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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4일 주일
[(녹) 연중 제18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18주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창조하신 풍요로운 자원을 사람들 손에 맡기시고, 당신 자녀들인 우리의 식탁에 음식이 모자라지 않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당신 말씀에 대한 열망을 키우시어, 진리에 대한 배고픔을 채우게 하여 주시기를 청합시다.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하늘에서 양식을 비처럼 내려 주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고 권고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하시며, 당신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주리라.>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16,2-4.12-15
그 무렵 2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가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였다.
3 이들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이 말하였다.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그런데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
4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백성은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나는 이 백성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해 보겠다.
12 나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너희가 저녁 어스름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양식을 배불리 먹을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주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13 그날 저녁에 메추라기 떼가 날아와 진영을 덮었다.
그리고 아침에는 진영 둘레에 이슬이 내렸다.
14 이슬이 걷힌 뒤에 보니,
잘기가 땅에 내린 서리처럼 잔 알갱이들이 광야 위에 깔려 있는 것이었다.
15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이게 무엇이냐?” 하고 서로 물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여러분은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4,17.20-24
형제 여러분, 17 나는 주님 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헛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민족들처럼 살아가지 마십시오.
20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21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하여 듣고 또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압니다.
22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23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24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24-35
그때에 24 군중은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25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28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30 그들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31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33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34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이집트의 고기 냄비는 ‘옛 인간’의 생활 방식입니다. 그런데 옛 인간의 삶은 충만하지 않습니다. 광야 길에 지친 이스라엘이 이미 잊은 듯하지만, 이집트는 설령 먹을 것이 있었다 하여도 종살이하던 집이었습니다. 그 땅에서 이스라엘이 억눌려 부르짖었기에 하느님께서 들으시고 그들을 해방시켜 주시는데, 이스라엘은 그 해방을 잊고 음식이 주는 쾌락을 찾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람을 속이는 욕망”(에페 4,22)이라는 표현이 특별히 눈에 들어옵니다. 욕망, 어떤 것을 좋다고 여겨 그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사람을 속인다고 말하는 것은 그 대상이 참으로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호수 건너편까지 애써 예수님을 따라간 이들은 무엇을 찾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께 빵을 청하지만, 막상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바로 생명의 빵이시라고 말씀하실 때는 그분을 떠나갈 것입니다.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이 옛 인간에게 속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날마다 음식을 구하려고 수고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지금 찾고 있는 것을 더 이상 찾지 말라고, 그 빵이 생명을 주지 않는다고 말씀하실 때 그들은 옛 인간을 벗어 버리지 못합니다. 마치 이집트의 음식을 그리워하여 종살이에서 해방되기를 바라지 않는 이들처럼, 내 손으로 붙잡을 수 있어 보이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더 큰 선물을 받지 못합니다. 이들은 배까지 마련하여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은 옛 인간을 만족시키는 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성찰 없는 성공이 곧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무실에 직원이 없는 관계로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면서, 비슷한 일을 하시는 분들의 고충과 애환을 120퍼센트 온몸으로 체험합니다. 대체로 안 그러시지만, 일단 내려 까고 시작하시는 분들도 꽤 계십니다.
주방에서, 분리수거장에서, 들판에서 땀흘리며 일을 하고 있노라면, 일단 바라보는 특유의 시선도 느낍니다.
아직도 우리 안에는 척결하고 극복해야할 측면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감정 노동 종사자들, 서비스 업종 종사자들, 요식 업소 종사자들, 그 얼마나 소중한 일에 종사하고 계시는데, 보다 존중받아야 하고 배려받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매일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일은 정말 우리에게 큰 의미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스스로 표현하고, 주님의 창조 사업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 어떤 일을 하던 직종에 상관없이 기쁨과 열정을 갖고 하면, 그 일이 바로 주님을 위한 일이고, 가치있는 일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일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썩어 없어질 양식과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내게 있어 썩어 없어질 양식은 무엇이며,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에 혈안이 된 사람들의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마음과 내면, 영혼과 본질을 우선시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그럴싸한 말과 결과에만 몰두합니다. 그 끝은 언제나 실망과 허탈함과 좌절감입니다.
