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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 2004년 3월 14일 월요일
고작 전깃불이나 끄고 있는 것으로 너희들을 떠올린다.
싸늘한 기운에 눈을 떴다. 그렇다 춥다 소리가 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은 어젯밤까지 때던 불기가 남아 그렇겠지. 뒷산 작은 언덕길을 오르고 온 뒤 아침으로 미숫가루를 탔다. 실수로 설탕을 쏟은 바람에 미숫가루를 더 넣어 두 대접이나 탔다. 그래도 좀 달기는 했지만 고소했다. 방에 들어와 책 한 권을 읽기 시작했다. 책꽂이에 꽂아 놓고만 있던 것. 지난 해 책방에는 이라크 전쟁을 기록한 것들이 참 많이 나왔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만 해도 이라크 사람이 쓴 것에 이라크 어린이를 대신해 썼다는 것, 그리고 반전평화팀원들이 쓴 것 몇 권에 미군의 뒤를 졸졸 따르며 그들의 활약상을 기록한 것까지 여섯 권이나 된다. 아마 언젠가 읽어야지 하고 눈에 띌 때마다 사두었을 텐데 여태 제대로 본 건 하나 없다. 모르겠다. 무엇이 두려웠나, 혹은 어떤 걸 피하고 싶었는지.
그 가운데 오늘 꺼내든 것은 바그다드에서 대학을 다니던 스무 살 여학생이 쓴 <<바그다드 소녀 투라의 일기>>였다. 투라의 일기는 마침 오늘 날짜와 같은 2003년 3월 14일로 시작했다. 눈앞으로 다가온 전쟁의 기운 아래에서 느끼는 두려움, 침공의 시작과 함께 휩싸인 공포와 막막함, 그리고 전쟁의 치열함 속에 안타까움과 슬픔이 더해진 혼란으로 이어진다. 투라네 식구가 피난길을 나선 것은 폭발음이 달라진 뒤였다. 하늘에서 떨어뜨리는 미사일이 아니라 바로 가까운 곳에서 탱크가 쏘아대는 대포 소리. 그건 바그다드 시가전을 뜻하는 거였다. 공화국 경비대마저 모두 무너지고 투라네 식구는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투라의 일기를 읽다 보면 몇몇 정황이나 어느 장면의 묘사가 내가 기억하는 것과 조금 달랐다. 하지만 내가 보고 겪은 것만이 다는 아니었겠지. 바그다드 안에서도 모든 지역의 상황이 꼭 같을 수는 없었을 거다. 하지만 그런 걸 감안한다 해도 좀 불편했던 건 투라의 눈길의 바탕에는 침략자의 그것이 짙게 배었기 때문이다. 물론 투라는 죽거나 다치는 사람들을 보며 슬퍼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미군들은 참으로 용감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는 감상을 곳곳에 내비추면서 그 슬픔이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한 문제에서는 눈을 돌리려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러겠는 것이 투라는 처음부터 한 영국 일간지 기자의 권유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점령이 시작하면서 바로 영국에서 출판, 우리나라에서는 동아일보사에서 번역해 펴냈다. 투라는 2003년 8월 미군의 호송을 받으며 미국으로 가 학비를 면제받은 채 유학생활을 하고 있다. 어쩌면 투라는 그저 전쟁이라는 상황만이 괴롭고 힘들었는지 모른다. 오히려 이라크는 지금 전쟁 때보다 더한 점령에 억눌리고 있지를 않은가.
그런데도 내가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어낼 수 있던 건 투라의 일기에 빠져들어서가 아니라 그 시간들과 나란히 있는 내 기억이 그대로 살아났기 때문이었다. 불안함, 두려움, 그리고 폭격 소리. 투라가 집안 풍경을 그릴 때면 카심의 집, 살람의 집이 떠올랐고, 투라가 어린 두 동생 이야기를 할 때면 모하메드와 네자르, 핫산과 세이프가 떠올랐다. 어디에선가 이라크 빵 호베즈를 굽는 냄새가 맡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두 해 전 오늘 기억이 또렷하지 않아 예전 일지를 살펴보니 그제야 눈에 환하게 떠오른다. 투라는 이 날부터 학교들이 문을 닫았다고 했지만 우리는 초등학교를 찾아다니며 아이들을 마났다. 그리고 교실 뒷벽과 복도에 한국 아이들이 보내온 사진과 그림을 붙였지. 아이들은 눈동자를 빛내며 자기들과는 조금 다르게 생긴 아이들 사진을 좋아했다. 유엔 본부 앞으로 가서는 걸개를 걸었다. 바끼통에서 기차길옆 작은학교에서 아이들이 그려 보내준 걸개 그림들. 우리는 가난한 마을 올드 바그다드를 다시 찾아 골목골목 아이들을 만났다. 생각하니 괴롭다. 미안하다, 얘들아. 고작 이렇게 전깃불이나 끄는 것으로 너희들을 다시 떠올리고 있구나.
저녁 여섯 시 반, 해가 지는 건 참 금방이다. 일도 없으면서 더 어둡기 전에 마을회관 앞으로 한 바퀴 돌았다. 일부러 왼 것도 아닌데 자꾸만 속초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농사를 짓는 선생님 글 <콩대> 맨 끝 구절이 입에 맴돈다. 작대기 대신 총대를 메고 산을 타겠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책에 있는 걸 그대로 옮겨본다.
“……농사 좀 못된 거야 하늘이 하는 일이니 어쩌겠나. 아이들 이리 뛰고 뒹굴며 놀고, 우리는 오늘 정말 아무 시름도 없이 이렇게 모여 일하며 하루를 보내는구나. 그러나 뛰노는 아이들 저 작은 배를 채울 먹을거리를 ‘제국’의 쇠갈퀴가 긁어가 버린다면, 우리도 콩 터는 작대기 대신 총대를 메고 산맥을 탈 수밖에 없겠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시골 밤은 참 길기도 하다. 자꾸만 문 앞에 나가 서게 된다. 방에는 촛불 하나이지만 바깥에 나가면 쏟아질 것 같은 별빛에 손톱모양으로 기울어가는 달빛, 그리고 저 멀찍이 회관 앞 가로등 불빛까지 있어 방 안보다 훨씬 밝다. 촛불 아래에서 속초로 편지를 썼다. 엎드려 몇 줄을 쓰다 나가 별 구경을 하면서 들락날락. 밤이 되니 이젠 불기도 다 빠져 그야말로 냉골이다. 발이 시렵다.
