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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20일 목요일
[(녹)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집회서의 저자는,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으로 가득 차 살아생전에 기적들을 일으켰고, 죽어서도 그의 업적은 놀라웠다고 전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며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복음).
제1독서
<엘리야가 소용돌이에 휩싸일 때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48,1-14
1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2 엘리야는 그들에게 굶주림을 불러들였고
자신의 열정으로 그들의 수를 감소시켰다.
3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는 하늘을 닫아 버리고 세 번씩이나 불을 내려보냈다.
4 엘리야여, 당신은 놀라운 일들로 얼마나 큰 영광을 받았습니까?
누가 당신처럼 자랑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5 당신은 죽은 자를 죽음에서 일으키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말씀에 따라 그를 저승에서 건져 냈습니다.
6 당신은 여러 임금들을 멸망으로 몰아넣고
명사들도 침상에서 멸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7 당신은 시나이 산에서 꾸지람을 듣고 호렙 산에서 징벌의 판결을 들었습니다.
8 당신은 임금들에게 기름을 부어 복수하게 하고
예언자들에게도 기름을 부어 당신의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9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
10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1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
12 엘리야가 소용돌이에 휩싸일 때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엘리사는 일생 동안 어떤 통치자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13 그에게는 어떤 일도 어렵지 않았으며 잠든 후에도 그의 주검은 예언을 하였다.
14 살아생전에 엘리사는 기적들을 일으켰고 죽어서도 그의 업적은 놀라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8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12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14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청원할 수 있는지 고민하게 합니다. 이미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고, 우리가 굳이 청하지 않아도 그것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한 분께 청원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청원 기도를 드릴 수 있고, 또 드려야 합니다. 청원 기도는 나와 하느님의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하여 주기 때문입니다. 모든 기도의 목적은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며, 청원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나의 청원에 대하여 응답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분과 나는 이 기도로써 어떤 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응답받지 못하는 청원 기도는 없습니다.
청원 기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돌아봅니다. 우리는 청원 기도로 하느님께 바람을 아룁니다. 그러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바람을 들으시고, 당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하십니다. 무엇인가를 간절히 청하다 보면, 마음 한구석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다른 것들이 천천히 떠오릅니다. 그것과 함께 나의 청원이 정말 옳고 합당한지 돌아보게 되고, 내가 청하여야 할 올바른 것을 알게 됩니다. 청원 기도 안에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나의 뜻을 고집하는 기도에서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도로 서서히 바뀌게 됩니다. 나의 뜻을 포기하고 그분의 뜻을 받아들일 때 은은하게 솟아오르는 기쁨도 함께 느낍니다. 주님의 청원에 내가 응답하면서 주님 사업의 협력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청원 기도에 대한 하느님 응답의 한 형태입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기도할 때도 너무 지향에 목숨 걸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이들과 재미있게 살 때의 일입니다. 자유롭게 외출 외박을 못 나가던 아이들이었는데, 주간 생활 태도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아이들은 신부 수사들과 동반 외출이 가능했습니다.
저는 주일 점심 식사를 끝내고 나면 습관처럼 가벼운 옷차림으로 아이들 서너 명과 길을 나서곤 했습니다. 너무 많이 데려가면 집단 이탈 가능성이 많은지라, 딱 서너 명만 데리고 나갔습니다.
외출 나가기 전날부터 제 머릿속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아이들을 어떻게 기쁘게 해줄 것인가?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장소는 어딜까? 영화관? 피시방? 오락실? 노래방? 간식으로는 뭘 사줄까? 피자? 통닭? 아이스크림?
