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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14일 토요일
[(녹)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성 헨리코 또는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내가 누구를 보낼까?”라는 주님의 소리를 듣고,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아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인데,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6,1-8
1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2 그분 위로는 사랍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아다녔다.
3 그리고 그들은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
4 그 외치는 소리에 문지방 바닥이 뒤흔들리고 성전은 연기로 가득 찼다.
5 나는 말하였다.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6 그러자 사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 7 그것을 내 입에 대고 말하였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8 그때에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내가 아뢰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육신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4-3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24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25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
26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28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30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31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32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33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두려워하다”는 오늘 복음에서 되풀이되는 표현입니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어떤 대상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의식이 생각을 가두고 행동을 막으며 영향을 줄 때, 보통 우리는 그 대상을 ‘두려워한다’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하여야 할 대상은 누구일까요?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 대상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더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 나에 대한 그들의 평가, 체면, 인정받고 싶은 마음, 돋보이고 싶은 마음 등 말입니다. 믿음을 잃어버리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보다 이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그분을 정말로 두려워한다면 판공성사 표가 나올 때만 고해성사를 보는 일은 벌써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미사 때마다 선포되는 그분의 말씀을 잊어버리는 일도, 기도가 사라진 삶도, 사랑하는 법을 잃어버린 이기적인 마음도 이미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하느님을 만난 이사야는 자신이 죄인임을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죄와 죄악을 없애 주십니다. 그리고 그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십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그분 앞에서 나의 모습을 솔직하게 인정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은총을 주십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어 두실 정도로’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느님을 늘 의식하며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아멘.(김재덕 베드로 신부)
우리의 모든 것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귀히 여기시겠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모두 누구에게나 그런 사람, 그런 체험이 있습니다.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는 사람, 생각만 해도 연민의 정이 북받쳐 오르는 사람. 나를 통해 이 세상에 온 그, 그 오랜 기간 나와 일심동체이던 그,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던 그.
매일 먹이고 씻기고, 달래고 재우던 그, 어찌 보면 나의 분신이요 나와 하나이던 그, 그가 힘들면 나도 힘들고, 그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그가 웃으면 나도 따라 웃던 그.
아마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그런 존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호세아 예언서는 우리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지닌 그런 주님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호세아 11,4,)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들이나 연인을 그토록 귀하게 여기고 애지중지하듯이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 각자를 그렇게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귀히 여기시는지, 얼마나 총애하시는지에 대해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럭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 29-31)
따라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무시하고 하찮게 여긴다 할지라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귀히 여기시겠답니다. 우리의 창조주요 우리의 미래를 책임지신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 끝날까지 기억하시겠답니다.
더 은혜로운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우리 인간들의 사랑과는 격이 다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주고받는 사랑처럼 작거나 모순되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이거나 편협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한없이 큰 사랑, 한결같이 일관된 사랑, 지극히 이타적이고 영원불멸하는 참사랑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89년 가을입니다. 신학교에서는 ‘자치회장’ 선거가 있었습니다. 자치회장 후보로 나온 동창이 제게 ‘지지 연설’을 부탁했습니다. 자치회장은 신학생의 대표입니다. 동창은 자치회장을 하고 싶은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저는 동창을 위해서 지지 연설을 준비했습니다. 그때 제가 택한 성경 말씀이 오늘 독서에 읽은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그러자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응답하였습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저는 친구를 위해서 뜨거운 마음으로 ‘지지 연설’을 했습니다. 