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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일 화요일
[(자)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은 죽은 모든 이,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오늘 세 대의 위령 미사를 봉헌해 왔다. 이러한 특전은 15세기 스페인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시작되었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정성껏 묘지를 방문하여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첫째 미사]
말씀의 초대
욥은, 구원자께서 살아 계시고 그분께서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오르시어 제자들에게 여덟 가지 참된 행복을 가르치신다(복음).
제1독서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 욥기의 말씀입니다. 19,1.23-27ㄴ
1 욥이 말을 받았다.
23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25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6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7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5,5-11
형제 여러분, 5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7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1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12ㄴ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둘째 미사]
말씀의 초대
지혜서의 저자는,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진리를 깨닫고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는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멍에를 메고 당신께 배우면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3,1-9
1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2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3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4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5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6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7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8 그들은 민족들을 통치하고 백성들을 지배할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9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5,17-21
형제 여러분, 17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18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20 율법이 들어와 범죄가 많아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21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5-30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셋째 미사]
말씀의 초대
지혜서의 저자는, 예지가 곧 백발이고, 티 없는 삶이 곧 원숙한 노년이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믿는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티 없는 삶이 곧 원숙한 노년이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4,7-15
7 의인은 때 이르게 죽더라도 안식을 얻는다.
8 영예로운 나이는 장수로 결정되지 않고 살아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는다.
9 사람에게는 예지가 곧 백발이고, 티 없는 삶이 곧 원숙한 노년이다.
10 하느님 마음에 들어 그분께 사랑받던 그는
죄인들과 살다가 자리가 옮겨졌다.
11 악이 그의 이성을 변질시키거나
거짓이 그의 영혼을 기만하지 못하도록 들어 올려진 것이다.
12 악의 마력은 좋은 것들을 무색하게 만들고
솟구치는 욕망은 순수한 정신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13 짧은 생애 동안 완성에 다다른 그는 오랜 세월을 채운 셈이다.
14 주님께서는 그 영혼이 마음에 들어
그를 악의 한가운데에서 서둘러 데려가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그 일을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15 곧 은총과 자비가 주님께 선택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들을 돌보신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6,3-9
형제 여러분,
3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4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5 사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
6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7 죽은 사람은 죄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8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9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죽음은 더 이상 그분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5,1-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어제 천상 교회의 성인들에게 지상의 나그네인 우리 구원을 위하여 전구를 청하였으며, 오늘 위령의 날에는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연옥 영혼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어제와 오늘, 이 두 날에 걸쳐 우리는 천상 교회와 지상 교회 그리고 연옥에 있는 이들이 하나임을 기억하며, 서로 기도해 주고 영적인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음을 믿습니다.
세상을 온전히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며 그 안에서 서로 온갖 것을 주고받습니다. 죽음 이후의 생명을 믿고 희망하는 교회는 이러한 관계가 세상을 떠난 이들과도 지속된다고 믿습니다. 성인들의 통공에 대한 교리는 이처럼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이 모두 주님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며, 거룩함을 나누고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하느님 나라에 나아가고 있는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은 세상에 남아 있는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자비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을 떠나보내고 세상에 남은 이들은 그리움과 더불어, 살아생전에 더 잘해 주지 못하고 고마운 마음을 전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통공의 교리는 우리가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알려 줍니다. 그들이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위령의 날을 맞아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영혼을 기억하며 그들이 평안한 쉼을 얻도록 기도하는 하루로 보내기를 바랍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언젠가 우리가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에 도달했을 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눈길 교통사고로 생사를 오가는 과정에서 임사 체험을 했던 헨리 나웬 신부님은 이런 말씀을 남겼습니다.
“요르단 강을 살짝 건너갔었을 때 받았던 가장 강렬한 느낌은 극진한 환대였습니다. 환한 웃음, 활짝 두팔 벌린 세상 자상하신 분으로부터 세상 따뜻한 환영을 받았을 때, 평생토록 나를 억압해왔던 두려움, 상처, 분노, 굴욕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편안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특별한 임사 체험이후 헨리 나웬 신부님은 우리에게 이런 권고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여러분 각자 죽음의 순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위대한 순간이 될 수 있도록 잘 준비하십시오.”
오늘 위령의 날은 먼저 떠난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사실 아직 이 땅 위에 남아있는 우리들의 날이기도 합니다. 먼저 떠난 이들은 남아있는 우리를 향해 무언의 외침을 건넵니다.
“오늘은 내 차례요, 내일은 네 차례!”
우리 역시 떠날 날들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으니, 이왕이면 좀 더 충만하게, 좀 더 열정적으로, 좀 더 기쁘게 이 세상을 살다 오라는 먼저 떠난 분들의 강력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니, 마치 불꽃놀이 불꽃처럼 순식간에 하루가 소진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날도 그렇게 순식간에, 섬광처럼 다가오고 사라질 것입니다.
