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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12일 월요일
[(녹)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 수도자
말씀의 초대
에제키엘 사제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리자, 그는 주님 영광의 형상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은 세금을 면제받지만 비위를 건드릴 필요가 없으니 성전 세를 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그것은 주님 영광의 형상처럼 보였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2-5.24-28ㄷ
제삼십년 넷째 달 2 초닷샛날, 곧 여호야킨 임금의 유배 제오년에,
3 주님의 말씀이 칼데아인들의 땅 크바르 강 가에 있는,
부즈의 아들 에제키엘 사제에게 내리고,
주님의 손이 그곳에서 그에게 내리셨다.
4 그때 내가 바라보니, 북쪽에서 폭풍이 불어오면서,
광채로 둘러싸인 큰 구름과 번쩍거리는 불이 밀려드는데,
그 광채 한가운데에는 불 속에서 빛나는 금붙이 같은 것이 보였다.
5 또 그 한가운데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습은 이러하였다.
그들은 사람의 형상과 같았다.
24 그들이 나아갈 때에는 날갯소리가 들리는데,
마치 큰 물이 밀려오는 소리 같고
전능하신 분의 천둥소리 같았으며,
군중의 고함 소리, 진영의 고함 소리 같았다.
그러다가 멈출 때에는 날개를 접었다.
25 그들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서도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가 멈출 때에는 날개를 접었다.
26 그들의 머리 위 궁창 위에는 청옥처럼 보이는 어좌 형상이 있고,
그 어좌 형상 위에는 사람처럼 보이는 형상이 앉아 있었다.
27 내가 또 바라보니,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부분의 위쪽은
빛나는 금붙이와 같고, 사방이 불로 둘러싸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부분의 아래쪽은 불처럼 보였는데,
사방이 광채로 둘러싸여 있었다.
28 사방으로 뻗은 광채의 모습은,
비 오는 날 구름에 나타나는 무지개처럼 보였다.
그것은 주님 영광의 형상처럼 보였다.
그것을 보고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사람의 아들은 죽었다가 되살아날 것이다. 자녀들은 세금을 면제받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22-27
제자들이 22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24 그들이 카파르나움으로 갔을 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25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는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26 베드로가 “남들에게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부터 두 주간 동안 평일에는 에제키엘서를 읽습니다. 에제키엘은 대략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되기 오 년 전쯤부터 예언 활동을 시작하여, 멸망하고 십오 년쯤 지난 때까지 활동합니다. 그는 멸망 전에 사람들이 설마 예루살렘이 파괴되지는 않으리라고 믿던 때에 멸망을 선포하고, 멸망한 뒤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구원을 선포하여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거스르는 예언자였습니다.
처음 그가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던 때는, 이미 바빌론이 한 번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여호야킨 임금을 비롯하여 꽤 많은 사람을 바빌론으로 끌고 간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상황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합니다. 그들은 지금의 상황이 다만 일시적인 어려움일 뿐이라고, 유배 간 이들이 곧 돌아오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제였던 에제키엘은 사회의 지도층에 속하고, 그래서 그도 유배를 가서 “칼데아인들의 땅”(에제 1,3)에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칼데아인들의 땅’에서 주님의 말씀이 에제키엘에게 내리고, 그는 거기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오늘 독서의 네 생물들에게는 날개가 있고, 또 바퀴가 있습니다(1,15.21절 참조).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만 머물러 계시는 것이 아니라 날개와 바퀴가 달린 어좌를 타시고, 어디라도 계시며 어디에서도 당신 말씀을 내리십니다. ‘칼데아인들의 땅’에 가서 살고 있어도, 하느님께서는 거기에서도 당신 백성과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질 때가 머지 않았습니다. 왜 성전이 무너져야 할까요? 성전 파괴는, 하느님을 성전 안에만 가두어 두는 사람들의 생각을 허물어뜨릴 것입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성전 세를 받으셔야 할 주님께서 성전 세를 바치셨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성전 세와 관련해서 베드로 사도에게 아주 특별하고 기이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오늘 보여주시는 기적은 대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독특한 이적 사화는 아마도 후대에 가필(加筆)된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제정해놓은 편협하고 제한된 제도나 관습으로부터 철저하게 자유로운 분이심을 강조하는 기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은 목숨을 걸고 성전 세를 징수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 세가 어떤 사람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구린 관례나 시궁창 냄새 나는 악습을 완전 개무시하는 한 표현이 지니고 있는 돈주머니에서 성전 제를 내지 말고 물고기 속의 돈으로 성전 세를 바치라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는 세금 징수에 목숨거는 유다인들에게 큰 엿을 하나 먹이신 것입니다.