둘째 날 - 2005년 3월 15일 화요일
내가 할머니를 모시고 다녀오는 게 맞다.
새벽 네 시부터 뒤척였던가. 추워 깼다가도 이불 속에서 이리 웅크리고 다시 저리 웅크리고 하기를 몇 차례. 춥다, 춥다, 춥다 하면서 그냥 웅크리고만 있었는지 아니면 설핏 잠이 들었는지. 두 시간을 더 그렇게 있다가 일어났다. 사과 한 알을 깎아 빵과 함께 먹었다. 아침에 먹는 사과는 금이라고 엄마가 늘 말하곤 했는데. 참 오랜만에 먹는 사과다. 이라크에서 먹던 사과는 이것보다 훨씬 조그맣고 푸석푸석했지.
해가 난 동안에는 집 안보다 바깥이 훨씬 따뜻하다. 낮 동안 볕이라도 품어 놓기를 바라는 마음에 남쪽으로 난 창을 모두 열어놓았지만 방 공기는 여전히 차다. 싸늘하게 식은 방바닥도 무얼 더 어쩌지는 못한다. 더 차갑게 식어가지나 말았으면 하는 마음뿐.
마을을 걷다 보면 이제 제법 농사준비가 시작이다. 짐칸 가득 거름을 실은 경운기를 밭에 들여놓고 삽으로 떠 흩뿌리며 밑거름을 한다. 오늘 오후에는 우리 집 아랫밭에서도 경운기 소리가 들렸다. 못 보던 아저씨 둘이 경운기에 붙어 삽을 떴고 그 몇 걸음 곁에서 할머니가 있었다. 나야 시골에 와 산다지만 부끄럽게도 아직 농기구 하나 옳게 다룰 줄 모른다. 게다가 품을 파는 것으로 보이는 아저씨들이 일을 하니 손을 보태고 싶다고 나설만한 처지도 아니었다. 살그머니 할머니 뒤로가 어깨에 손을 얹고,
“할머니!”
“어어, 어야어야어야어야.”
웃느라 눈이 감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끄덕 ‘어야어야어야어야’ 하는 말이 아랫밭 할머니 인사법이다. 얼마나 고개를 아래위로 크게 움직이는지 허리까지 같이 굽혔다 폈다가 된다.
“여따가는 감자 심어요?”
“그래, 감자 심어 무야지.”
“접대 눈 많이 왔을 때 그 쪽 집들은 괜찮았어요?”
“아유, 눈 마이 왔지. 이만침 쌓여갖고 꿈쩍도 몬 했어.”
할머니는 허리춤까지 손을 올려붙였다.
“어디 아프신 데는요?”
“나야 맨날 안 아픈 데 없이 아프지. 그래 날 추븐데 하는 공부는 잘 돼?”
“에이, 그냥요. 헤헤.”
인사를 하고 밭을 나오다 돌아서니 할머니는 아까 그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하고 계셨다.
마침 마을에 차가 들어오는 시간이 되어 끼이익 버스가 섰다. 내리는 사람들보다 보따리 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장날도 아닌데 제법 많다. 아는 얼굴이 있나 내다보니 우리 뒤엣 뒷집 할머니가 있다. 머리에 함지를 이고 손에는 커단 보따리까지 든 채 힘겹게 올라왔다. 할머니이! 달려 내려가 보따리부터 받아드니 고마버라, 고마버라 하시며 휴우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게 다 뭐냐 하니까 할아버지 약 할 거라고. 그 집 할아버지는 풍에 크게 걸려 늘 앉아만 지낸다.
할머니 댁에 짐을 내려놓고 오니 우리 집 문 앞에 웬 할머니 한 분이 서 있다. 못 보던 할머니.
“내가 이렇게 정신이 어두워.”
“할머니 무슨 일인데요?”
“내가 장에 갔다 오는데 사 논 거를 그냥 두고 왔어.”
할머니는 저녁에 손님이 온다 해 부둣가로 횟감을 사러 갔다 오는 길이라 했다. 아는 집이기도 하고 해서 회를 부탁한 다음에 약방에도 들르고 가게에도 들러 이것저것을 샀는데 버스 시간이 됐다고 올라탔더니 그만 횟감 찾아오는 걸 잊은 거였다. 집에 와 부엌에 들어가서야 그걸 알고는 택시를 불러야 하나 어쩌나 하다가 나를 찾아왔다.
“총각이 나 좀 죽변에 태다 줄 수 있나 해서.”
아주 잠깐 몇 가지 생각이 스쳤지만 그럼요 라고 했다. 이 일로 해서 나는 일주일 기름 안 쓰는 약속을 어기게 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자리에서 정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할머니는 내가 아니라면 택시라도 불러야 할 판, 손에 꼭 쥔 만 원짜리 하나가 그걸 말해줬다. 택시가 마을에 들어와 할머니를 태우고 나가고 다시 마을로 들어오는 편보다는 내가 할머니를 모시고 다녀오는 것이 기름을 적게 쓰는 일에도 더 맞는 일이다. 그렇다고 마을 할머니들이 어디 택시 타는 일을 예사로 생각하는 분들인가? 피치 못할 일이 아니면 한 시간 길 읍내에도 손수레를 끌고 걸어 다닌다. 차를 타는 일이랬자 두 시간 걸러 한 대 있는 버스를 타는 일정도. 내가 이 마을에 산지 두 해가 넘었어도 차 좀 태워달라고 찾아온 일은 다 해야 이번이 두 번째 밖에 되지 않는다. 그 하나가 캄캄한 밤 할아버지가 술을 자시고 읍내에서 못 들어오고 있는데 좀 모셔다 달라는 부탁이었지. 내가 할머니를 모시고 다녀오는 게 맞다. 기름을 덜 쓴다는 건 내 기름을 안 쓴다는 게 아니라 우리의 기름을 덜 쓰는 일이 되어야 하지 않은가.
