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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7일 월요일
[(백)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16세기 중엽 오스만 제국(현재의 튀르키예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제국)이 지중해로 세력을 뻗치자, 1571년 10월 7일 그리스도교 연합군(신성 동맹)은 그리스의 레판토 항구 앞바다에서 벌인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을 무찔렀다. 그리스도인 군사들은 이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것이 묵주 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간구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덕분이라고 여겼다. 이를 기억하고자 성 비오 5세 교황께서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셨다. 1960년 성 요한 23세 교황께서는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이름을 바꾸셨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이웃이냐는 물음에,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준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응답하신다(복음).
제1독서
<복음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1,6-12
형제 여러분, 6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여러분을 불러 주신 분을
여러분이 그토록 빨리 버리고 다른 복음으로 돌아서다니,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실제로 다른 복음은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을 교란시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8 우리는 물론이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9 우리가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이제 내가 다시 한번 말합니다.
누가 여러분이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10 내가 지금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하느님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입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이라면,
나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종이 아닐 것입니다.
11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분명히 밝혀 둡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12 그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5-37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사도 1,12-14)와 복음(루카 1,26-38)을 봉독할 수 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가만히 보면, 율법 교사가 질문하지만 사실 답을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다른 곳에서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이가 예수님이 아니라 율법 교사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신명기에 있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은 레위기에 있으니 율법 학자가 이 계명들을 알고 있는 것은 당연하고, 예수님께서 그 계명들을 지키게 하신다고 하여서 그에게 새로운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라고 다시 묻는 것은 그가 어제 우리가 묵상한 것처럼 규정이 없어도, 규정보다 더 나아가는 삶을 사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는 이웃의 범위를 한정하려 합니다. 그는 사마리아인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웃의 범위가 정해지면 그 안에서만 계명을 지키려 하였습니다. 법을 최대한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10,28)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가 이웃을 한정하려 할 때, 그는 자기가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는 계명을 실천하여 생명을 얻었을까요?
마지막에 그는 강도에게 이웃이 되어 준 이는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10,37)이라고 말하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계명들을 진심으로 실천한다면 우리는 ‘살 것’입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성모님과 예수님을 향한 우리 매일의 사랑 고백, 묵주 기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는 신학교 다닐 때 여기저기 몸도 아팠지만, 이 길을 계속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갈등도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업 땡땡이도 많이 치고, 제대로 신학 공부도 하지 못했습니다. 늘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지라, 30년 전부터 반성하는 마음으로 매일 영성 서적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습니다.
좋은 영적 독서 책 한 권을 만나면 마치 횡재한 기분입니다. 탁월한 영성가들의 신앙과 삶, 지혜와 경험이 맞춤형으로 내 손안으로 딱 들어오니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릅니다.
최근에 영적 독서를 하던 중에 묵주 기도와 관련된 풀톤 쉰 대주교님의 말씀을 접하고 정말 가슴이 뛰고 설레었습니다. 이런 말씀입니다.
“때로 우리가 매일 바치는 묵주 기도는 지루한 반복이나 그저 해야 하는 일상의 의무처럼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연인들 사이에서는 수시로 서로 사랑을 확인합니다.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해요 라고 말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아름다운 진리에는 지루한 반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결국 묵주 기도는 성모님과 예수님을 향한 매일의 사랑 고백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성껏 묵주 기도를 바치면, 그것은 “성모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묵주 기도를 누구보다도 좋아하셨던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묵주 기도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기도입니다. 묵주 기도는 단순하고 깊이가 있고, 훌륭한 묵상 기도입니다. 묵주 기도를 바칠 때마다, 제 영혼의 눈앞에는 예수 그리스도 생애의 중요한 사건들이 지나갑니다. 환희, 빛, 고통, 영광의 신비로 구성된 그 신비들은 성모님의 마음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있는 친교를 나눌 수 있게 저를 이끕니다. 찬미의 기도이며 간구의 기도인 묵주 기도가 묵상 기도로 넘어가길 희망합니다. 묵상을 동반하지 않는 묵주 기도는 영혼이 없는 육신과 같습니다.”
보십시오! 묵주 기도는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구원송 등 염경기도의 조합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묵상기도입니다. 묵주 기도는 염경기도와 묵상기도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기가 막힌 기도입니다.
묵주 기도문 매 신비 안에 반드시 ‘무엇무엇을 묵상합시다!’ 라는 문구가 들어있지 않습니까? 묵주 기도는 당연히 묵상 기도입니다.
묵상이나 관상에로 나아가지 못하는 묵주 기도는 영혼이 없는 육체에 불과합니다. 또한 묵상 없이 그저 입으로만 줄줄 바친다면 묵주 기도가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이방인들의 빈말처럼 될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묵주 기도를 자주 바치면 좋은 점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정성껏 묵주 기도를 바칠 때, 성모님께서 더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성모님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더 우리 가까이 현존하십니다.
