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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5일 목요일
[(녹)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아무도 인간을 두고 자랑해서는 안 된다며,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라고 하시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다(복음).
제1독서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3,18-23
형제 여러분, 18 아무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19 이 세상의 지혜가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을 그들의 꾀로 붙잡으신다.”
20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생각을 아신다. 그것이 허황됨을 아신다.”
21 그러므로 아무도 인간을 두고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22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23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11
1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2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4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5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7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8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9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10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11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베드로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선택하셨음이 오늘 복음의 여러 부분에서 눈에 띕니다. 첫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 계시고 군중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부들이 그물을 씻고 있었다면, 이 어부들은 예수님 말씀을 듣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 주변에 모여 있는 것이 멀리서도 보였을 터인데,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은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 두 척 가운데 시몬의 배에 타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물을 내려 고기를 많이 잡은 이는 시몬이었고, 다른 배의 동료들은 아마도 고기를 잡지 않고 있었기에 그물을 올릴 때 시몬을 도와주고 시몬이 잡은 고기를 두 배에 나누어 싣습니다. 마지막에는 시몬의 동료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을 따라나서지만,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신 이는 시몬이었습니다.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베드로는 놀라고 두려워 예수님께서 떠나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떠나가시지 않고 베드로를 당신 곁에 있도록 부르십니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두려워하지 마라”(5,10). 어쩌면 이 말씀이 열쇠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르실 때마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하시지만, 사실은 늘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부르시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부르심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음을 아는 사람이라야 부르심에 따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 많은 인간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부당함이 아니라 그를 부르시는 분의 힘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참담한 실패 체험의 배경에는 언제나 내가 있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출가 이전 뱃사람이었을때 시몬의 외침은 오늘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루카 5,5)
시몬의 체험과 외침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반복해온 체험이요 외침이었습니다.
목표를 달성해보겠다며, 한번 보란 듯이 대박 내 보겠다며 밤잠을 줄이고 건강까지 해쳐가며 백방으로 노력해봤지만 결과는? 참담하고 초라한 꽝이었습니다. 비참함과 자괴감에 당당하던 어깨는 축 처지고 자신감 넘치던 목소리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위축됩니다.
살아가면서 수시로 참담한 실패의 새벽을 맞이하는 시몬과 우리입니다. 참담한 경험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로지 인간의 힘, 인간의 경험, 인간의 능력만 믿은 결과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이 난다긴다하지만 아무리 기를 써도 안될 때가 부지기수입니다.
놀랍게도 인간의 끝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더 이상 한걸음도 물러날 곳 없어 보이는 벼랑 끝에서 하느님이 시작하십니다.
돌아보니 참담한 실패 체험에는 언제나 내가 중심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자리하셔야 할 곳에 교만하고 이기적인 내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으니 실패는 불을 보듯이 뻔한 것이었습니다.
매사에 주님께 영광과 찬미와 감사를 드릴때, 내 이름,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들어높이고, 주님의 뜻을 찾고 실현시키고자 노력할때, 결과는? 언제나 대성공일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선배들은 ‘판단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사제에게 필요한 덕목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사제도 거룩함을 지향하며 성덕(聖德)을 쌓아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해야 하니 지덕(知德)을 쌓아야 합니다.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체덕(體德)을 쌓아야 합니다. 라틴어로 이 3가지 덕은 모두 S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선배들은 3S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덕목이 있는데 그것이 ‘판단력(判斷力)’입니다. 판단력은 ‘내비게이션’과 같습니다. 내비게이션은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를 알려줍니다. 잘못된 길을 가면 다시 새로운 방향을 알려줍니다. 예전에 냉장고 광고 문구에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성탄 선물로 ‘목도리’를 하기로 했습니다. 총구역장님과 백화점엘 갔습니다. 저는 원하는 가격이 있으면 대충 사면 좋겠다고 여겼습니다. 총구역장님은 좀 더 저렴한 가격에 좀 더 좋은 목도리를 찾았습니다. 한 시간 정도 백화점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렇게 발품을 팔아서 구역장과 반장들에게 드릴 성탄 선물을 골랐습니다.