차안에서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다 보니 할머니는 처음 뵈었지만 그 댁 할아버지는 내가 아는 분이다. 두 눈이 먼 할아버지. 두 눈이 먼 채로도 지게로 거름을 지고 밭에 나가는 걸 봐 깜짝 놀랐지. 우리 집 앞마당에 모시고 막걸리를 따라 드렸다. 뭐 하는 젊은이냐 묻기에 아이들에게 이야기 들려주는 일을 한다 했더니 그리도 반가워하면서 집에 종종 놀러오라셨다. 내가 눈은 멀어 보이지 않지만 옛날 얘기 할 것들이 참 많다며. 하지만 아직 그 뒤로 찾아뵙지는 못했다. 그날 그렇게 할아버지를 뵙고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이라크로 떠났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내내 집을 비우고 떠돌아다니다 이제야 겨우 다시 자리를 잡고 있으니.
“그런데 할아버지는 어쩌다 그렇게 앞을 못 보게 되셨어요?”
“그 옛날에 군대에 끌려가 훈련받다가 그리 됐다는데. 그러고 군대에서 나와서도 맨 눈이 아프다 하더니 못 고치게 눈이 멀어가지고는…… 그게 벌써 삼십 오년이나 됐어.”
“그래요? 그러면 그런 건 나라에서 어떻게 해 줘야 하는 거 같은데.”
“그게 그런데 무슨 군번줄 같은 게 있거나 그 때 한 부대서 같이 있던 사람이 있어야 한다니까 어디 알아보지도 못하고.”
할머니는 벌써 옛날 일이라는 듯 남의 일처럼 말씀을 했다.
“그렇게 앞이 안 보이는데도 어떻게 그렇게 잘 다니세요? 접대는 지게를 지고 밭에도 가시던데.”
“그 양반 여서 나서 칠십 년을 넘게 살아왔으니 어디에 뭐가 있는 중은 대충 알지. 성질은 불같은데다가 눈이 그래 노니 소리만 버럭버럭 지르고 내가 배겨나지를 못해. 그러니 답답하다고 작대기라도 짚고 더듬더듬 다녔는데, 그러다 작년에는 뵈지도 않는 눈에 고름이 나와서 수술까지 받고는 그 담부터 몸이 저래 아파 누워만 있어.”
부둣가에 나가 횟감을 찾아와 할머니 댁에 내려드리니 할머니가 손에 쥐고 있던 만원을 내 주머니에 꽂으려 했다. 한참 실랑이.
“할머니 왜 그래요, 정 없게. 다음에 놀러 가면 감자나 쪄 주세요.”
“미안시려워 그러지. 그럼 낼이라도 놀러와, 우리 집서 밥 먹어.”
“네 들어가세요.”
해가 지고 나면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이불 두 채를 포개어 덮고 그 안에 쏙 들어가 엎드려 누웠다. 머리맡에는 촛불 두 자루. 책을 펴 보기도 했지만 작게 흔들리는 불꽃에 이 생각 저 생각이 함께 흔들렸다. 창근이.
여태 창근이에게 편지 한 통 쓰지 않고 있었다. 벌써 겨울 한 철을 다 지났구나.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길을 걷는 창근이는 지난 봄 구치소에서 한 달 가량을 살고 재판 연기로 나왔다가 지난 연말 다시 구치소로, 지금은 교도소에 가 있다. 창근이에게 편지를 쓰다 나니 녀석을 반전평화팀 지원연대 사무실에서 처음 만나던 때부터 시작해 이라크전과 관련한 모든 활동이 다 떠오르는 듯 했다. 창근이는 언제나 그 맨 가운뎃 자리에서 묵묵히 일을 했지. 그러니 자연히 지난 두 해를 되밟듯 기억을 쫓았다. 그 가운데에서도 이제야 비로소 부끄러운 줄을 알게 된 내 말과 행동들.
그 시간동안 참 숱하게 많은 말을 쏟아내며 지냈다. 암만과 바그다드 그리고 파병반대를 말하는 자리에서 쓴 온갖 글에 각종 집회와 강연, 간담회 그리고 회의를 하는 자리에서부터 그 뒤로 이어지는 술자리들까지. 지금 이렇게 집에서 지낼 때는 고작해야 마을 할머니들을 만나 나누는 말 몇 마디가 전부다. 때로는 말 한 마디 떼지 않고 지나는 날도 더러 있으니 여기에 대면 정말 얼마나 많은 말을 뱉어냈는지. 아마 집에 내려와 지낸 요 석 달 동안 한 말을 모두 더해야 그렇게 말을 쏟아내던 때 하루치만도 못하지 싶다. 그러니 그 동안 하고 다닌 말에는 얼마나 여물지 못한 말이 많았을까? 다듬지 못한 생각을 그대로 드러냈고, 경망스러운 행동 또한 적지 않았다. 한 가지 일을 놓고 의견이 갈릴 때면 내 것을 고집하느라 더 많은 말을 쏟아냈겠지. 돌아보면 부끄러움 투성이다. 허나 정작 머리를 쥐어뜯게 하는 건 어떤 커다란 문제를 놓고 의견을 다투거나 할 때가 아니라 아주 작고 하찮아 보이는 순간순간의 기억들이다. 그 어떤 분위기에서 내가 지은 표정이나 말투, 그리고 작은 행동 따위. 실로 사람들 속에서 내가 마음을 다쳤거나 내가 다치게 한 일들은 하나하나 내 놓고 말하기에 참으로 하찮아 보이고 사소한 것들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생각 없이 한 말이나 행동으로 마음을 다치게 했고, 그게 쌓여 누군가와는 다시 말도 건넬 수 없는 사이가 되기도 했다. 어쩌면 하찮고 사소한 말과 행동, 표정 하나하나는 그 순간 그 사람의 인격을 다 말해주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머리에만 머무는 사상이나 신념, 세계관 따위보다 믿을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진정한 ‘평화’에 다다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 또한 그 어떤 신념이나 의지, 주의, 주장 따위는 아닐 것이다. 성찰 속에서 닦아가는 마음의 바탕, 관계 맺는 방식이나 태도 같은 것. 다만 신념이나 의지는 그러한 바탕 위에서 세상의 문제들에 대응해가기 위해 필요한 이정표정도일는지 모르겠다. 전쟁은 이라크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맞선 자리에서 반전평화를 외치던 우리 안에도 있었고, 평온하지 못한 내 마음 안에도 있었다.
