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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5일 토요일
[(녹)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성 대 알베르토 주교 학자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속이는 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왔으니,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라고 당부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나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이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이라야 아버지도 아드님도 모십니다.>
▥ 요한 2서의 말씀입니다. 4-9
선택받은 부인이여,
4 그대의 자녀들 가운데, 우리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계명대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매우 기뻤습니다.
5 부인, 이제 내가 그대에게 당부합니다.
그러나 내가 그대에게 써 보내는 것은 무슨 새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입니다. 곧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6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가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고,
그 계명은 그대들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7 속이는 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는 속이는 자며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8 여러분은 우리가 일하여 이루어 놓은 것을 잃지 않고
충만한 상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살피십시오.
9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을 벗어나는 자는 아무도 하느님을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이라야 아버지도 아드님도 모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그날에 사람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26-3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6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28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29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30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31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32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33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3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36)·37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어떤 사람에게 세 명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는 첫 번째 친구를 가장 좋은 친구로 여겼고 늘 함께 있고 싶어 하였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좋아하기는 하였지만, 첫 번째 친구만큼 소중하게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세 번째 친구에게는 별로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임금에게서 궁으로 들어오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혹시 무슨 벌을 받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진 그는 세 명의 친구에게 임금 앞에 함께 가 달라고 차례로 부탁하였습니다.
그가 가장 좋은 친구라고 여긴 첫 번째 친구는 딱 잘라 거절하였습니다. 다음 두 번째 친구는 궁전 문 앞까지는 함께 가 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어렵다고 말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친구에게 부탁하였는데 그는 흔쾌히 대답하였습니다. “그래, 기꺼이 함께 가겠네. 자네는 어떤 나쁜 짓도 하지 않았으니 두려워할 것 없네. 내가 함께 가서 임금께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잘 말씀드려 주지.” 임금의 부름은 죽은 뒤 하느님 앞에 서는 것을 뜻합니다.
첫 번째 친구는 재산입니다.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돈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을 모으려고 갖은 애를 쓰지만,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없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가족과 친척들입니다. 그들은 무덤까지 따라와 주지만, 죽은 이가 무덤에 묻히고 나면 그를 혼자 남겨 두고 돌아갑니다. 세 번째 친구는 선행입니다. 그의 선행은 그가 죽은 뒤에도 영원히 그와 함께 남아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탈무드에 나오는 유명한 세 친구 이야기로, 하느님 앞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마지막 순간에도 집과 들에 남겨진 재산에 마음을 쓰는 어리석은 자들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 동행할 친구는 돈이나 재산이 아닌 오직 사랑의 실천뿐입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수시로 확인합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로마 유학 시절, 나폴리를 거쳐 폼페이로 소풍을 자주 갔었습니다. 구 도시 유적지의 역사가 흥미롭기도 했지만, 폐허 사이를 산책하고 있노라면 아주 좋은 하루 피정이 되곤 했습니다.
자주 가다 보니 나중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폼페이 가이드 역할도 몇 번 했었습니다. 폼페이는 대도시 나폴리에서 대중교통으로 30분정도 걸리는 곳에 위치해있습니다. 이 도시는 한때 잘 나가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기원후 79년경 발생한 베수비오 화산의 강력한 폭발로 인해, 도시 전체가 순식간에 매몰되어, 역사 속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폼페이 사람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먹고 마시고, 웃고 즐기다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엄청난 화산재에 순식간에 파묻혀버렸습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정지되어버렸습니다. 일하다가, 잠자다가, 식사를 하다가, 고기를 자르다가, 별의 별 짓을 다 하다가 그 상태 그대로 멈춰 화석이 되고 만 것입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죄와 타락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도 폼페이와 흡사한 스토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계명을 무시하며,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의 머리 위로, 주님께서는 엄청난 양의 유황과 불을 퍼부으셨습니다. 얼마나 강력했던지 사람은 물론 모든 가축들, 생명체들이 순식간에 녹아버려 형체를 알 길이 없었습니다.
수많은 소돔과 고모라 시민들은 단체로 제삿날을 맞이한 것입니다. 단 그 도시 안에 유일한 의인이었던 롯과 그 가족만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 탓에 살아서 빠져나왔습니다. 일말의 미련과 아쉬움이 남아있던 롯의 아내는 자꾸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부정(不淨)한 도시, 타락한 도시, 짐승들의 도시, 죽음의 도시에서는 최대한 빨리 빠져나오는 것이 상책입니다. 어떤 모임이나 공동체에 갔었는데, 비릿한 냄새가 진동한다면, 비정상 집단이라고 여겨진다면 빨리 빠져나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빨리 빠져나와서 주님께서 운행하시는 생명의 배, 구원의 배 위로 재빠르게 승선하는 것이 살길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바로 그런 역할을 수행해야 마땅합니다.
