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1월 7일 목요일
[(녹)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그에게 이롭던 것들을,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는 의인 아흔아홉보다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3,3-8ㄱ
형제 여러분, 3 하느님의 영으로 예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자랑하며
육적인 것을 신뢰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4 하기야 나에게도 육적인 것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가 있기는 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육적인 것을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더욱 그렇습니다.
5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
6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7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8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1-10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5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8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9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1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광야에 놓아두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으러 가는 목자는 그리 좋은 목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한 마리의 양을 위하여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놓아둔 무책임한 목자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속성’을 깊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선택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를 구원하시고자 하며, 단 한 마리의 양도 버리시거나 포기하실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백 마리를 돌볼 때 한 마리쯤 잃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어쩌면 아주 작은 기회비용이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버림과 포기라는 말이 없으며, 그분께 한 마리를 잃는다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과 같습니다. 한 마리 때문에 아흔아홉 마리를 놓아두시는 분이 아니라, 단 한 마리도 포기하시지 않고 모두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곧 이 비유는 버림받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 이야기가 아니라, 길 잃은 한 마리의 양 이야기입니다. 어쩌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 가운데 또 다른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면 주님께서는 곧바로 그 양을 찾아 나서실 것입니다. 이는 아흔아홉 명의 구원을 배제한 채 특정한 한 명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도 주님의 구원 의지에서 멀어질 수 없음을 뜻합니다.
우리도 길 잃은 영혼 하나를 찾으러 나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한 영혼을 포기하고 배제하면서 회개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는 공동체보다, 불편하고 고생스럽더라도 한 사람의 회개를 이끌고 그것에 기뻐하는 공동체를 바라십니다. 그런 공동체가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시는 하느님과 닮았습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내가 이토록 주님으로부터 극진한 사랑받는 존재인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 안에서 공공연하게 무시당하고 멸시당하던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으니, 세리, 창녀, 죄인들이었습니다.
특히 거룩함과 불결함을 항상 명확하게 구분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그들은 벌레만도 못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대놓고 무시하고 상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천국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땅에 강생하신 예수님께서는 허리를 굽히시고 자세를 낮추신 후, 세상 자상하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시고, 어쩔 수 없는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셨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그들도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는 귀한 존재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의 실추된 품위와 가치를 되찾아줄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하셨습니다.
오늘의 비유 말씀, 아흔아홉 마리 건강한 양들보다 한 마리 길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양치기, 등불을 밝히고 집안 곳곳을 샅샅이 뒤지며 은전 한 닢을 찾는 부인의 스토리는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시는지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던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세리와 창녀, 죄인들은 너무나 감동을 받은 나머지 삶의 근본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내가 이토록 주님으로부터 극진한 사랑받는 존재인데,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아서야 되겠는가? 하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성찰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분이야말로 내 남은 인생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실 주님이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간 종사해왔던 어둠의 직업을 뒤로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사방에서 몰려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놀랍게도 말씀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제일 앞쪽에 세리와 창녀, 죄인들이 초집중하며 말씀을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복음 대목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방황과 타락의 길,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사람들을 절대로 무가치한 존재나 실패작으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구치소나 교도소에 한 번 다녀왔다고 인생 낙오자로 낙인찍지 않으십니다.
그보다는 당신의 뜨거운 사랑과 한없는 자비를 통해 그들이 당당히 일어설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자극하시고 격려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자비는 나락으로 떨어진 한 인간을 다시금 일어설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온전히 믿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여 주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 세리, 창녀, 죄인들은 비로소 지신의 비참한 처지를 진지하게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세심하게 성찰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있는 죄인인 우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여 주시고, 이해해주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시고, 어떻게든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자 안간힘을 쓰시는 우리 주님의 자비로운 모습입니다. 그 주님 모습으로 인해 우리는 참다운 회개를 하고 새롭게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회개한 양이 되라는 말씀이 아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는 투덜거립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와 은전 하나를 찾아 마을 사람들에게 함께 기뻐해 달라고 말하는 어떤 부인의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한 사람의 회개는 하느님을 정말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1967년 8월에도 온 국민이 한 사람의 생명이 살아난 것 때문에 기뻐했던 적이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한창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 아래 새마을 운동을 강조하던 시절 충남 청양 구봉 광산에서 김창선 광부가 수직갱도의 붕괴로 120미터 아래에 갇히는 일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곳에는 전화가 있어 그가 살아있다는 소식이 온 나라에 퍼지게 됩니다.