카파르나움 세금 징수원은 예수님께 성전세를 요구했는데, 사실 이것처럼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다시 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이스라엘의 주님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드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도 애지중지하는 성전의 주인이십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이 바치는 성전세를 수령하실 분은 사제나 랍비들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성전세 징수원은 기가 막히게도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성전세를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는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서글프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셨던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명하신 것이 갈릴래아 호수에 가서 낚시를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세를 바치셔야 할 분이 아니라 성전세를 받으셔야 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굳이 까칠한 유다인들의 비유를 건드릴 필요가 없으니 베드로 사도에게 꽤 웃기는 방법으로 돈을 마련해 성전세를 바치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다시 한번 예수님의 지극한 겸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왕 중에도 한참 아래쪽의 왕인 세상의 왕에게 겸손하게 세금을 바칩니다. 큰 나라 전체를 다스리는 황제가 한 고을을 다스리는 영주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부여해주신 권한을 단 한 번도 남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겸손하게 하느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바로 그것만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따라가십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가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따라서 구원받기 위해서입니다. 루가복음 19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자캐오는 구원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구원받았음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자캐오는 행위로써 구원받았습니다. 구원은 믿음과 그 믿음을 드러내는 행위로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죽음 이후 심판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이 땅에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늘어나고, 신자가 늘어나지만,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대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없는 구원을 바라는 건 아닐까요? 우리는 재물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구원의 선물로 생각하는 건 아닐까요? 우리는 세상에서 성공하고, 건강하게 지내고, 원하는 게 채워지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믿음으로 하느님께서 변하기를 바라는 건 아닐까요?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구원은 명예, 재물, 권력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 갈증이 나기 마련입니다. 그것들을 채우기 위해서는 양심을 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들을 채우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던 아합왕이 그랬습니다. 충실한 부하 우리아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다윗이 그랬습니다. 동생 아벨을 죽였던 카인이 그랬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낙원에서 쫓겨났던 아담이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보다, 나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게 쉽다.”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은 세상의 방법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은 몹시 슬퍼하였습니다. 왜일까요? 제자들은 죽음을 통한 구원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명예와 재물 그리고 권력을 줄 거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은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와 죽음이 없는 구원은 허상입니다. 믿음을 사랑으로 드러내지 않는 구원은 풀잎 끝에 맺힌 이슬과 같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께 우리도 십자가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를 청하며 예전에 읽었던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놓아/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행복한 한 주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마태 17,27)
빛은
스스로
밝다하지 않으며
다만
어둠 속 깊이까지
스며들 뿐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높다하지 않으며
다만
우러르는 이를
보듬을 뿐입니다
땅은
스스로
넓다하지 않으며
다만
모든 이 깃들게
내어놓을 뿐입니다
물은
스스로
자유롭다하지 않으며
다만
모든 이보다 낮추어
흐를 뿐입니다
사람은
참으로
하느님의 사람은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며
다만
모든 이를 비추고
모든 이를 보듬고
모든 이에게 내어놓고
모든 이보다 낮출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니
그러할 뿐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니
그러할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도록
그러할 뿐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도록
그러할 뿐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Jane Frences de Chantal)
신분 : 설립자, 수녀
활동지역 :
활동연도 : 1572-1641년
같은이름 : 방지가, 샹딸,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프란체스카, 후아나
1572년 1월 23일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Bourgogne) 지방 디종(Dijon)에서 귀족 가문의 둘째 딸로 태어난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Joanna Francisca de Chantal)은 18개월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엄격한 가톨릭적 분위기 속에서 아버지로부터 폭 넓은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20세 때에 크리스토프 드 샹탈(Christophe de Chantal) 남작과 결혼한 그녀는 충실한 아내이자 헌신적인 어머니요 검소하고 알뜰한 주부로서 몰락의 위기에 처해 있던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성(城)에서 매일미사를 봉헌하는 관례를 만들었고, 다른 성의 신심활동을 도입하여 소개하면서 자선활동도 열심히 하였다.
그들 부부는 6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둘은 유아 때 사망하였다.
게다가 1601년 남편이 사냥을 나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자 그녀는 네 명의 자녀와 함께 친정으로 돌아와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시아버지로부터 자신이 살고 있는 몽틀롱(Monthelon)으로 오지 않으면 손자들의 상속권을 박탈하겠다는 위협을 받고 할 수 없이 몽틀롱으로 가서 7년 동안 자녀교육에 힘쓰며 살았다.