대여섯 시간 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머릿속에 좋은 추억의 사진 한 장 남겨줄 수 있을까? 그렇게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아마 세상의 모든 부모들도 비슷한 마음이겠지요.0
보십시오. 세상 부족한 저희 같은 사람도 누군가에게 좋을 것을 주기 위해 그토록 애를 쓰는데, 선하신 주님께서는 오죽 하시겠습니까? 틈만 나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시고, 백방으로 노력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따라서 너무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 하고 졸라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어련히 생각하고 계시고, 최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시는데, 너무 걱정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저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텐데, 그분의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굳게 믿으며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니, 그 어떤 것도 좋습니다.’ 하면서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기도할 때도 너무 지향에 목숨 걸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 어련히 알아서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니, ‘당신 뜻에 맡깁니다!’하고 외치며 남은 하루하루를 기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저는 요즘 묵주기도 때 특별한 지향을 두지 않고 바치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시간에, 좋으신 어머니 성모님과 함께 좋으신 아들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의 여정을 묵상하는 마음으로 바칩니다. 좋은 시간, 좋은 분들과 산책하는 마음으로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의무감에서 숙제처럼 바치지 않으니, 그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인지 모릅니다.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께서 여러분 자신을 바라보게 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아주 아름다운 기도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주님의 기도': 나를 하늘로 오르게 하는 엘리야의 불마차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십니다. 알려주시며 이방인들처럼 자기가 원하는 것을 계속 알릴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다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 안에서 그분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을 알아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기도에 다 들어있습니다.
오늘 독서도 기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은 성령을 의미하고 성령은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엘리야가 성령의 불 회오리바람에 들어 올려져 불 마차를 타고 하늘로 오른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 기도는 우리를 이 지상에서 하늘에 오르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땅에 붙들어 매고 심지어 지하까지 끌어내리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나의 뜻입니다. 저와 함께 지내던 루카 보좌 신부가 자신이 처음 가위에 눌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가위에 눌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던 경험을 말하는데 자신은 그런 경험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가위에 눌릴 수 있을까를 물었습니다.
친구들은 잠들기 전에 가위에 눌렸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잠자면 가위에 눌린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바로 돌아와서 그날 가위에 눌렸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잤더니 진짜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숨도 쉴 수가 없었고 당연히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희미한 두 사람이 옆에서 말하는 게 들렸습니다.
“쟤, 지금 안 자!” 두려운 나머지 발버둥을 쳤고 간신히 깨어났는데 자신이 자기 목을 조르고 있었었습니다. 사실 가위에 눌리고 싶다는 마음은 친구들과 하나가 되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세상 것과 하나가 되고 싶은 자아의 욕구는 정말 땅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놓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과 하나가 되고 갚은 운명을 맞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내가 사고 나서 죽은 곳에서 자신도 뛰어내려 죽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여 같은 운명으로 간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 희망을 하늘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썩어 없어질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하로 내려가지 않고 하늘로 오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를 이 지상에 집착하게 만드는 자기 뜻을 죽여야 합니다. 그 뜻을 죽이는 게 불입니다. 나무에 불이 붙이면 그 안의 진액이 먼저 빠져나오듯 성령이 오시면 자아의 욕구가 죽습니다.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자아를 상징하는 소를 살라버리고 그 밑의 물을 말려버린 것과 같습니다. 기도는 그렇게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합니다.
그런데 그 불 회오리바람 가운데 불마차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주님의 기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기도의 정수입니다. 그 안에 하느님 자녀가 가져야 하는 하느님 뜻이 다 들어있습니다. 내가 이 지상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일곱 개만 원하게 될 때 우리는 천사의 도움으로 하늘에 오르게 됩니다. 엘리야가 불 회오리바람과 불 마차를 타고 하늘로 오른 방법이 이것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기도의 뜻을 음미하며 바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그 뜻에 하나로 젖어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마차라고 생각하고 주님의 기도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저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고 호흡을 50번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주님의 기도 한 번 하는 데 한 시간 걸립니다. 다른 생각이 끼어들지 않게 하려고 호흡에 숫자를 세면 더 좋습니다. 숨을 끝까지 다 내쉬면 코로 저절로 공기가 배에 차게 됩니다.
이렇게 세포 하나하나에 산소가 들어가듯이 내가 가벼워지고 하늘로 올라가 천국의 평화를 느끼게 됩니다. 몇 번 바치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뜻이 나의 뜻을 불사르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나머지는 덤으로 다 받게 될 것입니다.
