오니
구절장삼(九節長衫) 노선사(老禪師)는
백팔염주(百八念珠) 목에 걸고
아미타불(阿彌陀佛) 염불(念佛)하니 극락세계(極樂世界) 여기로다
파리답(笆籬畓) 지슬 따라 삼거리(三巨里) 업어 내려
귀내(龜川)에 고기 낚아 범도연(泛棹淵) 돛을 달아
벼락덤(雷岩崖)에 떨어지니 평리(平里)가 앞에 있네
순풍시절(順風時節) 호시절(好時節)에 풍류동(風流洞)이 그 아닌가
바오달(바드리) 백마산성(白馬山城) 창의용사(倡義勇士)
결사보국(決死報國) 성터만은 아직 있네
고야천(姑射川) 맑은 물에 은어(銀魚) 떼는 뛰고 노네
덕달리(德達里) 가림들에 새(新木) 말띠기 구경하고
사희동(四熙洞)건너들어 변자당(卞慈堂)나팔고개
잠시 쉬고 일어나세 농암(籠巖) 청석(淸石) 놀이 가자
농암대(籠巖臺) 구경하고 오목골 치밟아서 열두들 넘어서면
연화동(蓮花洞) 꽃밭 속은 용소(龍沼)로 둘러 있고
사지(沙旨) 상봉(上峰) 상상봉(上上峰)에
상원암(上元岩)이 번뜩 드네
버구(法貴) 삼동(三洞) 니리들어 귀미(龜尾) 사촌(沙村) 양어금에
칠리수(七里水)가 합수되니 귀호(龜湖)에는 거북 뜨고
등잔소(燈盞沼)를 구비 돌아 수십 질 장송(長松) 아래
월연대(月淵臺)가 솟아 있고
놀기 좋다 금시당(今是堂)은 좌우로 둘러 있네
용두소(龍頭沼) 푸른 물에 정자선(亭子船) 올라 보니
진홍단장(眞紅丹粧) 기생들은 노래하고 춤잘 추네
응천(凝川)에 닻을 내려 영남루(嶺南樓)에 올라보니
뜰에는 돌꽃(石花)이요 루(樓) 아래는 죽림(竹林)이네
마암산(馬岩山)이 헌산(軒山) 되고 아복산(蛾伏山)이 진산(鎭山)이네
무봉산(舞鳳山) 돋은 해가 나리티(日峴)에 해 기우니
만풍(晩風)에 디린바람 백발(白髮)만 날리구나
●●●리동가 발굴를 도와주신 분 (12분)
○구미마을 : 심재곤(남),
○안법마을 : 박영순(여),
○법산마을 : 추복도(여)
○사촌마을 : 남상규(남),
○단장마을 : 허 선(남), 이상홍(남)
○삼거마을 : 우일남(여),
○국전마을 : 장운수(남),
○덕달마을 : 이복우(남)
○태동마을 : 김성준(남), 박정식(남)
○안법마을 : 배응태(남)
●●●단장면 리동가 요약 및 지명 설명
1. 조사경위
각 리동의 어른 분들로 부터 단장면 지명 유래를 조사하던 중
그 옛날 선조들이 농사일 가운데 틈틈이 이동가를 불러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1993년부터 지금까지 각 마을의 연로하신 남녀 12분의 도움으로
한 소절 한 소절씩 연결하여
면민들에게 선조님들의 여유로움과 고달픈 삶을 후손들에게 들려 주어서
내 고장의 역사와 지명, 명소, 리동가를 보존하려는 목적
2. 가사(歌詞) 내용
- 지역명 : 단장면 리동과 산과 물길 따라 영남루까지
- 내 용 : 리동 지명과 마을 역사를 소개한 가사 (100년~300년 전 역사)
- 용 도 : 농요(農謠)로서 농한기 농번기 유희 時 농민들이 농요 또는 내방 가사 등으로 틈틈이 불리워짐
- 시 기 : 약 80년~300년 전에 지역민들이 주축이 되어 구전으로 불리워 진 가사
(세월이 흐르면서 일부 가사가 추가됨)
3. 자료 조사자
- 조사자 : 밀양 단장면 미촌리 구미2길 35 (구미마을) 거주
향토사학자 손 흥 수
- 조사기간 : 1993년~2014년
- 연 락 처 : 전화 055-352-5381 / 010-7205-5381
4. 지명 및 가사내용 설명
1) 국화전 >국전마을. 리동가의 첫 번째 마을
2) 서물한 산 >조산방, 주물(呪物)한 산, 마을을 비보하기 위하여 숲이 있었으며, 돌무지 조산방을 새마을사업 때 다리 공사에 채움 돌로 하여 없어지고 난 후, 마을에 안 좋은 일이 계속 생겨, 다시 동민들의 합의하여 새로 그 터에 다시 조성하였다.
3) 진주동 >국전 아랫마을. 마을뒤 일제가 광산 개발을 하였으며 지금은 폐광
4) 지사동 >지시동마을, 옛날(200년 전) 능성 具氏의 서당이 있었으며, 지금은 서당터만 밤밭 속에 있다.
5) 무릉동 >무릉마을
6) 가 실 >노곡마을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 1854-1931) 선생 자암서당(紫岩書堂)이 있다.
7) 용 포 >마을이름
8) 소태동 >태동마을
9) 부엉덤 >단장천변 용회동 앞산
10) 노적봉 >경주산을 말하며 단장마을의 노적봉이며, 오룡(다섯마리의 용)이 한 구슬을 두고 다툰다 하여 競珠山이다.
일제가 공동묘지를 조성하였다.
11) 단정 >단장마을.
단장면사무소가 있었으나 공비들의 방화로 소실되었으며, 지금은 그 터에 홍제중학교가 개교하였다.
12) 용회동 >용회동 마을 입구 동남쪽에는 연경마을이 있었으며 시장도 있었다.
1919년 기미년 만세운동이 일어난 연경장터 만세운동地였으며, 1959년 사라 태풍 때 침수, 마을이 유실됨.
13) 사연리 >사연리 마을, 마을 상류 하천에는 곰소가 있다.
14) 승학동 >사연리 안골 마을
15) 동화전 >동화전 마을
16) 당모랭이 >동화전에서 아불로 가는 중간 산모롱이, 길 가운데 당나무가 있다.
17) 정각산 >아불 골마 뒷산이며 산속에 정각 마을이 있었으며 지금은 폐동되었다.
옛 절터에는 부도탑만이 남아있다.
18) 정승동 >
귀내 북서쪽 골짜기 안 마을, 고려 공민왕 때 정승(政丞)인 "안성군(安城君) 김용(金鏞)"의 귀양지, 開京에서 왕을 시해하려다 실패한 후에, 정승동에 21일간 유폐된 후에 끌방재를 넘어 계림(경주)으로 압송되어 처형됨.
19) 도래지 >귀내에서 남명 간 고개 이름
20) 재악산(載嶽山) >
우리나라의 오악(五嶽)인 백두산(白頭山), 묘향산(妙香山), 금강산(金剛山), 삼각산(三角山), 지리산(智異山)의 정기(精氣)를 실(載)은 산이라 하여 "재악산(載嶽山 = 載岳山)"이다.