신학생 때의 기억입니다. 주일학교 교사들과 천마산으로 답사를 갔습니다. 우리는 물이 있는 곳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비가 조금씩 내렸습니다. 교사들의 의견이 둘로 나뉘었습니다. 하나는 비가 곧 그칠 것 같으니 그냥 물가에서 지내자는 의견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비가 더 내리면 위험하니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자는 의견이었습니다. 교사들은 신학생인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모두 저의 결정을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냥 있으면 편하기는 한데, 비가 많이 내리면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동하면 물을 구하기 어렵고, 짐을 다시 정리하는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자리를 옮겼는데 비가 오지 않으면 ‘왜 이동했느냐’고 할 것 같았습니다. 자리를 옮기지 않았는데 비가 많이 내리면 ‘왜 이동하지 않았느냐’고 할 것 같았습니다. 자리를 옮기자고 하였고, 다행히 모두 저의 이야기를 따라 주었습니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자리를 이동한 것에 대해서 모두 기쁘게 받아들였고, 다음 날, 답사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본당 사제가 되면서 ‘판단력’이라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더 깊이 생각합니다. 저의 결정과 저의 판단이 최종 결정과 판단이 되는 때가 많습니다. 제 뒤에 수정하거나, 번복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은 비교적 판단하기 쉽습니다. 차 축성, 가게 축성, 봉성체에 대한 부탁은 시간을 정해서 약속을 잡으면 됩니다. 선거 때가 되면 후보들이 찾아와서 홍보를 부탁하기도 합니다. 성당 안에서 홍보하기는 어렵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만 성당 밖에서 명함을 돌리는 건 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며칠 전입니다. 가정 미사를 해 줄 수 있는지 문자가 왔습니다. 작년에 남편이 하느님의 품으로 갔고, 1년이 되는 날이라고 합니다.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고, 형제님을 위한 기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형제님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는 교우들이 함께했습니다. 뉴욕에 사는 부모님이 함께했습니다. 뉴욕에서 온 부모님은 브루클린 교우들의 영상 인사를 스마트폰에 담아 왔습니다. 덕분에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신중한 판단이 필요한 때도 있습니다. 성전 신축이나, 성전 이전과 같은 문제는 비용도 많이 소요되고, 공동체의 의견이 나뉘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판단의 기준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판단의 기준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판단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판단의 기준은 내가 원하는 만큼 상대방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갈릴래아의 어부들도 판단의 기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물을 깊은 곳으로 치라고 하셨고, 어부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어부들은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부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이제부터 너희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부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치워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의 판단 기준도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9월은 순교자의 성월입니다. 순교자들은 모두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좋겠습니다. 그 신앙의 눈으로 순교자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뭍에서 호수로, 호수에서 뭍으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날 새벽 뭍에다 배를 대고
빈 그물을 씻고 있었지
초췌한 모습 허탈한 마음으로
밤새 나에게 아무 것도
베풀지 않은
쌀쌀맞기 그지없던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그러나 이내 곧
다시 맞닥뜨려야만 하는
삶의 터전이요
고통의 현장인
호수를 등지고서 말이야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지만
무언가 해야만 했기에
그저 내 손가락들을
작은 물고기 삼아
그물코에 넣었다 뺐다
뜻 없는 짓을 반복하던
그날 새벽녘
낯선 그분이 다가와
배에 오르시어 말씀하셨지
뭍에서 조금 저어
호수로 나가줄 수 있겠소
뭍에서 호수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
평소 같았으면 그랬겠지
나에게 모든 것이었던
너무나도 익숙한 호수였으니까
그러나 그날은 그렇지 않았어
나에게 아무 것도 아닌
너무나도 낯선 호수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그분의 까닭 모를 부탁을
