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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5일 화요일
[(녹)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잔치에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사람들은 아무도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2,5-11
형제 여러분,
5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6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5-24
그때에 15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분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17 그리고 잔치 시간이 되자 종을 보내어 초대받은 이들에게,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전하게 하였다.
18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19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
20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였다.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알렸다.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에게 일렀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22 얼마 뒤에 종이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자,
23 주인이 다시 종에게 일렀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는 이들의 준비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다 준비되어 있더라도 그 초대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하느님 나라를 누리지 못합니다. 이 비유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맞으실 잔치를 다 준비하셨지만, 정작 초대받은 우리는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비유에서, 먼저 초대받은 사람들은 잔치에 별 관심이 없으며, 세상살이에서 중요하다는 일들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초대받았던 이들은 우리의 모습을 성찰하게 합니다. 그들이 잔치를 거절한 이유들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그 이유들은 합당하며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잔치보다 더 앞세운 일들은 비윤리적인 행위가 아닐뿐더러 오히려 그들의 삶에서 필수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정당하고 중요한 일이라 할지라도 하느님 초대를 외면하게 한다면 악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시선을 두고, 그들을 돌보도록 부름받는 것은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는 한 형태입니다. 그 초대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평소에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그 부름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마음 깊은 곳에 그들을 도우려는 선의는 있지만, 중요하고 합당한 여러 이유로 그 초대를 미루고 거부합니다. 그러나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들을 제쳐 두고 초대에 응한다면,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는 하느님 나라 잔치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은혜로운 초대에 기쁘게 응답합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살펴보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하나의 사이클이 거듭 반복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하느님 측의 열렬한 초대,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측의 거부, 하느님의 진노, 이스라엘의 회개, 그러나 또 다른 배신과 타락, 그리고 우상 숭배, 그러나 하느님의 크신 자비, 또 다시 이어지는 하느님의 초대, 그러나 은혜로운 초대에 대한 노골적인 거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번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의 길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하느님 나라의 큰 잔치를 베풀고 그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또 다시 그 중요한 초대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몇 평 되지도 않는 밭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땅이 하늘보다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안타깝게도 영원한 생명을 몇 푼 안 되는 부동산과 바꿔버린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도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최근에 산 겨릿소 다섯쌍을 부려봐야 된답니다. 보아하니 일 중독에 빠진 사람입니다. 일의 노예가 된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존재나 영혼의 양식, 영원한 생명마저도 뒷전입니다. 과도한 일이 그들을 멸망으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막 결혼한 새신랑이었습니다. 그의 온 정신과 마음은 오로지 인간적 사랑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본능의 노예가 되어 영혼의 사정을 돌볼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으로부터 제1차로 선택받은 민족, 민족들의 으뜸이자 장자였던 이스라엘의 운명은 끝장나버렸습니다. 하느님 초대에 대한 거듭된 거절의 결과는 멸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자리는 이민족들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잘 차려진 잔치의 좌석에 앉은 사람들의 면면은 우리 인간들의 상상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100퍼센트 거기 앉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대사제들, 율법의 전문가들, 바리사이들은 단 한 명도 앉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 자리에는 가장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가장 밑바닥 인생들로 채워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정통 신앙인으로 자처했던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이신 포도나무의 원줄기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포도나무에는 이교 민족의 가지가 접목되어 기대하지도 않았던 포도 열매가 왕성히 열리게 된 것입니다.
먼저 불림받은 사람들, 특별한 선택을 받은 사람들, 정말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우월감 갖지 말고, 내가 1등이라는 의식도 갖지 말고 늘 겸손하게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노력할 일입니다.
『본당 공동체가 하나 되게 하는 가장 완전한 길』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이들이 누구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종들을 보내어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돈에, 어떤 사람들은 명예에, 어떤 사람들은 쾌락에 집착하여 그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미사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라고 하십니다. 이전에는 집사람들과 친척들을 불렀다면, 이제는 ‘한길과 골목’으로 나아가라고 합니다. 한길과 골목은 가난한 이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도 자리가 남자 주인은 이번에는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라고 명령합니다. 점점 더 어려운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집 안 사람에게 소식을 전하는 것은 쉽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는 것은 조금 어렵습니다. 그런데 큰길로 나아가 그들을 데려오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가난한 이들이야 부족한 게 많아서 잔칫상에 쉽게 나오겠지만,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냉담자 회두, 가난한 이들을 향한 선교, 그다음은 길거리 선교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가두선교의 열정이 많이 식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령께서 그 본당에 충만히 활동하지 않으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성령강림이 있었을 때 제자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밖으로 뛰쳐나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모습이 가두선교입니다.
