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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11일 주일
[(녹) 연중 제19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19주일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 세상에서 나그넷길을 걷는 교회를 이끄시어, 사라지지 않는 음식으로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빛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힘차게 걸어갑시다.
말씀의 초대
광야에서 엘리야는 천사가 준 빵과 물을 먹고 마신 다음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른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고 권고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며, 그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당신의 살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엘리야는 그 음식으로 힘을 얻어 하느님의 산에 이르렀다.>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9,4-8
그 무렵 엘리야는 4 하룻길을 걸어 광야로 나갔다.
그는 싸리나무 아래로 들어가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저는 제 조상들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5 그러고 나서 엘리야는 싸리나무 아래에 누워 잠이 들었다.
그때에 천사가 나타나 그를 흔들면서, “일어나 먹어라.” 하고 말하였다.
6 엘리야가 깨어 보니, 뜨겁게 달군 돌에다 구운 빵과 물 한 병이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그는 먹고 마신 뒤에 다시 누웠다.
7 주님의 천사가 다시 그를 흔들면서,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 하고 말하였다.
8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 음식으로 힘을 얻은 그는 밤낮으로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여러분도 그리스도처럼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4,30─5,2
형제 여러분, 30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31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32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5,1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41-51
그때에 41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그분을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42 그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4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45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46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4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50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우리가 이미 지니고 있는 믿음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요한 6,41)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뵙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서 이루시는 표징들을 보았는데도 믿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을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분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는 사실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께서 하느님이심을 믿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음을 믿으며, 인간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셨음을 믿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먹으라고 내주셨다는 것도 믿고, 우리가 받아 모신 성체가 그 몸이라는 것도 믿으며, 그 몸이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것도 믿습니다. 지금까지 열거한 내용은 모두 기본 교리이고,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신자가 아니라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믿을 수 있을까요? 어쩌면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리의 논리성을 따지기 전에 어려서부터 이미 신자가 되어 있던 경우도 있고, 성장해서 다른 어떤 이유와 사정으로 믿음을 받아들인 경우도 있으며, 드물게는 책이나 말로 설득되어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신앙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려 할 때도,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거부합니다.
오랫동안 신앙을 지니고 있다 보면, 내가 신앙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놀랍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6,44)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조그마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예수님께 이끌어 주셨기 때문입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오늘 더 깊은 감사의 정으로 성체를 영해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른 새벽부터 밤늦도록 매일 매일 하루 세끼 꼬박꼬박 아이들을 위해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면서 이런저런 묵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매일 먹는 빵, 식사라는 것,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우리 삶 속에서 먹는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 맛있는 식사를 정성껏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복음적인 일인지? 그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식사로 인해 우리의 생명이 지속되니, 그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지상에서의 육신적인 빵의 중요성도 이토록 중요시여기고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지상의 빵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수 없는 천상의 빵, 매일의 성체 성사를 통해 영하게 되는 생명의 빵에 대한 가치와 의미 부여는 과연 어느 정도인가 깊이 성찰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세상의 빵이 지니는 한계가 있습니다. 충분히 먹었는데, 돌아서면 또 먹어야 합니다. 또 다시 허기와 갈증은 반복되고 먹어도 먹어도 온전히 충족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빵이 지니는 유효 기간은 길어야 사흘이요 일 주일입니다. 그래서 늘 내일 먹을 빵에 대해 걱정하고 언제나 허기와 갈증에 시달리는 우리를 향해 오늘 주님께서는 너무나 은혜로운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과분하게도 예수님의 크신 배려와 희생으로 그 영원한 생명의 빵을 언제 어디서든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찾을 수 있고, 언제든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더 깊은 감사의 정으로 성체를 영해야겠습니다. 그 성체로 인해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었으니 더 없이 기쁜 마음으로 찬미의 송가를 불러야 하겠습니다.
트루먼 쇼와 생명의 빵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도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을 먹으면 하늘 나라에 도달할 것이라는 성체성사와 관련된 복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빵이라고 하실 때 의아해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는 것을 본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례 때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하느님 자녀로서 인정받으셨음을 믿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당신을 먹는 이는 죽음을 보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이라 하십니다.
나중에 이들은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말씀에 이해하기 어렵다가 다들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그런데 열두 사도만이 떠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왔을 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보지 못한 ‘표징’이 분명히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5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오늘 복음 사이에 우리가 간과하는 하나의 표징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신 기적입니다. 제자들은 이 표징과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같은 것이었음을 이해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어두울 때 제자들은 호수 중앙에서 큰바람에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십니다. 이들은 지쳐있는 데다 겁까지 집어먹습니다. 예수님은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나다”(I am who “I AM”)라는 말은 탈출기 3,14절에 하느님께서 “나는 나다”라고 하실 때의 하느님 이름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맞아들이려 할 때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가려던 곳은 어딜까요? 우리는 누구나 하늘 나라로 향하고 있습니다. 하늘 나라는 그만한 사랑의 수준을 가진 이들만 들어갑니다. 우리는 피를 빨아먹는 모기와는 살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살과 피를 내어주는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이 세상 것에 집착할 때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집착은 잃는 두려움 때문에 생깁니다. 이 두려움이 없어져야 부모가 자녀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듯 사랑 실천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내 안에 하느님께서 들어오셨다면 우리는 이제 이 지상 것에는 집착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성체를 영해야 합니다.
