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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27일 목요일
[(녹)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 주교 학자
말씀의 초대
여호야킨 임금 때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 도성을 쳐들어와 기물들을 떼어 내고 사람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간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바빌론 임금은 여호야킨과 건장한 모든 사람을 바빌론으로 데려갔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24,8-17
8 여호야킨은 열여덟 살에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석 달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느후스타인데 예루살렘 출신 엘나탄의 딸이었다.
9 여호야킨은 자기 아버지가 하던 그대로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
10 그때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도성을 포위하였다.
11 이렇게 그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동안,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이 도성에 이르렀다.
12 그러자 유다 임금 여호야킨은 자기 어머니와 신하들,
대신들과 내시들과 함께 바빌론 임금에게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바빌론 임금은 그의 통치 제팔년에 여호야킨을 사로잡았다.
13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네부카드네자르는 주님의 집에 있는 모든 보물과
왕궁에 있는 모든 보물을 내가고, 이스라엘 임금 솔로몬이
주님의 집에 만들어 놓은 금 기물들을 모조리 떼어 냈다.
14 또한 온 예루살렘 주민과 모든 대신과 모든 용사 등 포로 일만 명과
모든 장인들과 대장장이들을 끌고 갔다.
그리하여 나라 백성 가운데 가난한 이들 말고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15 네부카드네자르는 여호야킨을 모후와 왕비들,
내시들과 나라의 고관들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그들을 끌고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데려간 것이다.
16 바빌론 임금은 또 훌륭한 사람 칠천 명과 장인과 대장장이 천 명 등,
전투할 수 있는 건장한 모든 사람을 바빌론으로 데려갔다.
17 그런 다음에 바빌론 임금은 여호야킨의 삼촌인 마탄야를
그 뒤를 이어 임금으로 세우고, 이름을 치드키야로 바꾸게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21-2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3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28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29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산상 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모아서 산상 설교 부분에 배치합니다. 마치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 하느님의 계명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산에 오르셔서 당신의 가르침을 전하여 주고 계십니다. 산상 설교는 참행복을 시작으로 율법의 완성에 관한 가르침과 그 밖의 여러 가르침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모든 가르침의 결론으로서 오늘의 복음 말씀을 듣게 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자신이 가르침을 많이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습니다. 들은 것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참된 믿음에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실천 없이 당신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실 실천은 우리 믿음을 반석 위에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실천 위에 세워진 믿음만이 더 굳건하게 우리 안에 자리 잡게 됩니다. 몸소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만이 하게 되는 체험이 있고 그 체험 안에서 믿음은 더 굳건해집니다. 말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그 믿음이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어려움과 고통이 닥칠 때 쉽게 무너집니다.
좋은 말씀은 우리 주변에 넘쳐납니다. 유튜브, 블로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등으로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묵상 글과 아름다운 글귀들을 서로 나눕니다. 이는 아름다운 일이고 우리 구원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이제 더 중요한 것이 남았습니다. 서로 나눈 이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었던 아름다운 말씀은, 나아가 참사랑의 실천으로 나누어져야 합니다. 이 실천 위에 자리 잡은 믿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영혼없는 로봇같은 신앙을 극복하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야트막하지만 산상에서 행하신 설교를 요약하면 세 가지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십시오. 가르침을 들었으면 실행하십시오.
당대 거짓 예언자들의 만행을 목격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저지르고 있던 악행을 날카롭게 지적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당시 거짓 예언자들은 ‘주님, 주님!’ 하며 입으로는 늘 그분을 찾았지만, 언행이 조금도 일치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킨다 할지라도, 그분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거짓 예언자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우리 가운데 어떤 목자나 지도자가 아무리 그럴듯하게 주님의 가르침을 선포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결실과 성공을 주님께로 돌리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자신의 이름, 자신의 얼굴, 자신의 성공만을 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가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개인적인 사리사욕을 찾는다면, 그것은 주님을 철저하게 이용하는 것이며, 주님을 모욕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거나 행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하는 삶을 산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교회는 실행 쪽으로만 과도하게 지우치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기도와 영적 생활과 사랑의 실천 사이의 적절한 균형과 조화를 강조합니다.
따라서 행동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극단적 선택은 늘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이 없는 업적은 속 빈 강정과도 같습니다. 연료가 없는 멋진 자동차와 같습니다. 최첨단 기술이 장착되어 있으나 영혼 없는 로봇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분석해보면 순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 7,24)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입니다. 그분 말씀을 듣는 것이 우선입니다. 실행은 그 다음입니다. 진지한 자세로 그분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우리가 하느님께 드려야 할 본질적인 전제 조건입니다. 다음 순서가 실행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냥 흘려보내도 되는 말이 아닙니다. 반드시 인간 측의 응답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인간 측에 의무와 과제를 지우는 강제소집령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실행 자체였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인간 측의 응답도 책임감이 있으려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당신 사랑으로부터 분출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인간 측의 응답은 사랑 안에 실행되어야 합니다.