그리 길지도 않은 우리네 인생, 인간 존재 자체가 늘 나약하고 부족하기에 언제나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우리가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탄 배는 자주 폭풍우 속으로 들어가 전후좌우로 심하게 요동칩니다.
높은 파도와 폭풍우 속에서도 우리는 늘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수시로 확인해야겠습니다. 천국으로 향하는 안전한 배에 올라타 있는지? 집단적 멸망을 향해 가는 죽음의 배에 타고 있는지 말입니다. 주님께서 늘 거처하시는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는지? 환락과 타락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머물고 있는지 말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멸망과 죽음의 사이비 종교로 빠져들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을 유혹하는 요즘 집단들의 특징은 대단한 고단수라는 것입니다. 던지는 미끼가 얼마나 달콤한지 모릅니다. 어쩌다 실수로 덜컥 미끼를 무는 순간, 그걸로 우리의 영혼과 정신, 우리의 인생 전체가 끝장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웃기지도 않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죽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불행하게도 나름 가방끈 길다고 자랑하는 사람들, 그래도 한때 잘 나갔다며 으쓱대는 사람들, 썩은 동아줄인줄도 모르고 끝까지 잡고 있는 사람들, 빨리 그 길에서 돌아서서 하느님의 길로 돌아서길 희망합니다.
왜 내 주위엔 유독 나에게 상처 주는 사람들만 있을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마지막 심판의 기준이 나옵니다. 마치 노아의 홍수 때와 같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노아는 하느님의 뜻에 집착하는 사람이었고, 물속에 빠진 이들은 세상 것에 집착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세상 것과 하느님 것을 동시에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하늘에 집착하는 사람은 하늘로 가고 땅에 집착하는 사람은 땅으로 갑니다.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동시에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이어 노아의 홍수와 비슷한 내용으로 롯의 아내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롯의 아내는 세상으로 상징되는 소돔에 두고 온 것들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정말 유황불로 온 소돔 땅이 멸망하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보지 말라고 하시는 명을 어기고 뒤를 돌아봅니다. 그렇게 되자 소금기둥이 되어버려 더 이상 천사의 인도를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이 있는 것만으로 멸망하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목숨을 보존하려고 하는 이유는 목숨을 지켜줄 이가 옆에 없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잃는 사람은 다시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집착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이는 심판의 기준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란 뜻입니다. 같이 침상에 있어도, 같이 맷돌질해도 행위로는 그 사람을 판별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그 사람이 자신을 지켜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 세상 것에 집착하느냐, 다 버리고 하느님 나라를 향하느냐가 결정됩니다.
제자들은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독수리는 시체를 뜯어먹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독수리를 부르는 존재는 시체 자체입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에게 독수리는 달려들 수 없습니다. 자칫 자신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왜 내 주위엔 나에게 도움 되는 사람은 없고 나에게 상처를 주는 이들만 있을까?”라고 한탄합니다. 안타깝지만, 그 이유는 자신이 죽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퀸의 보컬 싱어, 프레디 머큐리는 명성을 얻자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팀원들을 저버리고 혼자 솔로 앨범을 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만나고 있는 이들이 그를 병들게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프레디 머큐리가 자신이 잘못 가고 있었음을 어떻게 깨달았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썩었다. 그래서 주위에 날파리들이 많다.”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 있습니다. 깨진 유리창이 그대로 있다면 사람들은 또 돌을 던집니다. 그 집에 주인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 안에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면 내가 강해 보이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던지는 상처들이 금방 치유되고 있음을 보고는 그 안에 강한 주인을 모시고 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미움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하느님이 그 사람 안에 사실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는 자신을 지켜줄 사람이 없어서 세상 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오드리 햅번이 그런 경우였습니다. 오드리 헵번은 나이도 많고 별로 유명하지도 않았던 배우 멜 페러란 사람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오드리 헵번은 남편의 재기를 위해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해 남편을 위한 배역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오드리 헵번은 남편의 촬영장에 나타나 허드렛일하며 남편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흥행 보증수표였던 그녀는 남편이 출연하는 별로 인기도 없는 영화에 동반 출연하여 흥행에 성공하게 합니다. 물론 남편이 연출한 형편없는 영화에 함께 출연하여 최초로 흥행에 참패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에겐 오래전부터 다른 여인이 있었습니다. 오드리 햅번은 남편의 불륜 현장을 목격했음에도 이혼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임신하여 남편을 잡아두려 했지만, 남편이 자녀를 원하지도 않고 결국 영화를 찍다가 낙마하여 유산되고 맙니다. 그런 아내를 돌보지도 않고 오직 돈과 재산만을 바라는 남편과의 결혼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어 14년 만에 이혼하고 맙니다.