1604년 사순시기 동안 친정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디종을 방문한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은 마침 그곳을 방문한 제네바(Geneva)의 주교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1월 24일)의 설교를 듣고 대단한 감명을 받아 그의 영적 지도를 청하였다.
처음에 다소 망설이던 주교는 결국 그녀의 간청을 받아들였고 여러 번의 만남을 통해 서로 영성적인 교감을 나누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다시 결혼하지 않을 것과 주교에게 순종할 것을 서원하였다.
디종의 카르멜회 수녀들과 만남을 통해 큰 영향을 받은 그녀는 자신을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하고자 원했으나 주교는 좀 더 인내를 갖고 기다리도록 했다.
1607년에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는 그녀에게 영성적으로는 성모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을 때에 드러내었던 덕들을 따르고, 활동적으로는 노인들과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활동을 하는 수도 공동체를 세우려는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였다.
이에 뜻을 같이 한 그녀는 주교의 도움으로 자녀들의 장래 문제와 집안의 대소사를 해결한 후 안시(Annecy)로 떠났는데, 그곳은 주교가 새로운 수도회를 세우고 싶어 하던 곳이었다.
1610년 6월 6일 삼위일체 대축일에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는 안시 수도원의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그녀와 2명의 동료들이 그 자리에 함께 참석해 주교로부터 정식으로 회칙을 받았으며 이듬 해 그들 모두 수도 서원을 하고 그녀가 원장이 되었다.
이 수도회의 이름과 회헌은 여러 번 바뀌어 오다가 마침내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를 공식 명칭으로 확정하였다.
이 수도회는 1612년 1월부터 병자방문을 시작하여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이듬해 그녀는 시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많은 재산을 상속받은 후 더욱 영성적인 성숙에 힘쓰며 수도회의 새로운 분원 설립에 주력하였다.
1614년 리옹(Lyon)에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면서 많은 난관을 겪기도 했지만 그 모든 시련에도 불구하고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은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의 도움을 받아 수도원을 급속히 확장해 나갔고 많은 여성들이 입회하였다.
이러한 성공적인 확장은 육체적인 고행보다는 겸손과 온화함을 강조한 주교의 가르침과 그녀의 신중함과 헌신 덕분이었다.
1619년에 그녀는 파리(Paris) 분원을 설립하면서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Vincentius a Paulus, 9월 27일)를 만나게 되었는데,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는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의 초기 정신과 활동 방향을 옹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가 사망한 후에는 그녀의 영적 지도자가 되어 주었다.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가 사망하던 1622년 당시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의 분원은 13개였고, 프랑스 전역으로 확장되어 그녀가 사망할 당시 약 86개의 분원이 있었다.
그녀는 수도회 내적, 외적인 시련을 견디어 내면서 계속해서 분원을 설립하기 위해 거처를 옮겨 가며 생활하였다.
1628년 흑사병으로 많은 수도자들이 사망한 후 안시 수도원으로 돌아온 그녀는 다시금 장상을 역임하다가 1641년 마지막으로 파리에 가서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를 만나고 돌아온 후 느베르(Nevers)에서 병을 얻었다.
결국 물랭(Moulins)의 분원에서 몸져누운 그녀는 1641년 12월 13일에 그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그녀의 시신은 안시로 옮겨져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의 무덤 곁에 묻혔다.
그녀는 1751년 11월 21일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시복되었고, 1767년 7월 16일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해 시성되어 1769년부터 로마 전례력에 포함되었다.
그녀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가 쓴 “신심생활 입문”(The Introduction to the Devout Life)에 잘 나타나 있다.
2001년 12월 18일 교황청 경신성사성의 교령에 의해 성녀 축일의 전례적 기념일이 12월 12일에서 8월 12일로 변경되었다.
그 이유는 1999년 3월 2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가 라틴아메리카의 수호자로 선포한 ‘과달루페(Guadalupe) 성모 축일’과 같은 날이어서 전례적인 기념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미국에서는 그녀의 축일을 8월 18일로 변경하여 기념하고 있다.
상류 계급 출신의 여인으로서 부인이나 혹은 과부로 혹은 수녀로 각기 그 신분에 적합한 덕을 닦고 중인이 모범으로서 성녀가 된 예는 극히 드물지만, 요안나 프란치스카는 그런 드문 분 중의 한 분이다. 요안나는 세례명이고, 프란치스카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사모하며 따르기 위한 그녀의 견진 본명이다.