○천년고찰(千年古刹) 표충사(表忠寺)를 병풍처럼 둘러산 "재악산(載嶽山 = 載岳山)의 사자봉(獅子峯 1,189m)"은 최고봉(主峰)이며,
○최고봉(主峰)인 사자봉(獅子峯 1,189m)"을 기준으로
●남동(南東)쪽으로 수미봉(須彌峯)
●남서(南西)쪽으로 문수봉(文殊峰), 관음봉(觀音峰)
●남쪽으로 향로봉(香爐峯), 백마봉(白馬峯)
●서남(西南)쪽으로 필봉(筆峯), 영봉(靈峯) 등은
재악산(載嶽山 = 載岳山)의 하나의 산군(山群, 산 덩어리)에 속한다.
●(주)도재국 :
신령스런 명산인 재악산(載嶽山)을 일본제국(日本帝國) 조선총독부(총독 '사이토 마코토' 齋藤 實) 육지측량부가 1/50,000 지형도에 천황산(天皇山)으로 표기 왜곡하고, 산봉우리를 天皇山群, 載藥山群, 香爐山群등 3개의 山群으로 제멋대로 조작하여 갈라 놓았습니다. 이러한 증거는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가 제작한 1/50,000 지형도에 있습니다. 일제가 山群(산 덩어리)을 조작ㆍ갈라놓은 증거의 지형도는 현재 국토지리정보원에 소장 중입니다
○또 1961.4.21 "건설부 국립지리원"에서는 산봉우리를 여러 山으로 변경 고시하면서
○ 최고봉인 사자봉(1,189m)을 천황산(天皇]山)으로,
○ 수미봉(1,119m)을 재약산(載藥山)으로 지명고시 하였고,
○이는 일제(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가 왜곡한 산을 국립지리원도 같이 왜곡한 것이나 다름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봉(峰)의 명칭을 산(山)의 명칭(山名)으로 한다면,
○재악산군(載岳山群)보다 규모가 엄청나게 큰 설악산군(雪岳山群)이나, 지리산군(智異山群) 등에는 각각 산 이름이 10개 정도는 만들어야 하는 이상한 꼴이 되어 버립니다.
○즉, 하나의 산군(山群)에는 주봉(主峰, 최고봉)에다 하나의 산명을 부여하는 것이 산명(山名)을 부여하는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따라서 그 당시(1961년) "건설부 국립지리원(현재는 국토지리정보원으로 명칭 변경)"의 이러한 이상한 오류를 반드시 해명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 또 일제(조선총도부 육지측량부)는 표충사 남쪽의 향로봉(香爐峯) 또한 향로산(香爐山)으로 즉, "봉(峯)"을 "산(山)"으로 조작하여 山群을 갈라 놓았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山群을 3개의 山群으로 갈라놓은 이유는 사자봉을 天皇山으로, 수미봉을 載藥山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일제의 술책입니다.
○지금 표충사에는 1995년에 탑(표충사 삼층석탑)을 중수할 때 "표충사 삼층석탑(表忠寺 三層石塔)"의 기초석 아래에 들어 있었던
○"載岳山 靈井寺 三層石塔 改修碑'[약칭 개수탑기비 改修塔記碑, 영정사를 중수(重修)한 내력을 새겨 기록한 돌비문]와
○비석걸에 있는 경자갑보월비(庚子甲補月碑)의 비문을 확인한 결과 산 이름을 "재악(載岳)"이라 새겨 놓았으며,
○절의 명칭은 "영정사(靈井寺)"로 새겨 놓았습니다.
○"영정사(표충사) 삼층석탑"의 내력을 새긴 '載岳山 靈井寺 三層石塔 改修碑(약칭 개수탑기비 改修塔記碑)'는
○"영정사(표충사) 삼층석탑을 중수하게 된 내력을 새긴 돌 비문"으로 "삼층석탑"보다 더 중요한 "보물"입니다
○즉, "載岳山 靈井寺(表忠寺) 三層石塔 "이 "하드웨어적인 보물"이라면,
○"載岳山 靈井寺(表忠寺) 三層石塔 改修碑"는 "소프트웨어적인 영정사(표충사)와 삼층석탑의 혼(魂)이 담긴 보물"로 보아야 합니다.
○庚子甲補月碑는 표충사에 있는 비문 중에 載岳山 산명이 새겨진 두번째 증거이며, 손흥수와 도재국이 이 碑의 뒷면에 《嶺左密陽載岳山靈井寺》라는, 문장을 최초로 발견하여 표충사의 한주스님에게 알려드렸습니다.
※'한주스님'이란 절의 살림을 도맡아 사는 요즘의 총무스님과 같은 역할을 하는 스님, 일종의 직위를 말합니다
○'嶺左密陽載岳山靈井寺'를 이해하기 쉽게 관련 지명 등을 첨가하여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鳥嶺에서 먼 남쪽을 보면, 洛東江 左岸에 密陽都護府가 있고, 밀양도호부 境域에 載岳山이 있고, 그 載岳山에 영정사(지금의 표충사)가 있다' 라는, 뜻입니다.
○옛날에는 경상도에서 漢城(서울, 조선시대에는 서울을 漢城이라 표기했음)으로 오갈려면 지금의 추풍령을 넘어다니지 않고, 嶺南大路를 따라 문경새재인 鳥嶺을 넘나들었습니다.
○또 동국여지승람, 범우고(梵宇攷),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여지도 등에도 "재악산(載岳山)"으로 명기되어 있습니다.
○표충사의 효봉대종사 사리탑 뒷편에는 庚子甲補月碑가 있습니다. 표충사의 여러 碑 중에서 표충사의 史蹟을 기록한 매우 중요한 유일한 碑입니다. 庚子甲補月碑에서 "甲"이란 임진왜란 兵火로 잿더미가 된 영정사를 복구ㆍ중수하지 못하고 근 60년 동안 있다가 경자년인 1661년에 영정사가 대대적으로 큰 佛事를 한 내용으로, 여러 殿閣을 증수하고, 불교의 중요한 경전인 圓覺經을 改版하고 본 碑를 건립한 것을 말하며, 이에 대한 증거는 "太虛 東溪 敬一 禪師님"이 지은 영정사 창건설화인 "密陽 載岳山 靈井寺 前後 創建記"에 기록되어 있으며, 영정사에서 개판한 圓覺經은 경상남도 중요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어 현재 김해시 대동면에 있는 普賢寺에 소장 중이며, 원각경의 刊記에 '경상도 密陽府 載岳山 靈井寺에서 改版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원각경의 표지와 刊記 부분 사진을 박순문 변호사가 구해서, 제(도재국)가 밀양광장의 본 게시판에 올려 놓았습니다. 표충사는 이 원각경을 되돌려받으면 좋겠으나, 어렵기 때문에 우선 이 원각경을 전부 사진을 찍어 경전(책)으로 표충사 유물관에 전시를 하면 좋겠습니다.
○유구한 세월의 비바람 등으로 돌꽃이 피고 풍화가 심하게 된 본 碑는 표충사의 어느 유물보다 중요한 碑이므로 더 이상의 풍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표충사 유물관 안으로 옮겨 봉안해야 합니다. 20여 년 전부터 손흥수와 도재국이 수십 차례 현장에서 보고 손가락 지문의 감개으로 만지면서 햇빛의 방향에 따라 글자가 가물가물하는 앞뒤 비문을 겨우 판독하여 도재국이 碑의 사진에 碑文을 적은 사진을 이 게시판에 올려놓고, 또 밀양향토사연구회에서 발행한 會誌인 '밀양이야기' 책에도 본 사진을 기고문 속에 올려놓았습니다. 경자갑보월비는 보물로 지정된 표충사삼층석탑과 載岳山영정사삼층석탑개수비와 대등한 가치를 갖는 표충사의 역사를 기록한 碑입니다. 하루빨리 표충사유물관 안으로 옮겨 봉안해야 합니ㅡ다. 손흥수와 도재국은 이러한 주장을 20여 년째 여러 차례 해 오고 있습니다.