둘째 남편은 이탈리아 의사였습니다. 그녀는 여행 중 우연히 만난 그 사람과 또 사랑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 남자도 역시 바람둥이였습니다. 남편의 바람피우는 현장을 신문에서 보고야 알게 됩니다.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리던 오드리 헵번의 결혼생활은 비극의 연속이었습니다.
왜 그녀의 결혼생활은 그렇게 원만치 못했던 것일까요? 바람둥이만 남편으로 맞아들였던 것일까요? 남편들의 책임도 있겠지만 오드리 헵번 역시 결혼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녀에겐 ‘배고픔’이란 게 있었습니다. 그녀가 6살 되던 해 아버지가 가정부와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딸에게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은 지옥 같은 일이라며 집을 나가버립니다. 그 이후로 오드리 헵번은 아버지를 만나지 못합니다.
오드리 햅번은 나치 시절에 길거리에서 음식을 주워 먹어야만 했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부재는 엄청난 상처였습니다. 그러니 생존을 위해 세상 것에 얽매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보고 달려드는 독수리 떼가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녀의 부와 명성, 아름다운 여성성을 노렸습니다. 그녀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에 매인 끈을 끊으려고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수도자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어려울 때 자기가 쓰려고 얼마간을 남겨 숨겨 두었습니다. 그가 스승을 찾았을 때 스승은 그의 행위를 이미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대는 진정 수도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먼저 마을로 내려가, 고기를 조금 사서 그대의 벗은 몸에 달아매고 다시 이곳으로 오게나.”
그는 스승의 지시대로 자기의 몸에 고기를 달고 산길을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몸에 달린 고기는 흔들거리며 냄새를 풍겼습니다. 냄새를 맡은 들개와 새들이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 고기를 노리고 그에게 덤벼들었습니다. 그는 들개들과 새들에게 대항하며 도망쳤으나 그것들은 끝까지 따라붙었습니다. 들개들과 새들의 계속되는 공격에 그는 많은 상처를 입었고 너무나 지쳐버렸습니다. 이내 그는 그것들이 자신에게 달린 고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차 없이 그 고기를 던져버렸습니다. 그러자 짐승들은 자신에게서 떨어졌고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가 돌아와 상처투성이가 된 몸을 보이자, 스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을 버리면서도 자기의 돈에 집착하는 자에게는 마귀가 이처럼 공격한다네. 모든 것을 벗어버린 진정한 빈 몸이 되게나.”
오드리 햅번은 두 번의 결혼 실패를 두고 더는 세상 것에 집착하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 자신에게 초콜릿과 식량원조를 해 주었던 미군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유니세프의 홍보대사를 자처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이가 된 것입니다. 노아가 배를 만들어 동물들을 태우게 되는 삶으로 전환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생존이 아닌 다른 이들의 생존을 위해서 사니 더는 그녀에게 파리떼가 몰려들지 않았습니다. 좋은 친구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녀는 죽기 직전까지 좋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내 안에 주님을 가지면 다 가진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 것에 집착하지 않고 그러면 주위에 점점 천상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드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내가 안 좋은 이들에게 둘러싸이는 이유는 내가 그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늘로 올라야 합니다. 그 방법은 내 안에 하늘에서 오신 분을 모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상처가 금방 치유되는 사람을 보면 두려워합니다. 이 믿음은 누구도 나에게 돌을 함부로 던질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산보 중에 한국에서 카톡이 왔습니다. 이름을 보니 31년 전, 보좌 신부로 있을 때 알던 청년입니다. 달라스에서 12시면 한국은 새벽 2시입니다. 당시에 청년 활동하던 자매와 결혼했습니다. 큰 애가 27살이라고 하니,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저는 반가운 마음에 전화했고, 우리는 예전의 추억을 나누었습니다. 늦은 시간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 생각이 나서 문자 보냈다고 합니다. 당시 본당에 청년은 100명이 넘었습니다. 주일학교 학생도 200명이 넘었습니다. 교사회, 성가대, 청년연합회, 레지오, 청년성서 공부가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열정, 패기, 도전, 모험, 낭만이 넘치던 시간이었습니다. 어른들과 성서 공부도 했고, 전 신자가 함께 가족 캠프도 갔습니다. 저는 2년 동안 본당 신부님을 3분이나 모시는 영광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사제관에서 짐을 세 번이나 옮기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2층을 사용했는데, 새로 오신 신부님이 2층을 사용하겠다고 해서 1층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또 새로 오신 신부님이 1층을 사용하겠다고 해서 다시 2층으로 옮겼습니다. 덕분에 필요 없던 짐을 모두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30년이 지났는데, 저를 잊지 않고 연락해 주니 고마웠습니다. 내년에 한국 가면 그때 그 시간의 추억으로 여행을 가보려 합니다.
