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천의 인생, 그 결국은 사망이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생이다(왕하 9:27-37)
1. 오늘의 말씀 : 왕하 9:27-37
27 유다의 왕 아하시야가 이를 보고 정원의 정자 길로 도망하니 예후가 그 뒤를 쫓아가며 이르되 그도 병거 가운데서 죽이라 하매 이블르암 가까운 구르 비탈에서 치니 그가 므깃도까지 도망하여 거기서 죽은지라
28 그의 신복들이 그를 병거에 싣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다윗 성에서 그들의 조상들과 함께 그의 묘실에 장사하니라
29 아합의 아들 요람의 제십일년에 아하시야가 유다 왕이 되었었더라
30 예후가 이스르엘에 오니 이세벨이 듣고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바라보다가
31 예후가 문에 들어오매 이르되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평안하냐 하니
32 예후가 얼굴을 들어 창을 향하고 이르되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 누구냐 하니 두어 내시가 예후를 내다보는지라
33 이르되 그를 내려던지라 하니 내려던지매 그의 피가 담과 말에게 튀더라 예후가 그의 시체를 밟으니라
34 예후가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이르되 가서 이 저주 받은 여자를 찾아 장사하라 그는 왕의 딸이니라 하매
35 가서 장사하려 한즉 그 두골과 발과 그의 손 외에는 찾지 못한지라
36 돌아와서 전하니 예후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그 종 디셉 사람 엘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라 이르시기를 이스르엘 토지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살을 먹을지라
37 그 시체가 이스르엘 토지에서 거름같이 밭에 있으리니 이것이 이세벨이라고 가리켜 말하지 못하게 되리라 하셨느니라 하였더라
2. 시작 기도
아버지! 멕성신학교 세미나에서 생명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셨으니 참석자들이 진리의 영으로 듣게 하소서. 아들은 아버지께 받은 생명으로 아버지를 사랑하사 복종하셨습니다(요 14:31). 그는 아버지의 일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요 17:4). 나 같은 자가 생명을 얻고 누리는 것은, 아들의 복종으로 인함입니다. 아들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 아버지를 사랑하사 아버지의 일에 죽기까지 복종하기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날마다 내 몸을 쳐 복종시켜 생명의 교제에 힘쓰며, 이 생명을 전하는 일에 온전히 복종하게 하소서. 아버지를 사랑함으로 복종하는 것은 짐이 아니라 영예입니다. 그리하여 복종하는 아들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보게 하소서. 오늘(10일) 저녁에는 하나님 나라 복음과 십자가 복음을 증거합니다. 선포되는 복음이 효력을 발생하게 하소서. 생명의 교제를 사모하며 말씀 앞으로 나아갑니다. 내 영혼을 보혈로 정케 하사 주의 말씀을 진리의 영으로 알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예후가 길르앗 라못에서 기름 부음을 받고 이스라엘 왕이 되었다. 그는 이스르엘로 와서 아합의 아들 요람을 살해하였다. 이로써 엘리야가 아합에게 내린 재앙의 신탁이 성취되었다(왕상 21:19, 29). 요람과 함꼐 있던 남왕국 유다의 아하시야 왕은 요람이 살해된 것을 보고 벳하간으로 가는 길로 도망하였다(27절).
벳하간은 문자적으로 ‘그 정원의 집’이다(개역개정, ‘정원의 정자’). 이곳은 이스르엘에서 남쪽으로 11km 떨어진 곳이었다. 예후가 그의 뒤를 추적하며 “저 자도 죽여라”라고 외치니, 이블르암 부근 구르 오르막길에서 예후의 부하들이 병거에 타고 있는 아하시야를 찔러 상처를 입혔다(28절). 이블르암은 벳하간에서 남쪽으로 1.6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불운한 아하시야는 이곳에서 부상을 당했다. 부상을 입은 아하시야는 사마리아 북쪽 구릉지대에서는 그의 병거가 속도를 낼 수 없음을 알고 방향을 돌려 북서쪽으로 18km 떨어진 므깃도까지 도망하였다.