흔쾌히는 아니지만
난 들어 주었어
뭍에서 호수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가던 길
먹고 살기 위해서
좋으나 싫으나
어쩔 수 없이 가야했던 길
그때 내키지는 않았지만
낯선 그분과의 첫 만남을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멀리도 아니고 그저 조금만
청하는 낯선 그분에게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었으니까
이 정도는 해주는 것이
사람으로서 예의였으니까
뭍에서 조금 떨어진
그곳에서 잠시 머물러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를 마치신
조금은 익숙해진 그분은
또 다른 부탁을 하셨지
깊은 데로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시오
아 어떻게 해야 하나
뭍으로 돌아갈까
깊은 데로 나아갈까
이분이 뜻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왜 처음부터 깊은 데로
나가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뭍에서 호수로
이번에는 얕은 데서 깊은 곳으로
다음에 또 무엇이 있는 것일까
그러면 다음에는 그 무엇일까
뭍으로 돌아가는 것도
깊은 데로 나아가는 것도
이제 나에게 달려 있는데
아 어떻게 해야 하나
짧은 순간 스치는
수많은 물음들을 가슴에 담고
난 한 걸음 더 나가고 있었던 거야
조금씩 그분에게 끌렸는지도 모르지
이미 시작했으니 되돌리기 싫었는지도 모르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니라 그저 가는지도 모르지
아무튼 깊은 데로 나아갔고
아무튼 그물을 내렸어
그분이 하라는 대로
그리고
지난 밤 처절한 패배의 현장에서
난 다시 일어났어
아니 난 다시 일으켜졌어
일어났기에 기뻤지만
일으켜졌기에 두려웠어
이제 낯설진 않지만 아직은 잘 모를
나를 일으키신 그분 앞에서
이제 그만 여기까지만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해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강박 속에
내가 떠날 용기가 나질 않아
나에게서 떠나시라고 읊조리던
참담한 패배를 딛고
두려운 승리를 품었던
그날 새벽녘
첫 만남의 낯섦을 녹이고
서서히 어느덧 날 사로잡은 그분은
마지막으로 청하셨어
두려워하지 마시오
이제부터 사람을 낚으시오
그래 그랬던 거야
그분이 내게 원했던 것은 단 하나
물고기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사람이 되는 것
내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명을 맡기시려고
조금씩 당신을 내어주셨던 거야
조금씩 나를 가지셨던 거야
조금씩 나를 드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사람을 낚으시오
옆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나가 그물을 던지시오
뭍에서 조금 저어 호수로 나가시오
짧지도 길지도 않았던 시간 동안
그분이 내게 건넨 애틋한 청을
마지막에서 처음으로
곰곰이 되새기면서
어슴푸레 밝아오는 동녘을 바라보며
그날 새벽 나는 다시 뭍에 올랐어
여느 때처럼 호수로 나갈 채비를 하려
잠시 오른 것이 아니야
다시는 호수에 나가지 않으리라
이제 뭍에 뼈를 묻으리라
그분과 함께 하기 위해서
아직은 설은 다짐으로
아직은 뿌연 바람으로
그날 그렇게 뭍에 올랐어
그리고 난 지금도 뭍에 있어
그래서 난 지금도 뭍에 있는 거야
오늘의 성인
성녀 데레사(마더)(Teresa(Mother))
신분 : 설립자, 수녀원장
활동지역 : 콜카타(Kolkata)
활동연도 : 1910-1997년
같은이름 : 테레사, 테레시아
오늘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서 시성식을 마친 성녀 마더 테레사(Mother Teresia, 또는 데레사)는 1910년 8월 26일 터키가 점령 중이던 알바니아(Albania)의 스코페(Skopje)에서 알바니아계인 아버지 니콜라 보약스히야(Nikola Bojaxhiu)와 어머니 드라네 보약스히야(Drane Bojaxhiu)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다음날 곤히아 아녜스(Gouxha Agnes)라는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녀가 태어난 지 2년 뒤인 1912년 알바니아는 터키로부터 독립했지만 스코페는 여전히 알바니아의 영토가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8년 스코페는 세르비아를 모태로 탄생한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영토가 되었고, 현재는 1991년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한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수도이다.
어려서부터 유복한 가정에서 신심 깊은 어머니로부터 철저히 신앙교육을 받은 그녀는 9살 때 건축업자였던 아버지를 갑자기 여의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소녀 시절부터 성인전과 선교사들의 이야기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18세 되던 1928년 어느 날 그녀는 기도 중에 평소 선교에 대해 갖고 있던 관심이 자신을 수도성소에로 부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예수회원인 본당신부의 지도와 도움을 받아 그 해 11월 29일 인도의 콜카타에서 전교 중인 아일랜드 더블린(Dublin)의 로레토 수녀회(Sisters of Loreto)에 입회하였다.
그녀는 더블린에서 집중적으로 영어를 공부한 후 1929년 인도(India)에 도착하여 히말라야 산맥 근처에 있는 다르질링(Darjiling)에서 수련기를 시작했다. 1931년 5월 24일 첫 서원을 하면서 후에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된 리지외(Lisieux)의 성녀 테레사의 이름을 자신의 수도명으로 택했다.