초부(草夫)도 알고 있는데,
최고 학부의 박사님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지?
지식인들은 각성할 줄 모르면서 변명은 이제 그만 하였으면 한다.
표충사에서도 "옛 조사님들[祖師 = 스님의 조상님들]의 글"을 못 모셨는지?
[옛 조사님들께서 "표충사 삼층석탑(表忠寺 三層石塔)" 속에 들어 있었던 "재악산 영정사 삼층석탑 개수비"와
비석걸에 있었던 '경자갑 보월비(庚子甲補月碑)'에
산 이름을 "재악(載岳)"이라 새겨 놓았으며, 절의 명칭은 "영정사(靈井寺)"로 새겨 놓았다]
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재악산(載岳山) 영정수(靈井水)는 마르지 않고 흐르고 있다.
21) 죽림가람(竹林伽藍) >옛 영정사(靈井寺)로 지금의 표충사(表忠寺)
22) 구절장삼 >노승의 지팡이와 장삼
23) 파리답 >대 울타리 또는 울타리로 둘러친 답(畓 논)
24) 삼거리 >삼거 마을
25) 범도연 >범도 마을 뱃머리. 옛날 가내공업으로 '범도 한지'가 유명하였다.
26) 귀내 >원구천 마을, '龜川'을 일제가 '九川'으로 왜곡
27) 평리 >고례리 평리마을
28) 벼락덤 >평리마을 건너 강가에 있는 벼락 맞은 큰 바위
29) 풍류동 >평리 위 산간 마을
30) 바오달 > 바드리, 군(軍, 의병)이 진(陳) 친 자리. 옛날 성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임란시 송재(松齋) 박명복 용사가 창의하여 백마산성 고수장이 되어 창의 용사들과 분전하였으나, 왜구의 조총에 많은 창의 용사들이 희생되어 성안을 붉게 물들었다 하여 '단지 성'이라고도 한다. 임란 時에 박뫼에서 거주하였으며 지금도 후손들은 감물리 등지에서 살고 있다.
※오래 전에 손흥수와 도재국은 백마산성 유허를 답사하고, 또 수 년 전에는 임진왜란 때에 왜적과 싸운 松齋 朴命馥 의병장의 후손을 초빙하여 송재 의병장과 왜적에 전사한 그 아드님의 묘소를 참배하고, 또 그 아래의 이 문중의 '결성 할아버지로 불리는 결성현감을 역임한 일명 국풍 선조'가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묘비를 답사하고 참배를 하였습니다.
○★1255(1276). 임진왜란 2대 격전지 작원관 전투 및 백마산성 전투 의고(疑考)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2742?svc=cafeapp
31) 고야천 >고례리 앞 내. 고례 대추는 품질이 우수한 특산품이다.
32) 덕달 >고례리 덕달 마을, 지금은 수몰
33) 가림들 >덕달 마을에 있는 들 이름, 지금은 수몰
●★1948. '단장면 리동가'에 나오는 고야천 구간의 밀양댐 수몰전 사희동, 덕달, 농암대 풍경 및 수몰 망향고유제 등 사진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4147?svc=cafeapp
34) 새말띠기 >봄에 논두렁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해 새(新)로 말뚝을 박음
35) 사회동 >덕달리 건너 마을, 지금은 수몰, 댐 건설 때 1만 년, 2만 년前 주거지 및 유물 발견
36) 변자당 나팔고개 >사회동에서 농암동으로 가는 고개에 있는 밀양변씨 할매당, 지금부터 200년 전 밀양변씨가 세거(世居)했던 곳, 지금은 수몰
37) 농암청석 >농암대의 바위와 맑은 냇물 아래 깔린 반석
38) 오목골 >옛날 채지당(採芝堂) 박구원(朴龜元 1442-1530)의 사호정 정자가 있던 곳
39) 열두돌 >국전리 안에 있는 마을
40) 연화동 >감물리의 옛 이름, 감물리초등학교 뒤 原삼국시대 묘지 출토
※(주)도재국 : 감물저수지 제방에는 연꽃 문양을 한 돌비석을 세워놓았습니다
41) 용소 >감물리 마을 이름
42) 사지상봉 >사지와 상봉 마을
43) 상원암 >구미 뒷산 너머에 있는 마당바위
44) 버구삼동 >큰골(노상), 법산, 안포동 마을
45) 귀미사촌 >구미와 사촌 마을, 사촌 마을 앞 똥뫼에서 1,400~1,500년전 동양 최대의 제철 유적 발견, 유물은 국립 김해박물관에 소장
46) 양어금 >양쪽 사이 중간
47) 칠리수 >
○단장면 4 골에서 발원하는
⓵ 영정수(靈井水)-載嶽山 발원
⓶ 배내수(梨川水)- 載嶽山 배내쪽에서 발원
⓷ 국화수(菊花水)- 金烏山 북쪽 국화전에서 발원
⓸ 연화수(蓮花水)- 金烏山 남쪽 감물리에서 발원,
○산내면 3골에서 발원하는
⓹ 구연수(臼淵水)- 호박소 시례에서 발원
⓺ 구만수(九萬水)- 九萬山 구만동에서 발원
⓻ 발례수(發禮水)- 鼎角山 발례에서 발원
48) 귀호(龜湖)> 구미 앞들, 예전에는 호수였다.
49) 등잔소 >칠탄정과 구서원 마을 사이 강에 있는 등잔 모양같이 생긴 바위 밑의 소(沼)
50) 수십길 장송 >월연대(월연정) 주위에 옛날에 울창했던 송림, 지금은 참나무와 함께 풍치림으로 보호하고 있다.
51) 월연대 >월연정 정자, 월연(月淵) 이태(李台 1483-1536) 선생의 영대(詠臺)
52) 금시당 >금시당(今是堂) 이광진(李光軫 1513-1566) 선생의 정자
53) 용두소 >용두연 유원지
54) 정자선 >빛을 가린 놀이 배
55) 진홍단장 >짙게 화장한 여자, 화장
56) 응천(凝川) >
●(주)도재국 : 아래에 일부 수정 및 추가
○영남루 앞 강, 東北川水가 월연정 앞에서 합수하여,
※동북천수 : 동천수와 북천수
※동천수 : 동쪽에서 흘러오는 지금의 단장천과 동천의 강물
※북천수 : 북쪽에서 흘러오는 청도천과 동창천의 강물
○장선 마을 앞에서 선불 마을과 살래 마을 아래 금시당쪽으로 分流
○다시 용두소에서 만나 다시 영남루 앞과 가곡동 앞 용두교로 분류
○마암산과 예림교 사이에서 合水되므로 凝川이라 함
○남천강은 일본이 우리 지명을 왜곡한 지명입니다
○사행천(蛇行川)이 더욱 발달하면 응천(凝川)이 됩니다
○산성산(山城山, 일명 一字峰)에 올라 보면 암새들과 삼문동이 합해져 아라비아 숫자인 《8 字》로 보이는 것은 뱀이 또아리를 튼 것같은 사행천이 발달한 응천으로 확인됩니다
○암새들과 영남루 앞, 삼문동, 마암산, 예림교 구간을 응천(凝川)이라 하는데, 일제가 南川江으로 조작하였습니다
○옛날에는 밀양을 '응천군(凝川郡)'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즉, 밀양의 군호(郡號)가 '응천'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일제가 조작한 남천강을 없애고 '응천'으로 불러야 합니다
57) 영남루 >보물 제147호 뜰에는 석화, 강변 언덕엔 죽림, 아랑의 전설이 있는 '嶺南第一名樓'
58) 마암산 >사포리와 예림리 사이에 있는 말 모양의 바위산, 지금은 직강 공사로 없어졌음
※하천 직강 공사를 할 때 미리 향토사학자들의 자문을 받아 이런 소중한 자연문화유적이 멸실되지 않게 해야하는 아쉬움이 있음.
