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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5일 월요일
[(녹)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성모 대성전 봉헌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백성을 거짓에 의지하게 하는 하난야 예언자와 온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설전을 벌이고,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하난야가 죽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되는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다(복음).
제1독서
<하난야, 주님께서 당신을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당신은 백성을 거짓에 의지하게 하였소.>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28,1-17
1 유다 임금 치드키야의 통치 초기 제사년 다섯째 달에,
기브온 출신의 예언자이며 아쭈르의 아들인 하난야가
주님의 집에서 사제들과 온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에게 말하였다.
2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바빌론 임금의 멍에를 부수기로 하였다.
3 두 해 안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이곳에서 가져가 바빌론으로 옮겨 놓은 주님의 집 모든 기물을,
내가 이곳에 다시 돌려 놓겠다.
4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다 임금 여호야킴의 아들 여콘야와
유다의 모든 유배자를 이 자리에 다시 데려다 놓겠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정녕 바빌론 임금의 멍에를 부수겠다.’”
5 그러자 예레미야 예언자가 사제들과,
주님의 집 안에 서 있는 온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난야 예언자에게 말하였다.
6 예레미야 예언자가 말하였다.
“아무렴, 주님께서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소!
주님께서 당신이 예언한 말을 실현시키시어,
주님의 집 모든 기물과 모든 유배자를 바빌론에서
이곳으로 옮겨 주시기를 바라오.
7 그러나 이제 내가 당신의 귀와 온 백성의 귀에 전하는 이 말씀을 들어 보시오.
8 예로부터, 나와 당신에 앞서 활동한 예언자들은
많은 나라와 큰 왕국들에게 전쟁과 재앙과 흑사병이 닥치리라고 예언하였소.
9 평화를 예언하는 예언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그가 참으로 주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드러나는 것이오.”
10 그러자 하난야 예언자가 예레미야 예언자의 목에서 멍에를 벗겨 내어 부수었다.
11 그러고 나서 하난야는 온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말하였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두 해 안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멍에를
모든 민족들의 목에서 벗겨 이와 같이 부수겠다.’”
그러자 예레미야 예언자는 자기 길을 떠났다.
12 하난야 예언자가 예레미야 예언자의 목에서 멍에를 벗겨 부순 뒤에,
주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내렸다.
13 “가서 하난야에게 말하여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나무 멍에를 부수고, 오히려 그 대신에 쇠 멍에를 만들었다.′
14 참으로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 모든 민족들의 목에 쇠 멍에를 씌우고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길 것이다. 나는 들짐승까지도 그에게 넘겨주었다.′’”
15 예레미야 예언자가 하난야 예언자에게 말하였다.
“하난야, 잘 들으시오.
주님께서 당신을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당신은 이 백성을 거짓에 의지하게 하였소.
16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오.
‘내가 너를 땅 위에서 치워 버리리니, 올해에 네가 죽을 것이다.
너는 주님을 거슬러 거역하는 말을 하였다.’”
17 하난야 예언자는 그해 일곱째 달에 죽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3-21
그때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13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1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15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16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17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19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20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21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예레미야는 하난야의 말에 “주님께서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소!”(예레 28,6)라고 말합니다. 그는 멸망을 바라지 않지만, 하느님의 말씀이 심판을 선고하라는 것이었기에 그 말씀을 선포합니다. 하난야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는데도 임금과 백성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물리쳐 버립니다.
내 마음 안에도 참예언자와 거짓 예언자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알아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때는 명백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고 받아들일 때도 있지만, 알면서 거부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 있는 거짓 예언자가 나를 속이는 순간에는, 정말 깊이 돌아보지 않으면 속아 넘어갑니다. 사람들이 하난야의 말을 따라가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네부카드네자르의 멍에를 부수시고 성전 기물들을 되찾게 하여 주신다는 말이, 그들이 믿고 싶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마음 안에서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 있을 때, 그 마음으로 속게 됩니다.
