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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20일 토요일
[(녹)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홍] 성 아폴리나리스 주교 순교자 또는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말씀의 초대
미카 예언자는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는,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신다(복음).
제1독서
<그들은 탐이 나면 밭과 집을 차지해 버린다.>
▥ 미카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1-5
1 불행하여라,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
그들은 능력이 있어 아침이 밝자마자 실행에 옮긴다.
2 탐이 나면 밭도 빼앗고 집도 차지해 버린다.
그들은 주인과 그 집안을, 임자와 그 재산을 유린한다.
3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이 족속을 거슬러 재앙을 내리려고 하니
너희는 거기에서 목을 빼내지 못하고 으스대며 걷지도 못하리라.
재앙의 때이기 때문이다.
4 그날에는 사람들이 너희를 두고서 조롱의 노래를 부르고
너희는 서럽게 애가를 읊으리라.
‘우리는 완전히 망했네. 그분께서 내 백성의 몫을 바꾸어 버리셨네.
어떻게 우리 밭을 빼앗으시어 변절자들에게 나누어 주실 수 있단 말인가?’
5 그러므로 너희를 위하여 제비를 뽑고 줄을 드리워 줄 이가
주님의 회중에는 아무도 없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이루시려고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4-21
그때에 14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16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17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8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21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복음에서 두드러지는 표현이 있습니다. ‘모두 고쳐 주셨다.’는 표현입니다. 공관 복음서 가운데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묘사할 때, 이 표현을 두드러지게 자주 씁니다(4,23; 8,16; 9,35; 10,1; 12,15 참조).
오늘 복음에도 이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모든’ 이에게 필요한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분께 예외가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께는 소외된 사람도 잊힌 사람도 없습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마태오 복음서가 인용한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그분께서는, 그 갈대가 다시 온전해지고 연기 나는 심지에 다시 불이 타오르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 희망을 둡시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을 잊지 맙시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이 닥치더라도, 여러 이유로 우리가 죄에 떨어지더라도, 그분을 따르는 믿음만은 버리지 맙시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께 잊힌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믿음으로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모두 반드시 구원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아멘.(김재덕 베드로 신부)
때로 우리가 벼랑 끝에 몰려 있는 느낌일 때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개인적으로 참 감개무량한 날입니다. 노인들만 수두룩한 이 시골에 꽃 같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여름 신앙학교를 시작하는 날이기에 그렀습니다. 신나게 뛰노는 아이들을 보는 형제들의 얼굴에는 다들 웃음꽃이 피어났습니다.
제가 이곳 피정 센터에 도착했을 때, 막 펜데믹이 시작되었습니다. 집합 금지 명령으로 인해 잡혀있던 모든 피정 계획이 100퍼센트 취소되었습니다.
참으로 막막했었습니다. 공동체에 월급받는 사람은 한 명도 없고, 매월 나오는 기본 전기세는 엄청나고, 통장 잔고는 바닥이고, 다른 피정 센터나 수련원들은 줄줄이 문을 닫았습니다. 윗선에서는 진지하게 폐업과 매각까지 고민했습니다.
다행히 주님께서 저희에게 크신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기도와 고민 중에 방법을 알려주시더군요. 딱 한 말씀 던져주셨습니다. “애야, 피정이나 수련회를 꼭 큰 규모로만 할 필요가 있겠느냐?”
저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하며 바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개인 및 소규모 피정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딱 한 명 오셨습니다. 친절히 봉사했더니 다음에는 두 명이 오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세 명, 네 명. 네 명까지만 가능하니, 여기 네 명, 저기 네 명, 저 건너편에 네 명...
그 어려운 펜데믹 기간에도 피정 센터는 잘 돌아갔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 자비와 은총 덕분이라고 확신합니다. 때로 주님께서 한쪽 문을 닫으시지만, 찬찬히 사방을 둘러보면 슬그머니 다른 문 하나를 열어주신다는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언제나 너그럽고 인자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그릇된 길을 간다 할지라도 항상 인내하십니다. 때로 우리가 벼랑 끝에 몰려 있는 느낌일 때도 그분께서는 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고 보살펴주심을 굳게 믿습니다.