59) 아복산 >누에가 알을 실은 형상, 아복산(蛾伏山), 밀양여고 뒷산
※사람들이 衙北山이라 하나 원래 이름은 蛾伏山입니다
60) 무봉산 >봉(鳳)이 춤추는 형상이라 하여 무봉산(舞鳳山) 지금의 무봉사 뒷산
※사람들이 衙東山이라 하나 원래 이름은 무봉산입니다
61) 나리티 >해가 지는 고개 일현. 밀양에서 무안으로 넘어가는 고개 일명. 날티고개
62) 만풍 >해질녘에 소소히 부는 바람
●●●리동가 조사 후 느낌이 있어
서기 1993년도에 지명 연구차 사촌 남상규(지금은 고인이 되었음) 씨 댁을 방문하였는데
“자네 동네 이름이 옛날부터 龜尾가 맞네, 리동가에도 그렇게 있다”고 말씀하셨기에
가사를 아시면 한 번 적어 주세요 말씀을 드리니까
너무 길어서 모두 다 기억은 못하시고,
(일부만) 적어 주셔서 이때부터 리동가를 찾아, 남의 집 개도 많이 짖게 하고
일하시는 분들 시간을 너무 뺏어 죄송하였으며,
그렇게 해서 찾아낸 것을 밀양신문에 게재도 하고, 라디오 방송국에서도 대담하였다.
밀양향토사연구회 창간호에도 게재하여 공개하였으며
더 많은 고증을 받아서 이제 22년이 되는 갑오년에 정리하면서
다시 노래가사를 따라 답사를 하면서 유적지를 찾아 다녔다.
참, 그때 찾지 않았다면 이 '리동가'는 영구히 사라질 뻔 하였으며, 더욱 감개무량하여
제보하여 주신 12분 가운데 생존하신 분은 3분 우일남(여), 추복도(여), 배응태(남) 이며
아홉 분은 신선이 되어 가셨습니다.
다시 또 알게 된 것은
역사는 할아버지 손에서 자란 사람이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할아버지 등 뒤에서 할아버지가 하는 이야기를 10세 미만 손자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역사는 어릴 때 배워야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지금의 핵가족은 많은 역사를 잊게 할 것 같아서 기우 같은 걱정을 해 봅니다.
또 한 가지 사실은 어머니가 불렀던 가사를 듣고
돌아가신 어머니 묘전에 노래비를 세운 분(배응태)도 있어서
저 또한 고개 숙여 명복을 빌었습니다.
배응태 씨는 부모님 묘소에 '단장면 리동가' 묘비석을 만들어 긴 가사를 비(碑)에 전부 새겼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다 발굴하였다고 믿지 않으면서도 이제는 끝마치겠습니다.
2014년 11월 29일 地耕書庫에서 孫興銖
●2018년 봄에 재경밀양향우회 총회장인 서울 강남 소재 '더 리버사이드 호텔' 로비에서 '載嶽山 산명 복원 홍보 활동'을 하는 좌측으로부터 우측으로 정대재, 손흥수, 도재국
●재악산 산명 복원 범국민운동 추진계획서 표지
●2022년 5월에 표충사 입구 식당에서 모여 재악산 산명 복원을 위한 수단 등으로 '단장면 리동가'를 작시, 작곡, 동영상으로 만들 것을 계획하였습니다. 우측으로 부터 좌측으로 손흥수, 장우익, 도재국
※위의
●손흥수(81세, 단장면 구미 동편 마을 출신, 현재 구미 마을 거주)
●장우익(76세, 단장면 국전 양지 마을 출신, 현재 경기도 고양시 거주)
●정대재(75세, 단장면 시전 도감소 마을 출신, 현재 서울시 서초구 거주)
●도재국(71세, 부북면 사포 신당 마을 출신, 현재 밀양시 삼문동 거주)은
○모두 고향이 밀양이며,
○밀양중학교 동창생으로 선후배지간 입니다
////////
●●●'단장면 리동가'는 앞으로 전국에 울려 퍼질 것입니다
장우익 선생님에 의하면 앞으로 '단장면 리동가'는 서울의 공연장 등에서 여러 차례 수만 명의 관중과 시청자가 있는 가운데 연주회 등이 개최될 것이라 합니다.
//////
●●●2022.8.29 '단장면 리동가' 동영상 일부 변경 및 추가 :
저(도재국)의 요청으로 장우익 선생님이 동영상 제작자에게 의뢰하여 2022.8.29 기준하여 '단장면 리동가'의 동영상을 다음과 같이 일부 변경 또는 추가를 했습니다
동영상의 일부를 변경 및 추가한 사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 화면에 자연석으로 된 '載藥山(수미봉) 표지석'은 일제가 조작한 산명인데, 이렇게 사진을 편집하면 '천황산 세력' 등에 의해 수미봉(사진에 일부 載藥山으로 보이는 돌 표지석)을 載嶽山으로 오인하게 만듭니다
●수미봉에 2002년에 밀양시가 '載藥山 돌 표지석'을 세웠는데, 이 載藥山은 일제가 조작한 산명입니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잘 모르고, 또 도재국이 사실대로 말을 하면 세상 사람들은 저(도재국)의 주장을 잘 믿어려 하지 않으나 사실은 아래와 같으며, 명백한 증거가 《밀양광장》 등에 있습니다
●제1봉인 사자봉의 원래 이름인 載嶽山을 1839년 영정사(표충사) 주지 월파천유(月坡天有)가 載藥山으로 변경했는데, 이 載藥山 명칭 또한 오래 전인 1677년에 《鄭東溪》라는 정체가 불명한 인물이
《太虛 東溪 敬一 禪師》가 지은 《密陽 載岳山 靈井寺 前後 創建記》를 僞作한 것이 소위 《영정사 창건설화》로 전해지는 《載藥山 靈井寺 古蹟》입니다. 정동계와 '태허 동계 경일 선사'는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위와 같이 1839년에 월파천유는 정동계가 조작한 것을 바탕으로 1차로 조작한 載藥山을 또 2차로 1923년에 일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 實)'가 천황산으로 조작을 하므로써 표충사의 배산(配山)이 없어지자 위 조선총독이 제2봉인 수미봉(須彌峰)을 載藥山으로 조작하여 표충사의 배산으로 삼게 했습니다. 이것이 '현행 지도상의 載藥山'입니다. 다시 설명드리지만 이것이 일제가 조작한 載藥山입니다.
●즉, 영정사에 주석하셨던 '太虛 東溪 敬一 禪師님(以下 줄여서 太虛 禪師님)'이 지은 신라시대부터 전해지는 '靈井寺 創建說話가 기록된 '密陽 載岳山 靈井寺 前後 創建記(以下 줄여서 靈井寺 創建說話)'를 1677년에 정체가 불명한 정동계(鄭東溪)가 위 '太虛 禪師님'이 지은 靈井寺 創建說話를 인용, 載岳山을 載藥山으로 僞作한 것이 소위 지금까지 알려진 '載藥山 靈井寺 古蹟(無二 巨芙 큰스님이 서울 고서점에서 구입한 책)'이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아래 영문주소를 검색하시면 있습니다. 더 자세한 것은 본 게시판의 다른 글에 있습니다
○★1949. 영정사(靈井寺, 표충사의 前身) 창건설화의 위작(僞作)과 진실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4150?svc=cafeapp
여러분 !