왜 반석 위에 집을 지으면 마음이 평화로울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미국의 첫 번째 수도회 창설자요,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첫 번째로 시성이 된 분이 엘리자베스 앤 시튼입니다. 그녀는 19세에 부유한 사업가 윌리엄과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고 잘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사업 실패와 병마의 어려움이 그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남편의 사업 파트너이자 친구인 필리치는 아탈리아에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이탈리아 좋은 날씨에서 병도 고칠 겸 사업의 도움도 받을 겸 이탈리아로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이탈리아는 병자를 바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검역소에서 몇 달을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동안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이때 느꼈던 평화를 남편이 검역소에서 나오자마자 죽었어도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필리치의 집안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성모 마리아와 성체에 대한 열망이 깊어졌습니다. 그렇게 미국으로 돌아와서 개종에 대한 갈등에 시달렸습니다. 마음에 성체를 모시고 살아가면 평화로울 것 같았지만, 그러면 독실한 성공회 집안인 가족들과는 멀어져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사회적, 재정적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805년 3월 14일 가톨릭교회에 입교합니다.
개종 후 엘리자베스는 사회적 배척과 재정적 어려움을 포함한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그녀는 자녀를 부양해야 했고 자신의 신앙과 필요한 수입을 결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볼티모어의 존 캐롤 대주교를 비롯한 여러 영향력 있는 성직자들의 격려를 받아 그녀는 학교를 열기로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예상하지는 못했으나 그녀의 마음은 평화로웠습니다. 마치 자기 행동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처럼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두 딸의 죽음과 지속적인 재정적 어려움이 있었으나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1809년에 미국 최초의 종교 단체인 성 요셉 사랑의 수녀회를 설립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시튼 수녀회로 교육 사업을 하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는 수천 명의 수녀들이 마더 시튼의 뜻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그녀는 미국 가톨릭 교구 학교 시스템의 토대를 마련하고 여러 세대의 교육자와 수녀들에게 영감을 준 공로를 인정받아 1975년 9월 14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최초의 미국 원주민 성인으로 시성 되었습니다. 그녀의 인생 이야기는 개인적인 비극에도 신앙에 관한 깊은 탐구가 어떻게 자신과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오랜 평화와 도움을 남기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은 행동에 관한 내용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집을 짓는데 하나는 반석 위에, 하나는 모래 위에 짓습니다. 집이 행동입니다. 나무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그 집은 뜻에 따라 좌지우지 됩니다. 여기서 뜻은 두 종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뜻은 내가 스스로 창조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를 나의 창조자로 인정할 것인지 두 선택밖에는 없습니다. 나의 행동의 의도가 나의 뜻인지, 내 창조자의 뜻인지에 따라 모래가 될 수도 있고 반석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죽음은 당신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반석이 된 것입니다. 반석은 나의 죽음 뒤에도 지속되지만, 모래는 나의 죽음과 함께 끝납니다. 그런 행동은 아무것도 남길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나의 뜻에 행동의 기초를 삼는다면 벌써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나의 뜻에 기초한 행동은 내가 죽으면 끝장납니다. 그러나 더 오래가는 무엇의 뜻을 따른다면 나의 행동은 그 무언가가 지속되는 동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평화롭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의 박치기왕, 김일은 당시 먹고살기 힘들었던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습니다. 자기 머리가 깨져 더는 박치기를 할 수 없을 때도 그는 국민을 위해 박치기를 하였습니다. 그것이 사망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평화로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참 어리석게도 그때 알았습니다. ‘온 국민이 내 박치기 한 방에 이렇게 통쾌함을 느끼는데 내가 감히 박치기를 멈출 수 있을까. 이 한 몸 아프다고, 조금 힘들다고 어찌 못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 박치기로 인해 많은 이들이 웃고 기뻐하고 행복했었다면 나 역시도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김일의 처음 박치기는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고 나중 박치기는 사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의도와 뜻을 가지고 하느냐가 행위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그 박치기가 국민의 뜻으로 이뤄진 다음에는 국민이 다 사라지기 전에는 그 의미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 먼저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러다 부모의 뜻을 따라줍니다. 자신이 받은 사랑에 보답해야 하는 양심 시스템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될 때 자녀의 어리광과 마음은 부모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고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 그 행동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뜻을 따름이 반석처럼 오래가는 것입니다.
