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동안에 루마니아에서 목회를 할 때 나에게는 양복이 딱 한벌 있었는데, 그것도 때가 되니 낡아서 너덜거리게 되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새 양복을 한 벌 샀다. 어느 날 아침, 가정 예배 시간에 내가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었다. “옷 두 벌있는 자는 옷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눅 3:11) 그때 네 살이던 미하이가 내 말을 중단시켰다. “아빠는 지금 양복이 두 벌 있잖아요. 그러니까 한 벌을 누더기 양복을 입고 있는 X형제에게 주셔야 해요.” “그분에게 어느 것을 주랴?” “물론 새것을 주셔야지요. 하나님은 언제나 제일 좋은 것을 주시니까요?” 그것은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나는 딸의 말을 따랐고, 언제나 관대하게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늘 헐벗지 않도록 해주셨다.(목사, 범브란트)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며 살고 계십니까?
약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 카페지기의 거리에서 찬양하며 영혼을 구원하고 치유하는 사역을 잘 감당할 수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리며 사역을 위한 필요한 것들이 채워질 수 있도록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제목 : 행동하는 신앙인 성경 : 빌 4:4~9
바울은 회심한 이후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빚진 자라고 생각했다. 롬 1:14-15에 보면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고 말한다. 사람의 자기 생명을 알고 의무를 안다면 인생은 흐지부지 적당하게 살 수는 없다.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의무, 사회와 국가, 가정과 이웃에 대한 의무를 바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을 참 인격자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자기가 빚진 자라고 생각했는데 여기는 세 가지 의미가 있음을 보게된다. 첫째, 속죄하는 의미에서이다. 바울이 유대인으로 있을 때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예수를 핍박했으나 바로 알고 보니 자신이 너무나 미련했고 자기와 같은 어리석은 자들이 있을까 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인류 문화의 기원을 자랑하는 바벨론도 죄 값으로 망하였고, 나일강 언덕의 풍부함과 금자탑의 과학을 의뢰하던 애굽도 죄 값으로 망했다. 그리심산을 자랑하던 이스라엘도 여로보암의 죄 값으로 앗수르의 종이 되었고,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믿던 유대왕국도 느브갓네살의 말발굽 아래에 무너지고 말았으니 이는 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긴 죄 값이다. 70명의 제자를 파송하신 주님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 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눅 10:5-6)고 말씀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나는 사람에게 평안을 빌어야 한다. 바울은 잘못된 신앙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영혼을 죽이며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파괴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한 어리석음을 알고 빚을 갚으려고 했다. 모쪼록 우리 자신도 사도 바울처럼 속죄하는 심정으로 자신을 점검하며 생활하기 바란다. 둘째, 자유하기 위해서 이다. 자유란 법이 허락하는 테두리 안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인 것이다. 만일 어떤 시민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어긴다면 이미 그는 자유를 상실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도 그와 같은 권리를 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고후 8:9에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고 바울은 말했다. 자연 속에 자유롭게 사는 꿩은 열 걸음 찾아서 콩 한 톨을 주워 먹고, 백 걸음 걸어서 물 한 모금 먹을 지언정, 울안에 갇혀서 사람이 주는 모이를 먹고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롬 8:21에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고 했다. 빚진 죄인이란 말이 있듯이, 사람이 빚을 지면 부담을 느끼고 부자유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예수의 복음에 대해서 빚을 졌으므로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불안하여 살수 없음을 느꼈다. 신앙인이라면 어느 누구나를 막론하고 자기 생활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하며 자기의 의무를 감당할 줄 알아야 한다. 「국민 생활의 자유는 가치 있고 종교의 자유는 귀하나 영적 자유를 지극히 값진 보배이다」라고 말한 스퍼젼 목사님의 말처럼, 영적 자유를 누리며 주님의 뜻을 이루는 자들이 되기 바란다. 셋째,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서 이다. 고후 6:1-2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 말한 바울은 죽어 마땅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난 일이 감사 감격하여 그 은혜와 사랑에 대한 빚을 갚으려고 했던 것이다. 9절에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고 한다. 사람이 사람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다 사람이 아니라 사람다워야 하듯, 교인이 교인다워야 참된 교인이다. 사람이 자기의 사명을 모르면 동물적인 본능으로만 살아가는데 사명을 알면 성실하고 용감하고 헌신하고 위대하게 되는 것이다. 행동하는 신앙인은 자기의 사명을 알고 살아간 사람이기 때문에 삶의 흔적이 아름답고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게 된다. 이 땅위에 빛을 남긴 사람들처럼, 우리도 생산적이고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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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샬롬~!!~ㅎㅎㅇㅇ