이제 제2봉인 수미봉을 일제가 載藥山으로 조작한 산명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지요?
일제가 위와 같이 산명을 조작하므로써 이전에 월파천유가 제1봉(사자봉)을 載藥山이라 한 것도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1961년에 우리 정부(국립지리원, 지금은 국토지리정보원으로 명칭 변경)가 위와 같이 일제가 1923년에 조작한 제1봉인 사자봉의 천황산과 제2봉인 수미봉의 載藥山의 산명 유래도 정확하게 조사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대로 지명고시를 하므로써 제1봉 사자봉과 제2봉 수미봉은 왜색(倭色)의 산명으로 둔갑시킨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1998년에 울산의 향토사학자 이유수(李有壽)라는 사람이 느닷없이 제1봉인 사자봉이 天皇山이고 또 민족의 산명이라고 아무런 증거도 없이 엉터리로 주장을 함과 동시에, 제2봉인 수미봉을 載嶽山이라고 엉터리로 주장을 하여 세상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는데,
이유수 씨가 이렇게 주장한 근거가 되는 논문?이라는 명칭이 《天皇山日式名說考察, 천황산이 일본식 산명인가를 고찰한다, A4용지 12 페이지 분량》입니다
이유수의 이 논문은 객관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반 역사적, 반 민족적인 글로서 논문이라 말 할 수도 없는 이유수 씨가 자기의 주장을 적은 것에 불과하며, 이 글이 허구라는 것을 손흥수와 도재국이 지은 《울산 측이 주장하는 천황산 산명이 허구라는 것을 증명하는 글》을 명백한 증거로써 밀양광장에 A4용지 규격으로 312 페이지 분량으로 올려놓음과 동시에 《밀양향토사연구회》의 會誌인 《밀양이야기》 책에 기고했습니다.
●이유수가 지은 위의 글이 완벽하게 허구라는 또 하나의 증거는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칙령을 내려 우리 민족의 모든 문물과 제도를 집대성한 文獻備考를 증보하여 나라의 독립심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편찬한 大章典이 增補文獻備考 입니다.
이 문헌은 편찬 과정에 일제가 방해와 탄압으로 일부만 편찬되었는데도 그 방대함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총론과 각론에 이어, 각 道別로 편제된 지리지條에만도 조선팔도와 북방 만주와의 변방계와 해역의 경계선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리編의 경상도 밀양군條의 山川에는 현행 지도상의 천황산을 載嶽山으로 기록하고 있고, 天皇山은 아예 기록조차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수는 위 천황산일식명설고찰이라는 글에서 고종황제가 민족의 독립심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天王山의 格을 높혀 天皇山으로 했다 라고, 엉터리로 그의 위 글에 기록하므로써 그의 글이 허구라는 것을 만천하에 스스로 발표하게 된 꼴이었는 데도 불구하고
울산 측은 이 엉터리 논거를 천황산의 증거로 주장하고,
산명 변경 권한을 가진 국토지리정보원과 일부 국가지명위원들은 울산 측의 이 엉터리 논거를 수용하므로써 지금까지 천황산을 못 없애고, 본래의 산명인 載嶽山으로도 복원을 못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엉터리 근거와 엉터리 근거를 계속 옹호하는 천황산 세력은 끝내는 국민과 민족의 심판을 받을 것이며,
이에 부화뇌동하는 세력도 같은 꼴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증보문헌비고에 관한 글도 도재국이 밀양광장과 '밀양향토사연구회'에서 발행한 會誌인 '밀양이야기' 책에도 기고를 했습니다.
●손흥수와 도재국이 수십 년간 표충사의 배산 즉, 제1봉인 사자봉이 載嶽山이고, 현행 지도상의 載藥山이 수미봉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며,
제1봉인 사자봉이 載嶽山이라는 증거 80여 건을 세상에 밝히자 2017.3.12에 표충사가 일주문에 《載岳山 表忠寺》로 현판을 걸고, 또 2017.8.17에 산문에 《載嶽山門》이라는 현판을 걸었습니다
//////
위와 같이
2017년에 제1봉인 사자봉을 지칭하는 산명으로
표충사 산문에 《載嶽山門》과 일주문에 《載岳山 表忠寺》 현판을 단 후로
'천황산 세력' 등은
제1봉인 수미봉 즉, 載藥山을 載嶽山이라고 해괴한 주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천황산 세력'의 영향으로
또 일반 사람들은 無知로 인해서
등산하는 사람들 대부분과 표충사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표충사의 산문과 일주문의 현판을 보고서
또 정부가 1961년에 현행 지도상의 제2봉에 載藥山으로 지명을 고시한 것을 이유로 해서
사람들은 산문의 《載嶽山》과 일주문의 《載岳山》이 《현행 지도상의 載藥山》이라고 엉뚱하게 고의적으로 주장하거나 또 잘못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손흥수ㆍ도재국ㆍ정대재 3인이 나오는 첫 배경화면 사진 속의 《載藥山 돌 표지석》을 사자봉인 載嶽山으로 오인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특별한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도재국은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장우익 선생님에게 '단장면 리동가'의 앞 부분에 동영상 한 장면(네번째 장면)과 끌 부분에 두 장면(載嶽山 사자봉 정상 사진)을 추가해 주도록 요청했습니다
즉, 도재국은 2022.8.28에 장우익 선생님께 '단장면 리동가'의 동영상의 앞 부분에 한 장면과 맨 마지막에
載嶽山 정상인 사자봉 원경(遠景) 두 장면을 추가로 넣어달라 했습니다
고맙게도 장우익 선생님이 도재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단장면 리동가'에 재악산(載嶽山) 정상을 나타내는 사자봉(獅子峰) 모습 등을 찍은 3 장면의 동영상(사진)을 추가했습니다
●새로 추가한 네번째 동영상 화면 1장(아래) 입니다
○왼쪽에 載嶽山 산명복원운동을 하는 사람들(3인)과 오른쪽에 '載岳山 靈井寺 三層石塔 改修碑'
////////
●맨 마지막에 추가한 2장의 동영상(아래) 입니다
●재악산(載嶽山) 정상의 사자봉(獅子峰)
●재악산(載嶽山) 정상의 사자봉(獅子峰)
○表忠寺의 表忠祠(표충사당)의 처마 아래에서 올려다본 載嶽山 정상의 사자봉
○표충사 유물관 앞 마당에서 올려다 보아도 위와 같이 사자봉이 보입니다
○위 사자봉이 載嶽山 정상입니다
○산명과 산봉우리 명칭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載嶽山 따로, 사자봉 따로, 각각 다른 산명으로 보나, 載嶽山과 사자봉은 같은 위치에 있는 이명동산(異名同山)입니다
●재악산(載嶽山) 정상의 사자봉(獅子峰)
○재악산 정상에 사자(獅子)의 사진을 올려보았습니다. 사자봉은 사자를 상징합니다
////////
★1933. 재악산(載嶽山)이 기록된 '단장면 리동가' 악보(채록 지경 손흥수/작시 금천 장우익/작곡 성창경/가야금 병창 이리진)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4132?svc=cafeapp
////////
★1931. 장군님! 올해는 저 표지석을 깨부셔 버리십시오<1>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4129?svc=cafeapp
※누구든지 이것을 복사하여 여러 곳에 게재하여 전파시켜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1938. '단장면 리동가(丹場面 里洞歌)'로 재악산(載嶽山)을 홍보하고 있습니다.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4137?svc=cafeapp
○천황산 세력의 방해 공작으로 이곳 밀양이 잠잠함도 불구하고 지금 밀양광장에 올린 본 글의 조회수가 계속 올라가는 이유는 제(도재국)가 밀양광장의 본 글을 제(도재국) 페이스북과 블로그, 인터넷 웹 사이트(다른 사람의 블로그 등) 등에 계속 링크시키고, 또 8월 30일에 제가 전국적으로 카톡을 무려 840명에게 보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못 보내드린 분에게 계속 카톡을 보낼 것입니다
또 몇몇 지인들이 동영상이 첨부된 본 글을 여러 사람에게 전파시키기 때문입니다
2022.8.31(수) 06:00 현재 조회 숫자가 647명 입니다
////////////
★1941. 부끄럽지 않습니까?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4140?svc=cafeapp
////////
★1950. 매우 나쁜 [천황산 세력]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4152?svc=cafeapp
/////////
★1952. 載嶽山을 홍보하는 naver blog '밀양 재악산' 조회 숫자가 48,000을 넘었습니다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4154?svc=cafeapp
///////////
★1953. 국가지명위원 11명은 가슴에 손을 얹고 영정사에서 원각경을 개판한 佛事에 참여하신 여러 선사님께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4155?svc=cafeapp
★1960. 축하합니다. 또 축하합니다. 거듭 거듭 축하합니다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4162?svc=cafeapp
★1962. '단장면 리동가' 지명따라 주민들이 '서물(庶物)한 산(山)'에서 영남루까지 옛날 복장으로 노래하고 춤추고 일하는 체험 행사 재연을 제안합니다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4164?svc=cafeapp
첫댓글 장우익 선생님에 의하면 앞으로 '단장면 리동가'는
서울의 공연장에서 여러 차례 수만 명의 관중과 시청자가 있는 가운데 연주회 등이 개최될 것이라 합니다.
