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고집이 세기로 유명한 제임스라는 청년이 있었다. 이 청년의 고집이 어찌나 센지 어느 누구도 그 고집을 꺾지 못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주변의 사람들은 “제임스의 고집은 하나님도 못 꺾으실거야”라고 장담하곤 하였다. 그의 고집은 다름아닌 불의에 대항하는 고집이었다. 어떤 일을 하다가도 그가 한번 생각하기에 잘못된 것이다 싶으면 절대로 관여하지 않는 자세를 나타낸다. 특히 교회생활에 있어서 그의 고집은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그가 알고 있는 교리와 위배되는 것이면 그는 목사의 말이라 할지라도 거절하는 사람이었다.
하루는 그가 교회에서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다가 그만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그는 꿈결에 베드로를 만나게 되었는데 베드로가 하나님 앞에 고집을 부리며 절대로 가지 않겠노라고 거절하는 것이었다. 제임스는 베드로를 향하여 “왜 가지 않으시려고 그러세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데요.” “모르는 소리 마라, 고넬료는 이방인이란 말이야. 하나님께서 무언가 착각하신거야. 이방인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사람들이야.” 제임스는 무언가 이상하게 잘못되는 것 같아서 “이러시면 안돼요”라고 소리치다가 그만 잠이 깨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마음속에 결정해 놓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라 하든지 무시하고 자신의 고집대로 해오던 지난날의 일들을 회개하였다. “이젠 사람 앞에서는 고집불통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고집융통으로 살겠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앞에서 고집융통으로 살고 계십니까?
롬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딛 1: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1. 카페지기의 거리에서 찬양하며 영혼을 구원하고 치유하는 사역을 잘 감당할 수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리며 사역을 위한 필요한 것들이 채워질 수 있도록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제목 : 말씀대로 행하는 믿음 본문 : 롬4:21,22
믿음이 신앙인의 내적 원리라고 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의 가치관과 인생관, 그리고 세계관에 이르는 삶의 전반적인 원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기초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며, 그러한 삶의 원리는 반드시 행위로써 그 실제적인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1. 믿는 것과 행하는 것(약2:14-16)
1)경계해야 할 외식주의 아무리 좋은 약도 먹어야 몸을 건강하게 하는 약효를 나타내게 되는 법이며, 훌륭하고 완벽한 이념이나 사상도 그것이 구체화될 때 비로소 가치를 인정받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이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요 보배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형식과 외식이라는 옷을 입게 될 때 믿음은 그 가치를 완전히 상실하고 맙니다. 유대 경건주의자들이 지닌 최대의 약점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만 그들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들의 경건이라는 것이 마음이나 생활과는 거리가 먼 겉모양을 꾸미는 데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식을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2)유익을 끼치는 신앙 생활 주린 자에게 필요한 것은 말에 그치는 위로가 아니라 먹을 것을 주는 행동이며, 이것이 우리의 신앙 언어가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많다고 구원에 참예 할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닙니다. 같은 밭에 심겨졌다고 모두가 알곡이 아니듯이 교회 안에는 생명이 없는 믿음, 구원에 이를 수 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부단히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여 우리의 신앙이 자신에게는 물론 전체에게도 유익을 끼치는 것이 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2. 믿음으로 행하는 생활(약2:17-19)
1)의로운 믿음 사람은 세 가지 차원에서 의로워야 합니다.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의로워야 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의로워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도 의로워야 합니다. 무근 일이든 내 자신이 알고, 믿고 행하는 일에 있어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즉 양심에 있어서는 하나님 앞에서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가 생활 속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신앙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의롭게 사는 길이 힘들고 어려울 때가 많고 또한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의로운가에 대해 생각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이 내게 이루어지는 생활이 곧 의로운 생활이며 의로운 믿음인 것입니다.
2)믿음이 강한 자의 태도 믿음이 강한 자는 믿음이 약한 자를 이해하고 그를 보호하여 귀한 믿음으로 자라나게 해야 합니다. 즉 믿음이 강한 자는 진리로 자유인이 되었지만 믿음이 약한 자를 위해 스스로 진리로 인해 누리는 자유를 절제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상 제물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며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라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질 것은 믿음이지 종교적인 금기나 가책이 아닙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비밀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강자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도 못할뿐더러 충성스런 종이 될 수도 없습니다. 강자의 믿음은 확신을 소유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먹어야 하는지 안 먹어야 하는지 또는 이것을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의 신앙의 자기 결단이 세워져 있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믿음의 행위는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것이어야 합니다.
3. 믿음과 행위의 일체성(약2:22)
1)행위의 원리로서의 믿음 야고보는 본문에서 믿음과 행함을 별개의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에 대하여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라고 하는 사람에 대하여 야고보는 믿음과 행위는 따로 떨어진 별개의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믿음과 보이는 행위가 하나라는 것은 믿음이란 행위로써 그 실체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란 보이지 않지만 그것은 바로 외적 행위를 주관하는 내적 원리로 작용하고 있으므로 믿음은 영적이고 행위는 육적인 것이며 따라서 이 영적인 믿음은 행위로 증명되어야 하고(마7:21), 그렇게 될 때 믿음과 행위는 별개가 아닌 하나로 조화된다는 것입니다.
2)믿음과 행위의 일체성 행위로 증명되지 않는 믿음이란 이미 그 자체로 죽은 것이라고 할 때 행위는 곧 믿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그것은 바로 믿음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행위는 신앙이 없는 불신자의 행위가 되고, 그것은 바로 죽은 행위인 것입니다(계3:1). 따라서 행위 없는 믿음 또한 죽은 믿음이므로 믿음과 행위는 역시 하나라는 것입니다. 행위의 원리로서의 믿음, 그리고 믿음의 표현으로서의 행위란 명제를 야고보는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받은 인간의 내적 실상과 외적 실상을 말하는 것으로 한 나무에 있어서의 뿌리의 열매와 같이 이 믿음과 행위는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약2:22).
결론 성도들은 주일이나 혹 그 밖의 다른 모임에서 기독교회들이 채택한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합니다. 이것은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다만 문제는 신앙 고백이 단지 입술에만 붙어 있어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가장 힘있고 확실하게 나타내는 언어는 행동이며, 이 언어로 고백되어지는 신앙을 통해서 어떤 역사를 기대할 수가 있습니다. 말만 하고 행치 않는 신앙은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
첫댓글 오늘도 주안에서 성령충만한 가운데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부모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민족을 구원하는 구원사역의 도구로 쓰임받고 성령의 도구로 쓰임받고 제자양육의 도구로 쓰임받고 열매 맺게 하소서 아멘
~감사합니다 ~샬롬~!!~ㅎㅎㅇㅇ
오늘도 귀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함께해 주신 예수 사랑 목사님, 평안 장로님, 만경강 목사님, 존재 목사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