므깃도에는 대규모의 병거 보관소가 있었고, 그곳의 병거대는 왕의 봉토를 받은 직업군인들이 있어서, 비교적 안전하다고 생각하였다. 아하시야는 끝까지 살고자 도망하였으나 결국 예후의 군사들에게 살해당했다. 하나님이 죽이고자 작정하신 자는 무슨 수를 써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아하시야의 부하들이 그를 병거에 실어 예루살렘으로 운반하고 그를 다윗성에 있는 그의 조상들의 묘지에 함께 장사지냈다(28절). 아합의 아들 요람 왕 제 11년에 아하시야가 유다를 다스리는 왕이 되어 불과 1년 만에 죽었다(29절).
유다 왕 아하시야는 이스라엘 왕 요람의 자매인 아달랴의 아들이다. 즉, 아하시야는 요람 왕의 조카다. 그는 복수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예후의 표적이 되었다. 무엇보다 그는 악한 왕 요람과 함께 있음으로 인해 요람과 같은 날 죽임을 당하였다.
30-37절은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죽는 장면이다.
예후가 이스르엘에 이르렀을 때 이세벨이 소식을 듣고 눈 화장을 하고 머리를 아름답게 꾸미고 창문으로 내려다보았다(30절). 이세벨이 화장을 하고 몸단장을 한 것은 대비로서 위엄을 갖추고자 함이었다(정중호). 그녀는 예후가 반란을 일으켜 요람을 살해한 것을 알고 있었다.
예후가 문 안으로 들어오자, 이세벨이 소리쳤다. “제 주인을 살해한 시므리 같은 자야, 그게 평화냐?”(31절). 이세벨이 예후를 보고 시므리라고 경멸한 것은, 예후가 반역자임을 지적한 것이다. 시므리는 엘라와 바아사 가문의 생존자들을 살해하였으나 그의 통치는 7일 천하로 끝났다(왕상 16:9-15). 따라서 예후도 시므리같이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예후가 얼굴을 들어 창문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내 편이 될 사람이 누구냐? 누가 내 편이냐?”(32절). 그러자 두세 명의 내관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예후가 그들에게 명령하였다. “그 여자를 아래로 내던져라”(33절). 그들이 그 여자를 아래로 내던지니 피가 벽과 말에게까지 튀었다. 예후가 탄 말이 그 여자의 주검을 밟고 지나갔다.
예후가 궁으로 들어가서 먹고 마시다가 말하였다. “이제 저 저주받은 여자를 찾아다가 장사를 지내 주어라. 그래도 그 여자는 왕의 딸이었다”(34절). 예후의 식사는 방금 일어난 끔찍한 사건에 대한 냉담한 무관심으로 비친다. 그러나 그의 식사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예후의 식사는 셈족의 전형적인 공동식사로써 예후와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역할을 하며, 예후의 시도에 대한 지방 유지들의 지지 여부를 시험해보고, 그들에게 호의를 약속받고자 하는 역할을 한다(그레이).
예후가 이세벨의 시체를 찾아다 장사하라고 한 것은 그녀가 왕의 딸이었기 때문에 관대한 처분을 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후 자기 생각이다. 사람들이 그 여자를 장사지내 주려고 찾아 나섰으나, 그 여자의 해골과 손발밖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35절).
예후가 그들의 보고를 듣고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그의 종 디셉 사람 엘리야를 시켜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졌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스르엘의 밭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주검을 뜯어 먹을 것이며, 이세벨의 주검은 이스르엘에 있는 밭의 거름처럼 될 것이므로, 이것을 보고 이세벨이라고 부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라고 하셨다(36-37절). 그 말씀대로 되었다.
예후는 이세벨을 왕의 딸로 보고 최후에 관용을 베풀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세벨의 시체는 해골과 손발 외에 발견할 수 없었다. 나머지는 개들이 먹은 것을 알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엘리야는 이세벨이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강탈했을 때 이 말씀을 받아 전하였다. “주님께서는 또 이세벨을 두고서도 ‘개들이 이스르엘 성 밖에서 이세벨의 주검을 찢어 먹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왕상 21:23).
이세벨의 시체가 이스르엘에 있는 밭의 거름처럼 되는 것은 문자적으로 ‘똥’이 된다는 것이다(히, 도멘). 이 단어는 매장되지 못하고 버려진 시체를 표현하는 말이다(렘 8:2; 9:21; 16:4; 25:33; 시 83:11). 이세벨이라는 이름이 아랍어로 ‘똥’이란 의미가 있으므로 저자는 ‘도멘’과 ‘이세벨’이라는 단어를 언어유희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몽고메리).
