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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일 월요일
[(녹)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안식일에 이사야 예언서 두루마리를 펴시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신다(복음).
제1독서
<나는 여러분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였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2,1-5
1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2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3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4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5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6-30
그때에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24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루카 복음서에서는 오늘 복음의 단락이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부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루카 4,18) 전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백성 가운데 가난한 이들만 따로 모으신 뒤 복음을 전하셨을까요? 그러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세리 자캐오나 니코데모,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 같은 이들도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니지 않았던 이들도, 종을 고쳐 달라고 청하였던 백인대장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전하여 들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신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그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에게,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행위는 기쁜 소식이 아니라 법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 구원을 간절히 바랐던 이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행위들에서 생명을 얻었지만, 예수님 없이도 부족할 것 없다고 여기던 이들은 그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복음은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이었기에 예수님께서 그들 안에 들어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하느님 앞에서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요한 묵시록 3장 17절에서는 라오디케이아 신자들에게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 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런 착각에 빠져 기쁜 소식에 귀를 막지 않도록 우리의 가난함을 살펴야 하겠습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진정 중요한 회복은 영적인 시력의 회복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안식일을 맞아 당신의 고향 나자렛 회당으로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를 펼치시며 당신에게 해당되는 구절을 장엄하게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하러 왔는지를 이사야 예언서를 통해 명명백백하게 밝히십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외아들이자 메시아임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파견되신 이유도 분명히 밝히십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우리 인간들의 위로자요 해방자, 구원자가 되기 위해 오셨음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다양한 속박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해방자로 오셨다는 말씀에 참으로 큰 위로와 기쁨을 얻습니다. 돌아보니 참으로 다양한 사슬에 묶여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무거운 죄의 사슬, 아무리 노력해도 호전되지 않는 영혼의 병,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나 자신이라는 굴레...
이토록 오랜 노예 생활과 유배 생활 속에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의 해방자로 오셨다니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또 얼마나 반가운 말씀인지요? 육체적으로 눈먼 이들의 시력을 되돌려주시는 것은 일종의 표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 중요한 회복은 영적인 시력의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정신의 눈 멈, 본질적인 것, 특히 하느님의 빛으로부터 멀어진 영혼의 암흑으로부터의 회복은 얼마나 더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어두운 이 세상에 찬란한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이제 우리 인간 이성의 빛을 밝혀주실 것입니다. 이성의 빛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빛을 통해 더이상 어두워지지 않을 참된 광명이 될 것입니다.
이제 이성의 빛(lumen rationis)은 계시의 빛(lumen revelationis)으로 변형되고 드디어는 영광의 빛(lumen gloriae)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서 낭독이 끝나고 예수님께서는 그야말로 촌철살인의 말씀 한마디를 덧붙이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의 명료한 말씀에 많은 사람들이 경탄과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그런 말씀이 흘러나온 것에 대해 놀라워하면서도 구원의 기쁜 소식에 열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더니 여기저기서 불신과 비판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목소리가 이것이었습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사람들의 태도가 돌변해버린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나자렛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잔뜩 기대했을 것입니다. 메시아는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며 순식간에 자신들의 처지를 180도 뒤바꿔주실 분으로 기대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지상적 번영이나 물질적인 부, 강력한 정치력,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사실 메시아를 통해 기대했던 것은 빵, 기적, 권세,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강력히 요구하신 것은 회개와 새 생활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간단한 예수님의 요구조차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완고해져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자신들의 눈앞까지 다가온 구원을 발로 차버리는, 그래서 그 구원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차지가 되고 마는 불행을 선택한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전 건축 비용 마련이었다고 합니다. 