창근이에게 쓴 편지를 다시 읽어보니 그건 뼈아픈 내 고백들이었다. 옆도 뒤도 돌아보지 못한 채, 앞이라고 해야 기껏 반 발짝 밖에 헤아리지 못한 채 열에 들떠 있던 내 모습에 대한 고백. 그렇다고 그게 우리의 활동을 부정해서는 결코 아니다. 그저 그 안에 있으면서 순간순간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거나 아프게 하던 내 모습이 하염없이 부끄러울 뿐. 감방 안에서 보내오는 창근이 편지를 보다보면 어느 새 나도 성찰을 배운다. 건강하길.
셋째 날 - 2005년 3월 16일 수요일
이건 결국 견디고 버티는 일에 머물 뿐이다.
밀양에 있는 아이들과 선생님에게 편지를 썼다. 지난겨울 소망나무 때 아이들이 보낸 편지에는 일년이 넘게 지나, 그리고 초여름 문집을 보내준 선생님께는 반년을 넘기고 쓴 답장인 셈이다.
비
이민혁
비가 온다.
며칠 동안 안 오더니
이제야 온다.
씨앗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도와 주러 온다.
새싹이 안 다치게
포실포실 조심스럽게 온다.
비가 참 좋은 일 한다. (2004년 4월 18일)
버릇이라고 해야 하나, 취미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나는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아이들 글을 펴놓고 한 줄 한 줄 옮겨 쓴다. 책을 읽다가 집중이 되지 않을 때, 글을 쓰다 다음 말이 막힐 때 아이들 문집에 있는 글을 베껴 쓰곤 한다. 아이들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내게도 그 마음이 옮아와 오는 것 같고, 아이들을 닮아 눈앞이 환해지는 기분이 든다.
요사이 내가 베껴 쓰던 것이 밀양에 있는 상동초등학교 아이들 문집이다. 조금씩 쓰고 있다 싶었는데 오늘로 책 한 권을 다 덮었다. 자연에서 논 얘기, 자연에서 일한 얘기, 그러면서 집과 학교에서 겪은 식구들 얘기, 동무들 얘기. 아이들의 마음에는 자연이 꽉 들어차 있다. 굳이 생명이니 평화니 존중이니 하는 어려운 개념 말을 들이댈 까닭이 없다. 벌써 아이들은 온몸으로 배웠고, 몸에 배어 있다.
개구리 배추애벌레
김병섭 임하정
주차장에서 놀고 있는데 나비가 낳은 아기
개구리가 애벌레를 잡으면서 생각한 건데
찻길로 폴짝폴짝 나온다. 애벌레가 살기 위해
아슬아슬 차가 지나간다. 우리 배추를 먹는 것이
차에 치이면 우야나 싶어서 나쁜 것일까?
살째기 잡아 나비도 되어보지 못하고
못둑에 놓아주니 우리 손에 죽다니. (2003년 10월 23일)
개구리
신났는지
헤엄치며
살살간다. (2004년 4월 29일)
벌레 하나라도 사람처럼 귀하게 여기는 마음. 이런 마음을 가진 아이라면 따로 전쟁의 배경이나 거기에 얽힌 복잡한 일들을 일러주지 않더라도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스스로 가릴 수 있을 것이다. 그건 비단 전쟁 뿐 아니라 개발을 앞세워 자연을 망가뜨리는 문제에서도 그럴 것이고 차별받는 노동자나 장애인 문제에서도 그럴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정보의 양이 아니라 약한 것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의 힘이다. 이 마음의 바탕만 제대로 가꾼다면 때로 거짓된 정보의 홍수 아래에서 자칫 잘못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진실을 볼 줄 아는 힘과 진실의 편에 서는 용기만큼은 변치 않을 것이다.
불행히도 나는 어릴 적 자연을 모르고 자랐다. 그랬으니 도시 생활에서 내가 배운 건 그저 소배와 관련한 것뿐이었겠지. 들에서 곡식이 어떻게 나 자라는가를 보고 배워야 할 때 아마 나는 물건을 사고 거스름돈 받는 법부터 배우면서. 짐승 얼굴에 보이는 감정을 살피는 것을 배워야 할 때 동전 하나로 전자오락 한판을 더 오래할 수 있는지에 몰두해 있었고. 그 어디를 돌아봐도 가꾸고 보살피는 일 따위는 없었다. 오로지 쓰는 것에 대한 것일 뿐. 고작해야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 정도나 배웠을 테지. 다 자란 뒤에야 시골을 찾았지만 내가 할 줄 아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요 며칠 하고 있는 기름 없이 지내는 일만 봐도 그렇다. 내가 아무리 이것을 철저히 지킨다 해도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다. 스스로 거두어 지어 먹는 일, 기름을 대신해 다른 방식으로 불을 지피는 일. 이러한 것들이 없는 이상 이 일은 결국 견디고 버티는 일에서 머물 뿐 삶을 바꾸는 일에는 한 뼘도 다가서지 못한다. ‘기름 없이 전기 없이’ 지낸다는 말은 그것들에 기대는 것 대신 다른 방식을 찾을 수 있어야 진정으로 문명에 거스를 수 있는 것이다. 고작해야 하는 추운 방 냉기를 견디고 공장에서 만든 미숫가루와 빵 따위를 미리 사다 놓고는 그걸 먹으며 지내니 말이다.