이렇게 하여 '단장면 리동가'가 전국에 울려퍼질 것이라 합니다
새벽부터 동영상과 글을 작성해서 후다닥 올려놓고
6시 30분경에 벌초하러 먼 길 갔다가
오후에 집에 와서
글을 다시 보니
이중으로 된 글도 있어 수정하고
동영상도 추가로 설명 글 올리고 나니
밤 9시가 넘었습니다
동영상에 일부 추가할 것이 있어
기술적으로 가능한지 여부를 장우익 선생님과 상의를 하겠습니다
본 글에는
동영상에 없는
●리동가의 가사에 있는 62건의 지명 등의 설명을 기록했고
●또 리동가 제작 경위도 기록했습니다
●또 30건의 동영상 설명서 까지 게재하여 리동가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되게 했습니다
《1》
법흥상원놀이 전수자 손기복 선생님의 카페에 올린 글을 아래와 같이 복사했습니다
////////
손기복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손흥수 선생님이 수십 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하여 채록한 '단장면 리동가'가 노래와 동영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리동가의 두 번째 동영상에 '법흥상원놀이'도 편집되었습니다
제 카페와 페이스북에 링크한 단장면 리동가를 여러 곳에 좀 전파시켜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손흥수 선생님과 장우익 선생님이 많은 노력을 하여 완성한 '단장면 리동가'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우리 밀양과 단장면 등의 역사ㆍ문화ㆍ지명 특히 載嶽山 산명 등이 수록되어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입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이렇게 소중한 국가문화재급 '단장면 리동가'가 제작, 발표되어도 밀양 사회에서는 잠잠하고, 언론에 보도조차도 없고, 특히 도재국이 운영하는 카페에 올려놓아도 보는 사람이 없는 것은 천황산 세력의 방해 공작으로 보입니다
다만, 카페 밀양광장에 조회수가 계속 증가하는 것은 제 페이스북에 밀양광장의 '단장면 리동가' 등의 글을 링크시켰기 때문입니다
《2》
또 도재국 페이스북에 올려놓아도 밀양 사람들은 잘 보지를 않는 것도 천황산 세력의 방해 공작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즉, 도재국이 올린 '단장면 리동가' 등도 밀양 사람들보다 전국의 타지의 사람들이 더 많이 보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단장면 리동가'를 노래로 만드는데 손흥수와 도재국이 관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관여했다면 아마도 언론에 대서특필했고, 또 밀양 사회에 엄청난 홍보 효과가 있을 것인데, 가슴 아프게도 밀양 사회는 이 '단장면 리동가'에 대해서 쥐죽은 듯이 고요합니다
그래서 손기복 선생님의 페이스북에 단장면 리동가를 올려드리오니 많이 전파시켜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밀양문화원 부설 밀양향토사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박순문 변호사는 《단장면 리동가》가 《밀양아리랑》에 버금가는 위대한 명곡이라 평하면서 행정기관과 여러 시민단체 등에서 밀양시민과 경남도민, 전 국민에게 널리 알렸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다음과 같이 산명을 수정합니다
●마암산(馬岩山)이 헌산(軒山) 되고 아복산(蛾伏山)이 진산(鎭山)이네
●무봉산(舞鳳山) 돋은 해가 나리티(日峴)에 해 기우니
56) 응천(凝川) >
○영남루 앞 강, 東北川水가 월연정 앞에서 합수하여,
○동북천수 : 동천수와 북천수
※동천수 : 동쪽에서 흘러오는 지금의 단장천과 동천의 강물
※북천수 : 북쪽에서 흘러오는 청도천과 동창천의 강물
○장선 마을 앞에서 선불 마을과 살래 마을 아래 금시당쪽으로 分流
○다시 용두소에서 만나 다시 영남루 앞과 가곡동 앞 용두교로 분류
○마암산과 예림교 사이에서 合水되므로 凝川이라 함
○남천강은 일본이 우리 지명을 왜곡한 지명입니다
○사행천이 더욱 발달하면 응천이 됩니다
○산성산(山城山, 일명 一字峰)에 올라 보면 암새들과 삼문동이 합해져 아라비아 숫자인 《8 字》로 보이는 것은 뱀이 또아리를 튼 것같은 사행천이 발달한 응천으로 확인됩니다
○암새들과 영남루 앞, 삼문동, 마암산, 예림교 구간을 응천(凝川)이라 하는데, 일제가 南川江으로 조작하였습니다
○옛날에는 밀양을 응천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즉, 밀양의 군호(郡號)가 응천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일제가 조작한 남천강을 없애고 '응천'으로 불러야 합니다
★1938. '단장면 리동가(丹場面 里洞歌)'로 재악산(載嶽山)을 홍보하고 있습니다.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4137?svc=cafeapp
★1938. '단장면 리동가(丹場面 里洞歌)'로 재악산(載嶽山)을 홍보하고 있습니다.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4137?svc=cafeapp
○천황산 세력의 방해 공작으로 이곳 밀양이 잠잠함도 불구하고 지금 밀양광장에 올린 본 글의 조회수가 계속 올라가는 이유는 제(도재국)가 밀양광장의 본 글을 제도재국) 페이스북과 블로그, 인터넷 웹 사이트(다른 사람의 블로그 등) 등에 계속 링크시키고, 또 8월 30일에 제가 전국적으로 카톡을 무려 840명에게 보냈기 때문입니다
또 몇몇 지인들이 동영상이 첨부된 본 글을 여러 사람에게 전파시키기 때문입니다
배를 모으다 = 배를 짓다 = 배를 만들다
東川은 얼음골에서 송백을 거쳐 금곡교 북쪽의 경주산 까지입니다
●●●버구삼동 : 안법리(안포+버구+노상)+법흥리(법산)
●(2) 법귀(法貴, 法區, 버구, 큰골, 大谷)
안포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안법초동학교를 중심으로 동과 남으로 길게 퍼져 있다. 안포(安圃), 법귀(法貴), 법산(法山)을 가리켜 옛날부터 버구삼동이라 하였는데 법귀 또는 법구는 버구에 대한 한자음의 표기로 여겨진다. 또 이 마을 동쪽 산기슭에 큰 골짜기가 있다 하여 큰골(大谷)이라고도 한다
○출처 : 密陽地名攷 단장면編 안법리條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NcdZ/4?svc=cafeapp
●법흥리 : (1) 법산(버구)
법흥리의 북쪽에 위치하며, 안법리의 노상 부락과 개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법산은 안포(安圃), 법귀(法貴)와 함께 흔히 버구 삼동이라고 하는데, 버구라는 지명은 버꾸(농악기)에서 온 것이라 하며 법귀(法貴) 또는 법구(法龜)로 한자음 표기를 했다. 실지로 옛날부터 버꾸놀음 건립(乞粒)이 유명하여 버구 농악의 평판이 높았다. 혹은 법산령에서 따온 지명이라고도 한다.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NcdZ/5?svc=cafeapp