우리 주님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토록 우리에게 큰 인내와 자비를 베푸시는데, 우리는 이웃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회심과 새 생활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는 주님께 깊은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면서, 그 인내와 자비를 가까운 이웃들에게도 실천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복음을 보면 ‘옥합을 깬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인은 비싼 순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깨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발라 드렸습니다. 그리고 여인은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렸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 비싼 향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면 좋겠다.” 복음은 유다의 말과 생각이 다르다고 전합니다. 유다는 따로 주머니를 가지고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은 언제나 너희들 곁에 있지만 나는 곧 떠난다. 이 여인이 이렇게 하는 것은 나의 장례를 위해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다른 것들은 잊힐지라도 이 여인의 행위는 기억될 것이다.” 저는 그동안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드린 것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승이시고,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옥합을 깬 여인의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우리도, 아니 나도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깨트려야 할 ‘옥합’은 어떤 것이 있을지 생각합니다. 그 옥합 안에는 어떤 것들이 들어있을까요? 전통과 관습이라는 옥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통과 관습이라는 옥합을 과감하게 깨트리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이 변하고, 상황이 변한다면 그 시대와 사람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자전거는 페달을 계속 밟아야 넘어지지 않고 전진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늘 개혁이라는 페달을 밟아야 합니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기득권이라는 옥합니다. 기득권은 교회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득권은 교회를 내부로부터 병들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기득권을 비판하셨습니다. 말은 그럴듯하게 하면서 정작 실천하지 않았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기득권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제자가 되려거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너희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는 꼴찌가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바로 기득권이라는 옥합을 깨뜨린 사건입니다.
요즘의 신앙을 생각합니다. 요즘의 가정을 생각합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성당에 가지 않아도 야단치지 않습니다. 대학에 가면 성당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원에 가지 않고, 공부하지 않으면 야단치지만 기도하지 않고, 성경을 읽지 않아도 말하지 않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일이 되어도 가족들이 함께 모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바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일이 먼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들었던 ‘작은 연못’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연못에 물고기가 살았습니다. 서로 싸우면서 한 마리가 죽었습니다. 물이 썩으니 살았던 물고기도 죽었습니다. 신앙이라는 연못이 상하면 그곳에서 살아야 하는 신앙인도 죽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곳에는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바벨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진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떠나야 했습니다. 권력을 향해서 날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욕망을 향해서 날아가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좀처럼 볼 수 없습니다. 오늘 미가 예언자도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 악을 일삼는 자들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결코 볼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눈앞에 있어도, 진리와 정의가 눈앞에 있어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순수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보였고, 그들은 주님과 함께하는 참된 행복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사람과 사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이
사람을
없애려한다
사람을
없애려하니
사람이 아니다
사람 아닌 사람이
없애려하니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을
피한다
사람이
피하니
사람이 아니다
사람 아닌 사람을
피하니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을
따른다
사람을
따르니
사람이다
사람이
따르니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을
품는다
사람이
품으니
사람이다
사람을
품으니
사람이다
오늘의 성인
성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신분 : 베드로의 제자,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 라벤나(Ravenna)
활동연도 : +1/2세기경?
같은이름 : 아뽈리나리스
성 아폴리나리스의 이름은 이탈리아의 라벤나 근교에 있는 산 아폴리나리스 인 클라세(San Apollinaris in Classe) 대성전의 묘비명 때문에 잘 알려져 있는데, 그에 따르면 그는 초대교회의 순교자 중 한 사람이었던 같다.
그러나 그가 언제 순교했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고, 단지 1세기경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문헌은 라벤나의 주교였던 성 베드로 크리솔로구스(Petrus Chrysologus, 7월 30일)의 “설교집” 128장이다.
그는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난 것으로 여겨지나 그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언제 주교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7세기에 기록된 행전에 의하면 사도 베드로(Petrus)에 의해 라벤나의 초대주교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그는 라벤나의 초대주교로서 약 26년 동안 주교직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여러 기적을 행하였으며 설교로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고 우상숭배자들에게 엄격했다고 한다. 박해자들로부터 혹독한 폭행을 당해 거의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난 뒤에도 계속해서 라벤나 근교에서 복음을 전하던 그는 다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7월 23일 순교하였다.
그의 축일은 현 로마 가톨릭 전례력에서 7월 20일(이전 7월 23일)로 변경하여 경축하고 있다.