베트남의 성자 구엔 반 투안 추기경께서는 아무런 죄도 없이 견뎌내야 했던 오랜 독방생활 중에, 철저한 고독, 치열한 자기 극복의 과정, 열렬한 기도 끝에 그 둘을 구별할 줄 아는 식별력을 얻었습니다. 그는 한치 눈앞의 것에만 몰두하지 정작 가장 중요한 본질에 소홀히 하고 있는 우리를 향해 외칩니다.
“영원이라는 상표를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은 어떠한 것이든 가짜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들이 지닌 공통된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외양이 그럴듯 해보이지만 유한하다는 것입니다.
영원할 것 같지만 실상 잠시 지나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영원성, 지속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추구하는 성찰 없는 성공이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겸손이 사라진 권위가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양심과 지성이 결여된 명예가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정직과 나눔이 없는 부가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참된 부와 그릇된 부,
진품과 명품, 영원한 보화와 짝퉁을 구분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인간은 각자의 이것을 발견하기까지 굶주리고 목마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예수님께서 ‘성체’라는 주제로 이끄시는 내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내어주셔 교회를 먹이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에너지가 떨어져 지쳐감을 의미합니다. 언제 사람이 지칠까요? 불안할 때입니다. 안 좋은 감정은 사람을 지치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차피 죽어야만 하는 인간의 처지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와 같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다면 사람이 지치지 않을까요?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 죽음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죽음을 더 큰 공포를 피하기 위한 피신처로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인정받지 못함’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와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더 많은 인정을 받았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도 그의 그림을 사주지 않고 더는 작가로서 좋은 글이 써지지 않을 때 그들은 자신들을 가치 없는 존재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전 KBS 아나운서인 이혜성 씨는 똑똑하고 예쁘면서도 ‘인정중독’에 빠져있었습니다.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녀는 공부를 잘해서 세상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고 아무리 인정을 받아도 배가 고파서 폭식증에 시달렸습니다. 먹으면 멈출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싶은 마음, 이것이 배고픔이고 목마름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어떻게 그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요? 부모의 사랑을 받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인정받음입니다. 우리는 커다란 진주를 들고 시장에서 그것을 팔려고 다니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아이가 그렇게 귀한 물건을 들고 다닐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아이에게 그 진주를 준 부모만이 그 진주의 가치를 압니다. 우리 각자는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라는 진주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을 나를 창조하신 분에게 봉헌한다는 말은 그분만이 그것을 5천 명을 먹이실 만큼의 가치로 만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빅터 프랭클의 ‘로고 테라피’, 곧 의미 치료를 한국에 소개한 책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의 공동 저자 박상미 교수는 24세 때 수돗물이 얼 정도로 단열이 안 되는 옥탑방에서 인생을 끝내려 하였습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살아왔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고 남자친구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와 몰래 사귀고 있었으며 가난은 그녀를 더는 버티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수면제를 먹고 이틀 동안 잠들어 있다가 깼을 때 그녀는 극심한 고통과 함께 자기 죽은 몸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죽기를 원했던 그녀는 “살려주세요!”를 연발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다시 몸속으로 돌아왔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삶이 주어진 은총이라고 믿으니 그 삶을 주신 분이 왜 자신을 창조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결국 그녀는 자신처럼 심리적 고통을 받는 이들에게 의미를 찾아주는 일을 하기 위해 공부하였고 그것을 전하며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당신 살과 피는 내 빵과 물고기를 바치게 만듭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을 창조자로 믿고 그분이 나를 창조하신 뜻에 집중하는 일입니다. 