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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례
고르넬리오 교황은 251년에 교황으로 뽑혀, 로마 박해 시대에 2년 동안 짧은 교황직을 수행하면서 배교를 선언하였던 신자들을 용서하고 다시 교회로 받아들였다. 그는 이단에 맞서 교회를 지키다가 유배되어 253년에 순교하였다.
치프리아노 주교는 고르넬리오 교황과 같은 시대의 목자로서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북아프리카 출신의 그는 늦은 나이에 개종하여 사제품을 받고 카르타고의 주교가 되었다. 치프리아노 주교는 박해 속에서도 고르넬리오 교황을 도와 교회의 재건에 힘쓰다가 258년에 순교하였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셨기에 죽은 이들도 되살아날 것이라며 부활을 강조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과 복음을 전하러 다니실 때,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수산나 등이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든다(복음).
제1독서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을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15,12-20
형제 여러분,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13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14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15 우리는 또 하느님의 거짓 증인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죽은 이들이 정말로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되살리지 않으셨을 터인데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되살리셨다고
우리가 하느님을 거슬러 증언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16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17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18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19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복음
<예수님과 함께 있던 여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1-3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2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3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교회는 신자들을 위해서 돈 이야기를 안 하는 것일까?
유튜브 채널 ‘포크포크’엔 감동적인 동영상들이 참 많습니다. 그중에서 아버지에게 차를 선물하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 중 ‘가족을 위해 73년식 포르쉐 포기했던 새아빠’란 내용이 감동적입니다. 친아빠도 아닌 새아빠를 위해 차를 선물한 것입니다. 새아빠는 엄마와 결혼하기 위해 자신이 가장 아끼는 73년식 포르쉐를 팔아야만 했습니다. 딸은 새아빠에게 그 차를 되찾아주기 위해 돈을 아껴서 그 차를 깨끗이 수리한 다음에 깜짝 선물을 합니다. 아빠는 딸을 안고 웁니다.
딸이 이렇게 새아빠가 가장 아꼈던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고 그것을 선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새아빠가 자신들을 위해 희생한 땀과 피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 마음 안에는 양심이 있습니다. 양심은 은혜에 보답하지 않으면 안정을 주지 않습니다.
중국 한 초등학교에서는 그들의 부모님이 자신들을 위해 일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자녀를 위해 뼈가 으스러지게 일하는 아버지들의 모습에 아이들은 눈물을 흘립니다. 이것보다 더 큰 교육이 있을까요? 부모들이 나중에 힘이 없어지고 자녀들이 성장하여 돈을 벌 수 있을 때 이 부모들은 절대 가난할 수 없을 것입니다.
'포크포크'엔 또 ‘2년째 엄마 차 얻어타던 아버지께 새 트럭 사드렸더니 반응’이란 동영상도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잔디관리 사업을 하며 고생하여 자신을 키운 것을 잘 압니다. 그리고 2년 전 트럭이 고장 나서 직장에 엄마 차를 얻어타고 출근하는 것도 압니다. 이에 아들은 돈을 아끼고 아껴서 아버지에게 트럭을 선물해드립니다. 아버지는 울면서 뛸 듯이 기뻐합니다.
노년에 풍족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피를 흘려서 자녀들의 마음 안에서 이기심을 몰아내고 어떻게든 보답할 수 있는 자녀들로 만들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노인 빈곤율은 세계 1위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고생을 알면서도 거의 보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녀들 안에서 악한 영을 빼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경쟁시켜서 자녀들 마음 안에 악이 성장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에게 재정적으로 도움을 주었던 여인들이 나옵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루카 8,2-3)
이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회개한 여인들이었습니다. 또한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였고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이들이었습니다. 그녀들은 영적인 은총을 받았고 이에 물적으로 보답하려 했던 것입니다.
사도들이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이들 중 굶어 죽은 이는 지금까지 한 명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선악과를 바치는 사람에게 성체가 유효하듯 영적인 선물을 주는 교회는 재물에 대한 욕심이 줄어든 이들이 많아지기에 가난할 수 없습니다. 항상 보답받기 때문입니다.
만약 교회가 가난하고 돈이 없다면 그 교회는 사람들에게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거나 병을 고쳐주는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일곱 마귀란 성령의 일곱 은사와 반대되는 죄를 의미하는데 교회에서는 이를 ‘칠죄종’이라 하고 칠죄종은 ‘삼구’로 모입니다. 칠죄종은 “교만, 인색, 시기, 분노, 음욕, 탐욕, 나태”이고, 삼구는 “세속(돈), 육신(성욕), 마귀(교만)”입니다.