그 후 7년간 테레사 수녀는 로레토 수녀회가 운영하는 콜카타(옛 지명은 캘커타, Calcutta)의 성모여자고등학교에서 지리와 역사를 가르쳤다. 1937년 5월 24일 그녀는 종신서원을 했고, 1944년에는 그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1946년 9월 10일 연례 피정 참석차 다르질링으로 가는 기차 속에서 테레사 수녀는 그녀 스스로 후에 ‘부르심 속의 부르심’이라 묘사한 놀라운 체험을 했다. 그녀는 수도회를 떠나 가난한 사람들 속에 살며 그들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소명을 들은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그녀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교황청의 특별한 허락을 받아 1948년 수도회 밖에서 수도자로 살 수 있게 되었다. 전통적인 서구식 수녀복장이 아닌 인도 여성들이 평상복으로 입는 사리를 수도복으로 택한 그녀는 우선 성가정 병원에서 속성으로 기초 간호학을 이수한 후 콜카타의 빈민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49년 3월 19일 성모여자고등학교 출신 제자인 슈바시니 다스가 찾아와 아직 형성되지도 않은 수도회에 받아주길 간청해 첫 지원자로서 마더 테레사와 합류했다. 그리고 1950년 10월 7일 가난한 이들을 위해, 가난한 이들과 함께, 그들 안에서 살고자 설립한 ‘사랑의 선교회’(Missionaries of Charity)가 교황청으로부터 승인을 받고 처음부터 함께한 12명의 회원들이 수련기를 시작했다.
1952년 8월 22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임종자의 집을 열었는데, 문을 열자마자 정원까지 아픈 이들로 꽉 들어찼다. 1953년 사랑의 선교회 본원이 설립되었고, 이어서 빈민굴의 고아들을 위한 집과 콜카타 외곽에 나환자들을 위한 자립 센터도 열었다.
1965년 2월 1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는 사랑의 선교회가 세계교회 안에서 일할 수 있도록 승인해 주었다. 교구 설립 수도회로서 지역 주교의 관할 안에서만 활동하던 사랑의 선교회가 이제는 세계 어디서나 선교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때 이미 사랑의 선교회에는 3백여 명의 수녀들이 여러 개의 시설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베네수엘라(Venezuela)에 해외 첫 분원을 연 이후 아프리카, 호주, 유럽 등 여러 대륙에 진출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마더 테레사의 적극적 후원자가 되어 그녀가 선교 활동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바티칸 시민권을 수여했다. 이렇게 해서 1971년에 이미 세계 여러 나라에 50여 개의 분원을 갖게 되었다.
1969년 3월 26일 ‘사랑의 선교회 협조자회’가 교황청으로부터 회칙을 인가 받아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이 협조자들은 세계 곳곳에서 사랑의 선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펼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마더 테레사와 사랑의 선교회 활동이 세계 곳곳에 알려지면서 그녀는 여러 국제적인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1979년 12월 10일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마더 테레사는 그 상을 자신이 온 삶을 바쳐 섬기고 사랑한 가난한 이들의 이름으로 받았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후 사랑의 선교회는 더욱 놀라운 속도로 세계 곳곳으로 뻗어 나갔다.
1970년 이후 마더 테레사는 알코올 중독자와 마약 중독자들을 치료하고 사회 복귀를 돕는 치료 센터를 여러 곳에 열었다. 또한 나환자 병원과 나환자들을 위한 재활 및 사회 복귀 시설을 운영하고,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보호 시설과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 그리고 결핵 환자들과 영양실조 걸린 이들을 위한 치료소 및 요양소들도 설치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활동도 시작했다.
1990년 4월 16일 마더 테레사는 건강을 이유로 총장직에서 물러났으나 같은 해 9월 총장직에 다시 선출되었다. 1997년 9월 5일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이며 세계 모든 이들의 영적 어머니인 마더 테레사는 87세를 일기로 콜카타에서 선종하였다.
그녀의 선종 소식에 종교와 이념, 민족과 인종을 초월해 전 세계가 한결같이 ‘인류의 참 어머니’를 잃었다며 애도하였다. 2003년 10월 1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살아서부터 ‘성녀’로 추앙받았던 마더 테레사 수녀의 시복식을 선종 6년 만에 거행했다. 교황은 30여만 명의 순례자들이 모인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오늘 하느님은 우리에게 마더 테레사를 새로운 거룩함의 모범으로 제시해 주셨다”며 그녀의 시복을 선언했다.