그런 마음은 여러 가지 그럴듯한 이유를 대면서 하느님의 뜻이라고 속삭입니다. 식별은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예측을 벗어나기 때문에, 어떤 도식에 따라 간단하게 알아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난야에게, 평화를 예언할 때는 그 말이 이루어져야 참예언자로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멸망을 예언할 때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심판 선고를 들은 이들이 회개하면 그 심판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을 때는, 진실하게 깨어 있는 사람만이 그것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것들은 쉽게 이해가 되지만, 어떤 것들은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성서 해석의 기준을 정하였습니다. 첫 번째 성서 해석의 기준은 ‘말씀’ 그대로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말씀 그대로의 해석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2000년 전과 지금은 제도와 문화가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에는 신분제도가 있었습니다. 왕정국가였습니다. 한 국가에는 한 종교가 허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권과 신권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방의 종교는 인정받지 못하였고, 이방의 종교는 박해의 대상이었습니다. 두 번째 성서 해석의 기준은 ‘윤리와 도덕’입니다. 윤리와 도덕은 시간과 장소에 크게 영향받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를 도와주고, 병든 이를 치료해 주고, 어린이를 돌보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강론과 말씀에 대한 해석은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세 번째 성서 해석의 기준은 ‘영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도,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재물과 권력으로는 우리의 썩을 몸을 구할 수 없습니다. 진시황제도, 알렉산더도, 나폴레옹도 많은 재물과 권력을 가졌지만 모두 썩어 한 줌의 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줍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야 합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꾼의 품삯에 관해서 이야기하셨습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도, 오후에 일한 사람도, 저녁이 되어서 일한 사람도 똑같은 품삯을 받았습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도,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것은 세상에서의 능력과 재능이 아닙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것은 세상에서 쌓아온 업적과 성과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남은 것을 모아보니 12 광주리가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여러 표징을 보여 주셨던 것처럼 그런 표징을 보여 주실 수 있다는 해석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이 표징이 복음을 읽는 나와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그냥 예전에 있었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이는 누군가가 자신의 것을 나누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 표징이 복음을 읽는 나와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는 놀라운 표징을 보여 주실 수 있습니다.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지하에 있는 많은 물을 끌어 올릴 수 있듯이, 우리의 나눔은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됩니다. 기쁨이 됩니다. 수단에서 이태석 신부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오웅진 신부님이 꽃동네에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의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서 나눔의 풍요로움을 볼 수 있습니다.
영성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표징이 복음을 읽는 나와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날이 오면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거기에는 사자도 없고 맹수도 들어서지 못하리라. 그런 것들을 볼 수 없으리라. 구원받은 이들만 그곳을 걸어가고 주님께서 해방하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으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그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라.”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나눔의 차원을 넘어서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그분께 드리니>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마태 14,18)
나
가진
한 그릇의 밥
그분께 드리니
그분께서
모든 이를
맛나게 먹이시네
나
가진
한 줌의 기쁨
그분께 드리니
그분께서
모든 이를
활짝 웃게 하시네
나
가진
한 모금의 시간
그분께 드리니
그분께서
모든 이를
넉넉하게 돌보시네
나
가진
한 가락의 눈길
그분께 드리니
그분께서
모든 이를
부드럽게 살피시네
나
가진
한 옴큼의 마음
그분께 드리니
그분께서
모든 이를
따뜻하게 품으시네
오늘의 축일
성모 대 성전 봉헌 축일
성모 설지전(聖母殿)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인 352년 에스퀼리노 언덕위에 성모 마리아를 위하여 세워졌으며 유럽 가톨릭 교회 사상 최초로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당으로, 처음에는 ’성모 설지전’이라고도 하였다.
5세기에는 교황 식스또 3세가 성당을 확장, 개축하였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때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탑이 건축되었다. 건물은 중앙의 신랑(身廊)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 20개의 이오니아 식 열주(列柱)로 좌우 측랑(側廊)이 나뉘어진 전형적인 성당이다. 성당의 내부는 신랑(身廊)의 양벽, 위, 승리의 아치 위, 넓은 후진, 정면의 안쪽이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 되었다.