●안법리 노상마을과 법흥리 법산마을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나리티(만풍에 해가 기울면서 우리내 인생도 저물어 간다)에서 노래가 끝이 납니다
천황산 세력들이 단장면 리동가를 발굴하고 노래를 만든 취지를 설명하는 글과 '단장면 리동가'를 세상에 전파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못 보도록, 또 세상에 못 퍼지도록
숨어서 카카오(daum)에 신고를 하는 등으로 자기들끼리 비상이 걸린 모양입니다
역사적인 사실을 적어서 세상에 알리고, 일제가 조작한 천황산을 없애자 하는데 반대하는 자들은 정녕코 우리 민족이 아닙니다
천황산 세력들은 우리나라에 살면서 왜놈들이 조작한 천황산을 지키기 위해 비굴하게 숨어서 망나니 짓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보신 모든 분은 아래를 복사하여 널리 널리 전파시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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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재악산(載嶽山) 산명(山名)이 기록된 '단장면 리동가(丹場面 里洞歌)' 노래(1절~3절) 및 동영상 완성 및 발표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4134?svc=cafeapp
안녕하십니까?
저희들은 경남 밀양에 살고있는 81세의 손흥수와 71세의 도재국입니다. 일제가 조작한 천황산(天皇山)을 없애고 원래의 재악산(載嶽山)을 복원하고, 밀양아리랑에 버금가는 민족문화가 생생하게 배어있는 '단장면 리동가(丹場面 里洞歌)'를 홍보하기 위해서 선생님에게 카톡을 보내드립니다. 지인들에게 본 카톡을 복사하여 많이 전달해 주시고, 많은 성원을 보내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아래와 같이 수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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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載岳山 靈井寺(表忠寺) 三層石塔 "이 "하드웨어적인 보물"이라면,
"載岳山 靈井寺(表忠寺) 三層石塔 改修碑"는 "소프트웨어적인 영정사(표충사)와 삼층석탑의 혼(魂)이 담긴 보물"로 보아야 합니다.
●●●《1》
●이유수가 지은 위의 글이 완벽하게 허구라는 또 하나의 증거는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칙령을 내려 우리 민족의 모든 문물과 제도를 집대성한 文獻備考를 증보하여 나라의 독립심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편찬한 大章典이 增補文獻備考 입니다. 이 문헌은 편찬 과정에 일제가 방해와 탄압으로 일부만 편찬되었는데도 그 방대함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총론과 각론에 이어, 각 道別로 편제된 지리지條에만도 조선팔도와 북방 만주와의 변방계와 해역의 경계선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리編의 경상도 밀양군條의 山川에는 현행 지도상의 천황산을 載嶽山으로 기록하고 있고, 天皇山은 아예 기록조차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수는 위 천황산일식명설고찰이라는 글에서 고종황제가 민족의 독립심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天王山의 格을 높혀 天皇山으로 했다 라고, 엉터리로 그의 위 글에 기록하므로써 그의 글이 허구라는 것을 만천하에 스스로 발표하게 된 꼴이었는 데도 불구하고 울산 측은 이 엉터리 논거를 천황산의 증거로 주장하고, 산명 변경 권한을 가진 국토지리정보원과 일부 국가지명위원들은
●●●《2》
울산 측은 이 엉터리 논거를 천황산의 증거로 주장하고, 산명 변경 권한을 가진 국토지리정보원과 일부 국가지명위원들은 울산 측의 이 엉터리 논거를 수용하므로써 지금까지 천황산을 못 없애고, 본래의 산명인 載嶽山으로도 복원을 못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엉터리 근거와 엉터리 근거를 계속 옹호하는 천황산 세력은 끝내는 국민과 민족의 심판을 받을 것이며, 이에 부화뇌동하는 세력도 같은 꼴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증보문헌비고에 관한 글도 도재국이 밀양광장과 '밀양향토사연구회'에서 발행한 會誌인 '밀양이야기' 책에도 기고를 했습니다.
●아래와 같이 추가합니다
30) 바오달 > 바드리, 군(軍, 의병)이 진(陳) 친 자리. 옛날 성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임란시 송재(松齋) 박명복 용사가 창의하여 백마산성 고수장이 되어 창의 용사들과 분전하였으나, 왜구의 조총에 많은 창의 용사들이 희생되어 성안을 붉게 물들었다 하여 '단지 성'이라고도 한다. 임란 時에 박뫼에서 거주하였으며 지금도 후손들은 감물리 등지에서 살고 있다.
※오래 전에 손흥수와 도재국은 백마산성 유허를 답사하고, 또 수 년 전에는 임진왜란 때에 왜적과 싸운 松齋 朴命馥 의병장의 후손을 초빙하여 송재 의병장과 왜적에 전사한 그 아드님의 묘소를 참배하고, 또 그 아래의 이 문중의 '결성 할아버지로 불리는 결성현감을 역임한 일명 국풍 선조'가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묘비를 답사하고 참배를 하였습니다.
○★1255(1276). 임진왜란 2대 격전지 작원관 전투 및 백마산성 전투 의고(疑考)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2742?svc=cafeapp
●●●본문에 다음과 같이 추가합니다(2022.9.7)
《1》
○庚子甲補月碑는 표충사에 있는 비문 중에 載岳山 산명이 새겨진 두번째 증거이며, 손흥수와 도재국이 이 碑의 뒷면에 《嶺左密陽載岳山靈井寺》이라는 문장을 최초로 발견하여 표충사의 한주스님에게 알려드렸습니다.
※'한주스님'이란 절의 살림을 도맡아 사는 요즘의 총무스님과 같은 역할을 하는 스님, 일종의 직위를 말합니다
《2》
○'嶺左密陽載岳山靈井寺'를 이해하기 쉽게 관련 지명 등을 첨가하여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鳥嶺에서 먼 남쪽을 보면, 洛東江 左岸에 密陽都護府가 있고, 밀양도호부 境域에 載岳山이 있고, 그 載岳山에 영정사(지금의 표충사)가 있다' 라는, 뜻입니다.