저도 저 자신을 바치는 것을 아까워하며 불만에 싸여있을 때 성체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음성을 들었고 그제야 나의 죄를 깊이 뉘우치며 “제가 무엇을 해 드리면 좋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나의 사명을 깨닫게 되었을 때 더는 신학교 생활이 지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이유는 나를 바쳐 목숨을 걸고 수행할 사명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찾지 못한 이유는 나의 가치를 알려주기 위해 살과 피를 내어줄 존재를 아직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가 바로 아이가 부모를 만나듯이 우리가 당신 생명보다 소중한 존재라고 알려주는 창조자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7)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양식을 통해 우리가 할 일을 알려주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7월 9일에 휴가를 떠난 부주임 신부님이 이번 주 목요일에 돌아옵니다. 건강하게 잘 돌아 올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제가 보좌신부로 있을 때도 휴가를 갔습니다. 당시에는 월요일에 가서 금요일에 오는 일정이었습니다. 주일을 껴서 휴가를 간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여름 행사를 마치면 주로 바닷가로 가서 스쿠버 다이빙을 했습니다. 겨울 행사를 마치면 산으로 가서 스키를 타거나, 산행을 했습니다. 시간도 흐르고, 세상도 바뀌어서 요즘은 주일을 포함한 휴가를 가곤합니다. 휴가를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건강입니다. 건강하지 못하면 휴가를 즐기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휴가는 몸이 떨릴 때 보다는 마음이 떨릴 때 가라고 합니다. 둘째는 시간입니다. 지나치게 바쁘면 시간을 낼 수 없습니다. 하루하루 빠듯하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휴가를 간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전에 이런 광고도 있었습니다. ‘열심히 일한 사람! 휴가를 떠나라!’ 셋째는 여유입니다. 휴가를 가려면 비용이 필요합니다. 휴가 중에도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안정적인 직장이 있어야 합니다. 가난한 나라, 가난한 사람에게 휴가는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닙니다. 넷째는 친구입니다. 혼자서 휴가를 갈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친구와 함께 휴가를 떠납니다. 저도 피정은 혼자서 간 적이 있지만, 휴가는 늘 친구와 함께 다녔습니다. 바쁜 일상을 떠나서 몸과 마음을 여유롭게 재충전하는 휴가를 떠날 수 있는 것도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휴가는 주차장이 아닙니다. 휴가는 주유소와 같습니다. 주유를 마치면 차는 다시 목적지로 떠나기 마련입니다. 휴가라는 주유를 마치면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당은 주차장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당에 와서 영적인 말씀을 듣습니다. 성당에 와서 기도합니다. 그렇게 영적인 주유를 마치면 가정으로, 직장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내가 받은 영적인 충만함을 가족과 이웃에게 나누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인도의 간디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존경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존경하지 않습니다. 간디의 눈에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수레바퀴를 굴리면서 살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먹을 양식이 없다고 불평하였습니다. 일용할 양식이 없다면 삶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만나’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의 문제가 해결되어도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늙게 되고, 뜻하지 않지만 병이라는 친구가 불쑥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삶의 시계가 멈추고 우리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운명입니다. 이런 삶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참된 신앙인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이런 삶의 수레바퀴를 벗어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삶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야만 비로소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우리 신앙인들은 ‘인생’이라는 짧은 휴가를 보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 인생이라는 휴가에서 영적인 주유를 잘 마치고 우리의 본향인 영원한 생명에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배움이 많아도, 신앙이 깊어도, 오랜 수도생활을 했어도 우리는 이 짧은 휴가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돌아가야 할 곳을 모르고 방황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은 무엇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 양식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새 인간을 입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한다. 같은 마음으로 그리스도인을 존경한다.”
오늘의 성인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John Mary Vianney)
신분 : 신부
활동지역 : 아르스(Ars)
활동연도 : 1786-1859년
같은이름 :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Joannes Maria Vianney)는 1786년 5월 8일 프랑스 리옹(Lyon) 근교에서 열심한 가톨릭 신자로 농부인 마태오와 마리 블루즈 사이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비안네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고, 5세 때에는 파리(Paris)에서 가톨릭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추방되고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비안네는 어린 시절을 주로 부친의 농장에서 양을 치면서 지냈다. 정규 교육은 몇 개월밖에 받지 않았지만,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여 비밀리에 첫 고해(1794년)와 첫영성체(1796년)를 받았다.