2003년 3월 16일, 두 해 전 오늘 우리는 바그다드 한 복판 타흐리(해방) 광장에 있었다. 병수 아저씨가 그려간 커다란 걸개 위에서 유은하 씨가 춤을 추었고 나는 그 곁에 앉아 북 장단을 넣었다. 모여든 세계 여러 나라의 평화활동가들과 수많은 이라크 사람들. 집회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하이달이 붙잡아 세웠지. 그리고 눈물을 머금으며 얘기했다. 떠나라고, 당장 이라크를 떠나라고. 전날까지만 해도 전쟁에 낙관적이던 이라크 사람들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불안한 징후 속에서 하이달은 내게 말을 한 거였다. 자신을 위해 떠나달라며. 자기네 이라크 사람들은 전쟁을 오래 겪어 전쟁 속에서도 살아날 수 있지만 너는 그럴 수 없다고. 우리가 다시 만나려면 어서 이라크를 떠나달라고……. 지금도 가끔 카심, 살람과는 연락이 닿지만 하이달하고는 소식을 나눌 길이 없다. 웃음이 참 많던 청년 하이달, 혜란이가 선물로 준 김광석 노래 테이프를 늘 제 차에 꼽고 다니며 따라부르곤 했었는데. 하이달, 너는 괜찮은 거니? 오늘밤 이라크는 무사했을까?
넷째 날 - 2005년 3월 17일 목요일
“작가라면 늘 아픈 눈을 뜬 채로 있어야 한다.”
찬 기운에 몸을 웅크리다 잠을 깨니 빗소리가 들렸다. 지난 밤 유난히 개구리들이 뿌글뿌글 하더니 비올 거라 떠드는 소리였구나. 비가 내리고 볕이 없으니 오전 내내 더 추웠다. 오후에 잠깐 날이 개이니 자꾸만 바깥에 나가 있게 되었다. 아직 음료수가 하나 남았는데도 일부러 화성3리까지 걸어가 가게엘 다녀왔다.
아룬다티 로이의 정치평론집 <<9월이여, 오라>>에는 마치 대못 같은 것으로 내 가슴팍을 확 긋는 것 같은 말이 있다. 단 한 문장.
“작가라면 늘 아픈 눈을 뜬 채로 있어야 한다.”
이 말 앞에서 나는 떨렸고 겁이 났다. 하지만 자꾸만 곱씹으며 되뇌고 되뇌다 보니 겁이 나는 게 아니라 거꾸로 그 말이 평온함을 주는 것 같았다. 늘 아픈 눈을 뜨고 살아야 한다면 그 얼마나 힘이 들어야 하는 걸까, 하지만 이 말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오히려 걱정해야 할 것은 ‘아픈 눈을 뜨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아프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상태인 것이니 겁을 낼 일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두어 달 전 신문에서 한 문학 계간지에 실린 평론 한 편을 소개한 기사를 보았다. 일본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이 최근 발표한 글이라 했던가. 그 글까지 직접 찾아 읽지는 않았지만 신문에 요약해 소개한 것만으로도 이런 저런 생각꺼리는 충분했다. 내용의 핵심은 지금 우리 시대에 진정한 문학이라는 게 있느냐는 것, 이 비평가는 스스로의 질문에 없다고 단호히 잘라 말하며 만약에 있다면 그건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문학 활동을 멈추다시피 한 두 작가 인도의 아룬다티 로이와 한국에서 녹색평론을 발행하는 김종철의 그것이라는 거였다. 문학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게 하는 질문이었다.
어디 그 둘 뿐일까? 아마도 그 일본의 평론가는 권정생 선생님을 알지 못했겠지. 돌아가신 이오덕 선생님도 몰랐을 거야. 진정한 문학은 지금도 현실 삶의 곳곳에서 펜을 숨긴 채 씌어진다. 천성산을 지키기 위한 도롱뇽들의 재판 소송, 꽃마차 하나로 전쟁 없는 세상을 노래하며 달리는 평화유랑단, 그리고 강화와 만석동에서 아이들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공동체 사람들… 이것들은 그것 자체로 지금 우리 시대에 씌어지고 있는 판타지 동화다. 새만큼 갯벌에 서 있는 솟대, 그리고 삼보일배의 길고 긴 행렬은 그것 그대로 시가 아니고 또 무엇이겠나? 그 말고도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씌어지고 있을 수많은 동화와 소설, 시와 노래들. 로이의 글을 우리말로 옮긴 번역자는 이 책의 맨 뒤에서 로이의 눈길이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그리고 그것의 바탕은 무엇인가를 단 몇 줄의 말로 분명하게 들어내 주었다.
“그녀의 시선은 언제나 약자들에게로 향해 있다. 이 지구상의 온갖 작은 것들,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것들, 어린이들, 민중들에게로 향해 있다. ‘이라크 해방작전’에서 죽어간 수많은 어린이들과 민간인들이 로이에게는 낯설지 않다. 그녀에게 이라크는 먼 나라가 아니다. 미국의 침략과 점령으로 죽어간 이라크 민중은 바로 수많은 댐 건설로 삶터를 잃고 헤매는 인도 민중들이었고, 나르마다 개발계획으로 수장되는 수많은 작은 곤충들과 숲이었다.”