○옛날에는 경상도에서 漢城(서울, 조선시대에는 서울을 漢城이라 표기했음)으로 오갈려면 지금의 추풍령을 넘어다니지 않고, 영남대로를 따라 문경새재인 조령을 넘나들었습니다.
《3》
○또 동국여지승람, 범우고(梵宇攷),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여지도 등에도 "재악산(載岳山)"으로 명기되어 있습니다.
《4》
○표충사의 효봉대종사 사리탑 뒷편에는 庚子甲補月碑가 있습니다. 표충사의 여러 비 중에서 표충사의 사적을 기록한 매우 중요한 유일한 비입니다.
《5》
庚子甲補月碑에서 "甲"이란 임진왜란으로 兵火로 잿더미가 된 영정사를 복구ㆍ중수하지 못하고 근 60년 동안 있다가 경자년인 1661년에 영정사가 대대적으로 큰 佛事를 한 내용으로, 여러 전각을 증수하고, 불교의 중요한 경전인 圓覺經을 改版하고 본 碑를 건립한 것을 말하며, 이에 대한 증거는 "太虛 東溪 敬一 禪師님"이 지은 영정사 창건설화인 "密陽 載岳山 靈井寺 前後 創建記"에 기록되어 있으며, 영정사에서 개판한 圓覺經은 경상남도 중요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어 현재 김해시 대동면에 있는 普賢寺에 소장 중이며, 원각경의 刊記에 '경상도 密陽府 載嶽山 영정사에서 개판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원각경의 표지와 간기 부분 사진을 박순문 변호사가 구해서, 제(도재국)가 밀양광장의 본 게시판에 올려 놓았습니다.
《6》
표충사는 이 원각경을 되돌려받으면 좋겠으나, 어렵기 때문에 우선 이 원각경을 전부 사진을 찍어 경전(책)으로 표충사 유물관에 전시를 하면 좋겠습니다.
《7》
○유구한 세월의 비바람 등으로 돌꽃이 피고 풍화가 심하게 된 본 비는 표충사의 어느 유물보다 중요한 비이므로 더 이상의 풍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표충사 유물관 안으로 옮겨 봉안해야 합니다.
《8》
20여 년 전부터 손흥수와 도재국이 수십 차례 현장에서 보고 손가락 지문의 감각으로 만지면서 햇빛의 방향에 따라 글자가 가물가물하는 앞뒤 비문을 겨우 판독하여 도재국이 비의 사진에 비문을 적은 사진을 이 게시판에 올려놓고, 또 밀양향토사연구회에서 발행한 會誌인 밀양이야기 책에도 본 사진을 기고문 속에 올려놓았습니다.
《9》
경자갑보월비는 보물로 지정된 표충사삼층석탑과 재악산영정사삼층석탑개수비와 대등한 가치를 갖는 표충사의 역사를 기록한 비입니다. 하루빨리 표충사유물관 안으로 옮겨 봉안해야 합니다.
《10》
손흥수와 도재국은 이러한 주장을 20여 년째 여러 차례 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영정사 창건설화의 기록을 《載藥山 靈井寺 古蹟》이라 했으나, 이 설화는 1677년에 정체가 불명한 鄭東溪가 僞作한 것이며,
진실한 영정사 창건설화는 위의 정동계가 지었다는 장건설화보다 먼저 세상에 발표한"太虛 東溪 敬一 禪師님"이 지은 "密陽 載岳山 靈井寺 前後 創建記"임을 아셔야 합니다
정체가 불명한 정동계는 위 선사님이 지은 창건설화를 대부분 인용 위작하면서 선사님이 영정사의 배산을 載岳山이라 한 것을 載藥山으로 岳 字를 藥 字로 고쳐 僞作했습니다
●동계집의 載岳山記와 원각경 사진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3907?svc=cafeapp
이 노래는
단장면민 또는 밀양시민이 단체로 행사할 때도
배경음악으로 들려주어도 참 좋겠습니다
또 단장면의 각 마을회관에서 방송으로 주민들에게 수시로 들려주어도 좋겠습니다
●장우익 선생님 소개
○출신 : 밀양시 단장면 국전리(菊花田) 양지마을
○나이 : 2022년 현재 76세
○학력 :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전직 : KT 국장(정년퇴직)
○직업 : 시인(많은 詩를 作詩하여 페이스북 등을 통해 발표)
●2022.9.10 추가 :
●즉, 영정사에 주석하셨던 '太虛 東溪 敬一 禪師님(以下 줄여서 太虛 禪師님)'이 지은 신라시대부터 전해지는 '靈井寺 創建說話가 기록된 '密陽 載岳山 靈井寺 前後 創建記(以下 줄여서 靈井寺 創建說話)'를 1677년에 정체가 불명한 정동계(鄭東溪)가 위 '太虛 禪師님'이 지은 靈井寺 創建說話를 인용, 載岳山을 載藥山으로 僞作한 것이 소위 지금까지 알려진 載藥山 靈井寺 古蹟이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아래 영문주소를 검색하시면 있습니다. 더 자세한 것은 본 게시판의 다른 글에 있습니다
○★1949. 영정사(靈井寺, 표충사의 前身) 창건설화의 위작(僞作)과 진실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4150?svc=cafeapp
●2022.9.9 추가 :
●장우익 선생님 소개
○출신 : 밀양시 단장면 국전리(菊花田) 양지마을
○나이 : 2022년 현재 76세
○학력 :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전직 : KT 국장(정년퇴직)
○직업 : 시인(많은 詩를 作詩하여 페이스북 등을 통해 발표하고 있음)
○참고 : 현재 서울에서 작곡가, 가수, 노래 공연가, 노래 영상 편집가 등과 활발하게 교류중임.
●●●2022.9.11 새벽에 다음과 같이 추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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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재악산(載嶽山) 산명(山名)이 기록된 '단장면 리동가(丹場面 里洞歌)' 노래(1절~3절) 및 동영상 완성 발표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4134?svc=cafeapp
※[천황산 세력]이 [daum cafe 밀양광장]에 있는 수많은 글을 인터넷에 노출되는 것을 방해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밀양광장의 수많은 글]을 못보게 하므로, 위와 같이 영문주소(URL)를 [도재국의 페이스북 계정]에 링크(연결)시켜 세상 사람들이 본 글 등을 쉽게 볼 수 있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천황산 세력]은 일제 잔재를 없애는 일을 방해하는 매우 나쁜 세력입니다
●●●2022.9.11 아침에 아래 글을 추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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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매우 나쁜 [천황산 세력]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4152?svc=cafeapp
●●●2022.9.12 아래와 같이 내용을 추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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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장우익'을 검색하면 '장우익 詩人님'이 作詩한 수십 편의 詩가 노래로 작곡되고, 또 유명 가수에 의해 동영상으로 제작되어 방영되고 있습니다.
체칠리아음악 체널에서는 좋은 여러 분야의 좋은 음악을 많이 내보내고 있습니다
표충사는 '단장면 리동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셔야 합니다
즉, 표충사 경내에 '단장면 리동가'를 신도와 등산객, 사찰 탐방객에게 많이 들려주면 좋겠습니다
2015년 지명심의 때 載岳山의 존재를 부정했던 국가지명위원 11명 중에는 평소에 제가 존경하던 우리나라의 지명 권위자 梁○○도 포함되어 있어 저는 충격을 받았고, 2015.12.4 이후로는 제가 그분을 존경하는 마음을 완전히 접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