언제까지 버틸지도 모르는 한 사람을 위해 열악한 장비로 수많은 사람이 투입되어야 하고 막대한 돈이 들어야 하는데 구조를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냐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에 전 국민에게 그 가족들이 나서서 자신들의 남편이자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빌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을 제쳐놓고 구출작업을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고, 2,200여 명이 구조작업에 투입되었습니다.
김찬선 씨는 떨어지는 물방울을 옷에 묻혀 그 옷을 씹으며 15일을 버텼습니다. 그가 절망에 빠질 때 가족들은 온 국민이 기도하고 있다고 힘을 주었습니다. 16일째 극적으로 구조되었고, 이는 갱도 밑에서 세계에서 가장 최장 시간을 버틴 기록이 되었습니다. 구출 당시 김 씨는 건강도 정신도 또렷한 상태였습니다.
이 일로 대통령은 물론 온 국민이 기쁨을 누렸습니다. 한 사람이 살아서? 그럴까요? 그래서 기쁠까요? 애초에 대부분은 그런 사람이 존재하는지도 몰랐고, 사실 4일째 되는 날 김창선 씨에게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그를 포기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면 왜 기쁜 걸까요? 내가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2,200명과 엄청난 돈을 투입해 살려낼 수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이 기쁜 것입니다. 나도 저런 처지가 되면 나를 똑같이 구해줄 나라에 산다는 것이 기쁜 것입니다.
한 나라가 하느님 나라가 되는 방법은 한 영혼을 구할 수 있는 목자들이 많게 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한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 사람들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체’를 영합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을 모실 성전이 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만약 내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가 되지 못한다면 나는 하느님 나라에 사는 게 아닙니다.
의인 아흔아홉은 적어도 하느님 나라에 있는 게 행복한지 아는 회개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인을 기쁘게 하지 못합니다. 주인에게 사명을 받은 목자만이 주인을 기쁘게 합니다. 우리는 돌아오는 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미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세례를 받아서 파견받는 목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회개하라는 뜻으로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냥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목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에 머무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회개는 양이 아니라 목자가 되게 합니다.
내 생명이 소중하면 다른 사람의 생명도 소중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양이 되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창선 씨도 1982년 매몰 14일 만에 생존한 태백 탄광 사고 생존자들을 찾아가서 힘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김창선 씨의 사례를 보고 버틸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김창선 씨는 말합니다.
“죽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죠. 하지만 내 목숨 하나가 그토록 소중한 거라곤 사고를 당하기 전에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한 이야기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복자품에 오른 바로톨로 롱고(Bartolo Longo)의 이야기입니다. 바르톨로는 나폴리 대학에 다니는 동안 가톨릭 신앙에서 멀어졌습니다. 반 가톨릭 교수들에게 둘러싸인 그는 교회에 대한 그들의 회의주의와 경멸을 흡수했습니다. 그의 호기심으로 인해 그는 강령술에 참여하게 되었고 결국 사탄 숭배에 가담하게 되었고 심지어 강신술의 ‘사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그에게 명확성이나 진실을 가져다주기는커녕,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괴로운 환상과 악몽과 함께 끊임없는 공포, 어둠, 깊은 슬픔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신비술 수행을 계속했고 점점 더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폼페이에서 일어났는데, 그곳에서 바르톨로는 절망과 자살 충동에 압도되어 사탄과의 계약의 결과를 반성했습니다. 그는 가톨릭 신부가 하느님께 봉헌된 것처럼 사탄의 신부로서 마귀에게 속박되어 있다고 느끼면서 자신이 영원히 저주 받을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이 절망적인 상태에서 그는 자신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믿음과 씨름했습니다.
바르톨로가 갑자기 묵주기도에 관해 들었던 약속, 즉 “묵주기도를 전파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것입니다.”라는 약속이 기억난 것은 바로 이 강렬한 암흑의 순간이었습니다. 이 기억은 그에게 희망의 불꽃을 가져다주었다.