해가 저물어 초에 불을 붙일 때쯤 해 울진에서 평화모임을 함께 하는 초등학교 교사 한 분이 찾아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볶이에 어묵 국물. 따뜻한 걸 못 먹고 지낸다는 엄살에 사들고 온 거였다. 그러니 나는 더 과장스런 말로 따뜻하네, 맛있네 하는 소리를 해대가며 꿀꺽꿀꺽. 따뜻한 걸 앞에 두니 절로 소주 생각도. 소주 한 병이 모자라 맥주도 몇 모금 더. 집에 온 손님에게는 이거라도 하나 더 걸치라고 겨울 잠바를 내주었다. 그래도 춥다고 무릎을 세우고 앉아 오돌돌돌 오돌돌돌.
알파나의 방공호에 있을 때도 가끔 촛불 아래에서 술을 마셨다. 나는 맥주, 모하메드 아저씨는 독한 위스키. 술이 금지된 건물이었지만 모하메드 아저씨는 숨어 마실 자리를 찾아 나를 부르곤 했다. 둘은 말이 통하지 않아 손짓으로 얘기를 나누었다. 밤 폭격에 겁에 질려 어깨를 움찔 놀라는 나를 보며 아저씨는 놀리기를 잘했다. 그건 모하메드 아저씨 뿐 아니라 이라크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다. 그이들은 쏟아지는 폭격에도 크게 놀라지도 숨을 자리를 찾는 일도 거의 없었다. 더는 피할 곳이 없다 여겨 그랬을까? 나 같은 이방인이나 바닥 위로 납작하게 엎드리곤 했다. 둘 사이에 긴 대화가 어려워 아저씨에게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나아 사알던 고향으은 꽃 피는 사안고오올……’ 아저씨는 곧잘 따라하곤 했다. 그리고 아저씨도 이라크 노래를 몇 곡 불러주었지. 몹시 구슬프게 들리는 곡조와 떨리던 목소리. 아저씨는 팔을 걷어 올려 걸프전에서 얻었다는 팔꿈치 상처를 보여주며 식구들 얘기를 했다. 자신은 돈을 벌러 바그다드에 와 있고 아내와 아이들은 지금 남쪽의 시골 마을에 있다고.
그친 비가 밤이 되어 다시 내린다. 개구리들이 운다.
여섯째 날 - 2005년 3월 19일
너무나도 치열하나 아주 평온하고 따뜻한 싸움
아침에 나가니 햇살이 참 좋았다. 며칠 만에 하늘도 무척 파랬다. 집회하기에 참 좋겠구나 싶었다. 서울 대학로에서 오늘은 평화 난장 문화제가, 내일은 국제공동반전행동의 날 집회가 있다.
건넛밭엘 내다보니 뒤엣 뒷집 할머니가 함지를 들고 다니며 무언가를 열심히 뿌리고 있다. 쫓아가 뭐하냐 물으니 흙에 비료를 준다 한다. 오후가 되면 집안 조카가 와 로타리를 쳐준다 했으니 그 전까지 다 해야 한다며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밭이 넓다.
“그냥 고루 뿌리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어디부터 해가고 있어요?”
나는 함지 없이 부대 째 끌고 다니며 할머니를 쫓아했다.
“힘드시죠, 할머니?”
딱히 묻는 말이라기보다 그저 인사처럼 건넨 말이었다. 그러면 보통은 맨날 하는 거 뭐가 힘드냐면서 웃고 마셨을 텐데 오늘따라 할머니 얼굴이 궂다. 이제는 일하기가 너무 힘들다, 허리가 아파 이것도 못 하겠다 하며 말이다.
“울진 나가 사는 아아들도 저들 사는 게 바쁘이 일 해 주러 오도 몬 해. 어젯밤에도 제사 지낸다고 왔다가는 새벽밥 먹고 위이 가뿌랬어.”
어제 밤이 늦어 승용차가 그리 올라가더니 그게 할머니 댁 아드님들이었구나. 할머니는 그래서 더 서운해 기운이 안 나는 모양이었다. 내심 오늘 누구 하나가 오전에 같이 일을 하면 땅을 갈아주러 오기 전까지 넉넉히 할 수 있을 텐데. 할머니 얼굴의 주름이 한층 깊게 잡혔다. 할머니는 한참을 더 힘들다는 타령이시더니 나중에 이 말을 할 때는 힘없이 웃었다.
“그래도 이래 힘들게 져 놓고 나면 나중에 아아들 먹으라고 쌀도 실어주고 감자도 보내고 그를 때가 젤 좋지. 그거 한다꼬 이래 하지.”
감자밭에 고추밭까지 다 해갈 쯤 해서 일 해 주기로 한 이가 모터를 끌고 왔다. 쪼그리고 앉아 풀매는 일에 대면 비료 흩뿌리는 일이야 일도 아니었다. 술렁술렁 서 다니며 하는 일이었으니.
방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사전을 뒤졌다. ‘유박, 석회고토, 유박, 석회고토……’. 비료 부대에 써 있는 이름인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 입으로 되뇌며 온 거였다. 할머니에게 물으면 노란 부대는 감자밭에 검정 거는 고추밭에 주는 거라는 대답이 다였다. <<우리말 큰사전>>에 보니 ‘유박’은 ‘깻묵’이라 나왔다. ‘석회고토’라는 말은 따로 없어 ‘고토’를 찾으니 그 첫 번째 뜻으로 ‘산화마그네슘의 통속적인 말’이라 풀이해 놓았다. 그래서 그 풀이가 맞나 했더니 그 아래에는 ‘건땅’과 같은 말이라는 설명도 되어 있다. 이번에는 다시 ‘건땅’이라는 말을 찾아보았다. ‘흙이 걸어서 농작물이 잘 되는 땅’이라 한다. 둘 가운데 이것 같기도 하고 저것 같기도 하고, 어느 쪽이 맞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에이, 말 한 번 참 어렵게도 써 놓았다. 하여튼 내가 아까 감자밭에 뿌린 검정 알갱이는 깻묵 비료, 고추밭에 준 갈색 흙가루 같은 것은 산성을 중화시킨다는 석회질 비료였다. 겨우 이름 하나 알았다.
