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거부는 고통을 동반한다.
오늘은 연중 제10주일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에서는 믿음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묵상케 합니다.
아담과 에와는 당신의 창조주이신 주님을 알지 못하여 불순종했습니다.
하느님의 명령을 깨닫지 못하여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복음에서도 예수님 가까이 있던 사람들까지도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여 모독하는 잘못까지도 범합니다.
믿음은 성부 성자를 바로 아는데서 시작되며, 받아들이므로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믿음은 회개이며 새 사람으로 새로워지는 것이며
그리스도는 새 아담이며 악을 이깁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 중에 걸림돌이 없이 평탄하지는 않았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반대자들도, 심한 비판자들도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제1독서에서는 아담이 죄에 떨어지는 경위를 이야기하고,
제2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께서 당신의 선교활동에서도 어려움이 있었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생활에서 십자가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하나의 법칙이 있습니다.
“투쟁하지 않으면, 기꺼이 지지 않으면 승리의 화관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께서도 이를 재 강조하시면서 “나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노라”고 모진 말씀을 하셨습니다.
칼에는 두 가지의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밖으로 휘둘러지고 다른 하나는 안으로 박히는 것입니다.
밖으로 휘두르는 칼은 대제관의 종의 귀를 베어 버린 성급한 베드로 사도의 칼처럼 이웃 사람들을 상하게 합니다.
주께서 네 칼집에 네 칼을 꽂기를 명하신 칼은 이런 종류의 칼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칼로 치는 자는 칼로 망하리라!” 악을 악으로 갚는 자는 악으로 망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십니다.
다른 종류의 칼은 이기주의와 그릇된 자기중심과 탐욕을 잘라 버리는 칼입니다.
자기의 탐욕과 육정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십자가를 지지 않는 자는 자신의 십자가를 비열한 독선과 핑계로
갖은 악랄한 수법으로 이웃 사람 등에다 슬그머니 올려놓고 시치미를 뗄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 “왜 우리 마음이 그렇게도 편안치 못한가!”하는 한탄이 절로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묵은 나와 싸워 이기지 않고서는 마음의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 이기주의는 항상 불안합니다. 자기만을 신처럼 우상처럼 떠받들기 때문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일입니다.
연합군의 한 병사가 몇몇 동료 군인들과 함께 어느 날 저녁 술집에서 놀았습니다.
술이 만취된 병사들과 술꾼들이 서로 싸움 끝에 말리던 그 집 부인이 살해되었습니다.
일이 공교롭게도 그 부인 살해 협의가 그 병사에게 떨어져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변호하는 법관 장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나는 살해를 안 했습니다. 그만한 법적 증거도 있습니다. 살인자는 그 때 같이 있었던 모리 하사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혈혈단신이고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모리를 기다리는 가정을 생각해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 살벌한 전쟁터에서 저는 먼저 가겠습니다.
그 친구를 위해서는 저의 생명까지도 기꺼이 버릴 각오이니 당신의 변호는 구구합니다.” 라고 거부하였습니다.
드디어 사형 집행 날에 운명의 짓궂은 장난은 그 살인범 모리 하사가 집행관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그 병사는 아찔하였습니다.
그 인간의 뻔뻔스러움을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었습니다.
눈을 보자기로 가리고 소총 병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습니다.
“쏘아”하는 살인범 모리 하사 집행관의 명령에 따라 그 병사는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총살 사형 집행 규칙에 그 지휘 하사관이 일단 집행이 끝나면 사형수 머리에 권총 일발을 쏘게 되었는데
그 하사관은 늠름한 걸음걸이로 그 쓰러진 병사 앞에 나아가
권총을 빼어 명중시키고는 책임을 완수했다는 듯이 병사들을 이끌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모른다면 이병사의 죽음은 어리석은 죽음이었을 것입니다.
“형제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하신 복음의 말씀을 기억하며
그 병사의 죽음을 고귀한 것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거스르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비극적인 예수님의 수고 수난이 일어난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악을 선으로 이기시는 예수님의 투쟁방법은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길 밖에 더 좋은 방법이 없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일방통행인 저 십자가의 길 밖에 다른 길이 없으셨습니다.
그러기에 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성인 성녀들이 이 십자가를 기꺼이 짐으로 영원한 영광을 차지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십니다.
그러기 세상 구원을 위해 당신의 십자가의 고통을 우리 모두에게 나누어지고 가기를 우리에게 청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에서만나는 고통, 어려움은 주님 사랑의 징표이며,
우리를 당신의 형제, 자매 어머니로 받아들이시는 징표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지닐 때 구원의 확신을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
2018년 연중 제10주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