그리고 연설의 마지막에 윤동주의 시 십자가를 들려주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응답과 윤동주의 열정이 통했는지 동창 신학생은 자치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자치회장을 하면서 동창 신학생의 절박함은 신학교 생활의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동창 신학생은 사제가 되어, 제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저를 기꺼이 도와주었습니다. 1998년 대한민국의 IMF의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고, 저의 집도 그 수렁의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동창 신부는 제게 따뜻한 손길을 주었고, 저는 친구의 도움으로 IMF의 수렁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당시 신학교에는 낙산 중창단이 있었습니다. 후배 신학생이 이사야 예언자의 응답을 모티브로 곡을 만들었습니다. 그 곡의 제목이 ‘Ecce ego mitte me!(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입니다. 멜로디는 경쾌하고, 장엄합니다. 가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오 주여 나 보내 주소서/ 주 나 여기 있으니/ 나를 보내주소서/ 님의 그 말씀 따라/ 나 살고자 하오니/ 추위에 목마른 자 위하여 보내소서 여기있소/ 사랑에 굶주린 자 위하여 보내소서 여기있소/ 당신처럼 나도 살으리니 보내소서 여기있소/ 보내소서 여기있소 여기있소/ 고난받는 내 민족 위하여/ 내 정력 다해 사랑케 하고/ 아픔에 있는 형제를 찾아 당신의 희망을 그에게 주리다 나에게/ 고난받는 민족을 위하여 내 정열 다해 사랑케 하고/ 아픈 내 형제를 찾아서 당신의 위로 그에게 주리다 나에게/ 나 여기 있으니/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주여 나를 주여 나를 보내소서 나를 보내소서 주여” 지금 다시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가사와 멜로디입니다.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유트브에서 한번 들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리고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이번 주 본기도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타락한 세상을 성자의 수난으로 다시 일으키셨으니 저희에게 파스카의 기쁨을 주시어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내가 마당을 쓸면 지구의 한 모퉁이가 깨끗해집니다. 내가 꽃 한 송이 심으면 지구의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집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면 지구가 온통 아름답고 밝아집니다. 그렇습니다. 남이 아니라 지금 내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그분 내게 스미시니>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6)
믿음이
내게 스미시니
나는 믿음입니다
늘 그렇게
믿음에게도
믿음이요
불신이
부추긴다며
더욱 믿음입니다
희망이
내게 스미시니
나는 희망입니다
늘 그렇게
희망에게도
희망이요
절망이
부추긴다면
더욱 희망입니다
사랑이
내게 스미시니
나는 사랑입니다
늘 그렇게
사랑에게도
사랑이요
미움이
부추긴다면
더욱 사랑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 헨리코 2세 (Henry II)
신분 : 황제
활동지역 :
활동연도 : 973-1024년
973년 바바리아 지방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이어 바바리아의 공작이 되고 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임되었다. 독일의 왕으로서 1014년 로마 황제로 대관된 성 헨리코는 교회와 수도생활의 개혁과 쇄신, 선교 활동의 후원에 탁월한 기여를 했다.
11세기의 관습에 따라서 헨리코는 자기의 지위를 유리하게 이용했으며 주교를 자기에게 충실한 사람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일에 따르는 부작용을 막았으며 실제로 교회와 수도 생활의 개혁을 촉구했다. 헨리코는 모든 일에 실제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통치를 강화시키는 데 매우 활동적이었다. 그는 반역과 불화를 진압했다.
그는 그의 국경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지역에서 발생하는 분쟁을 처리해야만 했다. 이것이 그를 특히 이탈리아 남부의 수많은 전투에 개입하도록 했다. 교황 베네딕도를 도와 로마의 소요와 분쟁을 진합하여 유럽에 안정된 평화를 유지하도록 했으며, 밤베르그 교구를 설정하여 이곳을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많은 교구를 설립하고 수도원들을 세웠다. 1024년 선종했다.
교황 에우제니우스 3세는 1146년 그를 황후 쿠네군다와 함께 성인품에 올렸다.
우리는 그가 너무도 성급해서 전쟁을 했을 것이고,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자 개혁을 추진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한계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는 바쁜 세속 생활 속에서도 성덕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가 성인이 되는 길은 우리의 일을 성실히 하는 데 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그들이 속해 있는 정치 사회와 마찬가지로 온 인류의 공동선을 이룩하기 위해 노력하고, 공동 생활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라는 점에 비추어서 노력해야 하고 사랑에 앞장 서야 하며, 여러 가지 제도들 -목적이 경제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문화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간에- 이 장애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질서와 초자연적 질서안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완성을 하도록 도와 주거나 힘들지 않도록 해준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신앙인들은 하나의 빛임에 틀림없다. 그가 이 모든 면에서 더욱더 완전하게 되면 될수록, 그는 하느님과의 영적 교감에 더욱더 일치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요한 23세,’지상의 평화’146,164항)
성 요엘 (Joel)
활동년도 : +4세기BC
신분 : 구약인물, 예언자
지역
같은 이름 : 조엘
요엘서는 구약성서의 열두 소예언서 중 두 번째로 등장하는 예언서로 브두엘의 아들 요엘(1,1)이 선포한 말씀으로 모아져 있다. 요엘은 ‘하느님은 (참) 하느님이시다’라는 뜻을 지니며 역대기와 느헤미야서와 에즈라서 등 구약성서 후대의 역대기계 문헌에는 18회나 언급되지만, 그 외에는 사무엘 예언자의 맏아들 이름으로 단 한 번만 사용된다(1사무 8,1). 그래서 요엘이 오래된 이름이기는 하지만 구약성서의 후대에 와서 흔히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 구약성서 어느 곳에서도 요엘 예언자가 언급되지 않는다. 요엘서 자체에서도 요엘 예언자 개인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그런데 요엘의 예언이 유다 지방, 특히 예루살렘과 그곳의 성전을 중심으로 펼쳐진다는 점에서, 그가 유대인이고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였음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요엘은 성전에서 거행되는 종교 의식을 당연한 일로 여긴다. 이사야나 에제키엘처럼 이스라엘인들의 잘못된 종교 의식을 비판하였던 예언자들과는 달리, 그것이 아무런 문제도 지니고 있지 않다고 본다. 그리고 가뭄과 메뚜기 떼의 침입으로 성전에서 매일 바쳐야 하는 곡식 제물과 제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여러 외적 궁핍보다 더 큰 불행으로 여긴다(1,9. 13. 16). 또한 그의 많은 표현도 전례 용어에서 유래한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그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직하던 ‘전례 예언자’였으리라고 추측된다.