성 엘리야 (Elijah)
활동년도 : +9세기경BC
신분 : 구약인물, 예언자
지역 :
같은 이름 : 앨리아, 엘리아스
성 엘리야(Elias)는 기원전 9세기경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였던 예언자이다. 히브리어 이름의 어원적 의미는 ‘나의 하느님은 야훼이시다’이다. 구약성서(1열왕 17-19장, 21장; 2열왕 1-2장)에서는 엘리야를 제자인 엘리사(Eliseus, 6월 14일)에 비해 비교적 덜 관대하게 소개하고 있다.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그의 활동 시작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없으며, 엘리사와는 달리 예언자로서 소명을 받은 이야기도 전하지 않고 생애 마지막 역시 마찬가지이다. 역대기(21,12)에서는 그의 활약을 아예 언급하지 않으면서 엘리야가 왕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낸 것으로만 전하고 있다. 그러나 예언적 전승(말라 3,23)이나 지혜 전승(집회 48,1-11)은 이스라엘 후기에 엘리야가 이스라엘 영성에 있어서 핵심 인물로 누린 명성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그는 시종일관 ‘티스베 사람’이라고 불렸는데 그 뜻이 명확하지 않다. 칠십인역에서는 요르단 강 건너편 북쪽에 있는 한 지역, ‘길르앗의 티스베’(1열왕 17,1)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히브리어 구약성서인 마소라 본문은 엘리야를 ‘길르앗의 거류민’이라고 하며 ‘티스베’라는 곳은 찾아볼 수가 없다. 엘리야 자신에 관한 역사적인 모습은 기적적인 전설들 속에 감추어져 있다. 심지어는 그의 이름조차도 그의 열성을 반영하는 가명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하지만 엘리야 이야기들의 구조와 세부 묘사들은 예언 말씀, 엘리야의 소명, 그리고 모세의 전승과 연결되고 예언 계승에 대하여 잘 발전된 신학적 사고를 밝히고 있다. 엘리야의 역할은 이스라엘의 예언 전승 안에서 흥미를 끄는 특성으로 묘사되었다. 즉 엘리야는 야훼 신앙 수호의 영웅으로, 진실한 하느님의 말씀을 말하는 예언자이며 왕가의 압박에 저항하며 살아있는 신앙을 수호한 예언자라는 것이다.
구약 후기 중간 시기 문헌과 랍비 전승에서는 엘리야가 이 세상에서 신비하게 사라진 것에 대해 미래의 하느님 승리의 날에 유일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말라기 3장 23-24절에서는 그가 주님의 날의 선구자라고 예언하였다. 그는 평화를 가져올 것이며 랍비들의 율법 논쟁을 해결할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엘리야가 메시아 전승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메시아의 선구자로 여긴다. 이러한 점이 후기 유대 전승에서 약화되었다 할지라도 널리 퍼진 이 특징의 대부분은 열왕기(1열왕 17장) 이야기들의 영향이다. 그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하여 사회악과 싸우며 불의한 이를 징벌한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전설의 인물로 남아있다. 그는 중세 민속학에서는 방랑하는 유다인으로 여겨졌고, 유월절 식탁에는 그를 위한 자리가 ‘엘리야의 잔’과 함께 항상 마련되었다. 그는 새로운 탄생의 보호자로 여겨졌으며 ‘엘리야 의자’는 할례식에 고정되어 있다. 엘리야는 이슬람교 전승에도 강하게 남아있다. 코란에 엘리야는 ‘정의로운 사람들’ 명단에 들어가 있으며, 바알 숭배를 철저하게 적대시하는 임무를 지닌 사람으로 되어 있다.
신약성서는 여러 문맥에서 엘리야를 언급하고 있다. 복음서들은 전승에서 착상하여 “먼저 엘리야가 와야만 한다”고 말한다(마르 9,11; 말라 3,23-24 참조). 또한 엘리야가 불행한 이들을 위하여 호의적으로 개입할 것(말라 15,35-36 참조)을 기다리는 민간 신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루가 전승에 의하면, 예수를 새로운 엘리야라고 하였다. 예수는 엘리야를 언급하며 자신의 고유 임무를 규정하였다(루가 4,25-26). 요한 복음서에서는 세례자 요한을 새로운 엘리야로 보았다(요한 1,21. 25). 이 전승은 다른 복음서에서도 나타난다. 엘리야처럼 세례자 요한은 모든 것을 새로이 세우고 또 엘리야처럼 권력가와 충돌하였다. 마지막으로 야고보는 엘리야의 기도가 열렬하여 응답을 받은 그리스도인 기도의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다(야고 5,17-18).
그러나 신약성서에서 무엇보다도 엘리야의 특징적인 모습은 메시아의 선구자로 여겨지는 것이다. 대중의 의견은 예수를 이 모습과 동일시하고, 반면에 예수는 세례자 요한과 동일시한다. 엘리야는 예수의 거룩한 변모 때 모세와 함께 예수의 곁에 있었다. 만일에 모세가 율법을 떠오르게 한다면 엘리야는 예언자를 떠오르게 한다(마태 5,17). 그리고 예수는 그것을 완성하러 왔다.