결국 묵주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 현존 체험, 성모님 동반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묵주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 성모님께서 언제나 내 인생 여정을 동반하신다.’는 의식을 지니게 되니, 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쁘게 견딜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세상일은 참 모를 때가 많습니다. 같은 부모에게서 나온 자식도 무척 다릅니다. 저의 형제들도 모두 성격과 외모가 다릅니다. 큰 형은 예술적인 감각이 좋았습니다. 필력도 좋고, 그림도 잘 그리고, 음악적 재능이 있었습니다. 작은 형은 좋은 몸을 지녔습니다. 형제 중에 키가 제일 컸습니다. 달리기도 잘 했고, 옷을 입어도 잘 어울렸습니다. 저는 큰 형과 달리 예술적인 감각이 부족했습니다. 작은 형과 달리 좋은 몸을 타고 나지 못했습니다. 부족한 제게는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성품을 주셨습니다. 공장에서 출고 되는 물건은 기능이나 성능이 다르면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소비자들이 반품을 요구할 것이고, 회사는 곧 어려움에 처할 것입니다. 사람은 물건이 아니기에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어도, 같은 선생님에게서 배웠어도 성품과 기질이 다른 것입니다. 진화의 관점에서는 서로 다른 성격과 체질이 좋다고 합니다. 코로나와 같은 질병이 찾아와도 면역력이 강한 사람은 견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다른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실 때입니다. 같은 로마 병사지만 반응이 달랐습니다. 어떤 병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지려고 했습니다. 빨리 끝내려고 예수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그러나 어떤 병사는 이방인이었음에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아! 저 사람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구나!” 예수님 옆에 있던 죄인들도 반응이 달랐습니다. 한 죄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오. 그리고 나도 구해 주시오.” 그러나 또 다른 죄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면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으로 갈 것이다.” 오늘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하면 된다.” 그러자 율법학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율법학자의 관점은 ‘나의 이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었느냐?” 예수님의 관점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입니다. 나의 삶은 과연 어떤 관점에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1571년 10월 7일 그리스도교 연합군은 그리스의 레판토 항구 앞 바다에서 벌인 ‘레판토 해전’에서 이슬람 제국을 무찔렀습니다. 이 전투의 대승은 묵주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간구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덕분이라 여기고, 이를 기억하고자 비오 5세 교황은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 훗날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저도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제안으로 2002년부터 빛의 신비가 묵주기도에 포함되었습니다. 이로써 묵주기는 예수님의 전 생애를 묵상할 수 있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환희의 신비는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 시절에 대한 묵상입니다. 빛의 신비는 예수님의 공생활에 대한 묵상입니다. 고통의 신비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묵상입니다. 영광의 신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리들 또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기를 희망하는 묵상입니다.
신학교에서 지낼 때입니다. 매일 저녁 7시 15분이면 묵주기도를 하였습니다. 혼자 할 때도 있지만 함께 할 때도 많았습니다. 본당 신학생들과 함께 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함께 하기도 하고, 교구 모임과 함께 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신학교에는 묵주를 들고, 기도를 하는 신학생들의 기도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그 기도는 신학생들을 지켜주는 힘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예방 주사를 맞는 것처럼 묵주기도는 신학생들을 악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주었습니다. 저도 묵주기도에 대한 작은 체험이 있습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묵주기도를 하려고 차를 잠시 세웠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에 큰 차가 제 앞으로 지나갔습니다. 차를 멈추지 않았으면 큰 사고가 날 뻔했습니다. 묵주기도를 시작한 것도 아니고, 막 하려고 했는데도 하느님께서는 제게 넘치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오늘 하루를 묵주기도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이웃이 되어주는 사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36)
저기
사람이 있어
애틋이
눈길
건네고
거기
사람이 있어
바지런히
발길
내딛으며
여기
사람이 있어
따뜻이
손길
내밀어
사람에게
사람이
기꺼이
이웃이
되어주니
참으로
사람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 바코 (Bacchus)
활동년도 : +303년?
신분 : 순교자
지역 : 시리아(Syria)
같은 이름 : 바꼬, 바꾸스, 바쿠스, 박코, 박쿠스
성 세르지오 (Sergius)
활동년도 : +303년?
신분 : 순교자
지역 : 시리아(Syria)
같은 이름 : 세르기예프, 세르기오, 세르기우스, 세르지우스
성 세르기우스(Sergius)와 성 바쿠스(또는 바코)는 전통적으로 로마 군단의 장교들로서 막시미아누스 황제가 유피테르(Jupiter) 신에게 희생 제사를 드릴 때 이를 거절함으로써, 유프라테스 남부 시리아의 레사파(Resapha)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온다. 성 세르기우스는 분명히 그곳에 묻혔는데 후일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황제에 의해 도시가 재건되면서 그의 이름을 따서 그곳을 세르지오폴리스(Sergiopolis)라고 불렀다. 이 지역의 많은 성당들이 성 세르기우스나 성 바쿠스의 이름으로 세워졌고, 그들에 대한 공경도 전 세계로 확대되어 보편화되었다. 사막의 유목민들은 이 두 성인을 그들의 특별한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있다. 성 바쿠스는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아라비수스(Arabissus)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두 성인의 유해의 일부가 현재 이탈리아 로마(Roma)의 성 세르기우스와 성 바쿠스 성당에 모셔져 있다.
성녀 유스티나 (Justina)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 파도바(Padova)
활동연도 : +304년?
같은 이름 : 유스띠나
이탈리아 파도바 지방에서 큰 공경을 받는 성녀 유스티나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거의 없다. 그녀는 종종 안티오키아(Antiochia) 출신의 성녀 유스티나(9월 26일)와 혼동되기도 한다.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성녀 유스티나는 파도바에서 순교한 동정녀로 사도 성 베드로(Petrus)의 제자이자 파도바의 초대주교인 성 프로스도키무스(Prosdocimus, 11월 7일)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스도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했던 성녀 유스티나는 집정관 막시무스(Maximus)의 명령으로 칼에 찔려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그런데 성녀 유스티나는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에 살았던 젊은 여성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미 100년경에 사망한 성 프로스도키무스 주교와 직접 만날 수는 없었지만, 영적인 유대는 가능했다고 본다. 그녀의 유해는 파도바 성벽 밖에 건립된 성녀 유스티나 성당에 안치되었다. 교회미술에서 그녀는 왕족 출신이라는 전승으로 인해 왕관을 쓴 공주로서 표현되고 있고, 순교한 사실에 따라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거나 가슴에 칼이 꽂힌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동정녀의 상징인 하얀 유니콘과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