이세벨은 시돈 왕 옛바알의 딸이었다(왕상 16:31). 그녀는 고귀한 공주의 신분으로 세상에 태어났다. 그리고 이스라엘 왕 아합의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자기가 믿던 바알 신앙을 이스라엘 전역에 파급시켰다. 또한, 그녀는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나봇의 포도원을 찬탈하였다. 아합이 죽은 후 그녀는 왕의 어머니(대비)로서 권력을 향유하였다. 하지만 평생 부와 권력과 영예를 누렸던 그녀는 비참하게 죽고 그 시체는 개들이 먹고 밭의 거름(똥)처럼 되고 말았다. 그녀의 출발은 화려했으나 그녀의 끝은 끔찍한 사망이었다.
모든 인생은 한번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다. 어떤 사람은 비참한 흙수저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이세벨처럼 금수저로 태어난다. 그러나 어떻게 태어나든 인간은 날 때부터 죄인이다(시 51:5). 죄인은 죄와 사망의 세력의 지배를 받으며 일평생 그 속에 악이 가득하여 미친 마음을 품고 살다가 죽는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모순이다. “모두가 다 같은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것,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잘못된 일 가운데 하나다. 더욱이, 사람들은 마음에 사악과 광증을 품고 살다가 결국에는 죽고 만다”(전 9:3).
죄의 세력이 지배하는 인생은 그가 가진 자유의 재량에 따라 악행의 정도가 결정된다(스피노자). 죄의 세력이 옛사람을 지배한다. 옛사람이 가진 자유의 재량은 악행의 크기와 비례한다. 죄의 세력이 주장하는 외부의 자극은 옛사람 안에 ‘정념’(아펙투스)을 일으킨다. 이때 자유의 재량이 크면 클수록 정념은 더 큰 악행으로 나타난다. 곧 외부에서 죄가 유혹할 때 무한한 부와 권력을 향유하게 되면 더 큰 악을 저지르는 것이다.
예컨대 돈을 마음껏 쓸 수 있는 부자나 연예인들에게 정념이 일어나면 그들은 마약이나 음행 등 더 큰 악에 빠진다. 스피노자는 정념을 제어하는 길은 자기 원인이 자기 밖, 곧 신에게 있다는 것을 아는 것(지성)이라고 하였다(<지성개선론>). 내 인생이 나의 것으로 착각할 때 인간은 정념이 일어나는 대로 반응하여 악을 행하는 것이다.
모든 인생은 저마다 축복 속에 태어나지만, 죄의 세력이 지배하는 영적 현실을 피할 수 없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지배 아래에 있다(엡 2:2). 그는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대로, 곧 정념에 따라 행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 살아간다(엡 2:3).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그런 인생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사 구원하신다(엡 2:5).
인간이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하게 죄와 무관하게 하늘로부터 오셨다(요 3:13). 그가 세상에 오신 것은 땅에서 들리기 위함이다(요 3:14). 그가 땅에서 들리는 것은 그의 십자가 죽음을 뜻한다(요 12:32-33). 이는 그를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다(요 3:15).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죄와 사망의 세력을 멸하셨다(히 2:14). 그는 육체의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죄를 그치셨다(벧전 4:1). 죄인이 육체의 고난을 받는다고 해서 죄를 그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죄인이 금욕과 금식 등 육체의 고난을 받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자기 의를 강화하는 것이다. 자기 의를 세우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이다.
육체의 고난을 받음으로써 죄를 그치신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우리가 죄를 그치는 길은 육체의 고난을 받으사 죄를 그치신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으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여러분도 같은 마음으로 무장하십시오. 육신으로 고난을 받은 사람은 이미 죄와 인연을 끊은 것입니다”(벧전 4:1).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자는 그의 죽음과 장사됨과 부활에 연합하는 자이다. 그는 육체의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생명으로 사는 자이다(롬 6:4). 죄와 사망의 지배를 받는 옛사람은 그리스도가 달리신 끔찍한 십자가에서 죽었다. 이세벨은 끔찍하게 죽은 것으로 끝이었으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새 생명으로 살아난다. 그는 한편으로 그리스도로 옷 입어 죄를 그치고, 다른 한편으로 죽었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산다. 그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4. 묵상 기도
나는 이세벨과 전혀 다른 흙수저로 태어났다. 지극히 가난한 때 비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물론 내가 태어났을 때 부모님은 기뻐하였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남아 선호 사상이 있었고, 세 명의 누님 다음으로 내가 태어났으니 부모의 기쁨은 짐작할 듯하다. 그러나 성장 과정은 매우 힘에 겨웠다. 그러다 20대 당시 최고의 직장인 은행에 취직하였다. 겉으로 볼 때 만사가 형통한 듯하였다. 그러나 내가 죄와 사망의 지배를 받는 자임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이상하게도 이생의 풍요를 얻을수록 죄악이 더 늘어났다. 죄의 세력은 끊임없이 정념을 일으켰고 나를 풍요롭게 하는 것들은 더욱 죄를 짓게 만들었다. 20대 중반부터 교회에 출석했으나 복음을 알지 못하였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한,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지 못한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은밀하게 죄를 짓는 일이 반복되었다. 아무리 회개해도 다시 제자리였다. 나의 노력으로 동물적인 자아는 쇠락하나 내 의를 세우는 악마적인 자아는 더 강화되었다.