감동에 사로잡힌 바르톨로는 땅에 엎드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그녀의 약속이 참이라면 묵주기도 신심을 전파하는 데 일생을 바치겠다고 간청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오랫동안 느꼈던 고통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깊은 평화의 느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삼종기도를 알리는 교회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여 이 은총의 순간을 더욱 확증해 주었고 바르톨로는 자신의 진정한 소명을 찾았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즉시 도미니코수도회 신부인 알베르토 라덴테(Alberto Radente) 신부를 찾았고, 그 신부는 그에게 영적인 지도를 제공했고 결국 그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정기적인 모임과 기도, 참회를 통해 바르톨로는 묵주기도에서 자신의 구원을 위한 길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신비주의의 위험을 피하고 그리스도를 믿도록 돕는 사명을 발견하면서 교회와 화해했습니다.
바르톨로의 개종은 너무나 심오하여 남은 생애를 묵주기도에 바쳤고, 궁극적으로는 폼페이에 유명한 묵주기도의 성모 성당을 짓고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고아들을 위한 자선 사업에 헌신했습니다. 그의 삶은 특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통해 하느님 은총의 구원 능력에 대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작곡한 존 뉴턴 사제는 처음엔 노예상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깨닫고는 그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제가 되어 인간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 알려주는 목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목자가 되기 전까지는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아 내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면 죽어가는 이들을 두고 풀만 뜯는 양으로 남아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우리를 양이 되는 것을 넘어서서 이젠 길 잃은 양을 살리는 목자가 되게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되는 것이 있습니다. 변화에 적응하는 사람이나 기업은 성장하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기업은 힘들게 됩니다. 40년 전에 논문 쓸 때입니다. 당시는 원고지에 손으로 쓰는 경우가 많았고, 수동 타자기로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저는 기업체에서 근무하는 청년의 도움으로 전동 타자기로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글씨체도 예뻤고, 깔끔했습니다. 5년 후에 석사 논문을 쓸 때입니다. 대부분이 전동 타자기로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저는 기업체에 다니는 주일학교 교사의 도움으로 삼보컴퓨터로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편집과 교정이 간편했습니다. 컴퓨터의 도움이 없었으면 논문 완성이 어려웠을 겁니다. 지금은 손으로 논문 쓰는 사람, 타자기로 논문 쓰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컴퓨터를 이용해서 자료를 검색하고, 논문을 작성합니다. 전화기의 발전은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제가 어릴 때는 집에 전화기가 없는 가정이 많았습니다. 전화기를 설치하려면 예치금도 많이 냈습니다. 처음 전화기가 집에 들어왔을 때가 생각납니다. 5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전화번호가 기억납니다. 이동통신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저마다 손전화를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30년 전입니다. 인터넷과 연결된 스마트폰은 말 그대로 똑똑합니다. 전화기로 예약하고, 전화기로 은행 업무 보고, 전화기로 문자 보내고, 전화기로 검색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고, 함께 가야 합니다.
‘ChatGPT 4o’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생성형 인공지능입니다. 구글, 네이버, 다음이 검색엔진이라면 챗지피티는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대화를 통해서 질문에 응답합니다. 대화를 통해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마치 개인비서처럼 저를 도와줍니다. 강론 준비할 때,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할 때, 문제의 해결 방안을 찾을 때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2025년 생성형 인공지능의 흐름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기존의 대화를 통한 인공지능도 계속 발전할 거라고 합니다. 대화는 물론, 시청각을 통한 인공지능이 시작될 거라고 합니다. 행동하는 인공지능도 시작될 거라고 합니다. 인공지능은 기업과 개인의 자문을 해 줄 거라고 합니다. 창의적인 작업, 예술, 콘텐츠 제작 분야에서 활용이 증가할 거라고 합니다. AI 기술의 발전과 함께 AI 윤리 문제에 대한 논의도 심화할 거라고 합니다.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특정 업무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맞춤형 AI 해결책이 더욱 많이 개발될 거라고 합니다. 데이터 처리가 클라우드에 의존하지 않고, 기기 자체에서 실시간으로 처리되는 엣지 AI의 사용이 증가할 거라고 합니다. 이러한 흐름은 AI 기술의 성숙도와 함께 점차 많은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AI가 사회 전반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거라고 합니다. 이런 흐름 역시 피할 수 없다면 배워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흐름에 자신의 모든 걸 바쳤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걸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바오로 사도는 육적인 것들을 추구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성공, 명예, 권력, 재물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영적인 것들을 추구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 복음, 부활, 영원한 생명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습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이런 체험을 ‘회심’이라고 부릅니다.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바리사이에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신앙의 별이 되었습니다. 복자 최일광(안드레아)는 종교를 배반하라는 말을 듣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에게는 두 개의 하느님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에 있는 하느님 나라요, 다른 하나는 저 하늘에 있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임금을 섬기며 살고, 저 하늘에서는 영원히 하느님을 섬길 것입니다." 당시 교회는 백정이었던, 천민이었던 최일광을 형제로 받아들였습니다. 복자 최일광 안드레아에게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부르는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그렇습니다.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녀 유스티나 (Justina)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 파도바(Padova)
활동연도 : +304년?
