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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24일 월요일
[(백)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하여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신 요한은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라며 뒤에 오실 구원자 예수님을 알립니다.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요한을 기리며 미사에 참여합시다.
말씀의 초대
이사야는, 주님께서 그를 모태에서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그의 이름을 지어 주셨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다고 한다(제2독서).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고 열린 할례식에서 아기 아버지 즈카르야가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겠다고 하는 순간, 즈카르야는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한다(복음).
제1독서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9,1-6
1 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2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3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4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5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6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3,22-26
그 무렵 바오로가 말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조상들에게 22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내가 이사이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나의 뜻을 모두 실천할 것이다.’ 하고
증언해 주셨습니다.
23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
24 이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25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6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7-66.80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교회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기념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겸손은 우리에게 특별한 본보기가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이었지만(마태 11,11 참조),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마르 1,7 참조).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사람임을 잊지 않았습니다(마르 1,3 참조). 예수님께서 세례 받기를 청하시자, 자신이 감히 할 수 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그분 뜻에 순종하며 세례를 베풀었습니다(마태 3,14-15 참조). 그분께서는 커지셔야 하고, 자기는 작아져야 함을 아는 겸손한 사람이었고(요한 3,30 참조), 마침내 자신의 말처럼 작아져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마태 14,3-12 참조).
진정한 겸손은 나약하고 불리한 처지에 놓여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으로 나약하고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참된 겸손을 알지 못합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주님을 등에 업고 자기를 내세웁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맡은 봉사 직무가 곧 자신의 권위가 되고, 하느님 말씀에 대한 지식과 교회 생활에 대한 경험들로 자신을 위한 봉사를 하게 됩니다.
그 반면 참된 겸손은 내적으로 강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덕입니다. 하느님께 의탁하면서 얻게 되는 내적인 힘은 자유롭게 자신을 낮출 수 있습니다. 주님께 의탁함을 힘으로 삼은 겸손한 사람은 주님께 첫자리를 내드리고 자신은 그 뒤에 설 줄 압니다.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다른 이를 위하여 드러나지 않는 봉사를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겸손을 보여 준 세례자 요한의 전구를 통하여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면 좋겠습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예언자로서의 삶, 어쩔 수 없이 고독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통상 가톨릭교회 안에서 성인(聖人)들의 축일은 하나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분들께서 돌아가신 날, 다시 말해서 천상 탄일을 축일로 정해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천상 탄일이 아니라, 지상에서의 탄생 축일을 경축합니다. 그에게는 축일이 두 개입니다. 탄생 대축일과 수난 기념일. 그만큼 세례자 요한은 등급이 높은 성인인 것입니다. 그를 성인 중에서 대 성인으로 인정하며 각별한 공경과 예우를 갖추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30년 세월을 나자렛에서 조용히 지내셨듯이, 세례자 요한 역시 오랜 세월 광야에 머물면서 침묵과 기도 속에 내공을 닦았습니다.
마침내 그가 세상 밖으로 나와서 외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환호했고, 그는 일약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요르단 강으로 그를 찾아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자 헤로데 조차 두려워할 정도였습니다.
그로 인해 세상 사람들이 ‘혹시 이분이 왕이 아닐까?’ 기대했지만, 그럴 때 마다 세례자 요한은 정확하고 단호하게 선을 긋습니다.
“나는 왕이 아니오.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오. 나는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 같은 존재, 한 줄기 연기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 교회가 세례자 요한을 성인 중의 성인으로 추앙하는 이유는 그가 지녔던 탁월한 겸손의 덕 때문입니다. 이토록 겸손한 세례자 요한의 신원의식은 뒤에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런 무리 없이 연착륙하실 수 있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사제 수도자들, 그리스도인들 역시 때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너희는 누구냐?”라고 질문을 던질 때, 솔직하게 소개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 티끌 같은 존재입니다. 주님 자비를 힘입지 않으면 단 한 순간도 홀로 설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주님 크신 사랑으로 인해 오늘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저는 제 삶을 통해 주님을 증거합니다. 저는 이 세상 안에 주님께서 현존하심을 외치는 광야의 소리일 뿐입니다.”
예언자로서의 삶, 어쩔 수 없이 고독합니다. 원치도 않았는데,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예언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사명을 주시는데, 때로 죽기보다 힘든 숙제입니다.
완전히 귀먹은 백성들을 향해, 이미 물 건너간 사람들을 향해, 다시 돌아오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해야만 합니다. 거듭되는 외침에도 사람들의 몰이해, 그로 인한 박해는 계속됩니다. 결국 외로운 투쟁을 거듭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죽음은 절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헌신과 희생의 결과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이 땅 위에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인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란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데, 예언자들이 흘린 피는 소중한 밑거름이 된 것입니다.