성 라우렌시오 유스티니아노(Lawrence Justinian)
신분 : 총대주교, 증거자
활동지역 : 베네치아(Venezia)
활동연도 : 1381-1456년
같은이름 : 라우렌시노, 라우렌시누스, 라우렌시우스, 라우렌씨노, 라우렌씨누스, 라우렌티노, 라우렌티누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유스티니아니, 주스티니아니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저명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라우렌티우스 유스티니아누스(Laurentius Justinianus, 또는 라우렌시오 유스티니아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러나 신심 깊은 어머니는 자녀들이 훌륭한 교육을 받도록 노력했다.
그는 19세 때에 빛으로 둘러싸인 한 처녀로부터 영원한 지혜에 관한 환시를 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기본적인 욕망에 만족하기보다 자신과 함께 참된 행복을 찾아가자고 초대하였다.
그래서 성 라우렌티우스는 산 지오로지오(San Giorgio)의 아우구스티노회에 있는 그의 삼촌 마리노 퀘리노(Marino Qeurino)에게 자문을 구하였고, 삼촌은 그에게 수도생활을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집에서부터 명예와 부 그리고 세속적 즐거움을 멀리하고 수도자적인 금욕생활을 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자 그의 건강을 염려한 그의 어머니는 결혼 계획을 통해 그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삼촌의 충고를 감추고 성 라우렌티우스는 어머니의 소망을 거부하고 대신 삼촌과 함께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매우 엄격한 금욕생활을 실천하고, 자주 어깨에 자루를 메고 다니며 자기 공동체를 위하여 음식을 구걸하러 다녔다고 한다.
사제품을 받은 후 그는 산 지오로지오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기도생활과 참회의 생활을 통해 내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다.
또한 미사 집전을 통해 모든 이들의 영혼을 돕고, 그들이 거듭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자각시켜 주었다.
1433년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Eugenius IV)는 그는 카스텔로(Castello)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교구의 행정과 재정 관리 등에 환멸을 느껴 그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양떼를 돌보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1451년 교황 니콜라우스 5세(Nicolaus V)는 그를 베네치아 교구의 초대 총대주교로 임명하였다.
성 라우렌티우스는 공적인 일에서는 매우 정열적인 성직자였으나, 개인적인 생활은 매우 엄격하고 겸손하였다고 한다.
성직자들의 모범으로 인정받고 있는 그는 1456년 1월 8일 베네치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524년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690년 교황 알렉산데르 8세(Alexander V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리고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XII)는 성인의 축일을 9월 5일로 정하였다.
그는 라우렌티누스 유스티니아누스(Laurentinus Justinianus, 또는 라우렌시노 유스티니아노)로도 불린다.
성 베르티노 (Bertinus)
활동년도 : +700년
신분 : 수도원장
지역 : 생베르탱(Saint-Bertin)
같은 이름 : 베르띠노, 베르띠누스, 베르티누스
프랑스의 쿠탕스(Coutance) 근교에서 태어난 성 베르티누스(또는 베르티노)는 뤽세이유(Luxeuil) 베네딕토 수도원의 수도승이었다. 그의 친구인 테루안(Therouanne)의 주교 성 아우도마루스(Audomarus, 9월 9일)는 성 베르티누스와 같은 지방 출신인 몸몰리누스(Mommolinus)로도 불리는 성 뭄몰리누스(Mummolinus, 10월 16일)와 성 베르트란드(Bertrand, 1월 24일)를 초대하여 자신을 도와 프랑스 북부 파스 드 칼레스(Pas-de-Calais) 지방의 모리니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하였다.
성 베르티누스는 동료들과 함께 시티으(Sithiu)에 수도원을 지었고, 성 아우도마루스 주교는 성 콜룸바누스(Columbanus)의 수도 규칙을 따르도록 하며 성 뭄몰리누스를 수도원장으로 지명하였다. 콘스탄츠(Konstanz) 출신으로 뤽세이유에 머물던 성 뭄몰리누스가 661년경에 누아용(Noyon)의 주교로 임명되자 성 베르티누스가 원장이 되었다. 그는 시티으 수도원을 프랑스의 학문과 선교의 중심 수도원으로 육성하였다. 후일 시티으 수도원은 성 베르티누스 사후 그를 기념하여 생베르탱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성 베르티누스의 문장은 배이다.
성 베르트란드는 성 아우도마루스와 성 베르티누스의 동료로서 생캉탱(Saint-Quentin) 수도원의 원장이 되기 전에는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 플랑드르(Flandre) 지방의 선교사로 활약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