왜 불마차가 불일까? 불은 태우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더 이상 태울 게 없다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을 태우는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신이 사랑에 의해 태워질 때 하늘로 오를 수 있다. 그런데 무엇으로 태울까? 바로 하늘로 끌어 올리려는 이의 ‘뜻’이다. 그 뜻이 나의 뜻을 죽일 때 하늘로 오를 수 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당신 뜻을 죽이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했을 때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왔음을 잊지 맙시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그때에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나 그분의 기운을 북돋아 드렸다.”(루카 22,42-43)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엎친 데 덮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난한 흥부 네는 자식도 많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아이들까지 많으니 흥부 네는 열심히 일해도 겨우 먹고 살기 바쁘기 마련입니다. 은행에서 대출받아 작은 가게를 시작했는데, 토네이도가 발생해서 건물이 부서졌습니다. 누구한테 하소연 할 수도 없고, 한숨만 나오기 마련입니다. 제게도 큰 행사가 겹쳐서 있었습니다. 본당 견진성사와 중남부 꾸르실료 교육이 겹쳤습니다. 둘 다 일정을 제가 잡지 않았습니다. 견진성사도 작년에 이미 날이 정해졌습니다. 꾸르실료 교육도 작년에 이미 날이 정해졌습니다. 제가 댈러스로 오면서 꾸르실료 지도신부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꾸르실료 교육을 맡아야 했기에 일정이 겹친 겁니다. 견진성사는 주교님이 오시고, 본당의 큰 행사이니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꾸르실료도 지도신부이기에 당연히 교육에 함께 해야 합니다. 주일 새벽에 꾸르실료 미사를 마치고, 본당으로 와서 견진성사 미사에 함께 했습니다. 주교님이 떠나시고, 다시 꾸르실료 마침예식을 위해 갔습니다. 견진성사도, 꾸르실료 교육도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견진성사 미사를 하면서 주교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겸손하고 검소하시고 소탈 하신 모습입니다. 작은 차를 손수 운전하고 오셨습니다. 장백의도 직접 입으셨고, 제의는 본당 것을 빌려 입었습니다. 공지사항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교님이 오시니, 제가 순위에서 밀리네요?” 교우들은 웃었습니다. 주교님은 한국말을 이해 못하시니 나중에 교우들이 왜 웃었는지 궁금해 하였습니다. 주교님에게 본당 사제와 주교는 순위와 권위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주교와 본당 사제는 직책이 다를 뿐이지 권위가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주교님은 점심 도시락을 드시고, 남은 건 가져갔습니다. 저녁에 드신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주교님의 모습이었습니다. 부주임 신부님에게도 자상하게 이것저것 물어보았습니다. 30개월 임기를 연장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건 저와 부주임 신부님이 속한 서울대교구의 교구장께 먼저 청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들에게도 관심을 보여 주시니 감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쌓아야 할 재물은 권위와 직책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늘에 쌓아야 할 재물은 겸손과 단순함입니다. 이웃에 대한 따뜻한 마음과 나눔입니다. 그것은 누가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꾸르실료는 교육 특성상 내용을 미리 알려주지 않습니다. 꾸르실료 교육을 마친 사람을 꾸르실리스타라고 합니다. 3박4일 교육을 마친 형제님이 소감을 발표하면서 ‘꾸르실리스타와 바리스타’가 비슷하다고 하였습니다. 바리스타는 일정정도 교육을 받은 후에, 커피의 맛과 풍미를 내서 모르는 사람에게 전해 줍니다. 명동에 ‘하랑’이라는 커피 매장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분은 가톨릭 바리스타 협회를 통해서 교육을 받은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자원봉사로 커피 매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봉사와 노력은 하늘에 재물로 쌓일 것입니다. 그분들의 봉사와 노력도 누가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꾸르실리스타도 3박 4일 교육을 받은 후에 그리스도의 맛과 풍비를 이웃에게 전하는 거라고 합니다. 꾸리실리스타는 기도, 활동, 공부의 삼박자를 고루 갖추어서 복음을 전하는 거라고 합니다. 형제님은 꾸르실료 교육의 목적을 잘 이해하였습니다. 그렇게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하늘에 재물을 쌓은 것입니다. 저는 32년 꾸르실리스타로 지내고 있지만 그렇게 멋지게 설명하는 분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스타는 별이라는 뜻도 있고, 전문가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번 3박4일의 교육에 15명의 봉사자가 함께 했습니다. 그분들 또한 하늘에 재물을 쌓았습니다. 그분들이 쌓은 재물은 누가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늘에 쌓을 재산은 무엇일까요? 하늘에서 가장 귀한 대접을 받는 재물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금, 다이아몬드, 고가의 미술품, 땅, 현금’은 아닐 것입니다. 하늘에서 귀한 대접을 받는 재물, 결코 남들이 가져갈 수 없는 재물, 사라지지 않은 재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따뜻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의 결실인 희생, 봉사, 나눔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실천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하지 않은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 하늘나라에 우리의 재물을 쌓아 보시는 것은 어떠하신지요?