엄청난 충격. 어제부터 나는 지금껏 책 한 권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다. 머리말부터 시작해 마음이 붙들리는 구절에 줄을 쳐가며 읽으니 어느덧 책 한 권의 거의 모든 쪽, 모든 문단에 밑줄을 긋고 있었다. 나는 이내 흥분했고 깊숙이 빠져들었다. 그럴수록 책장 넘기는 일은 애써 참아야 했다. 단숨에 읽고 싶은 유혹이 앞섰지만 한 편 한 편을 읽을 때마다 얻는 느낌이 너무 커 그걸 진정시키지 않고는 다음 글로 넘어가기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런다고 해서 온전히 내 것이 될 리 없겠지만 나는 밑줄을 근 구절들을 공책에 한 줄 한 줄 베껴가기 시작했다.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 이 안에서 열아홉 사람이 들려주는 스물다섯 편 이야기는 그것 그대로 기쁨이고 희망이었다. 그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려줄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물질문명과 세계화, 경제독점 같은 문제들의 본질을 환하게 드러내주고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우리가 왜 그 굴레를 벗지 못하는지, 그 안에 갇혀 사람답게 살아가지 못하는지에 대한 까닭과 해답마저 아주 쉽게 밝혀주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이들이 거슬러 살아가고 있는 하루하루. 흔히 무언가를 거슬러 사는 일, 맞서 저항하는 일이라 하면 어떤 희생이나 헌신, 고통스러운 인내 같은 것이 먼저 떠오르곤 하지만 그이들의 목소리는 기쁨에 넘쳤다. 행복에 겨워했고 즐거움을 가득 머금었다. 그 이야기를 읽다 보니 어느덧 나까지도 그이들의 즐거움에 젖어들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 앞에서 내가 지내고 있는 ‘기름 없이’ 한 주일은 생각할수록 정말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시작부터가 말 그대로 ‘견디며 지내는’ 것에 있는 까닭이었다. 다시 한 번 그 동기를 살피면 나는 어떤 식으로나마 전쟁에 맞서 저항을 해야지 하고 있었고, 여기에 내가 생각한 이 전쟁의 원인이란 개인에 대한 자원 소비의 강요와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한 석유 자원의 확보였다. 그러니 반전평화주간만이라도 기름과 전기를 쓰지 않으며 전쟁에 맞서겠다는 것. 그러면서 마음으로 준비한 것은 단지 춥고 어둡게 지낼 것과 따뜻한 음식 없이 지낼 것을 잘 견뎌야 한다는 생각에만 머물렀다. 그랬으니 나는 석유 소비와 문명 앞에서 아주 잠깐 동안 웅크리며 참고 견디는지는 몰라도 그것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문제는 춥고 어둡게 지내야지 하는 게 아니라 기름과 전기를 대신할 만한 것을 자연 안에서 내 몸을 움직여 찾아야 하는 거였으니 말이다.
무언가를 견디거나 참아 내는 식의 저항은 기본으로 즐거운 일이 될 수 없다. 또한 자연스럽지도 못할뿐더러 오래 갈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억지로 참아 내거나 견디는 게 아니라 그것 자체로 기쁨과 즐거움이 된다면 문제는 확 달라진다. 관념의 보람과 맞바꾸는 자기희생도 아니며 대의를 위한 헌신 같은 것도 물론 아니다. 싸우기 위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서 선택하는 것이 그것 스스로 싸움이 되는 일, 세상에 대한 저항과 삶의 행복을 가꾸는 일이 서로 모순 없이 하나가 되는 일이다. 과연 이게 가능한 것일까? 나는 이 놀라운 길을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의 삶에서 보고 말았다.
그이들이 ‘플러그를 뽑고’ ‘낮은 수준의 기술력’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문명을 거부하는 것만이 아니다.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일은 더더구나 아니다. 그이들이 선택한 삶은 자연스레 식구나 이웃들과의 관계를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로 바꾸어 주었고, 그이들 스스로를 자연 생태 안으로 하나가 되게 해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나가 자기 삶의 온전한 주인이 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 위에서 가꾼 마을 단위의 경제와 문화는 독점 자본의 지배와 세계화의 폭력이 더는 끼어들 수 없게끔 했다.
그이들은 ‘플러그를 뽑은’ 것으로 자아를 찾았고 사랑과 감사를 배운 동시에 세계화와 싸우고 있다. 문명의 횡포, 전쟁, 지구 생태의 파괴와 싸운다. 너무나도 치열하나 아주 평온하고 따뜻한 싸움, 기쁨에 넘쳐 싸우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이들처럼 살아가며 말하는 것을 이제 아주 처음 알게 된 건 아니다. 하지만 그동안에는 이번처럼 강하게 온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과연 그렇게 개개인의 삶을 바꾸는 것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하는 고민부터 ‘그러한 삶은 어쩌면 세상을 등지고 당장 고통 받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건 아닌가?’ 하는 갈등, ‘그와 같은 삶을 살고는 싶지만 누구나 그렇게 살 수 있으려면 더 많은 다른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하는 물음까지 시원하게 풀리지 못하는 것들이 가로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확신하지 못했으니 어떠한 실천으로도 이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는 그러한 고민과 갈등, 물음에 대한 해답까지 아주 쉽게 보여준다.
어제만 해도 나는 책을 보다가 왜 이걸 이제야 꺼내 읽는지 나 자신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게 아니다. 차라리 지금처럼 문제에 대한 고민을 한참 싸안고 있다가 읽게 된 것이 오히려 잘 된 일인지 모르겠다. 흥분이 가라앉질 않는다.