하느님은 필요한 자에게 그만큼 성령님을 부어주십니다. 모세에게는 엄청난 성령의 힘을 지팡이에 넣어 주셨습니다. 그 지팡이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고 바다도 갈랐습니다. 그 힘을 통해 한 것은 무엇일까요? 서로 갈라졌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가 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모세를 따라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갈라질 수 없었습니다. 모세를 따르지 않으면 만나도 먹지 못하고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물도 마시지 못하기 때문에 살 수가 없습니다. 물론 모세에게 불만도 품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느님과 계약을 이루어 계약의 백성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먼저 성령이 충만해야 밖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그런 의도를 가져야 합니다. 매일 강론하는 이에게 성령을 더 주실까요, 아니면 평일 강론은 안 하고 주일 강론도 그냥 자기 생각만 말하는 사제에게 성령을 더 주실까요? 우리 의도가 중요합니다. 본당이 결국엔 밖으로 나아가 선교하겠다는 열정이 있다면 주님은 그 사명에 맞는 성령은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그러한 본당에 어떤 일을 이루실까요? 대구교구 이판석 신부님은 지산성당에 있을 때 가두선교를 통해 7년간(1995~2002) 3,200명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본당이 하나 분가될 수 있었습니다.
2007년엔 서울 성내동 성당에서는 60일간 가두선교를 하여 5,000명에게 안내 책자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때 1,600명에게 자기소개서를 받았고 그중에서 400명이 입교 등록을 하였습니다. 그중 300명이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가두선교는 확실히 효과가 있습니다. 그만큼 큰 희생과 용기가 따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때 성령께서 함께하셔서 이 성당에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은 무엇일까요? 바로 본당의 일치입니다. 일치된 본당은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누립니다. 하느님 집을 어떻게 해서든 가득 차게 하도록 노력합시다. 그러면 성령으로 본당이 일치되고 행복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장례식장에 목사님이 오신 적이 있습니다. 묘지에서 하관 예절에도 목사님이 오신 적이 있습니다. 가톨릭 예식에 목사님이 오셔서 기도하고 싶다고 해서 좋다고 했습니다. 고인의 가족 중에 교회 다니는 분이 있어서 그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목사님이 정성껏 기도해 주니, 고인께서도 기뻐했으리라 생각합니다. 33년 사제 생활하면서 아직 법당이나, 교회의 장례 예절을 다녀 본 적이 없었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분의 가족 중에 교회나 법당에서 장례 예절을 지키는 분이 없었을 수 있고, 그런 분이 있었다고 해도 제게 고인을 위해서 장례 예절에 함께 하도록 부탁하신 분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드디어 제게도 교회의 장례 예절에 함께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본당 사목 위원의 형님이 하느님의 품으로 갔는데, 독실한 교회 신자였습니다. 사목 위원도 몇 년 전까지 교회에서 큰 직책을 맡아서 봉사했다고 합니다. 형제님은 성당에서 교리를 배우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습니다. 제게 고인이 된 형을 위한 장례 예절에 함께 해 주기를 청하였고, 저는 기꺼이 가겠다고 했습니다.
어느 교회인지 물어보았는데 고인은 교회에서 장례 예배를 하지 않고, 장례식장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어째서 그런지 이유를 물었습니다. 형제님이 다니던 교회는 일반 신자는 교회에서 장례 예배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목사님이나, 장로님은 교회에서 장례 예배를 드리지만, 일반 신자는 장례식장에서 추모 예배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문화와 전통의 차이가 있겠지만 장례 예절은 가톨릭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걸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걸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 찾아 주었다.” 고인께서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를 청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로 있다가 보좌 신부의 직책을 받아들이는 신부님을 보았습니다. 오랜 사목 경험이 있기에 본당 신부를 도와서 기쁘게 사목하였습니다. 교우들도 신부님과 공동체를 이루며 잘 지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직책은 보좌 신부이지만 인격이 보좌 신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모두 직책과 관계없이 복음을 선포하는 사목자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직책과 직위로 인격과 인품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교구 사제들도 훨씬 풍요로운 사목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젊은 사제들에게 더 많은 사목의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자존심과 선입견을 버릴 수 있다면, 교만과 욕심을 버릴 수 있다면 상황에 반응하며 이끌리기보다는 상황을 예측하고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종의 모습을 취하시면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순종과 겸손을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받지 못하는 사람을 안타까워하십니다. 현실에 안주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교만과 선입견으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모두에게 열려있지만 아무나 갈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상황에 이끌리기보다는 상황을 이해하고 이끌 수 있다면, 순종과 겸손으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따라갈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받을 수 있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오늘의 성인
성녀 엘리사벳(Elizabeth)
신분 : 신약인물, 부인
활동연도 : +1세기경
같은이름 : 엘리자베스, 엘리자벳
마리아의 사촌인 성녀 엘리사벳(Elisabeth)은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이던 성 즈카르야(Zacharias)의 아내이자 세례자 요한(Joannes Baptistae, 6월 24일)의 어머니이다. 루카 복음서 1장에 의하면 그녀는 사제 아론의 자손으로 남편과 함께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었지만, 나이가 들도록 아이가 없었다.