다른 한편, 기존의 성서에 정통한 요엘은 선배 예언자들의 사상을 어어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미 공포한 말씀을 다시 선포하고 그들의 어구나 어휘를 인용하고 재활용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예언자를 ‘성서 예언자’ 또는 ‘성서 해설가’로 규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점이 예언자로서 요엘의 성격을 흐리게 하거나, 그의 독창성을 부정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여러 정황을 종합할 때, 기원전 4세기 초엽이 요엘 예언자의 시대일 가능성이 가장 큰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는 페르시아 제국 시대로, 유대인들은 민족과 땅이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나름대로 평온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느헤미야와 에즈라가 감행한 종교개혁 덕분에 예루살렘 성전은 유일한 성소로 자리를 굳히고, 그곳의 모든 전례도 이미 잘 정비되어 거행되고 있었다.
성 실라 (Silas)
활동년도 : +1세기경
신분 : 사도들의제자, 증거자
지역 :
같은 이름 : 실라스, 실바노, 실바누스, 씰라스, 씰바노, 씰바누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성 실라는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에 따라 이방인 공동체로 진출하기 위하여 사도 바오로(Paulus, 6월 29일)와 바르나바(Barnabas, 6월 11일)와 함께 시리아로 파견되었다.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마르코(Marcus, 9월 27일)라는 요한 문제로 언쟁했을 때, 그는 바오로를 수행하여 그의 제2차 전교 여행지인 시리아(Syria), 실리시아(Cilicia) 그리고 마케도니아(Macedonia)를 순회하였다(사도 15,38-40). 성 실라는 필립비(Philippi)에서 사도 바오로와 함께 고발되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으며(사도 16,19 이하), 테살로니카(Thessalonica)에서는 유대인들의 폭동에 직면하였으나 교우들이 그날 밤으로 베레아(Berea)로 떠나게 주선해 주었다(사도 17,5-10). 사도 바오로가 실바누스(Silvanus)라고 언급한 사람(2고린 1,19)은 실라의 다른 이름인 듯하다. 또한 베드로 1서 5장 12절에 언급된 실바누스라는 인물 역시 사도 바오로가 알던 실라와 동인 인물로 여겨진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코린토스(Corinthos) 교회의 초대주교였고 마케도니아에서 운명하였다.
성녀 밀드레다 (Mildred)
활동년도 : +700년경
신분 : 공주, 수녀원장
지역 : 민스터(Minster)
같은 이름 : 밀드레드
머시아(Mercia)의 왕 미르왈드(Merewalh)와 켄트(Kent)의 공주인 성녀 에르멘부르가(Ermenburga, 11월 19일)의 딸이며, 성녀 밀부르지스(Milburgis, 2월 23일)와 성녀 밀드지타(Mildgitha, 1월 17일)의 동생인 성녀 밀드레다(Mildreda)는 파리(Paris) 교외 셸(Chelles) 수도원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열렬한 구혼자의 청을 거절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타네트(Thanet) 섬에 있는 민스터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 후 그녀는 그곳의 원장이 되었다. 그녀는 켄트에서 열린 교회회의에도 참석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한 놀라운 자애심이 크게 돋보였다.