한 존재가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 소멸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 일이 이제 우리에게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세례자 요한의 삶과 죽음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 안에 생명의 불꽃을 간직한 사람들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비록 육체는 이 세상에서 자취가 사라지지만 영혼은 더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비혼주의: 행복할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 탄생의 특이한 점은 세례자 요한이 태어나기 전부터 하느님 뜻에 봉헌된 나지르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의 이름을 천사가 일러준 대로 요한이라고 지으며 처음에 의심했던 즈카르야까지도 아들의 사명의 협조자가 됩니다. 그러자 그동안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였다가 입이 풀려 주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 뜻을 따르는 이를 긍정하고 도와주기만 해도 그 사람의 수준이 하느님과 친밀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즈카르야가 귀와 입이 풀렸다는 말은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전에는 아무리 외쳐도 하느님께 목소리가 닿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자격을 ‘의로움’이라고 합니다. 이 의로움은 양심의 자유에서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나뭇잎으로 몸을 가렸으나 주님 앞에 나설 수 없었습니다. 의로움은 오로지 하느님 자비에서 옵니다. 그리스도를 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입고 의로워진 이는 그 받은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신도 자녀를 그렇게 하느님 자녀로 만들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양심은 ‘정의’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유튜브 ‘오리를 엄마로 착각한 길잃은 강아지’는 이를 잘 보여줍니다. 어미를 잃은 강아지는 착해 보이는 오리에게 다가갑니다. 오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강아지를 태우고 돌아다닙니다. 강아지가 안정됩니다. 강아지는 오리를 어미처럼 따릅니다. 시간이 흘러 강아지는 꽤 자랐습니다. 오리는 새끼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 오리는 새끼들을 잘 돌보지 못합니다. 그러자 개가 대신 새끼들을 돌봐줍니다. 받은 게 있으니 주는 것입니다.
모기들은 알을 낳아주는 데까지만 받았습니다. 그래서 알을 낳고 그만입니다. 개는 두 달 이상 어미가 돌봐줍니다. 그렇게 받은 만큼만 해 줍니다. 인간은 20년 동안 그렇게 합니다. 그래야 양심의 자유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느님 자녀가 되었다면 언제 양심의 자유를 누릴까요? 나의 자녀도 하느님 자녀로 만들 때입니다. 나의 자녀가 신앙이 없고 하느님 뜻에 자기를 봉헌하지 않았음에도 마음이 평화롭다면 나 자신이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고마움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카베오 하권 7장에는 일곱 아들을 낳은 어머니가 나옵니다. 이 용감한 어머니는 셀레우코스 왕 안티오코스 4세가 자신의 일곱 아들을 고문하고 처형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녀는 아들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굳게 지키라고 말하면서 하느님의 율법에 충실할 것을 격려했습니다. 그녀는 그들에게 영원한 보상과 부활의 희망을 상기시켰습니다. 만약 자녀에게 생명을 구하라고 했다면 어머니는 하느님 앞에 나아갈 때 “나는 너를 하느님 자녀로 낳았는데, 너는 네 자녀까지도 하느님 자녀로 만들지 못했느냐?”라고 혼이 날 것입니다.
우리나라 미혼 남녀 15%는 자신은 비혼주의라고 하고 51.7%는 비혼을 생각 중이라고 하며 결혼을 꼭 하겠다는 청년들은 33.3%였습니다. 부모가 나를 키워주었는데도 나는 자녀를 안 키우겠다고 한다면 이제 부모와의 소통이 단절됩니다. 그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자녀를 탄생시키지 못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심이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비싼 핸드백을 들고 맛있는 음식을 찍어 인스타에 올려도 마음은 공허하고 점점 불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양심의 원리입니다.
오늘 엘리사벳과 즈카르야가 자기 아들을 ‘요한’이라고 짓는 동시에 그들은 아들을 주님 뜻에 바친 것입니다. 주님 뜻에 바친다는 말은 순교자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부모들이 하느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양심의 평화를 얻습니다.
이스라엘은 왜 자녀 출산율이 1위일까요? 구약시대부터 하느님께 자녀를 봉헌하는 것을 내 행복을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사무엘을 주님께 바치기 위해 아들을 청한 한나를 생각해봅시다. 그녀는 처음부터 하느님께 바치겠다는 서원을 하고 아들을 주님께 청했습니다. 아들을 하느님께 바쳐야 하느님 자녀로서의 자신의 마음에 평화를 얻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자녀를 낳음이 없이는 하느님 자녀로 태어난 자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음을 명심합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다른 성인의 축일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혹시 아시는지요? 그렇습니다. 다른 성인들은 세상을 떠난 날을 축일로 지냅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공덕을 쌓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가경자, 복자, 성인’의 순서를 거쳐야 합니다. 증인이 있어야 하고, 성인의 전구를 통해서 ‘표징’이 드러나야 합니다. 한국은 그런 과정을 거쳐서 103위의 성인과 124위의 복자를 신앙의 증거자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다른 성인과는 달리 태어난 날을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태어난 날을 축일로 지내는 분은 성모님과 세례자 요한입니다. 이는 태어난 날을 축일로 지내는 예수님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도 성령의 이끄심에 의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도 성령에 의해서 마리아에게 주어졌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이름도 성령의 이끄심에 의해서 엘리사벳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세례자 요한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요한이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율법과 계명에 따라서 속죄의 예식을 거치고, 제물을 바쳐야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데, 요한은 세례를 받으면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시에는 상상하기 힘든 획기적인 죄의 사함을 받는 예식이었습니다.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갔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역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하였고, 달릴 길을 충실히 달린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습니다. 나는 오셔야 할 그분이 아닙니다. 나는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광야의 목소리 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겸손하였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을 지내면서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충실함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갈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부러워하면 지는 거라고 합니다. 남의 떡을 부러워하기 보다는 나에게 주어지는 사명에 충실하면 좋겠습니다.