50대 초반 비로소 복음을 영으로 알게 되었다. 십자가 복음의 효력을 알고 죄를 그치는 길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죄의 세력은 최후에 멸망받는다(고전 15:26). 그러므로 죄의 세력은 죽을 몸을 지배하여 육체의 소욕(정념)을 따르게 한다. 내가 십자가에 죽었고 죄의 몸이 장애가 되었음을 잊는 순간 다시 죄의 종으로 전락한다. 하루라도 죄와 싸우지 않는 날이 없다. 다만 죄와 싸워 승리하는 길이 있기에 안심한다. 쉬지 않고 파도가 일어나듯, 쉬지 않고 정념이 일어나도 그리스도로 옷 입고 거기에 반응하지 않는다. 내 몸과 지체를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만 드린다.
이세벨은 고귀한 공주로 태어났으나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나는 비천한 자로 태어났으나 역시 끔찍한 최후를 당할 자였다. 귀천의 인생은 모두가 그 결국이 사망이다. 그런 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생명을 얻었다. 이세벨의 마지막은 사망이나, 나의 마지막은 영생이다. 오늘도 영생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멕성신학교 세미나를 인도한다. 특히 오늘은 십자가 복음을 전한다. 십자가 복음의 효력이 성령으로 증거되어 신학도와 목회자들이 죄와 사망의 지배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께 드려지기를 간구한다.
5. 묵상 기도
아버지... 모든 인생은 한번 나서 죽습니다. 요람와 아하시야는 왕자의 신분으로 났으나 끔찍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이세벨은 공주로 자라서 왕비가 되고 후에 대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국은 끔찍한 사망입니다. 그의 시체는 개들이 먹고, 밭의 거름더미(똥)가 됩니다. 아, 이생의 부귀영화가 죽어서는 한 줌의 오물이 됩니다. 모든 인생의 결국이 일반입니다. 평생 죄의 지배를 받으며 악독을 행하다 사망으로 끝이 납니다.
아버지여... 저는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여전히 죄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한때 나를 풍요롭게 한 것이 더 큰 악을 행하게 하였습니다. 외부 자극이 주는 정념을 제어할 길이 없었습니다. 죄와 사망의 종노릇하며 사망을 향해 가던 비참한 인생이었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그 크신 사랑으로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그가 육체의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죄인으로 태어나 죄를 짓다가 사망에 이를 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아 생명으로 사는 자 되었습니다.
아버지... 죄의 세력은 종말에 멸망합니다. 죄의 세력에 깨어 있게 하소서. 죄의 세력은 죽을 몸을 지배하여 정념을 일으킵니다. 외부 자극에 반응하여 악을 저지르게 합니다. 피할 수 없는 죄의 세력 앞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자가 되게 하소서. 죄의 몸이 장애가 되었음을 왕의 명령으로 받게 하소서. 내 몸과 지체를 오롯이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멕성신학교 삼 일째 세미나를 섬깁니다. 특히 십자가 복음이 선포될 때 진리의 영으로 역사하소서. 복음의 효력이 나타나 죄와 사망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주와 복음을 위해 자기를 드리는 역사가 있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하나님이 죽이고자 작정하신 자는 무슨 수를 써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정념에 따라 행하여 본질상 진로의 자식으로 살아가는 존재 복음을 듣고 반응합니다…정념에 따라 살지 않게 복음의 생명력으로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