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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22일 목요일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1900년 무렵부터 성모 마리아께 ‘여왕’의 영예가 주어져야 한다는 요청이 많았다. 1925년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이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정해지면서 이러한 요청은 더욱 늘어났다. 이에 따라 1954년 비오 12세 교황은 마리아께서 여왕이심을 선언하고, 해마다 5월 31일에 그 축일을 지내도록 하였다. 그 뒤 보편 전례력을 개정하면서 마리아를 천상 영광에 연결하고자 성모 승천 대축일 뒤로 옮겼으며, 축일 이름도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로 바꾸었다. 이날 교회는 성모 승천의 영광을 거듭 확인하며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도구가 되신 것을 기린다.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정결하게 하여 새 마음을 주고 새 영을 넣어 주겠다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 비길 수 있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영을 넣어 주겠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6,23-2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3 “나는 민족들 사이에서 더럽혀진,
곧 너희가 그들 사이에서 더럽힌 내 큰 이름의 거룩함을 드러내겠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너희에게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면,
그제야 그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24 나는 너희를 민족들에게서 데려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다가,
너희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25 그리고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26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27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
28 그리하여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1-1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1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이사 9,1-6)와 복음(루카 1,26-38)을 봉독할 수 있다.>
오늘의 묵상
마태오 복음서에서, 임금이 준비한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고도 가지가지 이유를 앞세우며 오지 않은 자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스라엘을 나타냅니다. 21장에서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았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여기에 해당하고(마태 21,23-27 참조),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는 말을 듣고도 가지 않은 아들이나(21,28-32 참조) 열매를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도(21,18-22 참조) 그들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임금이 보낸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거부하였음을 의미하고, 임금이 군대를 보내어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에 예루살렘이 로마 군대에게 파괴됨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다시 초대된 이들은 처음 초대받았던 이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21,31) 들어가고 있는 세리와 창녀,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나중에 초대받은 이들에 속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혼인 예복입니다. 초대는 선물로 주어졌지만, 그 초대를 받은 사람 편에서 초대에 알맞게 응답하지 않는다면 그 선물은 효력을 잃고 맙니다. 먼저 초대받았던 이들이 밭과 장사를 앞세웠기 때문에 그 초대를 잃어버렸다면, 그 뒤에 초대받은 우리도 이 초대보다 다른 무엇을 앞세울 때 그 초대를 놓치고 말 것입니다. 마침 오늘 입당송이 “황금으로 단장한 왕비, 당신 오른쪽에 서 있나이다.”입니다. 하늘 나라의 초대를 소중히 여기고 잘 간직하여 깨끗한 혼인 예복을 입고 그 나라에 들어갈 날을 준비합시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성모님께서 천상의 여왕이 되신 이유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희 살레시안들은 저녁 식사 설거지가 끝나면 자동으로 모이는 곳이 있습니다. 야외에 서계시며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시고 도와주시는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성모님’ 상 앞입니다.
한 형제의 선창으로 묵주기도를 시작합니다. 형제들이 함께 수도원 경내를 천천히 산책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치는 이 시간, 하루 일과 중,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입니다.
묵주기도가 끝나갈 무렵, 발걸음은 다시금 성모상 앞으로 향합니다. 기도 끝에는 어김없이 성모님 노래를 합창합니다. “마리아 모후여, 어지신 어머니~”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입니다. ‘모후’라는 말은 ‘왕의 어머니’, 또는 ‘여왕’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에 가장 충실히 협조하셨던 성모님의 머리 위에 빛나는 왕관을 씌워드린 것을 경축하며 ‘여왕’ ‘모후’라는 칭호를 붙여드렸습니다.