그녀는 프랑스의 부르고뉴 주 디종 시의 귀족 프레미오가의 출신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한때 주(州)의회 의장을 겸한 근면(勤勉)한 인사였으며, 생후 얼마 안되어 어머니를 여읜 요안나를 측은히 여겨 특별히 관심을 갖고 그녀의 양육에 힘을 기울였다.
요안나는 아직 나이 20세 미만이었을 때에, 어떤 부유한 귀족인 청년에게 구혼을 받았으나 그가 이단을 따르는 자란 것을 알자 즉시 거절해 버렸다.
이것만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독실한 신앙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그녀는 국왕의 충신이며 신앙심이 깊은 신자인 바롱크리스토퍼 드 샹탈 남작의 구혼을 받고 이것이 주님의 뜻인 줄 알고 승낙을 해 연분을 맺게 되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는 이 새 가정에는 봄 날씨와 같은 온화함이 깃들었고 즐거움뿐이었다.
남편인 샹탈이 혼인 전에는 가사보다도 국사(國事)에 치중하여 분망했던 관계로, 집안에는 약간의 부채가 있었으나 그것도 주부인 요안나의 알뜰한 살림에 의해 얼마 후에는 깨끗이 청산을 했다. 그로부터 9년간 그들에게는 여섯 명의 자녀가 태어났으며 그 자녀들의 교육도 알뜰히 시켰다.
그러나 세상이란 것은 믿지 못할 일이어서 보름달같이 원만하던 그녀의 가정에도 우수가 깃들게 되었다.
하루는 친구와 더불어 사냥을 간 남편이 친구의 오발로 인해 불의의 큰 부상을 입고 신음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의 따뜻한 간호도 보람없이 며칠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평소에 정이 두터웠던 부부였던 만큼 프란치스카의 비통한 모습을 보는 사람은 저마다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람도 만나기 싫어 방안에 들어앉아 있던가,
혹은 산속에 가서 외로이 죽은 남편을 생각하며 하루종일 울기만 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이런 비통한 마음이 사라지고 동시에 하느님의 빛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눈물을 씻고 머리를 들어 앞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여생을 독신으로 살며 그리운 그분의 유물인 아이들을 잘 길러내서 초토에 파묻힌 남편의 영전에 보답할 것을 굳게 결심했다.
상(喪)을 벗은 요안나는 유산을 자녀들에게 분배하기 위해 그들을 데리고 마테본에 사는 시어머니 댁에 갔다.
시어머니는 본래 무뚝뚝한 성격에다가 그녀가 신임하는 여종까지 요안나를 눈에 티처럼 여겨 그 시어머니에게 여러 가지 나쁜 말을 했으므로 자연히 그녀의 입장은 곤란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안나는 사랑하는 아들들을 위해 모든 것을 잘 참고 시어머니나 그 여종이나 또는 그 여종의 아이들에게까지 한결같이 친절로써 대해주었다.
그러는 동안 요안나는 33세가 되었다.
그 해 그녀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디종에 있는 친정에 갔었는데, 때마침 유명한 프란치스코 드 살이 그곳에 와서 설교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성당에 가서 그의 설교를 들은 그녀는 이 분이야말로 자신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곧 그의 지도를 청했다.
이때부터 요안나는 성인의 지도를 받으며 성덕에 나아가게 된 것이다.
그녀는 프란치스코에게 육신의 고행보다도 영신적 극기에 대해서 지도를 받았고, 숨은 선덕의 아름다움을 배웠다.
그녀는 실수로 인해 자기 남편을 죽인 사람을 물론 미워하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나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 사람을 만나서, 지금까지 맺혀있었던 모든 원한을 깨끗이 씻어버리는 뜻으로 그 사람의 딸의 세례 대모가 되어 주었다.
자녀들이 이제는 다 컸으므로 그녀는 어머니로서의 일도 적어졌다.
그래서 요안나는 소녀시절에 품었던 수도 생활에 대한 동경을 다시금 갖게 되었다.
그녀는 지도 신부인 성 프란치스코에게 그뜻을 밝혔다. 그녀는 가르멜회 입회를 원했지만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은 전부터 있던 수녀원에는 들어갈 수 없는 과부들을 위한 새 수도원을 세우려고 했던 참이므로 그 계획은 즉시 실현되어 요안나는 그 계획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것이 곧 ’방문회’의 시초이다.
수녀가 되려면 물론 사랑하는 자녀와 정든 아버지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이 정이 많았던 요안나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것이었다.
더구나 그들이 한결같이 수도원 입회를 반대했으므로 그녀의 고민은 더욱 커질 따름이었다.
그러나 수도자가 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줄 안 요안나의 신념은 동요됨이 없이 결국 사랑하는 자녀와 아버지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수도 서원을 발했다.