관건은 순간순간을 하릴없이, 영양가 없이 보낼 것이 아니라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게 계획하고 구성해야겠습니다. 며칠 전부터 저는 자기 전에 작은 노트에 내일 꼭 처리해야 할 사소한 일들을 순서대로 메모합니다. 어떤 날은 한 페이지가 꽉 차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간들이 엄청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보다 알차게, 보다 계획적으로, 보다 충만하게 엮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 숱한 날들을 선물로 주시면서 바라시는 바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복하게 살다가 당신 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이 세상에서의 행복, 인간적인 행복도 포함되겠지만, 궁극적으로 영적인 행복이요, 주님 안에서 행복입니다. 산상 수훈을 통해서 강조하시는 바로 그 행복입니다.
죽음은 사실 우리의 삶 속에 이미 스며들어있습니다. 또한 삶이란 것도 죽음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삶과 죽음은 항상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도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미 ‘작은 죽음’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 일선에서의 물러남, 질병, 노화, 소외, 실패, 고독...우리는 매일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 안에 실재하는 다양한 죽음의 요소들을 대면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살아있으면서도 매일 작은 죽음을 체험합니다. 결국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또한 삶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모순되는 말처럼 보이지만 삶은 시시각각 죽음으로부터 위협받고 있기에 더욱 소중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반대로 죽음이 없다면 끝도 없이 반복될 죄와 악습, 병고와 고독...도대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죽음이 있어 기나긴 한 인간의 생이 정리되고 완성되니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요. 아리송하지만 결국 죽음 안에 삶이 있고 삶 안에 죽음이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에 도달했을 때, 우리들의 지난 삶은 어떻게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요? 절대로 우리가 보낸 세월의 양으로 평가받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가 관건이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하루하루를 얼마나 충만하고 의미 있게 살았는가가 중요할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라고 표현합니다. 반대로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는 시간을 ‘카이로스(Kairos)’라고 말합니다.
참 삶은 의미있는 삶, 가치있는 삶, 깨어있는 삶, 현재에 충실한 삶, 주님의 생명력으로 가득한 삶, 결국 사랑의 삶입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하루하루가 그저 하루 삼시 세끼 섭취하고 연명하는 데 만족한 삶이 아니라, 하루하루 의미있고 충만한 삶으로 엮어가는 것, 축복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비결이 될 것입니다.
연옥을 믿지 않으면 벌어지는 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연옥은 무척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성인들은 지옥의 고통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만큼 큰 자비의 행위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오늘은 연옥이 하느님의 자비임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만약 연옥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도 하느님 나라의 가장 작은 사람보다 크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세례자 요한보다 완전해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것을 친구 생일잔치에 가서 느꼈습니다. 다만 양말이 뚫려 엄지발가락이 나왔을 뿐인데 잔칫상이 마치 지옥과 같았습니다. 창피해서 맛있는 거 먹는 거보다는 집에 빨리 돌아오고 싶었습니다. 지옥에 가지는 않더라도 양말을 기울 시간을 주어야 하느님께서 자비로운 분이실 것입니다. 만약 그럴 시간을 주지 않는다면 무슨 핑계를 대든지 잔칫상에 가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렇게 연옥이 없으면 감히 성인이 되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시도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을 가졌더라도 연옥에 대한 교리가 약하면 어떻게 될까요? 마르틴 루터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지옥이 두려워’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고해성사하고 보속을 해도, 죄는 여전히 짓고 보속을 고통스럽기만 하였습니다. 이때 바오로 사도의 행위보다는 믿음이라는 말씀을 너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행위를 버리기로 하였습니다. 일단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죄가 용서받았다고 믿어야 해서 ‘죄를 용서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천국에 이른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실천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는 처음에는 성경에서 제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과연 믿음의 정도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는 정도면 충분할까요? 우리 믿음은 하느님 자녀, 곧 그리스도처럼 되었다는 믿음까지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죄를 짓는 법이 있으셨을까요? 없으셨습니다. 따라서 행위 또한 완전하셨습니다. 이렇게 연옥을 생각하지 않으면 완전해야만 해서 그 완전의 정도를 낮추기 일쑤입니다.
전에 전교 1등 하는 고3 학생이 어머니를 살해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전국 1등을 하라고 아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아들이 어느 날 성적표를 받았는데 학교에서도 1등이 아닙니다. 아들은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성적표를 위조하였습니다. 결국 어머니가 알까 봐 자기가 죽느니 어머니를 죽이는 편을 선택한 것입니다.
성적표는 실천입니다. 실천이 믿음의 정도를 나타내줍니다. 아무리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만한 실천이 나오지 않으면 착각입니다. 그러나 ‘여지’를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의고사와 같은 성적표가 필요 없다고 말할 것이고 또한 그 목표를 낮출 수밖에 없게 됩니다.
부모는 자녀가 전국 1등을 못 하더라도 사회에서 살 수 있을 정도의 공부만 하면 나머지는 다른 것으로 보충하면 될 것임을 압니다. 그렇게 자비로운 여지를 주는 부모 앞에서 아이는 목표를 낮추지도 않고 거짓말을 하지도 않습니다. 실천과 믿음의 균형을 맞추며 나아갈 것입니다.