묵주기도, 영광의 신비 바치실 때, 제일 마지막 5단은 어떤 신비를 묵상합니까? “예수님께서 마리아께 천상 모후의 관을 씌워드림을 묵상합시다.”입니다. 일종의 대관식 장면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삼종기도 첫구절은 어떻습니까? “천상의 모후여, 기뻐하소서! 알렐루야! 태중에 모시던 아드님께서 알렐루야!” 보십시오! 여기서도 천상의 모후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성모님 성가 중에 아주 유명한 성가 있습니다. “하늘의 여왕 되시는 오 마리아!” 매일 수도자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이런 찬미가를 부릅니다. “여왕이시며 사랑에 넘친 어머니”
보십시오. 하늘이 여왕이신 성모님에 대한 표현이나 이미지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 여기저기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여왕’ ‘모후’라는 호칭은 단순하고 소박하신 성모님, 고향에 계신 우리 어머니 같은 성모님께 그리 잘 어울리는 호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언제나 모든 것을 거꾸로 뒤집는 분,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마니피캇 찬가의 내용처럼, 주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흩어 버리십니다. 권세있는 자들을 자리에서 내치십니다. 부요한 자들을 빈손 돌려보내십니다. 목에 잔뜩 힘주는 사람들, 잔뜩 폼 잡는 사람들을 바닥으로 내치십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한결같은 충실함으로 아들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최선을 다해 협조하셨던 지극히 겸손하신 성모님께 큰 축복을 내리시어, ‘모후’‘여왕’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성모님은 모후요 여왕이기는 하시지만, 동시에 한없이 겸손하신 여왕이십니다. 우리의 성모님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갖은 고통과 상처로 힘겨워하는 어린 양들을 측은지심의 눈빛으로 굽어보시고, 살뜰하고 극진히 챙기시는 봉사의 모후이십니다.
승천하신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천상 모후의 관을 받으신 후에도, 한결같이 자애롭고 온유한 모습으로, 죄인인 우리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봉사하고 계십니다.
교회가 성모님께 여왕이란 어마어마한 칭호를 붙여드린 이유는 그분이 하느님의 여종으로서 최선을 다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생애는 가장 모범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평생토록 침묵 속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으셨고, 계속되는 고통과 십자가 속에서도 기도하고 희망하며 아들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셨습니다. 이것이 여왕이 되신 이유였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잘못 받고 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신학교 때 예비군 훈련을 하면 신학생들은 수단을 벗고 예비군 군복을 입고 밖으로 나갑니다. 예비군 복장은 군대 제대할 때 입고 나왔던 옷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옷만 입으면 사람들이 바뀝니다. 말년 병장으로 모두 변하는 것입니다. 모자를 비뚜로 쓰고 윗도리는 밖으로 내고 담배를 뭅니다. 돌아올 때는 술도 거하게 취하여 워커 끈을 다 풀은 채로 복귀합니다. 그때마다 생각하는 것은 ‘복장이 사람을 만든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겉은 군복을 입었지만 속은 여전히 수단을 입고 있는 신학생들도 발견이 됩니다. 절대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밖의 복장보다 내면의 복장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주님 앞에서 입어야 할 옷은 종의 옷이며, 사람들을 만날 때 입어야 할 옷도 종의 옷입니다. 내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에 대한 믿음에 따라 우리 삶의 태도가 결정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혼인 잔치에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혼인 잔치에서 쫓겨납니다. 그는 분명 자신은 혼인 잔치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믿음은 그 삶의 태도를 그에 합당하게 바꿉니다. 혼인 잔치를 망치는 사람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힘으로 무화과 잎으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습니다(창세 3,7 참조). 자기들 스스로 하늘 나라에 합당한 존재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가죽옷을 만들어주셨습니다(창세 3,21 참조). 하느님을 만나 생겨난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옷은 곧 정체성입니다.