성녀 데레사(예수의)(Teresa of Jesus)
활동년도 : 1900-1920년
신분 : 수녀
지역 : 로스 안데스(Los Andes)
같은 이름 : 테레사, 테레시아
성녀 로스 안데스의 예수의 테레사(Teresia de Jesus de los Andes, 또는 데레사)는 1900년 7월 13일 칠레(Chile) 산티아고(Santiago)의 상류가정에서 후아나 페르난데즈 델 솔라르(Juana Fernandez del Solar)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그녀는 프랑스의 맨발의 카르멜회 수녀인 리지외(Lisieux)의 성녀 테레사의 전기를 읽었는데, 이는 이미 신심 깊은 그녀에게 뿌리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이를 통해 그녀는 자신이 하느님을 위해 홀로 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극복하며 모든 것 위에 다른 사람을 두는 방향으로 자신을 변화시켜 나갔다. 그녀의 자기 변화에 더 큰 영감을 준 것은 첫영성체였고, 이를 통해 그녀는 주어지는 모든 것을 값진 것으로 만들기 위해 더욱 노력하였다.
1919년 5월 7일, 19살의 나이에 후아나(또는 후아니타, Juanita)는 로스 안데스의 카르멜 여자 수도원에 입회하여 같은 해 10월 14일 착복식을 하고 예수의 테레사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녀의 짧은 생애의 마지막을 향해가고 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영성생활의 체험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편지 쓰기 사도직을 시작했다. 그러나 수녀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치명적인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활동의 제약을 받게 되었다. 그녀의 스무 번째 생일을 세 달 남겨 두고, 또 6개월의 법정 수련기간을 완료하기 직전에 그녀는 죽음의 위험 중에 있는 상태에서 관면을 받고 1920년 4월 7일 첫 서원을 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12일 그 해의 성주간 중에 선종하였다.
성녀 예수의 테레사가 선종한 후 그녀의 시신은 산티아고에서 90km 정도 떨어진 로스 안데스의 아우코 린코나다(Auco-Rinconada) 순례지에 모셔졌다. 매년 10만 명 정도의 순례자들이 그녀의 유해를 참배하기 위해 이곳을 찾을 정도로 그녀는 대중적인 명성을 얻었다. 특히 여성과 젊은이들에게 잘 알려진 그녀의 생애에 대한 텔레비전 미니시리즈가 1990년대 초 칠레에서 제작되어 방영되기도 했다.
그녀는 1987년 4월 3일 칠레 산티아고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93년 3월 21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녀는 칠레의 첫 번째 성인이자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성인으로 선포된 첫 번째 맨발의 카르멜 여자 수도원의 수녀이다. 또한 아빌라(Avila)의 성녀 테레사(10월 15일), 예수 성심의 성녀 테레사 마르가리타 레디(Teresia Margarita Redi, 3월 7일), 리지외의 성녀 테레사(10월 1일), 십자가의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Teresia Benedicta, 8월 9일)와 더불어 맨발의 카르멜 여자 수도원의 다섯 번째 테레사 이름을 가진 성녀이다. 그녀의 축일은 4월 12일에 기념하기도 한다.
성녀 클렐리아 바르비에리(Clelia Barbieri)
신분 : 설립자
활동지역 :
활동연도 : 1847-1870년
같은이름 : 글렐리아, 끌렐리아, 클레리아
성녀 클렐리아 바르비에리는 1847년 2월 13일 이탈리아 볼로냐(Bologna) 외곽의 페르시체토(Persiceto)에 있는 분드리에 디 산 지오반니(Bundrie di San Giovanni)라는 마을에서 주세페 바르비에리(Giuseppe Barbieri)와 지아친타 난네티(Giacinta Nannetti)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서로 다른 출신을 갖고 있다. 아버지 주세페 바르비에리는 가장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머니 지아친타 난네티는 마을에서 가장 유력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 지역의 의사인 지아친타의 삼촌 집에서 하인으로 일했고 어머니는 부유한 피에트로 난네티(Pietro Nannetti)의 딸로 자랐다. 많은 논란 끝에 주세페와 결혼한 지아친타는 노동자의 가난을 받아들이고, 부유한 집에서 나와 시아버지인 산테 바르비에리(Sante Barbieri)의 초라한 시골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돌처럼 단단한 믿음과 온전한 그리스도교적 삶을 만들어갔다. 어머니의 소원대로 성녀 클레리아는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녀에게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가도록 어린 나이부터 가르쳤다. 어느 날 성녀 클레리아는 어머니에게 어떻게 하면 성녀가 되는지에 대해 묻기도 했다. 그러면서 어린 클레리아는 바느질과 방적 기술을 익히고 거친 털을 짜는 방법을 터득했는데, 이는 그 지역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1855년 콜레라가 번졌을 때 8살이었던 성녀 클레리아는 아버지를 여의었다. 의사 삼촌의 배려로 성녀 클레리아와 그녀의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은 성당 근처에 있는 편안한 집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성녀 클레리아는 하루하루를 더욱 성스럽고 열심히 살게 되었다. 그녀는 집에서 바느질을 하거나 성당에서 기도를 하였다. 