그녀가 아이를 못낳는 여자였을 뿐 아니라 이미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인 남편 즈카르야가 자신의 차례가 되어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는 직책을 수행하던 중, 주님의 천사가 발현하여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를 전해주었다. 즈카르야는 이 사실을 의심함으로써 벙어리로 지냈고, 요한이 탄생한 후에야 비로소 혀가 풀려 하느님을 찬미하며 말을 하게 되었다.
성녀 엘리사벳은 동정 마리아가 대천사 가브리엘(Gabriel, 9월 29일)로부터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들었을 때 이미 임신한 지 여섯 달이었고,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표징이 되어 마리아의 응답에 큰 힘이 되어주었다.
또한 성모 마리아의 방문을 받았을 때 성령을 가득히 받아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2-45) 이렇듯 성녀 엘리사벳은 성모 마리아와 함께 루카 복음에서 하느님의 구원역사를 여는 주도적인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성 즈가리야
1세기경. 예루살렘.팔레스티나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이던 성 즈가리야는 마리아의 사촌 엘리사벳의 남편이다.
그는 아비야의 조에 속하는 사제의 한사람으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율을 어김없이 지키며 하느님 앞에 떳떳하고 올바르게 살았다.
그의 차례가 되어 분향하는 직책을 수행하던 중에 가브리엘 천사의 발현으로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를 들었다.
그는 이 사실을 의심함으로써 벙어리로 지냈고, 요한의 탄생 이후에 그의 혀가 풀렸다(루가 1장 참조).
전승에 의하면 그는 세례자 요한이 있는 곳을 대라는 헤로데의 명을 거절하므로써 성전에서 살해되었다고 전해온다. 즈가리아는 히브리말로 ’야훼 기억하시다’라는 뜻이다.
성 갈라시온 (Galation)
활동년도 : +연대미상:
신분 :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갈라티오, 갈라티온
성녀 에피스테메 (Episteme)
활동년도 : +연대미상
신분 :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에삐스떼마, 에삐스떼메스, 에피스테마, 에피스테메스
성 갈라티온(또는 갈라시온)의 부모는 클리토폰과 레우시페임이 확인되었으나, 성 갈라티온과 성녀 에피스테메(Epistemes)의 이야기는 자세히 전해오지 않는다. 클리토폰과 레우시페는 시리아의 에메사에서 결혼하여 살고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레우시페는 우연하게도 그리스도교 은수자 한 분을 따뜻이 대접한 일이 있는데, 그 은수자는 박해를 피하여 숨어 지내던 오누프리우스라는 수도자였다. 그녀가 이 수도자로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 그녀의 남편도 신자가 되었다.
이들 부부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내렸음인지 드디어 아들이 태어났다. 우유 빛처럼 맑은 아들의 얼굴을 따라 부모는 갈라티온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였는데, 그는 매우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하였다. 성 갈라티온은 부모의 요청에 따라 에피스테메라 불리는 어느 외교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성 갈라티온은 아내에게 동정으로 살겠다는 뜻을 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제의를 이해할 수 없고 이상하게 생각한 성녀 에피스테메는 남편을 설득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남편이 아내에게 그리스도교 종교를 자세히 설명하고 영세받기를 권하자 아내도 순순히 이에 응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성 갈라티온은 아내와 의논하여 모든 재산을 팔아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그것도 부족하여 성 갈라티온은 시나이 사막에 있는 푸블리온 은수처로 떠났고, 성녀 에피스테메(Epistemes)는 수녀들의 공동체에 들어갔다.
3년 후에 성 갈라티온은 그리스도인이란 죄목으로 체포되어 에메사의 관리 앞에 끌려 왔다. 이 소식을 들은 성녀 에피스테메는 남편과 함께 고난을 감수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스스로 체포되었다. 이들 부부는 갖은 고문을 받았지만 계속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형리들은 그들의 혀, 손 그리고 발을 자르고 그래도 죽지 않자 목을 베어 처참하게 죽였다
성 즈가리야 (Zachary)
활동년도 : +1세기경
신분 : 신약인물, 예언자, 사제
지역 :
같은 이름 : 자카리아, 자카리아스, 자카리야, 재커리, 즈가리아, 즈카르야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이던 성 자카리아(Zacharias, 또는 즈가리야)는 마리아의 사촌 엘리사벳(Elisabeth)의 남편이다. 그는 아비야 반에 속하는 제관으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율을 어김없이 지키며 하느님 앞에 떳떳하고 올바르게 살았다. 그의 차례가 되어 분향하는 직책을 수행하던 중에 천사의 발현으로 세례자 요한(Joannes Baptistae)의 탄생 예고를 들었다. 그는 이 사실을 의심함으로써 벙어리로 지냈고, 요한의 탄생 이후에 그의 혀가 풀렸다(루가 1장 참조). 전승에 의하면 그는 세례자 요한이 있는 곳을 대라는 헤로데의 명을 거절했기 때문에 성전에서 살해되었다고 전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