새 정체성은 만남을 통해 얻어집니다. 만약 내가 미혼 남성이었는데, 어떤 여자를 만나 결혼했다면 이제 그 여인 때문에 나는 남편이라는 새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남편이 되면 이전 정체성대로 살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만나오던 여자들이 있었다면 새로운 정체성을 위해 그 관계들을 끊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전 옷을 벗어버리는 일입니다. 성사로 치면 이 과정이 세례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세례는 어떤 옷, 곧 어떤 정체성을 가지게 할까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6-27)
저희 성당에서는 강론이 끝나면 모두 함께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입니다.”를 외칩니다. 이것이 하느님 자녀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지 않는 이상 어떻게 그리스도라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로마 6,3-4)
우리가 그리스도께 감사해야 할 유일한 것이 있다면 죄로 살던 이전의 내가 죽었고 이젠 그리스도를 입어 그리스도로 믿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나를 그리스도로 살게 하고 하늘 나라 잔치에 합당한 예복을 갖춘 존재로 만듭니다.
50조 사업가 ‘댄 페냐’의 쓴소리를 들어봅시다.
“당신은 당신과 어울리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친구를 보여주세요. 당신 미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누구와 어울리나요? 당신은 빌 게이츠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스티브 잡스나 워렌 버핏도 아닙니다. 당연히 일론 머스크와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왜 그들과 어울리지 못하나요? 그들의 수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일론 머스크의 일과 삶에 균형을 이룬다고 생각하세요? 아니요. 스티브 잡스가 살아있을 때의 일과 삶의 균형을 이뤘다고 생각하세요? 아니요. 빌 게이츠처럼 사나요? 헨리 포드처럼 살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세상의 부를 만든 사람 중 아무도 일과 삶의 균형을 이루지 못했다면 왜 당신은 그들이 가졌던 것을 가질 것으로 생각하세요? 20년 또는 30년 후에 당신이 있고 싶은 곳에 있는 사람을 찾아서 지금 그 사람에게 가세요. 세계적인 운동선수가 되고 싶다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자존감을 키우고 싶다면 일론 머스크처럼 사십시오. 그러면 높은 자존감은 엘론 머스크와 커피를 마실 시간을 마련해 줄 것입니다.
은행에서 돈을 받고 싶다면, 당신 나라 대통령처럼 옷을 입으십시오. 당신 나라 총리처럼 옷을 입어요. 당신에게는 첫인상을 남길 기회가 한 번뿐입니다. 그러나 당신들 대부분은 당신들 옷차림 때문에 부끄러울 것입니다. 두 번째 인상은 입을 열 때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가장 큰 존경심을 가지고 제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더듬거리고, 중얼거리고, 땀을 흘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옷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출처: ‘50조 사업가: 부자 되려면, 옷부터 똑바로 입어야’, 필미필키 티비, 유튜브]
저 같은 경우는 그리스도를 입었다고 믿기 위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를 자주 외웁니다. 그리고 마치 그리스도의 그 심장이 나의 심장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것이 혼인 예복을 입는 방법입니다. 그리스도를 입고 그리스도라 믿지 않았다면 진정으로 세례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전입니다. 뉴욕에 있는 분에게 송금할 일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카카오 뱅크처럼 미국에도 간편하게 송금할 수 있는 ‘벤모와 젤’이 있습니다. 수수료 없이, 소액을 송금할 수 있는 편리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송금의 한도가 있습니다. 저는 송금 한도가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몇 번에 걸쳐서 송금하니, 은행에서 온라인 뱅킹을 막았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해결하려 하니 복잡했습니다. 은행에 가서 이야기하니, 직원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은행을 통해서 송금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같은 금액을 몇 번에 걸쳐서 송금하려 했을 때, 은행은 제게 전화도 하고, 문자도 보냈다고 합니다. 제가 그것을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은행은 저를 보호하기 위해서 온라인 거래를 막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은행의 계좌는 본인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볼 수 있으면 곤란할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제가 있는 사제관은 게이트가 있습니다. 게이트를 열기 위해서는 비밀번호를 알아야 합니다. 단지에서는 비밀번호를 3개월에 한 번씩 교체하고 있습니다. 단지에 있는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무엇이 새 마음이고, 무엇이 새 영일까요? 새 마음과 새 영은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 ‘비밀번호’와 같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넣어 주신 ‘숨’입니다. 아담이 선과 악을 아는 나무를 먹으면서 상실했던 하느님을 닮은 마음입니다. 가난한 이를 도와주려는 측은지심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자신을 낮추려는 사양지심의 마음입니다. 