만약 그 부모가 하느님이라면 당신을 위해 행한 뜻은 영원히 지속합니다. 그분은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뜻에 따라 물 한 잔 준 행위도 영원한 보상을 받는다는 말이 이 뜻입니다. 내가 하는 행동보다는 나는 나를 나 자신을 창조한 창조자로 여기는지, 아니면 나의 창조자가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가 나에게 바라는 뜻이 있을 것인지 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분명 매일, 아니 매 순간 그분이 나에게 원하는 뜻을 찾게 될 것입니다.
저는 성경이 제일 좋겠지만, 아직은 『하.사.시.』를 매일 읽으며 그 뜻 안에 머물려고 합니다. 매일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 청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모든 삶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삶입니다. 이렇게 살면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마음의 평화를 지니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나의 행동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내가 느끼기 때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상황에 대처하는 인식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상황을 문제(Problem)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제(Task)로 보는 겁니다. 문제는 수동적인 면이 있습니다. 문제를 내는 사람이 있고, 문제를 풀어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의 교육은 문제를 푸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문제를 풀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순위가 정해집니다. 문제를 떠올리면 긍정적이기보다는 일단 머리가 아프기 마련입니다. 과제는 능동적인 면이 있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대한민국은 ‘경제 개발 5계년 계획’을 세웠습니다. ‘국민소득 1,000불, 수출 100억 불’이라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모두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초가집은 기와집으로 바뀌고, 흙길은 포장이 되고, 재래식 화장실은 수세식 화장실로 바뀌었습니다. 집집마다 자동차가 하나씩 생겼습니다. 과제는 희망이 되고, 과제는 성취가 되고, 과제는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 되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힘든 상황을 문제로 보느냐, 과제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 상황은 걸림돌이 될 수 있고, 디딤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고려의 시인 원천석은 고려의 마지막을 이렇게 회고하였습니다.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五百年) 왕업(王業)이/ 목적(牧笛)에 부쳐시니/ 석양(夕陽)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 하노라.” 참 아름다운 글입니다. 비슷한 시조로, 길재는 고려의 마지막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이 또한 참으로 아름다운 글입니다. 인간사 희로애락이 참으로 덧없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꽃이 피면 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듯이, 국가도 찬란한 꽃이 피면 사라지는 것이 이치라며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새로운 왕조를 시작하는 이방원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萬壽山) 드렁 칡이 얽어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百年)까지 누리리라.” 왕조는 사라지고, 화려했던 궁궐은 사라졌지만, 우리 조상들의 멋진 풍류와 문화는 이렇게 지금까지 우리의 마음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도 흥망성쇠를 겪었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던 모세와 여호수아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피웠던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던 예언자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유배를 떠나야 했던 슬픈 역사도 있었습니다. 로마에 의해서 성전이 파괴되고 2000년 동안 디아스포라의 시대를 지내야 했습니다. 홀로코스트의 비극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 비극과 고통을 ‘문제’로 생각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새롭게 일어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런 비극과 고통을 ‘과제’로 생각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은 파괴되고, 나라를 빼앗겨 유배의 삶을 살게 되었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말씀을 새롭게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 희망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그 희망이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부활 신앙’입니다. 그 희망이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희망을 준비한 사람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 희망을 온몸으로 드러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문제로 생각하면 피곤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규율과 율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하고, 혼인법을 지켜야 하고, 금육과 금식을 지켜야 합니다. 주일에는 미사참례를 해야 하고,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문제투성이입니다. 이렇게 신앙을 문제로 접근하면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습니다. 시련과 유혹의 비가 내리면 곧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을 과제로 생각하면 희망이 보입니다. 하느님의 더욱 큰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포기할 수 있습니다. 부귀보다 가난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건강보다 아픈 것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을 과제로 접근하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습니다. 시련과 유혹의 비가 내릴지라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과제’라는 반석 위에 집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상황을 문제로 인식하는지, 과제로 인식하는지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오늘의 성인
성 치릴로(Cyril)
신분 : 총대주교, 교회학자, 교부
활동지역 :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활동연도 : 380-444년
같은이름 : 시릴, 시릴로, 시릴루스, 치릴루스, 키릴로, 키릴로스, 키릴루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태생인 성 키릴루스(Cyrillus, 또는 치릴로)는 그 도시 총대주교인 테오필루스(Theophilus)의 조카였다. 성 키릴루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고전과 신학 교육을 받았고, 그의 아저씨에 의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403년 총대주교를 수행하여 콘스탄티노플로 갔으며, 그곳에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9월 13일)를 단죄한 퀘르키아(Quercia) 주교회의에 참석하였으며, 417년까지는 테오필루스의 노선에 따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를 반대하였다. 412년 10월 15일 테오필루스가 사망하자 성 키릴루스는 사흘 후에 그의 아저씨를 계승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성 키릴루스의 지지자와 그의 라이벌인 티모테우스(Timotheus)의 지지자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일어나 그는 큰 상처를 입고 출발하였다. 그런데 성 키릴루스는 자신이 축출하였던 노바티아누스(Novatianus) 이단을 상대로 일련의 공격을 다시금 재개하였다. 그 결과 그가 그 도시에서 몰아냈던 유대인들과 총독 오레스테스는 그의 이같은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430년 성 키릴루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Nestorius)와의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이지 인간은 아니었기 때문에 마리아는 천주의 모친일 수 없다고 가르쳤으며, 따라서 마리아에게 '천주의 모친'(테오토코스, Theotokos)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성 키릴루스는 교황 성 코일레스티누스 1세(Coelestinus I, 4월 6일)를 설득하여 430년 8월에 로마(Roma)에서 주교회의를 개최하여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같은 해 11월에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주교회의를 열어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단죄하여 교회 일치를 도모하였다.