성녀 마르가리타(마리나)Santa Marina (Margherita)
성인의 활동지역 : 안티오키아(Antiochia)
성인의 활동연도 : 연대 미상
성인과 같은이름 :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그녀는 원래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살던 어느 이교 사제의 딸이었으나, 어느 크리스챤 유모 밑에서 자라났다. 이리하여 크리스챤이 된 그녀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집을 나와서 자기 유모와 함께 양을 치며 살았다. 그러나 그 지방의 장관인 올리브리우스가 우연히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와 높은 지식을 보고는, 자기 아내와 이혼하여 결혼코자 하였다. 그녀는 한발자욱도 움직이지 않자, 이윽고 크리스챤이란 죄목으로 투옥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용으로 변한 사탄의 공격을 받아 곤경에 몰렸을 때, 항상 품고 다니던 십자가로써 극적으로 퇴치하였다.
그 후 그녀는 수많은 방법으로 고문을 당하였으나, 오히려 그녀의 용덕을 지켜보던 관중들이 마음으로 크리스챤이 될 각오를 새롭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따름이었다.
그녀는 참수치명하였는데, 실제로 그녀의 죽음은 그 지방에 수많은 개종자를 낳았던 것이다.
로마 순교록에는 "위대한 순교자 마리나"라고 기술한 뒤에 마르가리따의 행적이 나온다. 그러나 마르가리따가 보편적으로 알려진 이름이며, 쟌다크에게 계시를 준 성녀이다
확실한 연대는 모르나 이는 아마도 디오클레시아노 황제 때인 307년 경이었으리라.많은 시인과 문인들이 박해의 광풍에 휩쓸려 사라진 꽃 마르가리타의 장렬한 최후를 아름다운 말로 그려냈으며, 각 지방에는 그녀에게 봉헌된 성당이 많이 건립되었고, 많은 부인들은 그녀를 수호 성녀로 삼아 영구히 그녀의 아름다운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성녀 마르가리타 (Margaret) - 안티오키아
오늘은 굳건한 신앙으로 사탄을 물리치는 성녀!! 안티오키아의 마르가리타 성녀에 대해 성인들에 관한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황금전설’에 근거해 주요 일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마르가리타는 안티오키아에서 출생했으며 부친의 이름은 테오도시오로서 이교도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녀는 신앙심이 깊은 유모에 의해 그리스도인으로 교육받으며 자라났습니다.
마르가리타가 15살쯤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양떼를 돌보고 있는 유모와 함께 초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었는데 올리브리오라는 그 지방의 총독이 그곳을 지나다가 곱디 고운 마르가리타를 보고는 부하들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 처녀가 귀족이면 내 신부로 맞아들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내 정부(情婦)가 되게 할 것이다.”
사령관에게 불려간 마르가리타는 이름과 자신이 귀족 출신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리스도 교인임을 당당히 밝혔다고 해요.
이교도인 총독은 소녀가 귀족 처녀라는 사실과 이름에 버금가는 아름다움을 지녔음을 놀라워하면서 그런 여인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당치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마르가리타는 총독에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의 영광에 대해서 읽었으면서도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용기있게 말하면서,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을 위해 고난을 받으셨고, 영원한 삶을 위해 부활하셨음을 당당하게 밝혔습니다. 이처럼 당당한 처녀의 답변에 화가 난 총독은 마르가리타를 감옥에 투옥시키라 명했으며 다음날 그녀를 관청으로 불러 심문했지요.
“어리석은 소녀여, 네 아름다움이 아깝도다. 우리들의 신을 믿으면 너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인데 그리 함이 어떠한가?”
마르가리타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땅과 바다와 모든 창조물을 떨게 하시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리스도는 저희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저 역시 그분을 위해 죽기를 희망합니다.”
올리브리오 총독은 그녀를 형틀에 묵어서 몸을 쇠스랑으로 찍는 등 모진 고문을 가했고, 마르가리타는 살점이 떨어져 나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될 때까지 고문을 당했다고 합니다.
마르가리타는 하느님께 자신이 싸우고 있는 적, 즉 사탄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거대하고 흉악한 용이 나타났는데 마르가리타가 성호를 긋자 곧바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마르가리타를 그린 그림에서 용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지요.
이 그림은 라파엘로가 그린 작품으로 성호경을 긋자 용이 사라졌다는 일화를 암시하기 위함인 듯 십자고상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