이 중의 승리의 아치 위에 있는 것과 신랑(身廊) 벽 위에 있는 것은 5세기의 것이라고 한다. 이들 모자이크는 성서의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그 아름다움과 신비함으로 이 성당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에페소 공의회가 431년 예수의 어머니를 ’천주의 모친’이라고 장엄하게 선포한 후 교황 시스또 3세(432-440)는 로마의 에스킬리노 언덕에다 천주의 거룩한 모친을 기념하여 대성당을 재건하였는데, 훗날 그 성당은 성모 대성당(산타 마리아 마죠레)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것은 서방에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바친 가장 오래 된 성당이다.
352년부터 366년에 이르는 13년간, 즉 성 베드로를 계승한 교황 리베리오 시대에
로마에 요한이라는 독실한 신자인 귀족이 있었다.
오래 전부터 역시 경건한 아내를 맞이하여 평화스럽고 원만한 가정을 이루어 행복한 나날을 보내었으나, 그 가정에 부족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곧 자녀가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자녀를 얻기 위하여 열심히 기도를 했다.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딴 곳에 있었음인지 그의 기도도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고 둘이 다 연로해져 이제 다시는 자녀에 대한 희망조차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막대한 재산을 성모께 바치기로 했다.그런데 어떻게 바쳐야 되는지를 모르던 두 부부는 열심히 기도하며 자선도 하고 단식제를 지키며 주님의 계시만 기다렸다.그의 소원은 드디어 이루어졌다.
즉 8월 4일이 지나 5일이 되는 밤중에 거룩하신 동정녀 마리아께서는 그 부부의 각자의 꿈에 나타나시어 “로마의 에스퀼리노 언덕에 나를 위한 성당을 세워라. 그 장소는 눈이 하얗게 내린 곳이니 즉시 알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아무리 묵시라고는 하지만 찌는 듯한 이 삼복 더위에 과연 눈이 왔을까 하는 반신 반의의 생각에서 우선 날이 새기만 기다렸다. 동이 트자 둘이 달려가 본즉 어찌 된 일인가! 과연 눈이 하얗게 와 있지 않은가! 그것도 꼭 성당을 지을 장소에만 눈이 내려와 딴 곳은 전혀 눈이 내리지 않았다.
신기함과 기쁨에 사로잡힌 부부는 곧 교황 알현을 청했다. 교황께 그이야기를 말씀드리니, 교황께서도 다른 사제들을 대동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이미 소식을 듣고 그곳에 모여든 수많은 군중들은 삼복 중에 백설을 보고 이는 거룩하신 동정 성모의 순결을 상징함이라 하며 모두들 경탄해 마지 않았다. 이런 뚜렷한 기적을 본 군중들은 모두 감동되어 하느님과 성모께 찬미를 드렸다. 모두가 성모를 위한 헌신적 정신에서 이 공사에 임했으므로 참으로 눈부신 진척을 보았고, 그 이듬해에는 교황께서 그 성당 축성을 하게끔 되었던 것이다.
이 새 성당은 성모께 봉헌한 성당이면서도, 최초에는 이와 관계가 깊은 성스러운 교황의 이름을 따라 리베리오 성당이라고 불렀다. 그 후 예루살렘에서 아기예수가 누웠던 말구유가 이 성당에 안치된 후부터는 말구유의 성모 성당이라고 불렀으나 로마의 다른 성당과 구별하기 위해 이를 ‘마리아마죠레’ 즉 ‘대 성모 성당’이라고 했다. 이는 그 규모의 미려함이 다른 성당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8월 5일 삼복 더위 중에 내린 기적적 백설(白雪)을 기념하기 위하여 ‘성모 설지전(聖母雪地殿)’이라고도 한다.
이 성당은 지금도 로마에 웅장하게 솟아 있어 그 고귀한 대리석이며 정교한 모자이크의 아름답고 화려함은 비할 데가 없다.
이 성당에는 많은 유물이 안치되어 있으며 계속 각국에서 순례객들이 와서 기도를 바치고 있다. 즉 이 성당은 순례자들이 반드시 참배하는 로마의 대 성당 중의 하나로 되어 있다.