BTS나 김미경 강사 등이 세상 모든 것을 얻고도 우울증이나 번아웃에 고생하였습니다. 김미경 강사는 모든 것을 다 잃고 “괜찮다, 사랑한다!”라는 내면의 목소리에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된 가장 좋은 예는 영화 ‘트루먼 쇼’(1998)입니다.
트루먼은 조작된 세상에서 연기자들과 살며 세상에 생중계되는 스타였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사는 세상이 전부라 믿었고 감독은 트루먼의 아버지가 물에 빠져 죽는 것을 연출하여 트루먼이 섬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 준 이가 트루먼을 진정으로 사랑한 유일한 사람인 실비아입니다.
실비아는 직장을 잃을 각오를 하는 키스와 진실한 말로 자신은 피지라는 곳에 있다고 말해줍니다. 이때부터 트루먼은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조금씩 실비아에게 갈 준비를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버리는 모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실비아의 진정한 희생은 트루먼이 두려움의 바다를 건너 거대한 거짓 방송 세트를 탈출하는 데 성공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저도 성체를 많이 영했지만, 신학교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라고 하시는 말씀에 삶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체는 하느님께서 ‘다’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다 받은 사람이 세상 것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고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아직 성체가 하느님이라고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실한 사랑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사람이 악해지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고 성체는 그 죄를 없애는 분이십니다. 성체 안에 계신 분이 하느님이시고 우리 부모처럼 살과 피를 나를 위해 내어주시는 분으로 믿읍시다. 그러면 이미 목적지에 닿은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가 처음 컴퓨터를 접한 것은 1995년입니다. 그전에는 수동타자기와 전동타자기를 사용했습니다. 3년 후인 1998년에 서울대교구는 모든 본당에 광케이블을 설치하였습니다. 이제 컴퓨터는 인터넷과 연결되었고, 컴퓨터는 문서작성의 도구를 넘어서 세상과 접속할 수 있는 창이 되었습니다. 컴퓨터가 인터넷으로 연결되면서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프로그램을 설치해야 했습니다. 한글을 비롯한 다른 프로그램들도 계속 업데이트를 해 주어야 했습니다. 업데이트와 백신 프로그램이 없으면 컴퓨터는 성능이 떨어지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 고쳐야 할 때도 있습니다. 컴퓨터는 스마트폰에게 자리를 많이 내어주었지만, 아직도 제게는 강론을 준비하는 고마운 친구이고, 세상과 접속하는 창문입니다. 팬데믹 때, 컴퓨터는 신앙생활에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교우들은 컴퓨터에 접속해서 온라인으로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저도 컴퓨터를 이용해서 강의했습니다. 팬데믹 이후 여전히 재택근무가 가능한 것도 컴퓨터와 인터넷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삶에도 ‘업데이트’된 순간이 있었습니다. 1977년입니다. 공부를 잘 해서 10등 안에 들면 자전거를 사준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10 등 안에 든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자전거는 제게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했고, 17 등을 했습니다. 이제 7명만 넘어서면 자전거를 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7명을 넘어서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그 아이들도 공부를 열심히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열심히 공부했고, 9등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도, 선생님도 그런 결과를 믿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그다지 공부를 잘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시 열심히 공부했고, 아무도 의심할 수 없는 성적을 얻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제게 업데이트 된 것이 있습니다. ‘하면 된다. 할 수 있다.’입니다. ‘태산이 높지만 하늘 아래 있는 산입니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는데 사람이 아니 오르고 산만 높다 한다.’는 시조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컴퓨터는 계속 업데이트 해 주어야 하듯이, 우리의 삶도 업데이트가 있어야 합니다. 규칙적인 식사와 꾸준한 운동으로 업데이트 해 주어야 합니다. 독서와 긍정적인 마인드로 업데이트 해 주어야 합니다. 열린 마음으로 나누고, 봉사해야 합니다. 강물을 거꾸로 헤엄치는 연어처럼 시간과 공간에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은 우리의 육체를 배부르게 하는 빵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착각하거나 오해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으로 재물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얻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신앙의 열매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으로 무병장수를 원하지만 그것도 신앙의 열매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빵은 우리가 미사 때 받아 모시는 ‘성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체를 모실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지만 썩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렇습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를 업데이트 시키는 것은 물질과 재물이 아닙니다. 무병장수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가는 것입니다. 나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업데이트해야 할 것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오늘의 성인
성녀 클라라(Clare)
신분 : 설립자
활동지역 : 아시시(Assisi)
활동연도 : 1194-1253년
같은이름 : 글라라, 끼아라, 클레어, 키아라
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귀족인 오프레두치오와 오르톨라나디 피우미의 딸로 태어난 성녀 클라라(Clara)는 용모도 뛰어나서 12세 때 혼인을 서두르는 부모들의 강권을 물리쳤으며, 1212년 사순절 때 성 프란치스코의 설교에 크게 감명을 받고 수도생활을 결심하였다. 그녀는 성지 주일에 부모 몰래 집을 빠져나와서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 성당에서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수도복을 받았다.
