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극장은 “매의 표”라는 프로를 2주간 동안 상영한다고 광고를 했다. 극장에서 상영되기 위해 제작된 이 80분짜리 칼라 필름은 기독교 선교를 위해 미국 장로 교회가 만든 것으로 여배우 엘다 키트가 주연을 맡았다. 그런데 3개월 후, 키트 양은 다른 영화로 이 극장 스크린에 또 등장했다. 그녀는 예술가 연합이 제작한 “안나 루카스타”에서 매춘부 역을 맡았던 것이다. 인생의 모습도 사실은 이와 같이 양면성을 띤 가면을 쓴 것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악의 가면을 벗어 버리는 자가 되어야 신앙인이라 할 수있다.
어느 날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에게 어떤 여자 교인 한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아무리 범죄해도 하나님은 저를 그대로 놔두시데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계시지 않든가, 아니면 하나님은 우리를 벌하지는 않는 분이신 것이 분명해요.”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무디는 부인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부인! 부인은 지금 부인 스스로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단지 그리스도인의 가면을 쓰고 있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왜요? 제가 교회를 얼마나 오래 출석했는데요”라고 부인이 반문하자 무디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은 당신을 그대로 놔두지 않을 것이요. 당신은 오래도록 교회에 그리스도인의 가면을 쓰고 다녔는지도 몰라요. 그러나 이젠 가식의 가면을 벗고 당신의 실체 그대로가 그리스도인으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당신의 모습에는 선과 악의 양면성이 나타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막 14:10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 카페지기의 거리에서 찬양하며 영혼을 구원하고 치유하는 사역을 잘 감당할 수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리며 사역을 위한 필요한 것들이 채워질 수 있도록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제목 : 그리스도를 닮아감 본문 : 고후3:18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성을 한마디로 요약해 본다면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영성의 본질은 인간의 성품의 고양이나 계발도 아니요, 막연한 종교적 특성의 강화도 아닙니다. 성도들의 신앙의 절대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그분의 삶을 닮아가는 것이 곧 영성의 알파와 오메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인품과 삶 속에서 얼마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볼 수 있는지에 따라 영성의 척도 또한 가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무엇을 닮아가야 하는지 함께 깊이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의 사상을 닮아감(엡4:21-24)
1)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신봉함 사상은 그 사람의 삶의 정신적인 기반이요 또 사고와 행동의 동기가 됩니다. 격조높고 올바른 사상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그 삶의 내용도 비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을 본받고 닮아가는 것에서 자연히 형성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의 사상의 중심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주권'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존재와 그 뜻을 이 세상 모든 가치 위에 두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이 인정되는 세계가 곧 천국이요 그 주권이 부인되는 세계가 사단의 영역이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외적으로 종교적이요 전통이 깊은 종교단체일지라도 하나님의 주권과 뜻대신 인간의 권세나 뜻이 드러나는 것을 주 예수는 외면하셨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주기도문 이 한 구절 속에 예수님의 사상과 가치관이 응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성이 깊은 성도일수록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의 뜻과 주권을 앞세우고 높히려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뜻에 대한 신봉과 순종이 결여된 영성이란 그 본질적인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2)영생을 지향함 예수 그리스도의 의식과 생각을 늘 사로잡고 있었던 사상적 기조는 '영생'이었습니다. 영생이란 죄와 죽음을 극복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한 삶을 누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는 이 땅에서도 이와 같은 영생을 늘 지향하셨던 것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이 있고 영원한 천국의 삶이 있음을 늘 말씀하셨고 그 삶을 바라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불의한 이 세상의 악과 모순을 이기시고 늘 희망 안에서 사셨으며 '앞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시고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도 개의치'(히12:2) 아니하셨던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누릴 영광의 삶을 확신하기에 세상의 불의도 유혹도 고난도 이기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성의 깊은 성도일수록 그 삶의 가치와 목표를 '영생천국'에 맞추며 그 소망으로 삶의 원동력을 삼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감(빌2:5-8)
1)절대 의로운 성품임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은 곧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골1:15)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골1:19) 하셨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성품의 기반은 곧 '의'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진리와 뜻에 위배되는 길은 결코 조금이라도 걷지 않으셨습니다. 의와 진리가 아닌 것은 결코 인정하거나 타협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사단이 '나에게 절을 하면 천하만국의 권세와 영광을 주겠노라['고 제의했을 때 그것을 일언지하 거절하고 골고다 십자가의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성이 깊은 성도들은 우리 주님처럼 자신에게 불이익과 희생이 닥칠지라도 세상의 불의와 손잡지 않는 것입니다.
2)온전한 사랑의 성품임 우리 주 예수님의 성품의 가장 큰 특성은 온전하신 사랑입니다. 이 사랑과 의의 성품이 조화를 이루어 완전무결한 인품이 나타난 것입니다. 의 없는 사랑은 무질서와 허무를 낳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 없는 의는 이 세계에 공포와 절망을 가져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비록 의를 추구하셨지만 사랑과 관용이라는 방법으로 자신의 삶과 이웃을 대하셨던 것입니다. 신앙이 독실한 성도들 중에 완고하고, 까다로우며, 이웃에게 따뜻한 마음과 눈을 지니지 못한 분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옳게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랑 없는 천사'가 바로 '악마'입니다. 사랑 없는 영성은 곧 허위입니다. 영성은 곧 사랑으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3)온유와 인내로 이룸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 안에는 이처럼 하나님의 성품도 충만하지만 한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성품도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성을 지닌 성도들이 본받고 닮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 모순되고 불의한 이 세상을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실천해 나가기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는 온전히 신적 성품을 유지하시고 나타내셨습니다. 그 방법이 바로 온유와 인내입니다. 쉽게 노하거나 좌절하거나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온유와 인내로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와 판결에 맡기는 삶의 처세가 사랑과 의를 이루는 영적인 지혜임을 예수께 배워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의 삶의 행적을 닮아감(벧전2:21-23)
1)고난을 감수함 그리스도의 삶의 내용은 곧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구원의 길을 마련하려는 삶에는 반드시 고난이 따른다는 진리를 주님은 늘 말씀하셨으며 그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성이 깊은 성도일수록 이 세상에서 고난 당함을 깊게 인식합니다. 유치하고 천박한 신앙인들이 세상의 물질적 축복과 안일한 삶을 갈구하는 것입니다. 의와 진리를 위해 고난도 기꺼이 감수하는 모습 속에서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2)주와 함께 영광 누림을 확신함 그럼에도 우리 주님은 세상에서 당당하고 희망이 넘치게 사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 보좌 옆에서 존귀와 영광을 누릴 것을 확신하셨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잠깐이요 천국의 상급은 영원함을 늘 인식하셨던 것입니다. 성숙한 성도들은 이와 같은 주님의 삶의 모습을 닮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삶의 희망과 자신감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와 함께 천국의 영광을 누릴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결론 예수의 생각, 예수의 마음, 예수의 운명을 닮아가는 삶이 바로 영적인 삶임을 압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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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명절 연휴를 가족과 함께 주안에서 행복하게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감사가 넘치는 명절되십시요.
~감사합니다 ~샬롬~!!~ㅎㅎㅇㅇ
감사합니다
함께해 주신 예수 사랑 목사님, 고은빛 회원님, 평안 장로님, 존재 목사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