오늘의 성인
성녀 논나(Nonna)
신분 : 부인, 평신도
활동지역 : 나지안주스(Nazianzus)
활동연도 : +374년
자세한 전기는 알 수 없으나 성녀 논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레고리우스(Gregorius)란 사람과 결혼했는데, 남편은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나지안주스의 지사였으며 유대인 이교인 그룹의 주요 멤버였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표양만으로 남편을 그리스도인으로 개종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제가 되게 하였고, 그 후에는 주교까지 된 나지안주스의 성 그레고리우스(1월 1일)를 후원한 장본인이다. 그녀의 세 아이들 역시 모두 성인이 되었다. 나지안주스의 성 그레고리우스(1월 2일), 나지안주스의 성 카이사리우스(Caesarius, 2월 25일) 그리고 성녀 고르고니아(Gorgonia, 12월 9일)가 그들이다.
성녀 아프라 (Afra)
활동년도 : +304년경
신분 : 순교자
지역 :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같은 이름 :
로마 아우크스부르크의 초기 순교자 명단에 성녀 아프라가 나타나지만 역사적인 근거는 희박하고 전설로만 전해온다. 그녀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의 박해 때 그리스도인으로 체포된 매춘부였다고 한다. 감옥에서 그녀는 하느님을 포기하라는 심문에 대하여 “내 몸은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아 마땅하나, 내 영혼을 이런 우상으로 파멸시킬 수는 없다”고 대답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전한다. 아프라는 사형 언도를 받고 레흐(Lech) 강의 섬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그녀의 어머니가 시체를 거두어 장례를 치렀다고 전해온다.
성 에미그디오 (Emygdius)
활동년도 : +304년
신분 : 주교,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에미그디우스, 에미디오, 에미디우스
전설에 의하면 성 에미그디우스(또는 에미그디오)는 독일 남서부 트리어(Trier)에 살던 이방인 튜튼 사람인데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로마(Roma)로 갔다가 큰 봉변을 당하고 축출되었는데, 그가 이방인들의 신전에 있는 우상을 파괴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후 그는 사제로 서품되어 이탈리아 아스콜리피체노(Ascoli Piceno) 지방을 순회하는 복음 선교사가 되었다.
그가 수많은 개종자를 얻고 선교 사업에서 크게 성공한 이유는 그 자신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체포되어 참수를 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296-304년 사이에 재임하였던 교황 마르첼리누스(Marcellinus)에 의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성 에미그디우스는 지진 방지를 위한 수호자이다. 그는 에미디우스(Emidius)로도 불린다.
성 오스왈도 (Oswald)
활동년도 : 604?-642년
신분 : 왕, 순교자
지역 : 노섬브리아(Northumbria)
같은 이름 : 오스왈두스, 오스왈드
성 오스왈두스(Oswaldus, 또는 오스왈도)는 그의 부친 애설프리스(Ethelfrith)가 616년에 이스트 앵글스(East Angles)의 왕 레드왈드(Redwald)에게 피살되었을 때 노섬브리아에서 스코틀랜드로 강제로 끌려갔었다. 이때 그는 스코틀랜드의 이오나(Iona)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 후 그의 외삼촌인 에드윈(Edwin) 왕마저 머시아(Mercia)의 왕 펜다와 브리튼의 왕 카드왈라에 의하여 피살되자, 그는 군대를 일으켜 카드왈라를 헥스햄(Hexham) 교외의 전투에서 물리치고 노섬브리아의 왕이 되었다.
그는 만일 이 전투에서 승리할 경우에는 이 승리를 성 콜룸바(Columba, 6월 9일)에게 바칠 것이라고 약속하고 전투 전날에는 거대한 십자가를 세웠다. 그리하여 그는 성 아이다누스(Aidanus, 8월 31일)에게 전국에 복음을 선포하도록 도와주면서 린디스파른(Lindisfarne) 섬을 기증하고 주교좌로 삼도록 배려하였다. 그는 성당과 수도원을 많이 세웠고, 스코틀랜드에서 수도자를 이주시켜 자기 백성들의 신앙생활을 돌보게 하였다. 또한 그는 웨식스(Wessex)의 첫 번째 그리스도인 왕 치네질스(Cynegils)의 딸인 치네부르가와 결혼하였는데, 불과 몇 년 후에 펜다와의 전투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