댈러스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교우들과 댈러스 교구 주교님이 한국을 방문하였고, 김수환 추기경님에게 추기경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지 문의하였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성전 건축 비용 마련과 더불어 지역 사회의 복음화를 위해서 ‘김수환 추기경 배’ 골프대회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팬데믹 기간을 제외하면 매년 골프대회가 성황리에 열렸다고 합니다. 교우는 물론, 교우가 아닌 분들도 골프대회에 참여하였고, 지역사회에 널리 알려진 행사로 자리 잡았다고 합니다. 지난 2월에 제가 부임했을 때, 교우들은 김수환 추기경 배 골프대회를 이야기했습니다. 여러 경로로 알아본 결과 주일에는 가능하지 않고, 평일에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려와 걱정과 달리 평일에 골프대회를 개회함에도 160명이 넘는 분이 신청했습니다. 댈러스, 휴스턴, 포트워스, 오스틴에서 신부님과 교우들이 신청하였고, 교우가 아닌 분들도 신청하였습니다. 운동을 통해서 교우들이 친선을 도모하고, 교우가 아닌 분들에게는 가톨릭을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힘든 내색 없이 열심히 봉사해 주신 준비위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것을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도 김수환 추기경님과의 아름다운 기억이 있습니다. 2001년, 제가 적성 본당 신부로 있을 때입니다. 적성 본당은 꽃동네의 오웅진 신부님이 군대에 있을 때 다니던 공소였습니다. 당시 오웅진 군인은 김수환 추기경님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추기경님께 공소 건물을 새로 신축하겠다고 하였고, 추기경님께서 후원금을 주셨다고 합니다. 오웅진 군인은 추기경님의 격려금을 바탕으로 땀과 눈물로 공소건물을 세웠다고 합니다. 제가 1999년에 부임했을 때, 그 공소 건물은 여전히 있었습니다. 새로 성전을 지었고, 공소건물은 오웅진 신부님이 창설한 꽃동네 수녀님이 머무는 수녀원이 되었습니다. 저는 김수환 추기경님께 2001년 대림특강을 부탁하였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대림특강과 미사를 하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날은 2001년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었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적성 성당이 서울대교구에서 가장 작은 본당이었기에 기꺼이 오신 것 같았습니다. 저는 동네 입구에 현수막도 걸었습니다. 교우들은 장단의 콩을 갈아서 두부를 만들었고, 임진강의 꽃게를 잡아서 매운탕을 끓였습니다. 본당 교우들 뿐 아니나, 인근 지역의 부대에서 군인들도 왔고, 지역의 주민들도 왔고, 문산과 법원리 신부님도 왔습니다. 23년 전에 대림특강을 해 주셨던 추기경님이 이제 ‘김수환 추기경 배’ 골프대회의 이름으로 저와 함께 해 주십니다. 천상에 계시는 추기경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생각을 하셨습니다. 좋은 결과를 먼저 찾았다면 예수님께서도 포기하셨을지 모릅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표징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사사건건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위험한 선동 꾼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와 희생보다는 영광의 자리에서 얻을 높은 자리만 꿈꾸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좋은 생각을 먼저 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갇힌 이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눈 먼 이들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좋은 생각은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들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를 비롯해서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에 신학과 교리의 기둥을 세웠습니다. 수많은 성인과 성녀들은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전에 먼저 좋은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나는 가리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루카 4,18)“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30)
나는 가리라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니
대신 가야할 이를 찾는
불안하고 초조한
눈빛을 거두고
다부진 각오로
보잘것없는 나를 채워
힘차게 당당하게
나는 가리라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니
부르심을 받아
떨리는 굳센 응답으로
내딛는 벅찬 첫걸음에
부르시어
보내시는 분의 뜻이
이미 이루어지기 시작하니
나는 가리라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니
가다가
이내 쓰러질지라도
다시 일어나
가로막는 이들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두려움 없이 거침없이
나는 가리라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니
오늘의 성인
성녀 라헬 (Rachel)
활동년도 :
신분 : 야곱의 둘째 아내
지역 : 이스라엘
같은이름 : 레이첼
라헬은 '암양'이란 뜻이다.
1) 야곱의 애처로 요셉과 베냐민의 모친이다(창세 30,22-25). 2)
가나안으로 여행하는 도중에 여브랏 부근에서 베냐민을 낳고 난산 끝에 죽어서 그곳에 장사되었다(창세 35,16-20).
◇ 야곱의 둘째 아내 - 불신앙으로
슬피우는 어미의 표상 라헬은 라반의 둘째 딸로서 근친혼과 일부다처가 허용되었던 고대 근동지방의 풍속을 따라 야곱의 둘째 아내가 되었다.
소녀 시절 어느 날, 메소포타미아 하란 지방 어느 광야에서 아버지의 양떼를 먹이고 있을 때 고종사촌 오라버니인 야곱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야곱은 외사촌 누이동생인 라헬의 아릿다움에 반하여 무려 14년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라반에게 봉사했다.
그로부터 야곱은 라헬에게 장가들 생각으로 일을 했다.
칠 년이라는 세월도 며칠밖에 안 되듯 지나갔다. 그만큼 그는 라헬을 좋아했던 것이다](창세 29,20) 이 글귀를 보아 그 누구보다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우아하고 현명한 라헬이 이스라엘 족장의 아내로서 부족했던 점은 시조모인 사라처럼 하느님의 섭리에 앞서 불신앙적 수단 방법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라헬은 언니 레아가 계속하여 루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를 출산하자 심히 시기하여 어느 날 밤 남편을 자신의 여종 빌하의 방에 들여보내어 아들을 낳도록 했다.
[그러자 라헬이 말하였다. "저에게 몸종 빌하가 있지 않습니까? 그의 방에 드셔요. 빌하가 혹시 아기를 낳아 제 무릎에 안겨 줄지 압니까? 빌하의 몸에서라도 아들을 얻어...](창세 30,3).