보통 성인식 때 첫영성체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교리적으로 완벽하게 준비된 그녀는 1858년 6월 17일 11살의 나이로 첫영성체를 할 수 있었다. 이 날은 성녀 클레리아의 미래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왜냐하면 그 날 처음으로 영적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과 성모님의 슬픔은 그녀의 성스러운 영혼을 더욱 고무하였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미래를 보게 되었으며 기도와 선행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성광 앞에서 그녀는 부동의 자세로 오로지 기도에 전념하였고 집에서는 힘든 일을 하는 다른 소녀들의 모범이 되었다. 조숙한 그녀는 삼베를 짜는 힘든 일이 주업인 곳에서 하느님에 대한 생각과 기도를 늘 간직하고 있었고 때로는 동료들에게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녀는 세상일에 열심인 마르타(Martha)는 아니었지만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힘겨운 노동 현장에서 일하면서 그녀의 가냘픈 손은 힘겨운 삶의 흔적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그녀는 모든 것을 멀리하고 오로지 사랑과 헌신에 몸을 바친 마리아(Maria)는 아니었지만 잡념을 갖지 않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만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는 헌신적인 삶을 살며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잊거나 무시했다. 그녀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이 기뻤고 그녀의 기쁨은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주로 나타났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그녀를 가장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동료들에게로 이끌었다. 그녀의 강렬한 믿음은 하느님의 가난한 자들에게 그녀의 모든 것을 주게끔 했다. 이 시기에 교회에는 ‘그리스도교 교리교육 봉사자’라는 모임이 있었다. 그들은 주로 남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냉담하는 이들을 신앙에로 인도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그녀의 마을에서는 어느 나이 든 학교 교사가 이 모임을 이끌고 있었다. 성녀 클레리아는 이 모임에 참여하였고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모았다. 처음에 조교로 들어갔던 그녀는 놀라운 역량과 준비성으로 선임 회원들까지 인도하게 되었다. 제법 솔깃한 청혼을 거절한 젊은 아가씨들은 성녀 클레리아를 그들의 지도자로 뽑고 사도적이고 명상적인 삶을 채택하였다. 이 헌신의 삶은 성체성사를 받는데서 비롯되어 인근 마을의 농부와 노동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당시는 이탈리아의 통일이라는 정치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기에 그들의 생각이 곧바로 현실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1868년 5월 1일 정치적인 문제가 해결되면서 성녀 클레리아와 그녀의 동료들은 ‘교사의 집’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하여 그들의 생각을 현실로 만들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리스도교 교리교육 봉사자회와 공식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이는 후에 그녀가 ‘슬픔의 어머니의 작은 자 수녀회’(The Congregation of Minims of the Sorrowful Mother)를 설립하는 초석이 되었다. 교사의 집으로 옮긴 후 의심할 여지없이 하느님의 힘으로만 가능한 비범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그녀의 기도에 담겨진 믿음과 헌신적인 사랑은 늘 놀라웠다. 그들의 작은 공동체에는 믿음과 하느님에 대한 갈망이 가득했고, 창의력과 상상력이 충만한 선교는 조직을 통한 선교가 아닌 보이지 않는 말씀을 통한 선교였으며 성녀 클레리아는 움직이는 영혼이었다. 처음에 설립한 작은 단체가 점점 그 수를 늘려가면서 교리교육과 종교적인 방향성을 필요로 하는 가난하고 병든 어린 학생들의 수도 늘어갔다. 사람들은 성녀 클레리아를 점차 믿음의 지도자와 선생님으로 보게 되었다. 그들은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녀의 나이 22세 때의 일이었다. 성녀 클레리아는 수녀회를 설립한 지 2년이 지난 후 잠잠했던 결핵이 재발해 볼로냐에서 선종하였다. 성녀 클레리아가 설립한 슬픔의 어머니의 작은 자 수녀회는 이탈리아 전역과 인도 그리고 탄자니아까지 확장되어 갔다. 오늘날 그녀의 발자취를 따르는 수녀들은 지속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돕고 있으며 300여명이 35개 공동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23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성녀 클레리아 바르비에리는 교회 역사상 가장 어린 수도 공동체의 설립자이다. 그녀는 1968년 10월 2일 교황 복자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9년 4월 9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