한때 조류 인플루엔자나 신종플루, 코로나 등의 전염성이 강한 병이 발생했을 때는 비행기를 타기 전에, 혹은 외국에서 들어올 때 체온계 등으로 일일이 검사하여 그런 병에 걸린 사람이 들어와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되지 않게 철저히 관리하였습니다.
죄는 확실히 전염성이 있습니다. 만약 어린아이가 불량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보고 듣는 것들이 좋지 않기 때문에 그 아이가 매우 건전하게 크는 것은 굉장히 힘듭니다. 다른 아이를 괴롭히는 그런 아이를 다른 아이들과 함께 놀게 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그러나 병이 들었으면 치료될 수 있습니다. 성장하면서 착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 시간을 주어야지, 무작정 완전하지 않으면 끝이라는 식이라면 정말 사랑도 없는 사회일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연옥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연옥을 목적으로 하라는 말이 아니라 노력을 포기할 필요는 없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면서 연옥이라는 곳을 만들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정진을 멈추지 않게 해 주신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컴퓨터와 인터넷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10년이 넘은 컴퓨터는 배터리가 부풀어 올라서 터질 뻔했다고 합니다. 컴퓨터를 잘하는 형제님이 배터리를 새로 주문하였고, 컴퓨터 내부를 새롭게 업그레이드해 주었습니다. 예전의 프로그램과 조금 달랐지만 금세 익숙해졌습니다. 사제관 인터넷도 파란불과 빨간불이 번갈아 들어왔습니다. 파란불일 때는 인터넷이 잘 되는데 빨간불일 때는 인터넷 사용이 어려웠습니다. 인터넷 회사에서 직원을 보내 주었고,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파란불이 들어오니 막힌 길이 뚫린 것처럼 시원했습니다. 나무를 옮겨 심으면 뿌리를 내릴 때까지 몸살을 앓는다고 합니다. 나무도, 토양도 서로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면 거기에서도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졌던 나쁜 습관들, 이 세상에서 가졌던 죄의 습성을 버려야 할 겁니다. 시기, 질투, 욕망, 나태, 편견, 분노, 탐식과 같은 걸 버려야 할 겁니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전에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았을 때입니다. 모두가 축하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몇몇 사람은 배가 아팠는지 다른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노벨상 위원회에 로비’했다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그건 노벨 평화상의 권위를 훼손하는 발언이었습니다. 작가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작품이 새롭게 조명되었고, 모두가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문인 중에 배가 아팠는지 다른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강 작가에 대한 한림원의 평가가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문학상 후보 중에 한강보다 뛰어난 작가가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한림원은 한강이 여자라서 노벨상을 준 것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한림원 심사위원들이 후보 작가들의 서류를 놓고 선풍기를 돌린 것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건 같은 민족으로서 축하해 주지 못하는 시기와 질투의 발언이었습니다.
서산대사는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답설야중거 불수호난행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이라는 시를 남겨주었습니다. “눈 덮인 길을 걸어갈 때면 발걸음을 신중히 하여라. 오늘 내가 가는 길은 뒷사람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오늘 위령의 날을 지내면서 세상을 떠난 모든 분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어떤 분들은 욕망의 바벨탑을 쌓으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부활의 십자가를 지고서 살았을 것입니다. 욕망의 바벨탑에 묻혀서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하느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한 영혼들의 전구를 구하며 우리들 또한 부활의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2024년 위령의 달입니다. 지나온 나의 발걸음이 욕망의 바벨탑을 쌓으려는 것이었다면 내려와서 부활의 십자가를 지고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나온 나의 발걸음이 뒷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향한 희망의 발걸음이 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위령의 날을 지내면서 ‘위령 감사송’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오늘의 성인
성 유스토 (Justus)
활동년도 : +289/303년
신분 : 순교자
지역 : 트리에스테(Trieste)
같은 이름 : 유스또, 유스뚜스, 유스투스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의 시민이었던 성 유스투스(또는 유스토)는 참회와 애덕의 생활에 헌신하였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무거운 것을 몸에 매달고 바다에 던져져 순교하였다.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라는 이름의 한 사제가 바닷가로 떠밀려온 그의 시신을 안장하였다. 1040년과 1624년의 트리에스테 주교좌 성당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유해는 여전히 그곳에 모셔져 있다. 그는 트리에스테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고, 그에 대한 공경의 오랜 관습은 현존하는 6세기의 모자이크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성 토비아 (Tobias)
활동년도 : +315년
신분 :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토비아스
리키니우스 황제군의 군인이었던 성 카르테리우스(Carterius), 성 스티리아쿠스(Styriacus), 성 토비아, 성 에우독시우스(Eudoxius), 성 아가피우스(Agapius)와 다른 5명의 동료들이 아르메니아(Armenia)의 세바스테(Sebaste)에서 화형을 당해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