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은 죄 중에서 가장 교묘합니다. 교만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셀제로 교만은 우리의 선행을 먹고 살기 때문에 아주 위험합니다. 우리들은 선심을 썼을 때 참 잘했다고 느끼 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을 도와주면서 우리는 스스로 등을 두드립니다. 우리는 심지어 교만을 다스리고 있다고 교만해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오늘의 성구에서 교만을 이기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는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고 했습니다. 글자대로 하면 [종의 앞 치마를 두르라]는 뜻입니다. 우리들의 태도는 봉사하기 원하는 마음 이어야 합니다.
제가 청년시절 구원을 받은 교회의 목사님의 생활에서 저는 그 예를 발견했습니다. 그분은 신도들과 얼마나 행동을 같이 하고 봉사했는지 그 동네 사람들은 그분이 목사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놀랄 정도였습니다. 집을 지을 일이 생기면 그분은 목수의 앞치마를 두르고 망치를 휘둘렀습니다. 페인트 할 일이 있으면 그분은 페인트 옷을 입고 붓을 손에 들었습니다. 세멘트 일이면 정화를 신고 흙손을 들었습니다. 흙을 날라야 하면 장갑 끼고 자기 몫을 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자랑할 일이 많았지만 그것을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신도들 섬기는 일에 너무 바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은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는 것이 어떤 뜻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겸손의 외투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잘 어울리는 옷은 없다. 당신도 겸손의 외투를 입고 늘 이웃을 섬기십니까?
베드로전서 5:5 다 서로 순복하고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1. 이제 움추렸던 만물이 소생하고 봄의 향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비젼속에 힘찬 전진을 이루워 나갈수 있도록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카페지기의 거리에서 찬양하며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이 하나님의 은혜속에 잘 이루어지고 지경을 넓혀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목 : 사랑과 겸손 본문 : 빌 2:8
겸손을 남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겸손이 현대 사회에서는 자신이 높아지려는 생각을 밑바탕에 두고 치밀하게 가식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겸손의 진정한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겸손을 예의상 한번 양보하거나 자신이 높아지려는 수단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겸손이 사랑의 본질로서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엄격하고 주의깊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과 함께 성도들은 왜 겸손해야만 하며 어떤 겸손을 추구해야 하는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딤전1:15)
1) 자신의 죄인 됨을 알아야 함 우리는 죄인들입니다. 아니 우리가 죄인이라고 시인하기에 앞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는 자기들이 죄인이라고 인식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음에도 지극히 당연시하고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인임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근신하고 겸손하게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베드로는 주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라고 했으며, 세라는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도 "조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고 하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2) 자기를 내세우지 않음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미치는 영향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자신의 일생을 한눈에 볼 수 있다면 행동을 조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를 자기 P.R 시대라고 해서 흔히 좋은 것은 과대 포장하고 나쁜 점은 축소해서 말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하게 자기 자신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함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을뿐더러 자기에게 맡겨진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죄인 됨과 부족함을 알기에 가식적인 겸손을 추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섬기는 자의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눅22:27)
1) 주님께서 섬김의 모습을 보이심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남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남을 섬기는 자세의 어려움이 있으며 그러기에 섬김은 누구나 할 수 있는것이지만 누구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혹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섬김의 모습을 취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유익을 통한 섬김이 진정한 섬김의 모습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섬김은 누구나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섬김은 자신을 온전하게 낮추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섬김을 통하여 유익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섬김이며 참된 겸손의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섬김은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온전하게 낮추셔서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으며(참조,마20-28)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어 줌으로써 우리에게 섬김의 도리를 보여 주셨습니다.(참조,요14:113)
2)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심 세상의 집권자 중에는 자신의 임의대로 권력을 남용하여 빈축을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여 무엇인가를 성취하려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20:17)고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으뜸이 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남의 종이 되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하지만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 결심을 굳게 하고서 노력하면 가능할 것입니다. 문제는 진정한 섬김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생각하는 대로 죽음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입니다.(참조,빌2:8) 죽음까지도 감수하면서 우리를 사랑한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겸손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3.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는 것입니다(고전13:4,5)
1) 남의 유익을 구함 자신의 유익을 의식하지 않고서 겸손한 모습으로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게다가 남을 위하여 자신의 권리를 자진해서 포기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날과 같이 이기주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남의 유익을 구하는 모습은 우둔한 행위로 비웃음을 사거나 의혹의 눈길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웃음, 질시, 의혹의 눈길도 진정한 겸손 안에서 남의 유익을 구한다면 그러한 것은 잠시뿐일 것입니다. 수치와 고난은 그 사람의 겸손이 진정한가 아닌가를 판가름하는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겸손은 그러한 수치나 수욕을 극복해 나갑니다.
2) 수고하는 사랑을 행함 바울은 사랑의 본질에 관하여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7)고 했습니다. 친구든 적이든 믿음을 가졌든 안 가졌든 간에 주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믿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수고하는 사랑을 하여야 합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수고하는 사랑을 행할 때 진정한 겸손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겸손을 가지고 있습니까? 남을 위하여 수고하는 사랑을 행하십시오. 주님은 이처럼 실천하는 겸손을 기쁘게 여기십니다.
결론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18:12)고 했습니다. 사랑의 본질로서 진정한 겸손은 그 자체만으로 끝나고 유익이 없다고 할지라도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어여삐 보시는 겸손의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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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도 주안에서 성령의 도움으로 주님의 영광과 복음과 겸손의 도구로 쓰임받게 하소서 샬롬
~감사합니다 ~샬롬~!!~~ㅎㅎㅇㅇ
감사합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오늘도 함께들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