며칠 전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을 읽었습니다. 졸업한 지 20년이 넘었는데 제자들이 선생님과 선생님의 아들을 초대해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지식만 가르쳐주지 않고,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학생 중에 1명이 문제를 자주 일으켰다고 합니다. 학교에서는 한 번만 더 문제를 일으키면 퇴학시키겠다고 했습니다. 학생은 마음을 잡고 학교를 잘 다니나 했더니, 다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담임 선생님을 불러서 퇴학시키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교장 선생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두가 저의 부덕함입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이번에도 문제를 일으키면 제가 교사를 그만두겠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선생님이 무릎까지 꿇고 간절히 부탁하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기로 했습니다. 선생님은 교실에 들어와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학생들은 선생님의 진실한 모습과, 선생님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문제를 일으키던 학생도 눈물 흘리면서 선생님께 용서를 청했습니다. 선생님과 학생들은 모두 하나가 되었고, 물의를 일으키던 학생도 무사히 졸업했다고 합니다. 그런 학생들이 20년이 지난 후에도 선생님을 찾아왔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의 길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나는 노아와 롯의 길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이웃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그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면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 세상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길입니다. 권위와 독선의 길입니다. 이웃을 배려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길입니다. 그 길의 끝에는 전쟁, 폭력, 기아, 가난, 난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정화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사를 받아들여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살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함께 나눈다면, 우리가 말씀을 가슴 속에 담고 산다면 세상의 마지막 날이 온다고 해도 두려운 것 없습니다. 신앙의 여정은 끝날 때까지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 보전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일치의 삶을 사는 길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써 보내는 것은 무슨 새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입니다. 곧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가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고, 그 계명은 그대들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주라는 광대한 ‘밭’에 하느님께서는 ‘보물’을 숨겨 놓으셨습니다. 그 보물은 바로 ‘지구라는 별’입니다. 지구라는 넓은 밭에도 ‘보물’을 숨겨 놓으셨습니다. 그 보물은 바로 하느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사람과 사랑은 같은 말 같습니다. 사람은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 알베르토(대)(Albert the Great)
신분 : 주교, 교회학자
활동연도 : 1200-1280년
같은이름 : 알버트, 알베르또, 알베르뚜스, 알베르투스, 앨버트
성 알베르투스(Albertus, 또는 알베르토)는 남부 독일 슈바벤(Schwaben) 지방에 있는 도나우 강가의 소도시 라우인겐(Lauingen)에서 그 지방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1223년 이탈리아의 파도바(Padova) 대학교에서 법률을 전공하던 시기에 가족들의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도미니코 회원이 되었다.
쾰른(Koln)에서 수련 기간을 보내고 신학을 전공한 알베르투스는 1220대말 힐데스하임(Hildesheim)을 비롯하여 프라이부르크(Freiburg),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그리고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에서 강의하였다. 쾰른으로 돌아올 즈음에 그의 지식과 강의에 대한 명성은 날로 치솟고 있었다.
1243년 혹은 1244년에 파리 대학에서 교수 자격을 획득하여 1245년부터 그 대학의 교수로 강의하였다. 이 시기 그의 제자로는 훗날 위대한 신학자가 된 성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 1월 28일)가 있었다. 그는 토마스의 천재성을 일찍 알아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토마스는 지적으로 나의 좋은 동료이자 친구이다.” 이말 그대로 토마스 데 아퀴노는 1274년 죽을 때까지 그와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료로 지냈다.
1248년 도미니코회는 쾰른에 ‘수도회 대학’(Studium Generale)을 설립하고 초대학장에 알베르투스를 임명하였다. 그는 쾰른의 수도회 대학 철학과 교수로서 직분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1254년에 알베르투스는 독일 관구의 관구장으로 임명되어 로마(Roma)로 갔는데, 그곳에서 빌리암 아르무르의 공격에 대항하여 탁발 수도회를 옹호하는데 진력하였다. 빌리암은 그 후 알렉산데르 4세 교황에 의해 단죄되었다. 그는 로마에 머무는 동안 교황의 신학 고문으로서 봉사하였다.