프란치스코는 아직 여자 수도원을 세우지 않았으므로, 바스티아 근방 성 바오로(Paulus)라는 베네딕토 수도원에 그녀가 머물게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들이 그녀를 강제로 집으로 데려가려고 하므로 끝까지 항거하다가, 산 안젤로 디판초로 옮겼는데 그 얼마 후에 15세 된 동생 아녜스까지 언니에게 와서 함께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녀의 부친은 12명의 장정을 무장시켜 아녜스나마 데려오려고 하였지만, 클라라의 간절한 기도의 힘에 의해 끝내 아무도 데려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들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산다미아노(San Damiano) 성당을 모원으로 확정하였으며, 이들을 위한 생활양식을 써줌으로써 가난한 부인회가 탄생된 것이다. 이 회가 잉글랜드(England)에서는 작은 수녀회(Minoresses)로 불리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클라라회이다. 클라라는 1215년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로부터 ‘가난의 특권’을 얻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애긍에 의존해도 좋다는 허락이다.
그 후 클라라는 이 특권을 유지하는데 늘 고심하였고, 교황이나 다른 성직자들이 수녀들의 규칙이 너무 엄격하다고 반대해서 많은 곤경을 겪었다. 클라라회의 수녀들은 당시 어느 수도회보다도 엄격하고 가난하였다. 그러나 클라라를 비롯한 동료들은 높은 수준의 관상가들이었으며, ‘복음적 완덕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 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그녀는 약 40년 동안 공동체를 지도하였지만 늘 건강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 성 프란치스코의 뜻이 담긴 클라라회의 회칙은 그녀가 운명하기 이틀 전에야 겨우 승인을 받을 정도로 그 엄격성 때문에 논란이 많았던 것이다. 클라라회는 급속도로 이탈리아 전역과 프랑스, 독일로 보급되었고 교황과 추기경 및 주교들의 자문 역할로써 떨친 그녀의 영향도 지대하였다. 그녀는 수많은 기적으로 더욱 영광스럽게 되었는데, 1241년 그녀의 기도로 프레데릭 2세의 난폭한 군인들로부터 아시시를 구출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1253년 8월 11일에 아시시에서 운명하였는데, 2년 후에 곧바로 시성되었다. 클라라는 텔레비전의 수호성인이고 문장은 성체 현시대이다.
성녀 수산나 (Susanna)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 로마(Roma)
활동연도 : +295년
같은이름 : 수잔, 수잔나
수산나는 '백합'이란 뜻이다.
가비니우스라는 어느 사제의 딸인 성녀 수산나는 매우 아름다운 처녀로 교황 성 카이우스(Cajus)의 조카였다.
그녀는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자기 조카인 막시미아누스와 결혼하라는 요구를 뿌리쳤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결혼을 종용하도록 파견했던 궁중 관리인 클라우디우스(Claudius)와막시무스(Maximus)까지 개종시켰다.
분을 참지 못하던 황제는 클라우디우스와 그의 아내 프레페디냐(Praepedigna)는 물론 그들의 두 아들과 막시무스를 쿠메에서 죽이고, 수산나와 그의 아버지는 참수시켰다.
성녀 필로메나(Philomena)
활동년도 : +연대미상
신분 : 동정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삘로메나, 삘루메나, 필루메나
1802년 이탈리아 로마(Roma)의 프리스킬라(Priscilla) 카다콤바의 한 벽감 속에서 젊은 처녀의 뼈가 발굴되었는데, 고고학자들은 초기 순교자의 유품임을 입증하고 그 순교자가 바로 필로메나임을 밝혀냈다. 1805년 이 유해는 나폴리(Napoli) 교외 무냐노(Mugnano) 교구 성당에 안치되었는데, 이 알려지지 않은 성녀에 대한 공경이 날로 퍼져나가 전 세계가 그녀를 공경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183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가 성녀에 대한 공경을 승인하고 8월 11일로 축일을 정하였다. 그러나 1961년 그녀의 무덤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사실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로마의 결정에 의해 공적인 공경이 금지되었다. 교회 미술에서 성녀 필로메나는 백합 또는 닻을 지닌 처녀로 그리고 세 개의 화살을 지닌 처녀로 그려진다. 때때로 종려와 채찍을 든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녀는 필루메나(Philumena)로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