겸손은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위치의 문제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이 겸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이 겸손입니다.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수오지심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용서해 주셨고,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아 주시는 아버지의 자비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처럼 희게 하리라.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하리라.” 우리의 죄가 크고, 많아서 하느님께 갈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느님께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하늘나라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회개는 하늘나라의 문을 열 수 있는 ‘비밀번호’와 같습니다. 옳고 그름을 식별할 수 있는 시비지심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위선과 교만을 비난하셨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계명을 잘 안다고 했지만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식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탐욕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율법과 계명을 이용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과 자캐오의 나눔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들은 이방인과 세리였지만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식별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현실의 삶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간다는 것은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 기쁨, 자유를 얻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를 현실의 삶에서 이미 천상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듯이 우리 역시 영원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선택하였습니다. 신앙을 통해서 주님의 제자가 되는 훈련을 하였습니다. 공동체 모임을 통해서 함께 기도하고, 주님의 자녀로서 충실하게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참 좋은 선택을 하였고,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잔치에 초대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봉사가 주님의 잔치에 함께 할 수 있는 예복이 될 것입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기회를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를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 요한 켐블(John Kemble)
활동년도 : 1599-1679년
신분 : 신부, 순교자
지역 : 영국(UK)
같은 이름 : 요안네스,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켐블
영국 잉글랜드(England) 헤리퍼드셔(Herefordshire)의 세인트 위어나즈(Saint Weonards)에서 태어나 가톨릭 신자인 부모 밑에서 자란 성 요한 켐블(Joannes Kemble)은 사제직을 위하여 프랑스 두에(Douai)로 가서 공부하여 1625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즉시 영국 선교 길에 나서서 고향인 헤리퍼드셔와 만머스셔(Monmouthshire) 지방에서 43년 동안이나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티투스 오츠(Titus Oates) 음모의 희생물이 되어 펨브리지 캐슬(Pembridge Castle)에서 1678년에 체포되었다. 죄목은 찰스 2세의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였다. 그러나 그의 음모는 런던에서 개최된 프리비 회의의 조사 결과 무혐의로 판정되었으나, 가톨릭 사제임이 드러나 유죄 판결을 받고 80세의 고령으로 헤리퍼드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Wales)의 40명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복자 베르나르도 (Bernard)
활동년도 : 1604-1694년
신분 : 수사
지역 : 오피다(Offida)
같은 이름 : 버나드, 베르나르두스
마르카의 아피냐노에서 어느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베르나르두스(Bernardus, 또는 베르나르도)는 일곱 살 때부터 양지기로 일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수도자가 되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카푸친회의 평수사가 되었다. 그는 여러 수도원의 잡일을 맡아 하면서 문전걸식을 시작하였다. 그의 이런 행동이 처음에는 인정되지 못하여 관구장에게 질책을 받기도 했으나, 일생동안 이런 일을 통하여 높은 성덕의 지위에 올랐던 것이다. 주민들은 그분에게 음식을 들고 와서 영적 지도를 받았고, 수많은 죄인들이 개과천선하였던 것이다.
한번은 어느 가련한 부인이 죽어가는 아이를 베르나르두스에게 내보이며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는 그 아이를 팔에 안았는데 그 아이는 이미 죽어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 부인은 이제 아들을 살려내라고 생떼를 쓰기 시작하였다. 성인은 그 아이를 안고 그곳의 성 펠릭스(Felix) 성당으로 가서 이렇게 기도하였다. “선하신 성 펠릭스여, 이제는 당신이 저를 도와줄 시간입니다.” 그 후 그 아이는 소생하였다. 이 기적으로 수많은 주민들이 큰 혼잡을 빚었다고 한다. 그는 90세의 일기로 선종했는데, 수도원 문지기로 일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1795년 교황 비오 6세(Pius 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