18세 때 부친의 허락을 받고 에퀼리(Ecully) 본당 발레(Balley) 신부의 지도를 받으며 개인적으로 사제직을 위한 공부를 시작하였으나 기초 교육이 부족하고 수학 능력도 많이 떨어졌다. 특히 라틴어 공부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정식으로 등록되어 있지 않은 신학생이었던 비안네는 1809년에 징집을 당해 갖은 고통을 겪었다.
1811년에 베리에르의 소신학교에 입학하여 철학 과정을 공부하고 1813년에는 리옹의 대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였으나, 라틴어 성적이 좋지 않아 1년 만에 퇴학당한 비안네는 학과 성적은 부족하였지만 발레 신부의 도움으로 신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신심과 성품을 인정받아 1815년 8월 13일 그르노블(Grenoble)에서 시몽(Simon)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제 서품 후 발레 신부가 있는 에퀼리 성당에서 2년 동안 보좌 신부로 생활한 비안네 신부는 1818년에 230여 명의 주민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 아르스의 본당신부로 부임하였다. 그는 여기서 죽을 때까지 42년 동안이나 봉직하면서 주민들에게 열렬한 신심을 불어넣었다. 이러한 비안네 신부의 노력으로 아르스의 종교적인 분위기는 일신되었고, 그 또한 설교자와 고해신부로 대단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 결과 1827년부터 수천 명의 고해자들이 그에게 성사를 받기 위해 한적한 시골 마을 아르스로 찾아올 정도였다. 매년 2만여 명의 신자들이 비안네 신부를 찾아왔기 때문에, 그는 오전 11시에 설교를 하고 성무일도와 식사, 특별한 상담 시간을 제외하고는 매일 새벽부터 저녁때까지 약 18시간 정도 고해성사를 주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동료 사제들은 그를 잘못 판단하고, 그를 무식하고 지나치게 열성적이며 허풍선이라고 비난하곤 하였다. 이에 대해 그의 주교는 “저 신부만큼이나 모두 미쳤으면 좋겠다.”고 하며 그를 옹호하였다.
이렇게 열심한 그 역시 가끔씩 사탄의 유혹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성품은 지극히 단순하였고, 충고는 간단명료하였으나 신심이 차고 넘쳤으며 직선적인 설교를 하였다. 순례자들의 소란, 끊임없는 고해성사 요구들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단지 세 번 아르스를 떠났는데, 그것은 모두 수도원에 잠시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비안네 신부는 열심한 성무에 지친 나머지 1859년 8월 4일 73세의 나이로 아르스에서 사망하였다. 1905년 1월 8일 교황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복자가 된 비안네 신부는, 1925년 5월 31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시성되었으며, 1929년에는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본당 신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성 엘레우테리오 (Eleutherius)
신분 : 순교자
활동지역 :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활동연도 : +310년
성 엘레우테리우스(또는 엘레우테리오)는 타르수스(Tarsus)에서 순교하여 그곳에 묻혔다. 그의 무덤은 유명한 순례지가 되었고, 그의 순교 이야기는 로마 순교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다지 신뢰할 만하지는 않다. 콘스탄티노플에는 그를 기리는 성당이 세워졌다.
볼랑디스트(Bollandists, 성인전집 Acta Sanctorum을 편집하여 간행한 벨기에의 예수회 학자들을 가리키는 말)는 2월 20일에 축일을 기념하는 성 엘레우테리우스 주교 순교자와 그를 동일인으로 보고 있다.
성 아리스타르코 (Aristarchus)
신분 : 바오로의 제자, 주교
활동지역 : 테살로니카(Thessalonica)
활동연도 : +1세기
그리스 테살로니카 태생의 성 아리스타르쿠스(또는 아리스타르코)는 사도 성 바오로(Paulus)의 전교여행의 동료 중 한 명이다(사도 20,4; 27,2; 필레 1,24).
그는 에페수스(Ephesus)에서 사도 바오로와 함께 체포되어 같이 투옥되었다.
전승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테살로니카의 초대 주교이며 네로 황제 때에 로마에서 사도 바오로와 함께 참수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