같은 이름 : 유스띠나
이탈리아 파도바 지방에서 큰 공경을 받는 성녀 유스티나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거의 없다. 그녀는 종종 안티오키아(Antiochia) 출신의 성녀 유스티나(9월 26일)와 혼동되기도 한다.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성녀 유스티나는 파도바에서 순교한 동정녀로 사도 성 베드로(Petrus)의 제자이자 파도바의 초대주교인 성 프로스도키무스(Prosdocimus, 11월 7일)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스도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했던 성녀 유스티나는 집정관 막시무스(Maximus)의 명령으로 칼에 찔려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그런데 성녀 유스티나는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에 살았던 젊은 여성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미 100년경에 사망한 성 프로스도키무스 주교와 직접 만날 수는 없었지만, 영적인 유대는 가능했다고 본다. 그녀의 유해는 파도바 성벽 밖에 건립된 성녀 유스티나 성당에 안치되었다. 교회미술에서 그녀는 왕족 출신이라는 전승으로 인해 왕관을 쓴 공주로서 표현되고 있고, 순교한 사실에 따라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거나 가슴에 칼이 꽂힌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동정녀의 상징인 하얀 유니콘과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성 헤르쿨라노 (Herculanus)
활동년도 : +547년경
신분 : 주교
지역 : 페루자(Perugia)
같은 이름 : 헤르꿀라노, 헤르꿀라누스, 헤르쿨라누스
고트족(Goths)들이 이탈리아 페루자를 7년 동안 점령하고 있을 때, 그들은 그곳의 주교인 성 헤르쿨라누스(또는 헤르쿨라노)를 가장 야만적인 방법, 즉 살가죽을 벗기고 참수하는 형벌로 무참하게 죽였다. 신자들은 재빨리 그의 머리만을 수습하여 장사 지낸 뒤 40여 일 후에 성 베드로(Petrus) 성당으로 이장하여 순교자로 공경하였다
성 윌리브로드(WILLIBRORD)
신분 : 선교사, 주교
활동지역 : 에히티나흐(Echternach)
활동연도 : 658~739
같은이름 : 빌리브로드, 빌리브로루두스, 윌리브로드, 윌리브로르드, 윌리브로르두스, 윌리브로르드
잉글랜드의 노스움브리아 출신인 성 윌리브로드는 일곱 살 때에 로폰 수도원으로 보내져서 성 윌프리드의 지도를 받았고, 12세 때에는 성 에그버트와 성 위그버트와 더불어 공부하였다.
그는 30세 때에 사제가 되었고, 11명의 잉글랜드 사제들과 함께 프리스랜드의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교황 세르지오 1세로부터 프리스랜드 설교권을 얻었으며, 페핀 대왕으로부터 큰 격려와 지원을 받았다.
695년, 그는 프리시안인들의 주교로 축성되어 그의 주교좌를 우트렉트에 세웠다.
또한 그는 룩셈부르그에 엑테르나크 수도원을 세움으로써 이 수도원 운동이 덴마크까지 파급되게 하였다.
또 그는 찰스 마르텔의 아들 페핀을 개종시킴으로써, 그의 선교사업은 날로 번창하였다.
그는 "프리시아인들의 사도"로 공경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