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 개척시대 '골드러시'라고 하면 멋진 이야기가 떠오른다. 금광에서 말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볼품없는 나귀였다. 금을 캐는 광부는 언제나 신실한 동반자로 당나귀를 선택했다. 왜 말이 아니고 나귀였을까? 말의 발굽은 보기는 좋았지만 구부러진 황야길, 미끄러운 강가의 돌들을 가로지를 수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광석 중 하나인 금가루와 금괴를 나른 짐승은 당나귀였다. 못생겼지만 신실하고 튼튼한 발을 가진 당나귀만 금을 나를 수 있었다. 오랫동안 당나귀들의 건장한 어깨 사이에 있는 검은 십자가 모양은 예수님을 겸손하게 섬겼던 수고에 대한 명예로운 보상이라고 여겨졌다. 그것은 영원한 '십자가 징표'였다. 서양 사회에서 이름없는 봉사자들을 나귀라고 부른 것 역시 아름다운 명예의 상징이다.
'박애, 명성' 등의 꽃말을 지닌 튤립은 원산지가 터키의 콘스탄티노플 (현 이스탄불)로 알려져 있다. 꽃산업의 최고봉을 자부하는 네덜란드에서는 17세기 초· 중반 튤립 광풍이 불었고, 주식시장의 핵이었다. 튤립을 소유하는 건 곧 교양과 부유함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꽃이 주식투자와 투기의 대상이 된 데서 튤립은 한때 '광기와 어리석음'의 상징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꽃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매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시장의 매물로 평가되면서 경제적 가치로 따질 때 매력은 뚝 떨어지고 만다.
사람의 얼굴은 튤립보다 아름답다. 화장이나 분장한 얼굴도 아름답지만, 인자함과 미소, 사랑이 풍기는 자연스러운 본래의 모습이 편하고 보기에 좋다. 성형한 얼굴이 더 예뻐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성형수술이 유행이 되어버린 현실은 정상적이라고 볼 순 없다. 꾸밈보다 진솔한 아름다움이 그리운 때다.
당신은 나귀와 같은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가는 무명의 봉사자입니까? 아니면 튤립과 같은 부요함과 그리스도인으로 치장된 예쁜 꽃입니까?
마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1.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나심을 이웃에게 알리며 코로나로 무너진 하나님의 교회와 신앙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2. 다음 주는 밤시간에 마산 창동 광장 성탄장식 있는 곳에서 성탄 찬양을 하려고 합니다. 근간 몸이 좀 좋지 않아 추워진 날씨 때문에 잘 감당할 수 있을지 염려가 됩니다.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제목 : 자기 부정과 십자가 본문 : 마16:24
모든 사람은 그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서 크게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철저하게 자기가 중심이 되는 사람들의 그룹입니다. 자신이 판단과 결정의 주체가 되는 사람들, 최대 관심사가 자기의 이익인 사람들이 이에 속합니다. 그들의 우상은 자신입니다. 둘째는 자기를 온전히 비우는 사람들의 그룹입니다. 나를 십자가에 못박고 주께서 삶의 중심이 되시게 하는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자기를 부정한다는 것은 삶의 중심이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시는 자리 바꿈이 진정한 의미의 자기 부정입니다. 1. 자기 중심적인 인간(렘17:9,10)
1)이기기주의에 빠짐 자기가 중심이 되면 필연코 이기주의에 빠지게 되며, 이것은 성도의 경건 생활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 요인이 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은 자신만 생각하고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이기주의의 위험성을 여러 실례들을 통하여 교훈하고 있습니다. 첫째, 아담과 하와의 이기주의는 인류를 죄에 빠뜨리는 불행을 초래했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이 부족해서 하나님이 금하신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이기적인 욕망이 그들로 계명을 어기게 했으며, 그 결과는 참으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둘째, 아간의 탐심으로 인한 이기주의는 동족에게 고통을 가져다 주었고, 자신은 물론 그 가족들까지도 멸망으로 몰고 갔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이기주의에 빠지면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2)주님의 자리가 없음 라오디게아 교회의 불행은 주님의 그 자리가 없었다는 점입니다(계3:28). 자기가 중심이 되는 사람들의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주님을 위한 자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이 위대했던 사람들, 하나님에 의해 큰 일에 쓰임을 받았던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언제든지 자신들의 삶 속에 주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오늘도 그분은 우리와 동행하기를 원하시지만 자기가 중심이 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계실 자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결국 주님과 사랑의 관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으며, 그분의 인도를 받지도 못합니다. 주님의 자리가 없은 인생들에게는 결코 축복의 삶이 주어질 수 없습니다.
2. 자기 부정의 중요성(갈2:19,20)
1)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심 바울이나 베드로를 위시하여 기독교 역사에 괄목할 만한 흔적을 남긴 대개의 사람들이 지닌 공통점은 주님이 그들의 중심에 계셔서 활동하셨다는 점입니다. '나'라는 것이 죽어야 이것이 가능합니다. 자아가 부정됨이 없이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0)고 말함으로써 자기 안에 주님이 사심을 증거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 나타난 수많은 증거와 표적들은 바울 안에서 주님이 역사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도 주님은 성도인 우리 각 사람의 중심에 계셔서 이와 같이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2)주님의 뜻이 이루어짐 인간의 자아는 주님의 뜻이 이뤄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외쳤던 바울은 하나님의 법을 섬기기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자신을 발견하고 안타까워 하였습니다. 성경은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가르칩니다(롬8:7). 자아가 죽지 않은 사람들, 즉 육신에 속한 사람들의 삶은 결코 경건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경건하다는 평가를 받는 일은 인위적으로 가능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인정을 받는 일이며, 이는 자아가 죽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아가 죽을 대 주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3. 제자의 필수 요건(고전11:1,2)
1)주님의 가르침을 받는 자 제자란 가르침을 받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주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자라야 제자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부르심을 받은 후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이전 것들을 모두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며 그 가르침에만 충실하고자 힘썼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들과 동일선상에 두려는 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제자가 아닙니다. 또한 자기를 부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와 같이 되고 맙니다.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그의 전부가 될 때에 비로소 참된 제자라 할 수 있습니다.
2)주님을 본받고 따라가는 자 최고의 신앙과 경건은 그리스도를 본받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 일은 성경과 신학에 관한 지식이 많은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믿음이 위대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주님을 본받고 따랐습니다. 내가 살아 있고서는 자기 부정은 불가능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었다고 고백했는데, 철저한 자기 부정을 통해서 이 일이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든지 자기를 쳐서 주님께 굴복시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으며, 그 결과 가장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 안에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들이 많아져야 교회가 제자리에 서고 사회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연륜이 오래된 사람도 초신자 못지 않게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이 바로 자기 부정입니다. 그래서 신앙에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성령안에서 경건 훈련을 강도 높게 받으면 자아가 죽게 되며,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 가능하게 됩니다.
결론 인간은 대부분 자기 중심적이어서 자아를 부정하는 일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가 경건 훈련을 집중적으로 해야 하는 까닭도 이것입니다.
|
첫댓글 오늘도 주안에서 지혜와 지식과 명철의 도구로 쓰임받게 하소서 샬롬
~감사합니다 ~샬롬~!!~ㅎㅎㅇㅇ
오늘도 주신 말씀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함께해 주신 예수 사랑 목사님, 평안 장로님, 만경강 목사님, 존재 목사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