오늘의 성인
성 실베리오 (Silverius)
활동년도 : +537/538년
신분 : 교황,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실베리우스, 씰베리오, 씰베리우스
교황 성 호르미스다(Hormisdas, 8월 6일)의 아들이었던 성 실베리우스(또는 실베리오)는 이탈리아 중부 프로시노네(Frosinone)에서 태어나 로마(Roma)의 부제가 되었으며, 교황 성 아가피투스 1세(Agapitus I, 4월 22일)의 서거 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정치문제에 휘말려 곤욕을 치렀고, 소아시아 리키아(Lycia)의 파타라로 납치된 사실도 있었다. 그 후 그는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도움으로 석방되었으나, 반대파에 의하여 재차 납치되어 나폴리(Napoli)의 팔마롤라 섬에 갇혀 있던 중 기아로 숨졌다. 일반적으로 유배지에서 사망한 교황들의 유해가 로마로 이송된 것과는 달리 성 실베리우스 교황의 유해는 유배지에 그대로 남아 있다. 교황의 무덤은 이후 순례 장소가 되어 많은 기적들과 치유가 이루어졌으며, 11세기부터는 칼케돈 공의회의 정통 신앙을 옹호한 순교자로 공경을 받았다.
성녀 플로렌시나 (Florentina)
활동년도 : +636년
신분 : 수녀원장
지역
같은 이름 : 플로렌띠나, 플로렌씨나, 플로렌티나
카르타고(Carthago)에 정착하여 살다가 549년경 서고트족(Visigoths)의 침입으로 도시가 파괴되자 세비야(Sevilla)로 이주한 에스파냐계 로마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녀 플로렌티나(또는 플로렌시나)는 후에 성인이 된 에스파냐의 성 이시도루스(Isidorus, 4월 4일), 성 레안데르(Leander, 2월 27일) 그리고 성 풀겐티우스(Fulgentius, 1월 16일)와 형제지간이다. 그녀는 카르타고에서 출생해서 세비야에 정착했으며, 수녀원을 설립하고 원장이 되었다.
복녀 미첼리나 (Michelina)
신분 : 과부
활동지역 : 페자로(Pesaro)
활동연도 : +1356년
같은이름 : 미켈리나
부유하고 이름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미켈리나 메뗄리는 12세 때에 리미니의 말라떼스따 가문의 아들과 결혼하여 행복한 생활을 하였지만 그 남편과 사별하여 과부가 되었다.
그녀에게는 어린 아들 하나가 있었지만 그것으로 자신의 마음이 안정될 수는 없었다.
그때 미켈리나는 프란치스꼬 재속 3회원이 되었다.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기도로 보내고, 애긍으로 생활하였으며, 밤이면 은혜로운 사람들이 베푸는 곳에서 쉬곤하였다.
그러던 중에 아들을 잃게 됨으로써, 그녀는 이 세상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었다.
그녀는 철저한 고행과 기도생활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나병환자들을 돕거나 온갖 자선활동으로 지친 몸으로 주님과 하나되는 행복감을 맛보았다.
임종이 가까와 올 즈음에 그녀는 로마 순례를 했는데, 이즈음에 그녀는 56세의 일기로 운명했는데, 전통적으로 그녀의 축일이 오면 램프불을 밝힌다고 한다.
그녀가 문전걸식할 때에는 아무도 불을 밝혀주지 않았던 것이 그 이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