해질 무렵 집 앞 뜰에 나가 불을 지폈다. 땅을 어느 정도 파고 둘레에 돌을 세운 뒤 잘라 버려진 나뭇가지들을 모아 땔감을 했다. 내가 봐도 참 어설펐다. 이런 일을 할 때면 늘 누군가 옆에서 알아서 척척 해 주었지 내 손으로 혼자 하기는 처음이다. 불이 꺼지면 다시 붙이고 또 꺼지면 또 붙이고. 땔나무보다 종이를 더 태웠나 보다. 어설프건 말건 계속 했다. 도시 시멘트 골목에서만 크느라 아무 것도 보고 겪지를 못했으니 잘 못하는 거야 당연하다. 게다가 눈썰미도 없고 손끝도 무디다. 누가 곁에 있으면 무엇 하나 제대로 못한다는 게 창피해 일부러 더 뒤로 물러서려고만 했으니 따로 배우지도 못했다. 생각 같아서는 어렸을 때로 돌아가 싹 다시 배우고 싶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못한다고 계속 안 하려고만 해서는 언제가 되어도 내 손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어설프면 어설픈 대로 무엇이든 자꾸자꾸 해 봐야한다. 은박지로 싼 감자 세 알을 넣고 잿불로 덮었다. 금세 깜깜해졌고 감자가 채 읽기 전 울진평화모임 분들이 집에 모였다. 번개탄에 삼겹살까지. 철망을 놓고 그 위에 고기를 구웠다. 잿불에 묻힌 감자를 꺼내어 먹어 보니 맛이 구수했다. 모임 분 가운데 한 분은 어릴 적 촌에서 놀던 이야기를 그렇게나 잘 했다. 나로서는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어느 책에서도 보지 못한 얘기들이다. 듣는 내내 입을 다물지 못했나 보다.
불을 피워 좋았다. 사람들과 함께 둘러앉아 더욱 좋았다.
마지막 날 - 2005년 3월 20일, 이라크 침공 2주년
일주일의 끝, 이제부터 제대로 시작한다.
이라크 하늘에 미사일이 퍼붓기 시작한지 꼭 두 해가 되는 날이다. 서울에서 집회에 참가한 동무의 말로는 이천에서 삼천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다 한다. 요사이 언론의 상황이나 눈에 들어나는 반전 열기에 견주면 적지 않은 수가 모인 거라 할 것이다. 고맙다, 모두들. 아무래도 파병 결정을 눈앞에 두고 있던 지난해처럼 바로 여론의 힘을 모아 움직여야 하는 일은 없으니 이라크 전쟁에 관련한 전반의 관심이 떨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게다가 이라크 현지에 대한 보도는 아주 짧은 기사로나 처리되며 그것도 점령군의 입맛을 따르는 것으로 세계 시민들을 속이려 든다. 지난 1월의 총선을 두고는 마치 굉장히 성공적으로 치룬 것처럼 내보내면서 이라크에 민주주의가 들어서기라도 한 듯, 이라크 사람들이 점령 정책을 지지한다는 듯 여기게끔 하려 했다. 나 또한 투표율이 60%를 넘겼다는 말에 믿기 어려워하면서도 놀라워 당황스러워했다. 선거가 지나 보름 쯤 뒤 온 살람 아저씨의 편지를 보고 나서야 그 모든 게 거짓이었음을 알았다. 투표에 참여한 사람들은 고작 40%정도였고, 그 숫자마저도 점령군과 임시 정부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한 거나 다름없었다. 투표를 않으면 양식 배급권을 주지 않겠다고 했으니 당장 먹을 게 없는 백성들이야 그것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언론은 이러한 사정을 온전히 알리지 않은 채 대부분 이라크 사람들이 점령정책을 받아들여 안정을 찾고 있다는 식으로 비추려 했다. 게다가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을 더욱 커다랗게 부풀려 보여주면서 불안의 까닭을 모두 이라크 사람들에게 돌렸다.
물론 갈수록 이라크 사람들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 또한 계속 되고 있다. 결혼 잔치를 벌이는 곳에 로켓포를 쏘고, 종교 예배를 올리는 사원까지 폭탄 공격이 있다. 하지만 그 뒤에는 점령 초기부터 일관되게 분열 정책을 써온 침략자들의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침략자들은 이라크 사람들이 서로 싸우게끔 해 그것으로 점령의 근거를 만들고, 그 싸움을 이용해 점령의 내용을 원하는 대로 이끌고자 한다. 그것은 마치 해방직후부터 전쟁을 겪은 뒤 혼란 속 이 땅에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겪은 소용돌이와 닮았다.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말로 패가 갈렸고, 한 마을에서 사이좋게 지내던 이웃끼리 죽고 죽였다. 이웃 마을 사람들을 떼로 죽이는 일도 잦았으며 집을 불태우는 일에 코뚜레를 꿰어 잡아가는 일까지. 그 모든 일은 좌익이 뭐고 우익이 뭔지 하는 것도 모른 채 시골에서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던 순박한 백성들까지 가만히 두지 않았다. 지금 이라크에서 수니파와 시아파로 갈려 싸우는 일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전쟁이 일어난지 꼭 두 해가 지난 지금, 이라크는 전쟁보다 더한 점령의 소용돌이로 신음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 땅에 침략군을 보내 놓은 나라의 백성이다.
오늘로 일주일이 다 지났다. 처음에는 석유 자원을 안 쓰겠다는 생각 하나에 막무가내로 시작했다. 그리고는 잘 참고 지내야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 시간을 다 한 지금, 나는 이 일주일이 오늘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당장이야 어렵겠지. 다 끊는 것도, 다 없애는 것도. 하지만 이 일주일은 어떻게든 앞으로의 생활로 스며 이어질 것 같다. 아니, 어떻게든 이어가고 싶다. 뽑아 놓은 플러그를 다시 꽂지 않은 채 내 삶을 찾는 일, 그리고 그것으로 문명의 지배와 자본의 전쟁에 맞서는 일.
첫댓글 이제야 다 읽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따뜻한 것이 솟는다. 희망이다. 기쁨이다. 아파하는 것들을 섬기는 따뜻한 마음이다. 그렇다. 가진 자들이 살아있는 것을 다 죽이는 것에 저항하는 것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에서부터 시작해야지. 맑고 밝은 마음으로 이 길을 걸어야지. 천천히 하지만 쉼없이.
냉이님 생명력이 느껴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