교회는 신자들의 마음 안에서 이것들을 없애야 하고 동시에 육체적인 질병도 고쳐주는 일이 행해져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보답으로 절대 재정적으로 가난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영을 빼내고 건강한 육체를 회복시켜 줄 힘을 지닌 것은 부모의 희생밖에 없습니다. 제가 부모님의 굳은살을 보고는 절대 반찬 투정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과 같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마음 안에서 자신들의 피로 악령을 쫓아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악령을 쫓아내시기 위해 당신 피를 쏟으셨습니다. 이것이 매 미사 때 우리가 영하는 성체와 성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수난 하신 그리스도를 위해 가장 쉬운 물질적 보상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정 하느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셨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평일 미사 때도 성체의 가치에 보답하기 위해 다만 천 원이라도 봉헌하도록 할 생각입니다.
십일조 이야기가 사라진 가톨릭이 재정적으로 더 부유할까요, 아니면 개신교가 더 부유할까요? 개신교의 웬만한 대형 교회는 가톨릭 한 교구의 재정을 훌쩍 넘어섭니다. 그래도 그들은 행복하고 부유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도 재정적인 회개를 하도록 촉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교회 자신부터 돈을 좋아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모의 피 흘림과 같습니다. 이렇게 흘려주면 신자들은 또 고마워서 더 보답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넉넉해지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말라키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십일조를 모두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양식이 넉넉하게 하여라.” (말라 3,10)
부모가 자녀로부터 나쁜 영을 자신들의 피로 몰아내어 자녀들의 감사를 받게 되는 것이나 교회가 가진 모든 것으로 신자들의 마음 안에서 나쁜 영을 몰아내어 그들의 보답을 받아 넉넉해지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신비를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넉넉하게 살면서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준다면 그들이 넉넉하게 살게 될 때에는 또한 여러분의 궁핍을 덜어줄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공평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2코린 8,14)
하지만 요즘 교회 안에서 돈을 봉헌하는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어쩌면 교회가 자비로워졌다기보다는 돈이 행복이라는 믿음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돈이 행복이라 믿기에 돈을 내라고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돈을 내는 것이 행복임을 믿었다면 돈을 많이 봉헌하라는 강론이 많아져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베푼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당당하게 돈을 내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이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각각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내야지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 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2코린 9,7)
에덴동산은 참 행복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가장 중요하게 행해져야 하는 일이 선악과를 봉헌하는 일이었습니다. 돈을 봉헌하는 게 행복입니다. 오늘 자신들의 재산으로 교회를 도왔던 여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행복하기 위해 재산을 포기하는 여인들이었습니다. 루카도 그렇고 바오로 사도도 그렇고 이렇게 교회를 위해 돈을 내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먼저 아낌없이 베풀어야 합니다. 그 피 흘림이 신자들의 마음에서 나쁜 영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대의 로마 황제였습니다. 옥타비우스로도 잘 알려진 그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의 뜻인 ‘존엄자’라는 칭호를 쓰면서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이루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장수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76세까지 살았습니다.
그는 로마에 아우구스테움을 짓습니다. 자기 자신과 가족들의 유골을 영원히 안장하기 위해 지은 영광스러운 능입니다. 자기를 비롯하여 후손들까지 세상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몰락을 상상도 못 했을 것입니다. 그의 능이 폐허가 되고 도굴까지 당할 것을 또 그 능이 포도밭이 되고, 르네상스 정원, 투우장, 화약 창고, 콘서트홀로 계속 바뀌게 될 것 역시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소위 잘 나간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영광이 과연 영원할까요? 끊임없는 격동과 변화의 물결 속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만이 그 자리에 계실 뿐입니다.
과거 유다인들은 율법만이 영원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반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달리 부녀자들과 함께합니다.
초대교회에서 부녀자들의 역할이 얼마나 컸었는가를 오늘 복음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자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전교 활동에서 식생활과 기타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일들을 시중 들음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필수 요원으로 함께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을 바쳐 예수님의 일행을 돕고 있었다고 복음을 전해줍니다.
당시의 유다 공동체는 부녀자들을 포함하지 않았고, 율법을 익히는데 부적당한 사람으로 여겨 공동체 모임에 참석할 의무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 교회는 부녀자들이 그 창설자 중의 중요한 요원이 되었습니다. 이는 새로 난 하느님의 백성 공동체는 율법 중심에서 벗어나, 예수님 중심이며 사랑 중심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율법 중심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또 예수님과 함께했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녀자들과 다른 제자들을 통해 율법 중심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오로지 예수님 중심, 그리고 예수님께서 강조하셨고 직접 당신 삶으로 보여주셨던 사랑 중심의 삶만이 영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 중심을 두고 살고 있나요? 영원하지 않은 것에 내 마음의 모든 것을 두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일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자정이 되면 내일은 매우 깨끗한 상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매우 완벽한 모습으로 우리 곁으로 와 우리 손으로 들어온다. 내일은 우리가 어제에서 뭔가를 배웠기에 희망한다(존 웨인).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