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m-i.kr/news/articleView.html?idxno=2018
서울역에서 16년 째 노숙을 하고 있는 박 모씨. 박 씨는 한때 충청도에서 잘나가는 지역 유지의 아들이었다. 이렇게 노숙자가 될 팔자가 아니었던 박 씨는 형과의 불화로 노숙자가 됐다.
박 씨는 충청도의 한 부유층 자재로 태어났다. 학교도 다니며 그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이 지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붉어진 형과의 유산 상속 마찰은 그를 노숙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박 씨의 형은 부모님이 남겨 놓은 많은 유산을 전부 가로채기 위해 박 씨를 속였다. 당시 결혼 전이었던 박 씨는 ‘결혼 전까지 유산을 관리해주겠다’는 형의 말에 유산 전부를 형에게 넘겨줬다.
이후 시간이 흘러 박 씨는 결혼을 했고 유산 절반을 요구했지만 박 씨의 형은 이를 지키지 않았다. 박 씨는 여러 차례 형에게 유산을 나눠 줄 것을 요구했지만 이미 유산 전부가 형의 이름으로 되어 있던 터라 어쩌지 못했다. 오히려 키워준 은혜를 모른다며 박 씨의 형은 박 씨를 집에서 쫓아냈다.
이후 박 씨의 가난한 삶이 시작되었다. 공사판부터 시장 잡일까지 박 씨는 안 해본 일이 없었다. 허나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박 씨의 아내는 집을 나가버렸다.
아우가 이런 상황이 되었는데도 비정한 형은 동생 박 씨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후 삶에 회의를 느낀 박 씨는 전국을 떠돌며 노숙생활을 하고 있다.
https://www.yna.co.kr/view/AKR20170126136600061
IMF 사태 이후로는 고학력 노숙인이 많아졌다. 김 신부는 IMF 당시 사업이 한순간 기울어 거리에 나앉은 서울대 출신 노숙인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김 신부는 이러한 수많은 노숙인의 다양한 사연을 천민자본주의로 묶었다.
그는 "저마다 노숙할 수밖에 없게 된 이유가 있지만, 노숙은 기본적으로 천민자본주의의 결과물"이라며 "제대로 된 사회적 안전망 없이 성장에만 힘쓰다 보니 조금 삐끗하면 거리로 내몰리기 십상이고 공정한 사회도 아니어서 가난이 대물림돼 노숙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김 신부가 고등동 밤거리를 오가는 청춘들을 '예비 노숙인'으로 표현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https://imnews.imbc.com/replay/2022/nwtoday/article/6335800_35752.html
중국에서 여러 기업을 운영하며 경제계 거물로 불렀던 한 사업가가 길에서 폐지를 줍는 노숙자 신세로 전락한 사연이 화제인데요.
세 번째 키워드는 "회장님의 기막힌 인생 천만장자에서 노숙자로" 입니다.
헝클어진 머리에 낡은 옷차림의 노숙인, 중국의 한 기업 회장님었다는데 믿어지시나요?
지난 20일, 광둥성 선전시 관계자가 추위에 떨던 그를 발견해 신원을 확인했더니 한때 천만장자로 이름을 알린 '장위안천'씨였던 겁니다.
그는 고향인 산둥 성에 의류회사를 차려 성공한 뒤 홍콩과 선전에서 식품 회사를 운영했다는데요.
당시 그의 회사 지분이 90%를 넘고 회사 직원은 수백 명에 달했다고요.
하지만 2003년부터 6년 동안 무리한 사업 확장이 부메랑이 돼 돌아왔습니다.
은행 대출금을 갚지 못해 결국, 2017년 파산하면서 상황이 악화 돼 2년 전부터 폐품을 팔아 구걸 생활을 하게 됐다는데요.
그는 사업 성공으로 가족과 연락을 끊고 지냈다가 이런 처지가 알려지자 가족은 그를 고향인 산둥으로 데려가기로 했습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62731.html
홀로 살던 노숙인 염씨의 빈소는 서울 은평구 서울시립서북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무연고자 장례 지원 단체의 도움이 없었다면 염씨도 다른 무연고자 대부분이 그렇듯 술 한잔 받지 못한 채 서둘러 화장장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래도 사흘장은 언감생심이다. 염씨는 빈소가 차려진 이튿날 발인을 마치고 서울시립승화원에서 한 줌 재로 변했다.
베트남전에 참전했었다는 염씨는 젊은 시절 건설 붐이 일었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공사용 트럭을 몰며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귀국해서 집도 마련하고 큰 트럭도 샀지만, 1997년 말 외환위기에 휘청이기 시작한 삶은 2005년 교통사고로 허리를 다친 뒤 돌이킬 수 없게 됐다고 했다. 1억원에 달하는 차량 할부금을 내지 못했고, 급기야 2007년부터는 종각역에 자리를 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