알베르투스는 1257년 관구장직을 사임하고 학업에 전념하다가 1259년 타렌타시아의 베드로(Petrus)와 토마스 데 아퀴노와 더불어 도미니코회의 새로운 교과 과정을 작성하였다. 그의 소망에 반하여 그는 1260년 레겐스부르크의 주교로 서임되었으나 쾰른에서 가르치기 위하여 2년 후에 사임하였다.
그는 1274년의 리옹(Lyon) 공의회에서 크게 활약하였는데, 특히 로마와 그리스 교회의 일치에 공헌하였다. 또한 알베르투스는 1277년 파리(Paris)의 스테파누스 탕피엘 주교와 그 대학의 신학자들에게 대항하여 토마스 데 아퀴노와 그의 입장을 옹호한 사건도 유명하다.
그 당시 알베르투스는 소위 만물박사로 통한 듯하다. 그의 저서에는 성서와 신학 일반은 물론 설교, 논리학, 형이상학, 윤리학, 물리학까지 두루 섭렵한 논문들이 많이 있으며, 그의 관심은 천문학, 화학, 생물학, 인간과 동물의 생리학, 지리학, 지질학 그리고 식물학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그는 특히 인간 이성의 자율성과 감각-경험으로 얻는 지식의 유효성 및 조직 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가치 확립 등이 돋보인다. 토마스 데 아퀴노는 이런 종합을 완성한 신학자이다.
성 알베르투스는 1931년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교회학자 칭호와 더불어 시성되었고, 과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한 마디로 그는 위대한 자연과학자들 가운데 최초의 위인이었다.
성 레오폴도 (Leopold)
활동년도 : 1075-1136년
신분 : 왕
지역 : 오스트리아(Austria)
같은 이름 : 레오폴두스, 레오폴드
성 레오폴두스(Leopoldus, 또는 레오폴도)는 오스트리아의 가르스에서 태어나 독일로 가서 파사우(Passau)의 성 알트만(Altman, 8월 8일) 주교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23세의 나이로 부왕을 승계하였다. 1105년에 그는 황제 하인리히 5세의 딸인 아녜스와 결혼하였다. 그는 18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의 한 명은 유명한 역사가인 프라이징(Freising)의 오토(Otto)이다.
성 레오폴두스는 클로스터노이부르크(Klosterneuburg), 하일리겐크로이츠(Heiligenkreuz), 클라인마리아첼(Kleinmariazell) 등지에 수도원들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1125년 독일 황제로 대관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그는 40년 동안 통치하였는데, 온전히 그리스도인다운 자세로 권력을 행사하였으므로 국민들로부터 ‘선한 사람’이란 칭호를 얻었고, 1485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Innocentius VIII)의 의해 시성되고, 1663년에 오스트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성 구리아 (Gurias)
활동년도 : +322년경
신분 : 순교자
지역 : 에데사(Edessa)
같은 이름 : 구리아스
시리아 에데사 성당의 부제인 성 아비부스(Abibus)는 리키니우스 황제의 박해 중에 친구인 성 구리아(Gurias), 성 사모나(Samonas)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들은 모두 산 채로 화형을 당한 후 함께 묻혔다.
복녀 루치아(Lucy)
신분 : 동정녀
활동지역 : 나르니(Narni)
활동연도 : 1476-1544/1547년
같은이름 : 루시아, 루씨아, 루키아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의 나르니에서 11명의 형제 중에 맏이로 태어난 루치아(Lucia)는 어릴 때부터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키로 작정하였으나, 그녀의 나이 14세 때에 거의 강제적으로 약혼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약혼반지를 버리고 완강히 거부하다가, 다음 해에 그 젊은이와 결혼하기로 약속하였다.
이 약속은 그녀가 고해신부의 충고도 있었지만 성모 마리아를 환시를 통하여 보았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 부부는 명목상의 부부였지 실제상의 부부는 아니었다. 이렇게 3년을 살다가 남편이 아내에게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허용하자, 그녀는 도미니코 재속 3회의 수도복을 입고 비테르보(Viterbo)의 공동체에서 생활하였다.
여기서 그녀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다가 오상 성흔을 받았다. 매 수요일과 금요일마다 피가 흘렀는데, 3년 동안이나 계속되니 이를 숨길 수 없었다. 교황청과 의사들도 이 사실을 확인하였고, 그전의 남편도 이 현상을 보고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였다.
또 페라라(Ferrara)의 공작 에르콜레는 그녀를 위해 수도원을 지어주었는데, 이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23세였다. 그러나 1505년부터 그녀는 대중들 앞에서 자취를 감추고 39년을 수녀원 안에서만 살았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보기 위하여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1544년에 그녀가 운명했을 때 사람들은 그때까지 그녀가 살아있었음을 알고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