빌하를 통하여 얻은 아들이 단 납달리이며, 이들은 훗날 레아의 시녀 실바가 낳은 아들 갓 아셀과 함께 북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비로소 라헬의 태에서 예정과 섭리의 아들이 태어났다. [하느님께서는 라헬도 돌보시어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열어 주셨다. 마침내 라헬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는 "하느님께서 나의 부끄러움을 씻어 주셨다" 하면서 아기 이름을 요셉이라 부르고 "야훼께서 나에게 아들을 하나 더 점지해 주셨으면 오죽이나 좋으랴!" 하였다.](창세 30,22-24). 여기에서도 우리는 인위적 잉태와 신앙적 잉태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으며, 그리고 하느님께선 신중하게 구원사의 매듭을 풀어 가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라헬의 결정적 과오는 하란을 떠날 때 그녀의 아버지의 우상 드라빔을 훔친 일이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훗날 라헬의 후손들이 망하고 북방민족의 포로가 되었을 때 그녀는 애곡하는 어머니의 표상이 되었던 것이다.
라헬은 "암양"이라는 뜻입니다.
라반의 둘째 딸이요 레아의 동생이었습니다. 레아도 함께 야곱의 아내였습니다. 라헬은 미모가 드러나게 아름다운 여자였습니다. 야곱이 하란 근교 우물가에서 외삼촌 집으로 피신해 가다가 라헬을 처음 대했을 때 야곱이 그를 사랑할 만큼 그 외모가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라헬을 위해 7년을 봉사할 때 수일같이 여겼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야곱의 애정을 측정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라헬은 명랑하고 쾌활했고 사교적이었습니다. 반면에 이기적이고 질투심도 많았으며 감정 표현을 거침없이 할만큼 대담한 여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야곱이 라헬에게 시달렸으며 다투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남편을 독점하면서도 언니 레아를 불편하게 만든 여자입니다. 라헬이 자기 고향을 떠날 때 친정집에서 드라빔을 훔쳐 자기 몸에 숨겨 가지고 나온 것은 대단한 욕심이었습니다(창세 31,19).
드라빔은 데라빔이라고도 하는데 사람 모양으로 세워놓은 작은 우상이었습니다.
가정을 지켜주며 아기 가진 여인들의 행운을 빌어준다는 우상이었습니다.
라헬은 이 드라빔을 하체에 숨겨 끝까지 아버지를 속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러한 태도에서 라헬의 간교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교훈과 적용]첫째, 미모와 많은 자질을 갖추었으면서도 후덕하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둘째, 미신적인 드라빔을 도적질해 나온 것은 위험한 혼합신앙이었습니다. 믿음은 순수해야 합니다.
성 브로카르도 (Brocard)
신분 : 수도원장
활동지역 : 카르멜산(Mount Carmel)
활동연도 : +1231년경
같은이름 : 브로카드, 브로카르두스, 브로카르드
프랑스 태생인 성 브로카르두스(Brocardus, 또는 브로카르도)는 카르멜산에 있던 프랑스 출신 은수자들의 원장으로 활약했다.
그는 1195년경 카르멜산의 은수자 공동체를 이끌던 성 베르톨드(Berthold, 3월 29일) 원장의 선종 이후 그를 계승해 공동체를 이끄는 원장이 되었다.
카르멜산의 은수자들은 특별한 창설자 없이 이미 6세기부터 은수자들이 모여 생활해왔다.
그래서 이들 은수자들에게는 특별한 규칙서가 없었는데, 성 브로카르두스는 당시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이자 교황대사였던 성 알베르투스(Albertus, 9월 17일)에게 교육을 부탁했다.
1209년경 성 알베르투스는 카르멜산의 은수자들을 위해 규칙서를 만들어줬는데, 이는 특별히 성 알베르투스의 카르멜회 규칙으로 불린다.
이 첫 회칙은 기존 은수자들의 삶과 정신을 간단하고 엄격하게 정리한 것으로, 1247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에 의해 이 규칙을 따르는 이들이 탁발(托鉢) 수도회로 인준받았다.
• 성 알베르투스의 규칙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은수자들은 단독 움막에서 지내되 매일 성무일도와 다른 기도를 바치고, 육체적 노동을 하며, 함께 미사를 봉헌해야 한다.
또 청빈과 절제를 지키고 거의 온종일 침묵 속에서 지내야 한다.
카르멜산의 은수자들은 성 브로카르두스가 통해 전달받은 이 규칙을 받아들여 실천했다.
한편 제4차 라테라노(Laterano) 공의회는 새로운 수도회 설립을 금지하는 칙서를 통과시켰지만, 성 브로카르두스는 자신의 덕과 지혜로써 모든 난국을 극복하고 은수자들이 마음 놓고 수덕생활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한편 성 알베르투스 주교는 성경에 정통한 성 브로카르두스를 라테라노 공의회에 데려갈 계획을 세웠으나, 공의회가 열리기 전 살해되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브로카르드 또는 브로카드(Brocard)로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