성 코일레스티누스 1세 교황은 성 키릴루스로 하여금 네스토리우스를 축출하도록 지시하였고, 성 키릴루스는 431년 제3차 에페수스(Ephesus) 공의회에서 교황의 특사 자격으로 의장직을 맡아 회의를 주재하였다. 이때 200명 이상의 주교들이 대거 참여하여 큰 성황을 이루었다. 이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가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안티오키아(Antiochia)의 총대주교 요한과 42명의 추종자들이 대거 몰려오기 전에 네스토리우스와 그의 추종자 세력을 단죄하여 분쇄하였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 일파는 그들 나름대로 회의를 소집하여 성 키릴루스를 축출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래서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가 성 키릴루스와 네스토리우스를 체포하였으나, 교황대사가 와서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공의회의 결정이 올바르다고 전하자 성 키릴루스는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2년 후 안티오키아 주교들을 대표하는 요한 총대주교와 성 키릴루스는 위의 단죄를 인정하는 동의안을 결의하는데 도달하였고, 네스토리우스는 강제로 유배되었다.
그 후 성 키릴루스는 삼위일체와 강생에 관한 교리 확립과 신학 논문 저술에 여생을 바쳤고, 그리스도교 사회에 깊이 뿌리박고 있던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와 네스토리우스주의를 배격하는 일을 하여 교회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알렉산드리아가 낳은 가장 유명한 신학자이다. 그의 저서는 정확한 사고와 명확한 전개 및 그 합당한 근거 제시로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성서에 관한 그의 주석서 가운데에는 요한, 루카 그리고 모세오경이 있으며, 수많은 교의신학 논문을 비롯하여 배교자 율리아누스(Julianus) 황제에 대한 반박문, 편지 그리고 강론들이 전해온다.
그리스 교부의 한 명인 성 키릴루스는 1882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언되었다. 동방 교회에서는 그의 축일은 6월 9일에 기념한다.
성 라디슬라오 (Ladislaus)
활동년도 : 1040-1095년
신분 : 왕
지역 : 헝가리(Hungary)
같은 이름 : 라디슬라우스
헝가리의 국왕 벨라(Bela)의 아들로 태어난 성 라디슬라우스(또는 라디슬라오)는 1077년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는 한차례 친척들의 퇴위 요구를 받은 적이 있으나 이를 무사히 진정시켰다. 그는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VII, 5월 25일)를 적극 지원하면서, 헝가리의 성왕인 스테파누스(Stephanus, 8월 16일)를 거울삼아 그의 발자취를 따르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그는 바이에른(Bayern)의 공작 웰프(Welf)의 딸인 아델라이드(Adelaide)와 결혼하였고, 쿠만족(Cumans)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물리쳤으며, 자신의 나라에 그리스도교를 적극 장려하였다. 뿐만 아니라 많은 성당들을 세웠고, 유대인들과 마호메트인들에게도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관대함을 보였다. 1092년의 자볼릭 교회 회의에서 그는 종교적, 사회적 사건들에 대한 일련의 법을 선포하였고, 제1차 십자군의 지도자로 선정되었으나 출전하기에 앞서 보헤미아(Bohemia)의 니트라(Nitra)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헝가리의 국가 영웅 중의 한사람이며 헝가리의 영토를 최대한으로 확장했던 위대한 왕임과 동시에 통치자로서는 참으로 놀라운 정의를 실천했을 뿐만 아니라 덕스러운 삶을 살았다. 그는 사후 바로 공경을 받기 시작하여 1192년 교황 코일레스티누스 3세(Coelestinus 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의 유해는 자신이 세운 나기바라드(Nagyvarad) 대성당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