그 외에 하느님과 개인적으로 선한 것이라 인정되는 것은 꼭 실행한다는 서원도 발했다.
그녀는 새로운 수도회의 총장으로서 그 자매들에게 될 수 있는 데까지 어머니다운 태도로써 대하고자 노력했다.
그리하여 기회 있는대로 건축한 분원(分院)의 수는 그녀의 임종 직전만 해도 무려 75개소에 달했다.
그동안 그녀의 성덕을 시기해 고의로 그녀의 사업을 방해하는 이도 있었다.
또 유게노 전투에서 큰아들을 잃었고, 딸과도 사별하게 된 일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의 하나 하나가 다 그녀에게는 비애의 날카로운 칼이 되었다.
그 중에도 가장 비통한 일은 그녀의 영적 아버지인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의 서거였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 더욱 분발해 많은 자매들을 이끌고 덕행의 길로 매진하는 한편 수도회의 발전을 도모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본부의 소재지인 아네시이에 무서운 페스트가 만연하자 사보아의 공작 부처는 요안나의 신변을 염려해 안전 지대로 피신할 것을 권유했으나,
그녀는 자매들을 남겨두고 떠날 수가 없다고 하며 도리어 시내에 나가 환자들을 돌봐 주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녀를 위안의 천사라고까지 부르게 되었다.
1641년, 요안나는 파리에 있는 수녀원을 방문하고 아네시이로 돌아오는 도중 폐렴에 걸려 위독하게 되어 물렝에서 12월 13일에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성 프란치스코 드 살 곁에 묻혔다.
그녀는 클레멘스 14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복자 인노첸시오 11세 (Innocent XI)
활동년도 : 1611-1689년
신분 : 교황
지역
같은 이름 : 인노첸시우스, 인노켄티오, 인노켄티우스
복자 교황 인노첸시오 11세는 1611년 5월 19일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Milano) 공국의 코모(Como)에서 신심 깊은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베네데토 오데스칼치(Benedetto Odescalchi)라는 이름을 얻었다. 어려서부터 사제성소를 느꼈던 그는 1626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코모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서 인문학을 배웠다. 15살이 되었을 때 그는 제노바(Genova)로 가서 가문에서 운영하는 은행의 일을 도우며 도제교육을 받았다. 1630년 그는 페스트의 광풍에서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안타깝게도 어머니를 잃고 말았다.
그 후 그는 로마(Roma)와 나폴리(Napoli)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1639년에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어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 때 교황청에 들어가서 다양한 임무를 맡아 성공적으로 수행한 그는 1645년 부제 추기경이 된 후 다시 사제 추기경이 되었고, 이어 극심한 기근으로 고통 받고 있던 페라라(Ferrara)에 교황 사절로 방문하였다. 교황은 페라라의 시민들에게 그를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라고 소개하였다. 1650년 노바라(Novara) 교구의 주교가 된 베네데토는 자신의 수입 전부를 교구의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9세(Clemens IX)가 선종한 후 강력한 교황 후보였던 그는 프랑스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결국 1676년 9월 21일 교황 클레멘스 10세의 후임으로 제240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에 선출된 후 인노켄티우스 11세(Innocentius XI, 또는 인노첸시오)라는 이름을 택한 그는 교회에 대한 프랑스 왕 루이 14세(Louis XIV)의 간섭과 견제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긴축 재정을 통해 교황청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고자 힘썼고, 프로테스탄트에 대해서도 온건한 입장을 취해 루이 14세 왕의 정책과 배치되었다. 또한 교리교육과 매일 영성체를 장려하고, 신학교 교육의 수준을 높이며, 윤리신학이 해이해지는 것을 경계하였다. 그리고 1687년 신비주의와 정적주의(靜寂主義, Quietism)에 물든 미겔 드 몰리노스(Miguel de Molinos)에 의해 야기된 이단과 싸우며 교회의 정통교리를 수호하였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는 교황직에 오르기 전이나 후나 늘 단순하고 경건한 삶을 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교회 내의 부패와 족벌주의를 배척하여 큰 존경을 받던 그는 1689년 8월 12일 로마에서 선종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성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 제대 아래 묻혔다. 1956년 10월 7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는 그를 복자품에 올렸는데, 시복식을 위해 그의 유해를 발굴했을 때 죽은 지 267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부패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그의 유해는 청동으로 장식된 석관에 모셔져 보존되다가 2011년 5월 1일 복자품에 오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를 모시기 위해 성당 안쪽의 다른 제대로 옮겨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