‘나 중심의 생각을 상대방 중심의 생각’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좀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은 철저하게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축일도 그런 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축일은 여름이 긴 하지에 가깝습니다. 하지가 지나면 여름은 점차 짧아집니다. 예수님의 축일은 겨울이 가장 긴 동지에 가깝습니다. 동지가 지나면 낮은 점점 길어집니다. ‘성소 후원회’ 임원 연수 때입니다. 강사 신부님은 제가 예전에 본당 신부님으로 모시던 분입니다. 저는 신부님을 소개해 드리면서 ‘제가 신부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제가 그런 말을 할 줄 알고 ‘끈 없는 신발을 신고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제 말을 유쾌한 유머로 받아 주시는 신부님은 역시 저보다는 한 차원 높으신 분이셨습니다.
슬픈 눈으로 바라보면 세상은 한없이 슬플 수 있습니다. 구약을 마치고, 신약을 시작하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도 그렇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이들 중에는 가장 위대하다는 말을 들었던 세례자 요한은 ‘살로메’의 춤 값으로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이들 중에 가장 위대한 세례자 요한을 기억하고 있으며, 사랑과 공경을 드리고 있습니다. 예전에 휴대폰 광고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할 때면 잠시 꺼 놓으셔도 좋습니다.’ 늘 켜져 있어야 하는 휴대폰도 소중한 사람과 있을 때면 꺼도 좋다는 광고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하느님의 더욱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지금 좀 서운해도 참을 수 있습니다. 지금 좀 속이 상해도 웃을 수 있습니다. 자존심이 무너질 때라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수많은 성인 성녀들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하셨고, 재물보다는 가난함을 택하셨고, 모욕과 멸시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예언자 되어, 주님에 앞서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라.”
오늘의 성인
성 요한(John)
신분 : 세례자, 예언자
활동연도 : +29년경
같은이름 : 밥띠스따, 밥티스타, 밥티스트,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성 요한 세례자(Joannes Baptistae)는 유다 임금 헤로데 시대에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 즈카르야(Zacharias, 11월 5일)와 아론의 자손이며 성모 마리아(Maria)의 친척인 성녀 엘리사벳(Elisabeth, 11월 5일)의 아들로서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한 아인 카림에서 태어났다.
그 역시 천사의 탄생 예고를 통하여 그동안 수태하지 못하던 엘리사벳에게 잉태되었다(루카 1,5-25). 그는 서기 27년경까지 유대 사막에서 은수자로 살았고, 30세가 되었을 때부터 요르단 강가에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설교하기 시작하며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오실 때 그분이 메시아임을 알아보고는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며 말렸다(마태 3,14). 그리스도께서 갈릴래아로 떠나신 뒤에도 그는 요르단 계곡에서 자신의 설교를 계속하였다.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는 세례자 요한의 언행과 군중들에 대한 그의 권위를 두려워하던 중에 어처구니없는 이유를 들어 그를 사해의 마캐루스 성채에 투옥하였다.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은 옳지 않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헤로디아는 간계를 꾸며 딸 살로메에게 그의 목을 청하도록 하여 요한은 결국 참수 당하였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은 쿰란 공동체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은 6월 24일이고, 수난 기념일은 8월 29일이다.
성 루몰도 (Rumold)
활동년도 : +775년경
신분 : 주교, 순교자
지역 : 말린(Malines)
같은 이름 : 루몰두스, 루몰드
성 루몰두스(Rumoldus, 또는 루몰도)는 벨기에 플랑드르(Flandre) 지방 말린의 주교이자 수호성인이다. 그는 고향 아일랜드에서 오랫동안 하느님만 충실히 섬기던 수도자였는데, 영혼들을 구하려는 열정을 이기지 못하여 인근의 우상숭배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다녔다. 그는 로마(Roma)까지 여행했는데 그곳에서 선교사 칭호와 주교로 축성된 후 벨기에 중앙부 브라반트(Brabant)로 파견되어 성 빌리브로르두스(Willibrordus, 11월 7일)와 합류하였다. 그는 말린에서 두 사람에 의해 순교했는데, 그가 그들의 사악한 행동을 공공연히 비난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유해는 말린의 주교좌 성당에 안치되었다. 성 루몰두스는 또한 아일랜드 더블린(Dublin)의 주교로서, 스코틀랜드 왕의 아들로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